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결한 영혼-163화 (163/277)

163====================

22. 재회.

테드는 무녀의 제안에 따라 환상마법을 해제하고 봉신월궁을 이곳저곳 둘러보았다. 마법은 전혀 보이지 않았으나, 부자연스러운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었다. 주술이다. 주술이 궁 곳곳에 걸려 있었다. 안타깝게도 어떤 주술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무녀와 함께 궁으로 도착했을 때는 마침 저녁 식사하기 전의 시간이라 이야기는 저녁식사를 하고 난 뒤로 정해졌다. 그렇다고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이미 테드가 올 것을 이야기 들었는지 수많은 시녀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넓은 방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들의 앞으로 반상을 가져왔다.

테드는 바닥에 앉아서 먹는 것에 편안함을 느꼈지만, 애쉬는 좌식이 상당히 불편한 듯 몸을 꿈틀거렸다.

시녀들이 가져 온 것은 12첩 반상이라 불리는 호화로운 상이다. 아니, 숫자로만 따지면 12첩 이상이다. 흔히 말하는 상다리가 부서질 것 같은 양이었다. 반상위에 놓인 것은 의외로 동양적 음식뿐만이 아니라 서양 음식까지 고루고루 갖추어줘 있다.

거기에 숙수들의 음식 솜씨도 뛰어나서 고급 레스토랑과 비교해도 남부럽지 않았다. 북엇국을 한 숟갈 떠먹은 사이나가 작게 감탄할 정도였다면 말 다한 것이다.

문주위에 서있는 시녀를 포함해 수 십 명이 실내에 있었으나, 식사 시간은 조용했다. 이따금 수저가 움직이는 소리를 제외하면 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식사 전 애쉬가 말하기를. 수인들은 식사를 신성하게 생각해서 식사 중에는 대화를 잘 하지 않는다고 한다. 옛날에는 식사 중에 말소리를 내면 호통을 들을 정도라고 했지만, 지금은 많이 사라진 전통이다.

조용하고 호화로운 식사가 끝난 뒤, 테드는 무녀와 함께 시녀들이 준비한 차를 마셨다. 따뜻한 유자차였다.

무녀는 유자차를 한 모금 마신 뒤, 그제야 입을 열었다.

“테드님. 이야기에 앞서 제가 하는 말이 허무맹랑하게 들릴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원래는 저와 테드님이 만나는 미래는 없습니다. 즉, 미래는 이미 작은 부분에서 부터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무녀님의 미래예지는 완전하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미래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어요. 그러니 말해주세요. 무녀님은 어떤 미래를 봤죠?”

테드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끄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그는 식사 도중 몇 번이나 튀어나올 뻔 한 질문을 음식과 함께 겨우 삼켰었다.

자신이 본 미래를 떠올린 무녀는 살짝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녀는 유자차를 한 모금 마셔 몸을 진정시키고서 입을 뗐다.

“……제가 본 미래는 테드님의 지금 모습과 비교하자면 조금 더 나이가 든, 7,8년… 어쩌면 10년 정도 후에 벌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의 테드님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늘의 구멍으로부터 떨어지는 천사들과 맞서 싸우고 계셨습니다.”

“……천사라니.”

테드는 그 말을 듣고 살짝 안심했다. 대전쟁이 아니었구나. 국가끼리 서로 싸우는, 증오와 살육만이 존재하는 그 전쟁이 아니었구나, 하고 안심했다. 그러다 뒤늦게 천사를 떠올렸다. 어떻게 보면 더 질이 안좋다.

“수 천, 수 만에 이르는 천사가 네메스 대륙에 나타났습니다. 산맥은 불타고, 땅은 뒤집혔으며 강은 피로 새빨갛게 물들었습니다. 그들은 천족, 마족, 인간, 엘프, 수인, 오크, 드워프, 뱀파이어, 드라칸 구분 없이 평등하게 죽였습니다. 자신들을 신봉하는 천족의 머리를 망설임 없이 날렸습니다. 그리고 천사들의 의해 네메스 대륙이 절망과 비명으로 가득찼을 때, 악마들이 나타났습니다. 제가 본 마지막 미래였습니다. 네메스 대륙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저도 알 수 없습니다.”

“…….”

테드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미래를 바꾸고 싶었고, 미래는 바뀌었다. 좋지 않은 쪽으로.

‘아니, 일단 진정하게 생각하자. 가장 큰 문제는 왜 천사가 떼거지로 나타났냐는 것.’

천사나 악마는 시스템의 제한을 받기 때문에 넘어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어쩌다 넘어와도 사이나처럼 힘의 제한을 받는다. 그리고 정당한 방법이 아니면 힘의 제한은 풀리지 않는다. 그런 천사나 악마가 떼거지로 나타났다?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는 이상 불가능하다.

