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결한 영혼-173화 (173/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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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대마수.

“성공적으로 끝나서 다행이네요.”

테드의 옆에 있던 애쉬가 말했다. 테드는 그를 힐끗 보고서 바닥에 쓰러지듯 앉았다. 쉴 새 없이 들이킨 마나 포션 탓에 배속이 출렁이는 기분이 들었다.

“예상보다 모험가들이 잘 해줬어요.”

빈말이 아니라 정말 모험가들이 잘해주었다. 그들은 대마수의 시선을 완벽하게 끌어서 테드에게 위험성이 가는 사태를 막았다. 덕분에 아무 위험 없이 마법에 집중할 수 있었다.

조금 놀란 것은 그들이 죽음을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광기까지 띄우면서 덤벼들었다. 처음에는 미약했던 광기는 죽음을 반복하면서 더욱더 짙어졌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냉정히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기에 알 수 있었다. 아군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들의 광기가 니플헤임의 부작용일 수 있다.

확인하기 위해선 테드 자신이 니플헤임을 사용한 상태에서 여러번 죽어봐야 한다.

“니플헤임을 다시 사용할 상황은 없겠지.”

작게 중얼거리며 테드에게 사이나가 다가왔다. 사이나의 걸음은 언제나처럼 가지런했으나, 그녀의 메이드복에 묻은 흙과 피는 평소와 달랐다.

대마수에게 입은 자잘한 상처는 악마 특유의 회복력으로 이미 치료 되었다.

“수고했어.”

“아닙니다. 주인님께서 나서주신 덕분에 쉬이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함성을 내지르던 모험가들이 힘을 합쳐 대마수의 시체를 들어 얼어붙은 땅을 밟으며 테드가 있는 곳으로 향해 돌아왔다.

“저 시체의 절반은 의뢰자인 저… 정확하게는 테드님에게 있어요. 어떻게 할까요?”

나머지 지분은 모험가들, 정확히는 모험가 길드에 있다. 모험가들은 몇 번이나 죽으면서 얻은 전리품을 나눠야 하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그게 계약상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저거 필요 없는데…. 아, 대충 뿔이랑 가죽만 조금 받고 나머지는 팔아버리죠.”

저 상태로 가지고 와봤자 바로 사용하지 못한다. 뿔과 가죽이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고, 설령 알고 있다고 해도 장비 품으로 사용하려면 대장장이의 손을 거쳐야 한다. 대마수의 가죽과 뿔이니 좋은 장비가 나오겠지만 과정이 귀찮다. 완성된 장비도 테드의 눈에 찰 리가 없으니 직접 인첸트 작업에 들어갈 것이 뻔하다.

“파신다면 제가 비싼 값에 사드리겠습니다. 돈은… 라이거 전하께서 내주시겠지만.”

애쉬가 히죽 웃었다. 이것도 공적으로 인정받을 것이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갔을 때가 벌써부터 기대 된다.

“당신의 힘으로 별 피해 없이 대마수를 처리했소. 모험가를 대표해 감사드리오.”

브렌이 다가오며 말하자 테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 같아서는 침대에 엎어져 사이나를 안고 자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 할 일이 남았다. 이제 시작이다.

“뭘요. 여러분들이 용맹하게 싸워주신 덕분이죠.”

“겸손은 필요 없소. 당신의 고대 마법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저세상에서 한탄했을 것이오.”

단호하게 말하는 브렌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면서 주위에 있는 모험가들을 살폈다. 희생자는 한 명도 없다. 모험가들은 사냥이 끝난 지금도 상기된 얼굴이었다. 다행히도 광기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 니플헤임을 해제하죠.”

옆에서 허공에 떠있는 사자의 서를 양손으로 덮는다. 몸 안의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누군가는 아쉬움의 한숨을, 누군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악명 높은 대마수의 토벌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모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모험가들과의 계약은 대마수 토벌까지다. 그들의 일은 끝났다.

“그 말은 우리에게 고대 던전을 탐사할 기회를 준다는 말이오?”

“우리와 여러분들의 계약은 끝났어요. 저로선 여러분들이 거절한다면 잡을 수 없죠.”

