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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대마수.
가장먼저 눈치 챈 것은 테드를 누구보다 빠르게 감지하기 위해 기감에 집중하고 있던 사이나였다. 그녀는 고대 유적에서 나오는 순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곳을 포위하고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의 기척을 느꼈다.
“애쉬님. 혹시 모험가 길드에서 추가로 모험가들을 보내 주기로 했습니까?”
고대 유적에 대한 정보를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있던 애쉬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계약은 여기에 있는 모험가분들까지입니다. 모험가 길드가 계약외의 모험가를 지원해줄 리가 없죠. 왜 그러신가요?”
“별일 아닙니다. 주위에 4,000명 정도가 포위해 있어 물어봤습니다.”
“4… 4,000명? 아니, 그게 별일 아니라니!”
애쉬가 당황해 외쳤다. 4,000명이 포위해 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정말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마치 잡담을 하듯 평탄한 어조로 말하는 사이나의 대범함에도 놀랐다.
“메이드 양 말대로 주위에 포위해 있는 것 같소. 일반인에 모여서 이곳에 올 일은 없으니… 병사인 것 같소만….”
“끄응.”
애쉬가 신음을 흘리며 두뇌를 가동시켰다. 사이나와 브렌의 말이다. 틀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병사들이 이곳으로 왔느냐 인데… 테드의 정체가 탄로 난 것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떠나간 모험가들이 신고를… 아니. 그래도 너무 빨라.’
거리와 시간상으로 불가능하다. 신고를 받았다고 해서 곧바로 4,000명이나 되는 병사를 이끌고 나타나는 것도 이상하다.
‘모험가 길드가 정보를 팔았나? 계약을 중시하니까 그건 아닐 테고… 모험가 길드의 첩자가 있나.’
모험가 길드에서도 대마수 토벌에 대해 알고 있는 인물은 고위 간부들 밖에 없다. 즉, 고위 간부들 중에 첩자가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렇다 해도 지금 중요한 것은 원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 상황을 좋게 벗어나는 것이다.
“저, 사이나 님. 혹시 적들이 어느 정도 거리까지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1km 정도입니다.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거 참 곤란하네.”
도망간다는 선택지는 불가능하다.
모험가들의 실력이라면 산맥이라는 점을 이용해 도망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럴 경우 고대 유적을 버려야 한다. 대마수 토벌의 성과를 그대로 적선하게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테드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애쉬는 임무를 비롯한 여러 가지 이유 탓에 그를 버릴 수 없다.
“그렇다면 남은 건 협상인가.”
4,000명이 정말 병사라면 딥크스 소속일 것이고, 딥크스가 원하는 것은 한정되어 있다. 태자 살해범인 테드의 신병과 고대 유적의 소유권 문제다. 소유권은 이미 모험가 길드에서 이야기가 끝났을 테니 테드의 신병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에 반해 이쪽에서 내걸 수 있는 건…… 없다. 고대 유적도 순수하게 그들만의 것이 아니다. 모험가 길드와 딥크스로 지분을 가지고 있기에 협상 조건이 될 수 없다.
“이쪽은 명분까지 부족하고… 그냥 테드 님이랑 같이 튀는 게 답이군.”
4,000명의 병사와 전투를 치르는 것도 생각해봤다. 당연히 압도적으로 불리하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도 태연한 사이나가 있다. 테드까지 제때에 맞춰 준다면 승리는 따놓은 단상이라고 생각한다.
애쉬는 힐끗 브렌을 살폈다. 모험가 길드를 통한 계약관계에 불과한 그들이 자신을 도울 이유는 없었다. 그들과의 계약관계는 대마수 토벌이 성공적으로 마친 순간에 끝났으니, 최악의 경우 모험가들이 배신하는 경우도 일어날 수 있다.
“걱정마시오. 비록 단 한번 함께 모험을 했다고 해도 본인은 당신들을 공격할 생각이 없으니. 아마 다른 모험가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오.”
애쉬가 쓴웃음을 지었다. 너무 노골적으로 쳐다봤나.
“모험가의 동료애 같은 겁니까?”