“제가 본 마지막 미래는 이렇습니다.”

상념에 빠지는 테드를 향해 무녀가 힘을 주어 말했다.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테드는 머쓱하게 웃었다.

“그럼 그 이전의 미래는요?”

“……테드님의 지금 외모로 보자면 1, 2년 후의 미래겠군요. 테드님은 딥크스의 대마수를 처치하고 고대 던전에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무언가를 얻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저로서는 알 수 없으나, 중요한 무언가라고 짐작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뒤에는 한 명의 유녀와 싸우게 됩니다.”

“유녀…? 말싸움이라도 하는 건가요?”

“아뇨. 조금만 방심해도 목숨이 달아나는 전투입니다.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연보라색 머리카락에 황금색 눈동자를 가진 유녀는 어둠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였습니다. 어둠에 닿는 순간 테드님의 마법이 소멸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알.”

끼어든 것은 조용히 경청하고 있던 사이나였다. 시원한 목소리에는 경악으로 인해 살짝 떨리고 있었다.

“바알? 알고 있어?”

테드가 물었다. 바알이라는 이름은 테드도 알고 있다. 악마 관련 책을 보면 거의 빠짐없이 나오는 제법 유명한 악마다. 바알은 악마중에서도, 서큐버스도 명함을 못 내밀 정도로 아름답기로 소문난 미녀라고 적혀 있었다.

“광폭의 마왕이라 불리는 서열 3위의 악마입니다. 외모의 특징과 어둠을 사용했다고 하면 틀림없습니다. 그 어둠은 그녀의 권능인 ‘폭식’이니까요.”

“그 폭식이란 건?”

“그녀는 땅, 나무, 마법, 돌, 물 구분 없이 만물을 어둠으로 먹어 치워 자신의 에너지로 변환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상대하게 된다면 그녀의 격투를 조심해야 합니다. 에너지를 사용해 강화된 그녀의 신체는 주먹 한 번에 산이 평지로 변할 정도입니다.”

“원펀걸이냐…….”

“…원펀걸…?”

뜻을 모르겠는지 사이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무심코 옛날 생각이 나서. 여하튼 바알이 엄청 쌔다는 거잖아. 그래도 만약 붙는다 해도 중간계에서 온전히 힘을 발휘할 수 없으니 할 만하다고 생각해. 거기에 그건 불확정 미래에 대한 이야기야.”

확실하지 않다. 테드가 다시 무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천사, 대마수, 바알. 나열하니 내 인생 참 파란만장하네요. 근데 그게 전부인가요?”

“아직 하나, 미래가 남아 있습니다. 어쩌면 테드님에겐 가장 중요한 미래일지도 모르겠군요.”

“어떤 미래인가요?”

무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껄끄러운 듯 테드의 눈치를 살피더니 작은 한 숨을 내쉬었다.

“테드님이 미쳐 날뛰는 미래였습니다.”

미쳐 날뛴다는 말에 멈칫했다. 테드는 마성을 사용하면 조금 과격해진다. 미쳐 날뛰는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감정의 일부가 사라지며 머리가 차갑게 식는다.

테드가 의문을 표하려 할 때, 그보다 한 발 앞서 무녀가 말을 이었다.

“12장의 날개를 가진 천사의 황금빛의 검을 맞은 사이나님이 전사했습니다.”

“…….”

애쉬는 분위기가 거북할 정도로 침착하다고 생각하며 테드의 눈치를 살폈다.

사이나는 자신의 죽음을 듣고서도 눈가를 조금 꿈틀거렸을 뿐이다.

무녀는 말을 하는 내내 테드의 얼굴을 곧게 바라보고 있었기에 볼 수 있었다. 아주 극심한 찰나, 테드의 눈동자가 붉은색으로 물들었다가 다시 검정색으로 돌아 오는 것을.

“……12장의 날개와 황금빛 검이라. 미카엘라군요.”

테드는 평소처럼 말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나온 목소리는 자기도 깜짝 놀랄 정도로 서늘한 목소리였다. 뒤늦게 목을 가다듬었다.

“네. 그렇습니다. 다만 미래의 일입니다. 아직 확정된 것이 아닙니다. 제가 테드님에게 미래를 입 밖에 낸 순간 이미 미래는 바뀌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르쳐줘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많은 도움이 됐어요.”

전혀 모르는 것과 일부라도 알고 있는 것의 차이는 엄청나다. 특히나 그게 미래의 경우라면 더욱.

미카엘라는 태양과 승리를 관장하는 여천사다. 12장의 날개를 가지고 있는 그녀는 태양의 힘을 가진 성검으로 악마를 멸한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천족이 추종하는 천사 중 한 명으로 악마와 달리 제법 알려져 있어서 일반인들도 미카엘라의 이름을 알고 있을 정도다.