대마수가 지키고 있는 곳. 고대 유적 혹은 고대 던전이라 불리는 이곳은 미지의 영역이다. 어떤 몬스터가 나오는 지, 어떤 보물이 숨겨져 있는지 전혀 알려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테드는 크루시안에게 들어서 고대 유적이 어떤 곳인지 대략적이나마 알고 있었다. 몬스터는 없다. 있는 것이라곤 고대 시절의 유물뿐이다. 고생고생해서 대마수를 처리한 보상 치고는 의외로 얻는 것은 별로 없다. 겉으로는 말이다.

“당신이 허락해준다면야, 우리는 그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소. 다들 안 그런시오?”

브렌의 말에 모험가들이 전원 동의를 표했다. 그들은 모험가 길드를 통해 고대 유적에서 얻는 전리품에 약간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테드가 50%라면 그들은 고작해야 1~2%다. 가만히 있어도 모험가 길드가 알아서 유적에서 얻은 전리품의 보상을 건네줄 것이다.

괜히 사서 고생할 필요가 없음에도 그들이 고대 유적에 가고 싶은 것은 모험가로서의 본능이다.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미지를 밝혀낸다. 모험가의 본성을 자극한다. 그것이 악명 높은 곳이라면 두 말 할 것도 없다.

“이곳에 남으실 분은… 없는 것 같네요. 좋아요 그럼. 바로 움직이죠.”

대마수의 시체를 일단 테드의 아공간에 보관하고 고대 유적으로 움직인다. 모험가들에게 육체적 피로는 없었다. 있는 것이라곤 정신적인 피로인데 고대 유적이라는 말에 홀린 모험가들은 정신적 피로마저 잊은 듯 했다.

“이 인원으로 괜찮을까요? 고대 유적안에는 몬스터나 함정같은게 잔뜩 있을 텐데.”

애쉬가 약간의 불안함을 담아 말했다. 그의 의견은 타당했다. 그러나 고대 유적에 몬스터는 없다. 함정도 없다. 있는 것이라곤 골동품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 유물뿐이다. 사실을 말할 수 없는 테드는 자신만만하게 씩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여기에 모험왕도 있고, 베테랑 모험가들도 있죠. 저랑 사이나도 있는 무슨 걱정이에요.”

“그렇소. 함정과 몬스터에 관해서라면 이곳에 전문가들이 수두룩하게 모여 있소. 이곳에서 던전을 경험하지 못한 모험가는 없소. 모두 적어도 3번 이상은 던전을 공략한 베테랑들이오.”

브렌이 자부심으로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거기다 본인이 가장 신뢰하는 직감이 아무 말 않고 있소. 이 경우엔 위험하지 않다는 말이오.”

“……하아. 전 직감 보다는 정보를 믿는 편인데 말이죠.”

“모험가와는 어울리지 않는 가치관이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딱히 모험가가 될 생각도 없고요.”

애쉬가 터덜터덜 힘없이 걸으며 테드의 등을 뒤따랐다. 그는 다른 집행자들의 비해 전투능력이 떨어진다. 모험왕 브렌과 싸우면 주먹 한 번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직접 싸우지 않고 뒤에서 싸운다면 정보조작을 통한 간접적 전투를 벌여 확실하게 브렌을 죽일 수 있다. 죽이지 못하더라도 그에 준하는 곤란함을 그에게 전해줄 수 있다.

“에휴. 팔자에도 없는 모험을 하게 되네.”

라이거에게서 임무를 들었을 때부터 했던 예상이었다. 각오는 진즉에 되어 있었는데 실제로 겪으니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1시간이 넘도록 쉬지 않고 내리 걸었다. 고대 유적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모험가들이 느긋하게 걸은 것도 한몫했다. 그래도 산맥의 절반이 궁그닐을 맞아 증발한 덕분에 마주치는 몬스터 없이 편안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이게 유적인가. 생각했던 것보다 작네.”