“음. 그것과는 조금 다르오. 굳이 말하자면 모험가의 신의라 할 수 있소.”
“……이거 모험가에 대한 편견이 조금 깨져나가는 기분이네요.”
“이해하오. 모험가들 중에선 신의조차 모르는 부끄러운 자들이 많소. 그러나 모험가 전체가 그렇다고 생각하지 말아주시오. 그것만으로도 본인은 충분히 만족하오.”
“모험가들이 브렌님 같았으면 좋을 텐데.”
애쉬가 말을 마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형의 정보가 그의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우거진 나무는 30M 정도 이어져 있고, 그 넘어에는 궁니르의 여파로 크레이터가 이어져 있다. 산맥이 멀쩡했다면 4,000명의 병사는 도리어 짐이 되었을 것이다.
‘산맥 밖은 크레이터 때문에 몸을 가릴 수단이 없어. 도망친다면 역시 산맥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야 하나.’
도주 경로를 살피고 있을 때였다. 모험가들이 갑자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애쉬는 경악성이 담긴 모험가의 목소리에 따라 하늘을 쳐다봤다.
“……허허.”
애쉬의 입에서 어이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붉은색의 거대한 마법진이 하늘에 그려지고 있었다. 마법에 대한 지식이 없어 마법진을 봐도 어떤 마법인지 알 수 없다. 다만 규모로 보자면 절대로 평범한 마법은 아닐 것이다.
“문답무용으로 전부 죽이겠다는 건가. 머리가 장식이 아니라면 모험가 길드를 적으로 돌릴지 않을 텐데…. 협박인가.”
상대는 협상을 생각하지 않았다. 이게 바로 길가다가 강도를 맞닥뜨린 기분인가.
“사이나 님. 혹시 저거 어떤 마법인지 아시나요?”
사이나가 하늘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마법진은 아직 절반도 그려지지 않았다. 사이나의 경우 마법실력은 마도사의 경지에 미치지 못할 지라도 지식만큼은 마도사에 필적한다. 그리고 하늘에 그려진 마법진의 일부를 보고서 마법의 정체를 알아냈다.
“메테오 스트라이크군요.”
사이나가 담담하게 말했다. 주위에 있던 모험가들이 약속이라도 한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제가 아는 그 메테오요?”
부정해주기를 바라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주인님처럼 인위적으로 마법진을 속인 것이 아니라면 메테오가 확실합니다. 발동되면 이 일대가 날아가겠군요.”
“아… 음. 뭔가 방법이 없을까요?”
“지금 제 수준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생각난 건데 사이나 님은 테드 님과 떨어져 있어도 대화가 가능하죠?
“지금 주인님과 연락이 되지 않는 상태입니다.”
“…….”
애쉬는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모험가들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그렇다고 아직 고대 유적에서 나오지 않은 모험가 팀과 테드 때문에 도망칠 수도 없다.
사이나는 그런 애쉬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저 마법진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만, 마법사는 처리할 수 있습니다.”
“마법이 완성되는 것인 먼저일지, 마법사 죽이는 것이 먼저일지 문제가 되겠네요. 의견은 감사합니다만, 그건 안 좋은 선택이에요. 일단은 대화는 해봐야겠죠. 상대방도 고대 유적을 잃는 것은 싫을 테니.”
애쉬는 움직이기로 했다. 일단은 최대한 시간을 끈다는 것이 첫 번째 목표다. 도망이든 전투든 일단 테드가 나오고 나서기 때문이다.
두 번째 목표는 잘 구슬려 군대를 돌려보내는 것이다. 이뤄질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
“우선은….”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며 사이나에게 호위를 부탁하려는 순간이었다. 앞에서 굉음이 울리더니 숲의 일부가 폭풍에 날아가며 직선거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에서 흙과 나무가 우수수 떨어졌다.
그리고 만들어진 도로를 통해 붉은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마족 여인이 호위기사를 2명을 대동한 체 걸어오고 있다. 그들이 마법진 아래로 직접 걸어오는 것은 둘째 치고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는 애쉬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현 딥크스의 여황제 메피아 바로크.
