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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재회.
“그래. 그 신의 조건이란 건 뭐야? 클리어 하기 위한 조건?”
테드는 네메스 대륙을 한 번 클리어 한 적이 있다. 아니, 단지 전쟁에서 학살을 했을 뿐인데 우연히 클리어를 하게 되었다.
“당신의 생각도 틀리지 않지만, 정확하게는 클리어 조건 중 하나입니다. 신의 조건이란 네메스 대륙의 신이 되기 위한 조건입니다. 조건을 모두 만족하시면 네메스 대륙의 신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자신이 신이라면’라는 상상을 안 해본 건 아니다. 그러나 막상 신이 될 거냐고 묻는 다면 글쎄다. 굳이 신이 될 필요는 없었다. 이 세계에선 능력만 있다면 신이 되지 않아도 신처럼 생활할 수 있었다.
“그다지 흥미 없는 이야기인데.”
크루시안이 빙그레 웃었다. 테드의 시큰둥한 반응은 예상했던 대로다.
“물론 그러시겠지요. 그래도 네메스 대륙의 신이 된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닙니다. 이 세계의 신은 창조주께서 직접 만드신 ‘시스템’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즉, 네메스 대륙에 한해서 전지와 전능의 힘을 갖는 것이죠.”
“시스템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좀 끌리는 걸.”
적당히 대꾸하며 대답하던 테드가 화들짝 놀랐다.
“아니, 잠깐. 그럼 사탄교나 악마 같은 것들은 당장 박멸 시킬 수 있다는 거잖아? 갑자기 엄청나게 신이 되고 싶다.”
“하하. 아무리 그래도 신이 되고 싶다고 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래도 일단 신의 조건에 대해서 말해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조건은 권능입니다. 신이라면 반드시 가져야 힘이죠. 테드님은 영력을 통해 권능의 일부를 발현하셨습니다.”
“그거 혹시 정령화 했을 때 발동한 마법?”
“그것도 그렇습니다만, 테드님이 사용하신 《시간정지》쪽이 훨씬 더 권능에 가깝습니다.”
“역시 그런가.”
테드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정지》를 사용할 때 마력의 소모가 적었다. 세계의 시간을 멈추는 마법인데 작은 마력으로 발동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권능, 영력을 사용했다고 하면 이해가 간다.
“두 번째 신의 조건은 세계열쇠입니다. 네메스 대륙의 중심, 네메스의 눈. 시스템의 본체가 있는 장소로 가기 위한 열쇠입니다.”
“세계열쇠라는 건 처음 들어보는데. 애초에 거기 갈 수 있는 장소였구나.”
“그곳은 마계와 천계처럼 다른 세계입니다. 시스템이 막고 있으며, 설령 시스템의 개입이 없다고 해도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가는 게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세계열쇠는 다른 세계로 가는 것이 가능합니다. 일종의 문이라 볼 수도 있겠군요.”
크루시안의 말에 테드는 무녀가 본 미래를 떠올렸다. 무수히 많은 천사들이 중간계에 나타난다고 했다. 그들은 혹시 세계열쇠라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그 세계열쇠는 어디에 있어?”
“네메스 대륙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했던 적도 없기에 그 정보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알고 있는 건 시스템이 전부죠. 저는 신의 권한을 가지고 네메스 대륙의 정보를 열람했기에 알 수 있었습니다. 시스템이 침묵하는 한 다른 누군가가 세계열쇠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우연히 탄생할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세계열쇠의 재료는 의외로 구하기 쉬우니까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었다. 그런 귀중한 물품이 우연히 탄생될 수 있다고? 아니, 지금까지 탄생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기적에 가까운 우연일지도 모른다.
“……그 재료라는 것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6개의 재료 중 이미 3개를 가지고 있지요. 6개 중에서 구하기 까다로운 것은 다 구해놓으셨군요.”
테드의 고개를 갸웃거렸다. 재료 중 3개를 가지고 있다고? 그러고 보니 웬만한 건 아공간에 집어넣고 잊어 먹었다. 몬스터를 죽이고 얻은 전리품이나 마석등을 모조리 아공간에 집어넣어 보관하고 있다. 워낙 편리한 창고다보니 그 안에 있는 물건이 얼마나 많을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아이언 우드. 블러드 우드. 스피릿 우드.”
“아!”