바위로 이루어진 작은 사원을 보며 테드가 중얼거렸다. 입구와 벽에는 나무 덩굴이 자라있었고, 입구에서 보이는 그늘진 통로에는 이끼와 버섯이 자라 있었다. 주위에 있는 숲과 함께 보면 사원은 제법 멋진 풍경이었다.

“입구가 상당히 좁소. 전원이 한 번에 들어가는 건 불가능하오. 인원을 나눠야겠소.”

브렌의 의견에 총합 30명을 각각 10명씩 3팀으로 나눴다. 테드와 브렌을 비롯한 강자들이 첫 번째 팀이었다. 혹시 모를 몬스터에 대처하기 위해서다.

“빠르게 돌면 30분이면 탐사는 끝날 것 같군요.”

애쉬가 사원의 규모를 보며 말했다. 사원의 크기는 이전에 머물었던 무녀의 봉신월궁보다 작았다.

“으엑, 벌레…!”

고대 유적의 입구에 들어선 테드가 질색을 하며 말했다. 사람과 동물의 발길이 닿지 않은 이곳에 벌레가 득실거렸다. 랜턴을 들고 앞장서 있던 레인저인 모험가가 발을 휘두르자, 벌레들이 발을 피해 사방팔방으로 도망갔다.

모험대는 천천히 고대 유적을 탐사했다. 레인저가 있을지도 모를 함정을 빠짐없이 체크하며 걸었기 때문이다.

“음. 벽에 무언가 그려져 있는 것 같은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소.”

여러 고대 유적을 탐사하며 자연스럽게 고대 언어나 벽화 등을 보며 해석 실력을 길러온 브렌이 고개를 저었다. 선 같은 것이 무질서하게 그려져 있는 벽은 그도 처음 보는 벽화였다.

브렌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미지는 그의 원동력이었다. 이 고대 유적의 끝에 뭐가 있을지 참으로 기대 되었다.

“…….”

테드는 주위의 눈치를 살폈다. 모험가들 중에서 테드를 신경쓰는 인물은 없었다. 몬스터나 함정이 하나도 발견되지 않자, 모두 통로의 주변을 둘러보기 바빴다.

고대 유물은 몇 개 발견되었다. 롱소드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무언가, 고대의 의복으로 추정되는 무언가 같은 것들이다. 쓰레기나 다름 없는 것들도 있었으며 도자기처럼 유물적 가치가 높은 것도 있었다.

테드가 슬그머니 벽을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이 고대 유적은 겉이다. 진짜배기는 속에 있다.

방식은 크루시안에게 들어서 이미 알고 있다. 정령화를 통해 어느 정도 알게 된 영력을 사용한다. 아직은 많이 어색한 영력을 오른손에 집중하자 벽이 우웅하고 울었다. 그 작은 소리를 놓치지 않은 모험가들이 일제히 멈추고 소리의 근원지를 쳐다봤다.

벽에 그려져 있던 검은색 선들이 테드의 손이 짚고 있는 곳으로부터 푸른색 빛을 내뿜으며 퍼졌다. 테드의 몸이 사라졌다.

“…전이 함정? 이런 제길! 모두 벽에서 떨어져!”

한 모험가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모험가들은 일사분란하게 벽에서 떨어졌다. 그들은 경계어린 눈으로 벽을 노려보았다. 파랗게 빛나던 선들은 이내 다시 검은색으로 돌아왔다.

“……후. 이거 큰일이군.”

브렌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전이 함정의 경우 함정중에서도 가장 까다롭다. 보통 미궁에 많은 함정인데 설마 이곳에도 있을 줄이야.

“뭐. 테드님이니 무사하겠죠.”

애쉬가 태평하게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는 테드가 지옥으로 떨어졌다 해도 무사하리라 생각했다. 고대 마법으로 멀쩡한 필멸자를 불멸자로 만드는 대마도사다. 오히려 지옥쪽을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

“……메이드 양은 걱정되지 않소?”

브렌이 침착하기 그지없는 사이나를 보며 물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가 어떤 성격인지 대충이나마 파악했다. 제 주인을 끔찍하게 아끼는 것도.

“주인님은 괜찮습니다.”

한치의 망설임 없이 사이나가 말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미 테드에게서 언질을 받았다.