그녀는 자신의 머리카락처럼 붉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서 기품과 고고함이 느껴지는 걸음걸이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만 보고 있다면 여기가 무도회장인지 숲인지 헷갈린다.
메피아의 오른쪽에 있는 호위기사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검은색 갑옷을 입고, 두 개의 거대한 뿔이 달린 투구를 쓰고 바이저로 얼굴을 가린 기사는 딥크스에서 유명한 십이각(十二角) 중 한 명인 ‘불퇴의 마운’이다. 그의 걸음은 흡사 골렘이 움직이는 것처럼 묵직함이 느껴졌다. 마운이 등 뒤에 장비한 검은색 대검을 뽑으면 반드시 피가 흐른다고 한다.
반대쪽에 있는 남자도 마찬가지로 십이각의 일원이다. 꼬불거리는 미역을 연상케 하는 검은 머리카락의 마른 체형의 남자는 회색의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다. 광대뼈가 튀어 나올 정도로 뺨이 홀쭉한 남자의 허리춤에는 두 개의 세검이 걸려 있다. 가로 막는 나무를 날려버리고 직선거리를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폭풍의 테리’라고 불린다.
‘메피아 여황이 테드님을 증오할 정도로 싫어한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직접 병력을 이끌고 행차 할 줄이야. 이거 큰일인데.’
펠리스로 따지자면 집행자의 위치에 있는 십이각 중 2명을 데리고 왔다. 상황은 최악이었다.
“……브렌님. 일단은 무릎부터 꿇어야 합니다.”
작게 소곤거리며 조금 떨어져 있는 브렌을 향해 말했다. 수인족의 청각을 생각하면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 증거로 브렌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메피아가 걸음을 멈추고 먼저 입을 열기 전에 애쉬가 앞으로 나서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애쉬의 귀에 뒤에 있던 모험가들이 바닥을 향해 무릎을 찧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그들에게도 상황을 보는 눈치가 있었다.
“딥크스의 황제 폐하를 뵙나이다. 이런 산속에는 어인 일이시옵니까?”
“…….”
메피아는 대답 없이 애쉬를 스윽 훑어보고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은 조금 뒤쪽이다.
“건방진 년.”
메피아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욕이었다. 그녀의 시선의 끝을 힐끗 확인한 애쉬는 어렵지 않게 상황을 예측할 수 있었다.
은발의 메이드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여황을 노려보고 있었다. 언제 꺼냈는지 섬섬옥수에는 하얀색의 세검이 들려 있고, 붉은색의 눈은 적의를 날카롭게 벼려 진홍색 여황을 노려보고 있다.
“오랜만이군요. 격조하여 몰랐습니다만, 피부가 썩어 있는 것을 보니 주인님을 스토킹 하느라 그동안 많이 힘드셨나보군요.”
메피아가 입가를 삐뚤어 올리며 팔짱을 꼈다.
“네년이야 말로 여기저기 도망치느라 힘들었을 것이다. 네년의 몸에 배인 흙냄새가 여기까지 나는 구나. 그런데 네년의 빌어먹을 주인 놈은 어디 있느냐? 설마 흙내난다고 버림받은 것은 아니겠지?”
하늘에는 지금도 계속 폭탄이 만들어지고 있고, 땅위에는 도화선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애쉬는 위장이 쓰려오는 것을 느꼈다.
“저… 폐하. 말씀 중에 끼어들어 정말 죄송스럽사옵니다만… 저희는 이곳에서 고대 유적을 공략하고 있었사옵니다. 폐하께서 직접 행차하실 정도의 물의를 일으킨 적은 없사옵니다.”
사이나와 마주 노려보고 있던 메피아의 붉은 눈이 그제야 애쉬에게 향했다.
“그대의 소문은 들었다. 이곳에 있던 대마수의 토벌도 성공적으로 끝냈군. 그대는 상상이상으로 우수하군.”
예상 밖의 칭찬이 날아왔다. 사이나를 대하던 태도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바뀌었다. 그녀의 속을 알 수 없음에 애쉬는 두려움을 느꼈다.