테드가 탄성을 질렀다. 아이언 우드의 나뭇가지는 엘프 마을 제누에서 얻었고, 블러드 우드의 나뭇가지는 힐데가르트의 보물고에서 얻었으며, 스피릿 우드의 나뭇가지는 아우티리아의 왕도에서 슬쩍 꺾었다.
“그것들은 세계수의 여섯 자식들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에 세계열쇠를 만들기 위한 필수조건인 심지가 되는 나뭇가지도 2개나 가지고 계시군요.”
“심지?”
“세계열쇠의 중심이 되는 부분입니다.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는 나뭇가지여야 하죠. 아이언 우드의 나뭇가지와 스피릿 우드의 나뭇가지가 심지의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당신이 다른 나뭇가지 3개만 구하면 세계열쇠를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세계수의 여섯 자식. 아이언 우드, 블러드 우드, 스피릿 우드, 파이어 우드, 가디언 우드, 골든 우드.
가지고 있는 것을 제외한 나머지 셋 중 파이어 우드와 골든 우드는 쉽게 구할 수 있다. 모험가 길드나 경매장에 가서 요청하면 많은 돈을 받고 구해준다. 파이어 우드 나뭇가지의 경우엔 커다란 대장간에 가서 얻어도 된다. 골든 우드의 나뭇가지는 귀족들의 사치품으로도 유명하니 부호한 대귀족들은 골든 우드를 정원에 기르기도 한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가디언 우드다. 가디언 우드는 몬스터처럼 움직이며 가까이 오는 자들을 공격하기도 한다. 대륙 곳곳에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 모험가 길드에 의뢰해도 몇 개월이나 걸릴지 알 수 없다.
“아무리 재료 중 절반이 내가 가지고 있다 해도 세계열쇠를 만들 이유는 없어.”
“알고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당신의 선택에 달린 일이지요. 그래도 이런 정보는 알아두면 언젠간 이득이 될 겁니다.”
크루시안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세 번째 조건은 신화입니다. 신이 되기에 걸맞은 업적을 말하죠. 중요한 것은 네메스 대 륙의 모든 이로부터 신화라고 인정받는 것. 이게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너도 신이니까 신화는 가지고 있지 않아?”
“저는 신화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태생신들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신화를 가진 것은 나서기를 좋아하는 신들 뿐입니다. 앞서 말한 3가지를 전부 이룬다면 당신은 네메스 대륙의 신이 될 것입니다.”
“신이라고 했는데 굳이 그런 방법 말고 클리어 한 뒤 소원을 이용해 신이 되는 건? 그게 더 간단할 것 같은데.”
“신은 될 수 있습니다만, 네메스 대륙의 신은 아닙니다. 네메스 대륙은 시스템에 의해 신의 간섭도 불가능하며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어딘가 다른 차원의 신의 자리를 갖게 되겠죠. 그러니 네메스 대륙의 신이 되려면 제가 말한 조건을 만족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네메스 대륙의 신이 탄생하는 순간 사도의 유입은 끊깁니다.”
“……뭐? 클리어 하는 순간 사도의 유입이 끊기는 게 아니라?”
테드는 두 번이나 클리어 했으나 클리어 후의 상황은 잘 모른다. 클리어 했으니 막연하게 더 이상 사도가 나타나진 않겠지하고 짐작했을 뿐이다.
“클리어의 보상은 소원을 하나 들어주는 것뿐입니다. 네메스 대륙의 신이 된다는 것은 게임식으로 말하자면 진엔딩이라 할 수 있겠군요.”
“…….”
테드가 생각에 잠기는 것을 확인한 크루시안이 주의를 끌 듯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벌써 10분이 지났군요. 여기서 제 본심을 말씀드리자면, 저는 당신이 네메스 대륙의 신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를 포함한 신들은 네메스 대륙에 사도를 보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창조주님의 명령이라 행하고는 있지만, 얻는 이득도 없는 손해뿐인 일입니다. 거기에 네메스 대륙에 신이 탄생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평화로워지겠죠. 물론 강요는 하지 않아요. 저는 어디까지나 당신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크루시안이 싱긋 웃었고 테드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신이 궁금하신 건 무엇인가요? 제가 성심성의껏 대답해드리겠습니다.”
“사탄교. 사탄교가 지금 어디서 뭘 하는지 정확히 알고 싶어.”
크루시안을 만난 이유다. 테드가 알고 있는 미래가 뒤틀리면서 사탄교는 테드의 인지 범위를 벗어났다.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어떤 목적으로 움직이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원래라면 데비크를 양산하기 위해 움직였을 놈들이 지금은 꼭꼭 몸을 숨기고 있다.