“어떤 위험도 주인님을 해칠 수 없습니다.”

브렌은 단호하게 말하는 그녀의 믿음에 조금 테드가 부럽다고 생각했다.

⁂ ⁂ ⁂

첨벙.

테드가 발목까지 올라오는 수면을 밟았다.

그가 전이된 곳은 좁은 통로였는데 바닥에는 푸른색 빛을 내는 신비한 물이 가득했다.

테드는 숨을 들이마셨다. 공간에 가득 찬 마나가 그의 몸으로 빨려들어갔다. 마나 포션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포만감을 느끼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푸른빛을 내는 물은 액체화된 마나다. 농도 짙은 마나가 모이고 모여서 액체가 되어 바닥에 고인 것이다. 마시면 강력한 마나를 얻을 것 같지만, 아무런 준비도 없이 생으로 마시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첨벙. 첨벙.

앞에 보이는 입구 혹은 출구로 보이는 곳을 향해 걸으면서 생각한다.

이곳은 마나를 느낄 줄 알고, 사용할 줄 아는 자들에겐 성지나 다름없는 곳이다. 마나가 공간에 빼곡하게 밀집되어 있는 이곳에서 마나를 수련한다면 더할 나위 없는 효율을 보일 것이다.

테드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머리가 청렴해지고 몸안에 남아있던 피로가 찌꺼기도 남기지 않고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여기에 있는 물들을 전부 챙겨서 가져갈까 생각했으나 이내 생각을 고쳤다. 마나 액체는 고이면 고일수록 더 늘어난다. 어차피 이곳에 올 수 있는 것은 영력을 사용할 수 있는 자들  뿐이고, 현재 영력을 사용가능한 것은 테드 뿐이다. 필요할 때 와서 조금씩 가져가면 된다.

“……오.”

작은 방에 도착한 테드가 탄성을 내질렀다. 바닥에 있는 빛나는 수면이 공간을 밝히고 있고, 방의 중앙에는 1M 높이의 검은색 천이 싸여있는 기둥이 있었다. 기둥 위에는 주먹만한 빛덩이가 있었다.

테드가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는 빛덩이를 향해 걸었다. 빛덩이는 유리 같은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빛의 유리는 이리저리 가만히 있지 않고 나선형으로 돌며 오색찬란한 광채를 자랑하고 있다.

감정을 시도했지만, 시스템의 영향밖에 있는 곳이라 그런지 알림창이 뜨지 않았다.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테드는 양손으로 뻗어 조심스럽게 감싸듯이 들어올렸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무게감, 촉감, 온기나 냉기같은 것이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눈으로 보고 있지 않으면 잡고 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테드는 양손에 영력을 일으켰다.

빛덩이가 스르르 녹아들듯이 테드의 손으로 흡수되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

테드가 눈을 감았다. 흡수되는 순간 빛덩이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레칸의 정수.

흡수하는 순간 영력이 영구적으로 증폭하고 고대의 지식 일부가 머릿속으로 흘려들어온다.

테드는 조용히 지식을 정리했다. 지식을 알았다고 해서 당장은 사용할 수 없다. 가지고 있는 지식을 녹여 자신에게 맞출 필요가 있었다.

몇 십 분을 그 상태로 있었을까. 테드가 두 눈을 떴다. 겉으로 보기에는 변한 것은 없었다.

테드는 기둥에 있는 검은색 천을 바라봤다. 레칸의 정수는 이것의 이름과 능력을 가르쳐 주었다.

“레칸의 위광.”

영력을 담아 그것의 이름을 불렀다. 검은색 천이 허공에서 펄럭이더니 테드의 몸을 감쌌다.

위광은 옷의 형태를 취했다. 후드가 달린 검은색 재킷이었다. 입고 있으니 굉장히 안락하다. 테드가 후드를 써본다. 답답한 느낌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벗고 있을 때보다 더 편안하다.

얻을 것을 전부 얻은 테드가 몸을 돌렸다. 그의 검은 재킷의 등부분에는 황금색 새로 된, 레칸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레칸의 위광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

레칸의 후계자.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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