“과찬이옵니다. 폐하. 마수를 토벌할 수 있었던 것은 이곳에 있는 모험가들 덕분이옵니다.”
“아니, 그대는 우수하다. 그대 때문에 테드 크루시안의 자세한 정보를 얻지 못했지. 얻은 정보도 한발 늦은 죽은 정보가 전부였다.”
애쉬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는 자신과 메피아의 논점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애쉬는 단순히 대마수 토벌에 관한 것을 말하는 줄 알았으나, 그녀는 애쉬의 정보 수집과 제어능력을 칭찬하고 있었다.
메피아가 다시금 주변을 둘러보았다. 20명에 가까운 사람이 모여 있다. 그녀가 알기로 토벌대의 수는 30이다. 10명이 부족하다. 도망 친 건가? 아니면 어딘가에 숨어 있나?
“짐은 말이다. 이곳까지 오면서 어울리지 않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초야를 치르는 새색시의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방에 들어오니 이부자리는 준비되어 있는데 낭군이 모습을 보이지 않는군. 대답해라, ‘흩날리는 재’. 역적은 어디에 있지?”
애쉬가 조용히 숨을 삼켰다. 갑자기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흩날리는 재는 그의 펠리스 왕국의 집행자로서의 이명이다. 그걸 언급하고 ‘역적’을 언급했다는 것은 일종의 협박이다. 역적을 감싸는 순간 펠리스와 딥크스의, 인간과 마족의 전쟁이 시작될 수 있다는.
물론 전쟁은 애쉬의 지나친 짐작일지도 모른다. 단순히 펠리스에 경고를 하는 차원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알고 있는 여황의 성정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
메피아의 시선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힌다. 식은땀이 줄줄 흐른다. 여기서 대답을 잘해야 한다. 대답 한 번에 수 천, 수 만 명이 죽어나갈 수 있고, 자신의 목숨도 달아날 수 있다.
“…그, …는….”
“듣고 있자니 어이가 없군요. 언제부터 주인님이 당신의 낭군이 되었습니까?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것입니다만, 설마하니 이부자리가 저를 말하는 것은 아니지요?”
사이나의 청량하고 날카로운 목소리는 그에게 구원이었다.
미간에 주름을 잡은 메피아가 사이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 누가 천박한 년 아니랄까봐. 낄 때 안 낄 때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냐? 그리도 끼어들고 싶다면 네년에게 묻겠다. 역적은 어디 있느냐?”
“당신이 말하는 역적이 누군지 모르겠군요.”
“……네년의 빌어먹을 주인 놈을 말하는 거다.”
“주인님이시라면 고대 유적 안에 계십니다. 곧 나오실 테니 발정난 개처럼 나대지 말고 차분히 기다리시지요.”
메피아의 옆에 있던 두 명의 기사가 제각각 자신의 무기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메피아가 손을 들어 그들을 저지했다. 이곳엔 모험왕 브렌이 있다. 사이나 혼자였다면 일찌감치 처리했을 것이다.
“…좋다. 아량을 베풀어 기다려주겠노라. 허나 모험가들이여. 그대들은 나서지 말지어다. 이것은 짐과 역적, 국가의 일이다. 그대들이 나설 곳이 아니다. 원한다면 이곳에서 벗어나도 좋다. 짐은 그대들을 붙잡지 않겠다.”
“…….”
모험가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최후에 브렌의 눈치를 살폈다. 브렌은 입을 꾹 다물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결국 모험가들도 브렌을 따라 닥치고 무릎 꿇고 있는 것을 선택했다.
“흥.”
모험가들의 행태에 메피아가 코웃음 쳤다. 의리니 동료애인가. 같잖기 그지없었다.
사이나는 조용히 기회를 봤다. 당장 메피아의 목을 베어버리고 싶으나, 그녀의 주위에 있는 자들이 범상치 않았다. 한 명이라면 당장 행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두 명이라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지만.
마법진이 거의 완성되어 갔을 무렵이었다.
고대 유적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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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