“테드님. 제가 전해야 할 것은 모두 전했습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어떻게 해야 미래를 바꿀 수 있는지 모르고 그럴 권리도 없습니다. 제가 본 것은 테드 님의 미래. 테드님이 선택해 나갈 미래입니다. 저는 테드님이 올바른 미래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렇게 믿어 주니 고맙네요. 뭐, 최대한 노력해볼게요.”

미카엘라와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머릿속으론 그와의 전투를 구상하며 테드가 말했다.

“테드님. 테드님에게 제안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제안이라 하시면?”

무녀가 시녀를 향해 손짓했다. 시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조신하게 걸어와서 지도를 건넸다.

“네미슈에는 수많은 던전이 있습니다. 모험가들에 의해 공략이 끝난 던전이 있고, 모험가들도 꺼려하는 던전도 있습니다. 이 지도에 나와 있는 던전은 네미슈의 상부들이 숨겨온 던전 입니다.”

테드가 무녀에게서 지도를 받아들었다. 지도는 놀랍게도 네미슈의 수도인 ‘수원도(水原都)’의 상세한 지도다. 수도의 남쪽 끝에 펼쳐진 호수에 붉은색 동그라미 표시가 있다. 아마도 이곳이 던전이다.

“선대 무녀께서 제게 언젠가 찾아올 귀인에게 이 던전을 알려주도록 하라고 명했습니다. 선대 무녀께서 말하신 귀인이 테드님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테드님에겐 분명히 도움이 될 던전입니다.”

“국가가 숨긴 던전이라면 범상치 않은 던전이라는 건데…. 뭐가 있는 거죠?”

국가는 도시 근처에 던전을 남겨두지 않는다. 던전 속에 있는 위험한 몬스터가 밖으로 나와 시민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보통은 모험가나 군대를 이용해 던전을 일찌감치 없애 버린다. 그런데 일부러 숨겨두었다는 것은 무언가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혹은 던전에서 생각보다 많은 이득을 본다거나.

“나오는 몬스터는 언데드입니다. 현재 확인 된 것은 스켈레톤, 구울, 데스나이트, 듀라한, 어보미네이터, 밴시입니다. 던전의 보스가 누군지는 아쉽게도 알 수 없었습니다.”

테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데드가 나오는 던전은 위험하다. 언데드는 자주 던전 밖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특히나 무녀가 말한 몬스터에는 상위몬스터가 끼여 있다.

“지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던전은 호수아래에 있습니다. 입장하는 것부터 힘들고, 입장제한이 걸려 있어 단 한 명밖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런 위험한 던전에 입장 제한이 한 명이라고요?”

입장 제한. 간혹 던전 중에서 발견되는 특이한 던전이 있다. 바로 던전에 입장할 수 있는 인원이 정해진 던전이다. 보통 10명 정도가 던전의 입장 제한이다. 제한 인원 이상으로는 시스템에 의해 들어가지 못한다.

“네. 호수아래에 있기 때문인지 언데드는 던전 밖으로 나오지 않습니다만, 모험왕도 던전 공략을 포기할 정도입니다. 말하기로는 상대가 언데드라서 공략이 불가능하다고…….”

무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해 이 던전 때문에 여러 가지로 시달린 적이 많았다. 네미슈의 대통령이 직접 찾아와서는 불안해 죽겠으니 어떻게 할 방법이 없냐고 닦달 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음. 언데드라….”

솔직히 말하자면 할만 했다. 모험왕이 어느 정도의 수준이지 모르겠지만, 대마도사인 테드는 자신 있었다. 언데드가 수 천 마리가 있어도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메리트가 없다. 언데드 던전은 고생하는 것에 비해 얻는 것이 적어서 인기도 별로 없다. 더군다나 여유롭게 던전 공략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무녀가 알려준 미래를 바꾸기 위해 계획을 짜야 했다.

“어디까지나 제안입니다. 거절하셔도 상관없습니다만… 선대 무녀께서는 이 던전안에 고대마법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고대 마법?!”

깜짝 놀란 테드가 되물었다.

고대 마법을 얻을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니, 오히려 반드시 해야 한다. 고대 마법하나에 전투의 상황을 그대로 바꿔버릴 수 있을 정도니까.

“선대 무녀님의 말씀이니, 틀림없을 겁니다. 그리고 물론 던전에서 얻은 물건은 모두 테드님의 것입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지원도 해드리겠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겠습니다! 내일 오전… 아니, 오후에 바로 던전에 들어갈게요. 지원은 딱히 필요 없어요.”

오랜만의 마법사의 피가 끓는다. 고대 마법. 이 얼마나 신비한 단어인가.

“알겠습니다. 그럼 자잘한 준비는 이쪽에서 해놓겠습니다. 오늘은 시간도 늦었으니 궁의 객방을 내어드리겠습니다.”

“그럼, 감사히.”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