크루시안은 드물게도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그건 제가 알고 있는 정보의 범위를 벗어난 질문입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네메스 대륙의 설정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을 뿐이에요. 거기에 제가 볼 수 있는 것도 어디까지나 계약자인 당신의 주위뿐입니다.”
“그런가…….”
한숨이 새어나오는 것을 꾹 참으며 말했다. 아직 실망하기에는 이르다. 자신이 모르는 정보를 알고 있는 크루시안이다. 남은 십 몇분 동안 크루시안에게 최대한 정보를 얻는다. 무녀가 본 미래를 막을 수 있게.
테드가 크루시안에게 얻은 것은 상상이상의 정보였다. 시스템의 허점이라던가, 대마수가 지키고 있는 고대던전에 관해서 라던가. 네메스 대륙에 숨겨져 있는 던전이라던가. 바론이 가지고 있는 루나틱 블레이드의 효과라던가.
어느 것 하나 허튼 정보는 없었다. 크루시안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를 추려서 준비하고 이곳으로 온 것이 틀림없었다.
“이제 시간이 끝나는 군요. 이번에는 시간이 부족해 제가 일방적으로 말한 것이 전부지만, 만약 다음이 있다면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군요.”
“그건 조금 힘들지도 모르겠는 걸. 요즘 업적 점수로 사고 싶은 게 엄청 많은 지라. 100,000점을 모을 수 있을지….”
“하하. 참고로 말하자면 네메스 대륙의 신이 된다면 저와 만나실 수 있습니다. 아니, 저뿐만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신들도요.”
“다른 차원의 신이 찾아오기라도 하는 거야?”
“신이 없고, 창조주가 만든 네메스 대륙에 관심 있는 신들은 많으니까요. 그리고 당신이 네메스 대륙의 신이 된다면 다른 차원으로 가서 신을 만나는게 가능합니다. 아니면, 당신의 가족을 만나는 것도 가능하고요.”
테드의 몸이 움찔 떨렸다.
아아…. 그래. 왜 그동안 잊고 있었을까.
“……가족들은 잘 지내?”
“예. 잘 지내고 계십니다. 모두 건강하고요.”
어머니는 여전히 잘 웃으시는지. 아버지는 담배를 끊으셨는지. 여동생은 남자친구는 있는지. 묻고 싶은 것들이 산더미처럼 나왔다. 그러나 시간이 부족하고 막상 입을 열었는데 목구멍을 무언가 막고 있는 듯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거 참 다행이네.”
겨우 끄집어 낸 말은 스스로가 한심스러울 정도다.
“이런 시간이 됐군요.”
크루시안의 몸에 빛무리가 생성된다. 그는 빛무리를 둘러싸인 체 말했다.
“아, 여동생 분은 내년에 결혼합니다. 상대방은…….”
사라졌다.
“…어, 잠깐!”
테드가 공허한 방안에서 외쳤다.
“상대방은… 이라니! 궁금증을 유발하는 것에도 정도가 있지! 도대체 어떤 개잡놈이야! 개쌍놈은 아니겠지? 쌍놈이면 신이 되서라도 죽이러 간다! 진짜!”
한동안 방방 뛰던 테드가 땅이 꺼져가라 한 숨을 내쉬고 힘없이 의자에 앉았다. 잊으려 했던 것. 잊고 있었던 것. 포기했던 것이 머릿속을 헤집는다.
크루시안이 자신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 던진 말이 아님을 알고 있다. 오히려 그 반대. 여동생은 잘 살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것이겠지.
한 손으로 얼굴을 붙잡았다. 차가운 손의 냉기가 머릿속을 식힌다. 지금도 선명히 가족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시간이 흘렀으니 알고 있는 모습과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특히나 여동생이 많이 변했겠지.
“……그걸로 됐어.”
작은 목소리로 끝맺는 말을 중얼거렸다. 뭐가 됐는지는 스스로도 모른다. 그러나 입 밖으로 내고나서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가족들이 잘 살고 있다면 좋은 일이다. 자신도 이곳에서 사이나와 함께 그럭저럭 잘 살고 있으니 잘 된일이 아닌가. 뭐, 사탄교라던가 딥크스라던가 문제가 여럿 있지만.
테드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볼일은 끝났다.
“다음에 꼭 다시 온다.”
아주 약간 네메스 대륙의 신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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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