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결한 영혼-162화 (162/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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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재회.

“네미슈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테드 크루시안 님.”

무녀의 말에 테드는 두 눈을 끔뻑였다.

요즘 네미슈의 무녀는 국경을 넘어 들어온 여행객들에게 이런 깜짝 서비스를 하는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지.

그녀의 두 눈은 정확하게 테드에게 향해 있으며, 입은 확인사살을 하듯 이름을 불렸다.

테드의 시선이 애쉬에게 향했다. 애쉬는 테드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 눈을 부릅뜨며 마주보았다.

“저 실수 한 거 아닙니다. 확실하게 흔적 지우고 거짓 정보도 퍼뜨렸어요. 아무리 유능해도 이틀 만에 테드님의 정보를 찾는 건 불가능해요.”

테드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무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미슈의 대통령에게 존중받으며, 국민들에게는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여성이다. 네미슈에서 그녀의 인기가 어느 정도냐면 대기권을 뚫고 달을 꿰뚫을 정도다.

“저기 사람 잘못 보신 것 같네요. 전 테드 크루시안이 아니라 펠릭스의 귀족인 카인드 트링거라 합니다.”

“아뇨. 당신은 테드 크루시안님 이십니다.”

“…….”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바라지 않는 대답이었다. 동시에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네미슈의 심장인 수도에 있어야 할 무녀가 이곳에 국경에 가까운 거리에 나와 있다는 것과 자신을 기다렸다는 극진히 행동하는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녀는 오늘 여기서 처음 만났고, 딱히 대접 받을만한 일을 한 적도 없다.

이 곤란한 상황에 누가 도와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담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이나는 별 관심 없어 보였고 애쉬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용병과 모나는 갑작스레 등장한 높으신 분에 돌처럼 굳어져 눈치만 살피고 있다.

“…네. 무녀님의 말씀대로 제가 테드 크루시안입니다. 저를 잡기 위해 찾아 왔나요? 아니, 그 이전에 어떻게 제가 이곳으로 올 것을 알았죠?”

테드는 그들의 목적을 알 수 없었다. 자신을 체포하기 위해 왔다면 다짜고짜 전투를 벌였을 것이다. 그들이 무릎 꿇고 극신한 대접을 한다는 것은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저희는 테드님을 맞이하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것입니다. 저희가 테드님을 잡는다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네미슈는 귀인에게 칼을 겨누며 환영하지 않습니다.”

무녀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걸며 말했다. 자신은 무해하다고 말하는 웃음 같았다.

“테드 님의 두 번째 질문에 답하자면, 저는 엊그저께 테드님이 이곳을 지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건 설마….”

테드의 얼굴이 굳는다. 엊그저께 보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엊그저께라면 아우티리아 왕도의 개성의 날로서 사탄교가 공주를 노리고 쳐들어 온 날이며 테드가 일시적으로 정령이 된 날이다.

“예. 저는 그날 밤에 테드님의 미래를 보았습니다. 다만 정확한 날을 알 수 없어 어제 오후부터 이곳에서 숨어 계속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차를 후루룩 마시며 꽃을 구경할 것 같은 무녀는 의외로 무식한 행동을 선택했다. 그 만큼 절박하다는 것일까. 아니면 외양과 달리 의외로 왈가닥 기질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테드는 왜 그렇게 기다린 것인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을 입에 담는다.

“제 미래라면, 어디까지 보셨죠?”

“오늘과 같은 가까운 미래와 언제 일지 모를 미래를 보았습니다.”

테드는 숨을 삼켰다. 자신도 미래라면 알고 있었다. 그래 알고 ‘있었’다. 어떤 미래는 바뀌지 않았을지 몰라도, 어떤 미래는 완전히 바뀌었다. 알고 있는 미래는 더 이상 완벽히 신뢰할 수 없다.

“……그 미래가 무녀님이 길거리에 나와서 무릎을 꿇을 정도로 중요한 미래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테드는 몸을 옥죄는 기분 나쁜 긴장감을 느꼈다. 긴장할 필요는 없다고 스스로 되뇌었다. 불안한 감정과는 다르게 오랜 시간을 통해 자연스레 얻은 냉철한 이성은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가 본 미래가 그녀에게 있어 좋은 미래였다면 굳이 흙바닥에 무릎 꿇지 않았을 거라는 걸.

“……저 때문에 네미슈가 위험합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부분을 정정하자면 네미슈가 아니라 대륙 전체입니다.”

전쟁인가? 무심코 내뱉을 뻔 한 말을 꽉 눌러 삼켰다.

“…제게 그 미래를 가르쳐 주실 수 있을까요?”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마법을 사용할 경우까지 생각하며 한 말이었다. 그리고 무녀는 다행히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네. 저는 테드님에게 제가 본 미래를 전하기 위해서 여기에 온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입 밖으로 내기에는 장소가 좋지 않습니다. 중요한 일이니 만큼 제가 기거하고 있는 봉신월궁(奉神月宮)으로 테드님과 그 일행 분들을 초대하고 싶습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일어나자 뒤에 있던 무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일어났다.

“어, 잠깐. 대화를 듣고 있어서 대충은 이해가지만… 나는 빠져야겠어. 내가 감당할 일이 아니야. 듀라 스승은 말했어. 끼어야 할 때와 끼지 말아야 할 때를 파악해야 한다고. 이건 내가 낄 곳이 아니야.”

테드가 입을 열기전에 무녀가 먼저 모나에게 다가갔다.

“모나 상단주님의 뜻은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뜻을 기꺼이 존중하겠습니다. 그러나 모나 상다주님이 실수 하실 수도 있기에 말해드리겠습니다. 지금 일어난 일은 국가 최고 기밀입니다. 그리고 최고 기밀은 유출되는 순간 유출자에겐 추살령이 떨어집니다.”

“어, 아…. 그 저는….”

모나가 기세에 밀렸다. 한 발자국 뒤로 빠졌으나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온 무녀가 양손으로 모나의 손을 붙잡았다.

“사람은 살다보면 한 번쯤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그건 여기에 있는 저도, 무사님들도, 모나 상단주님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나 실수는 방지할 수 있습니다. 그 실수 방지법을 제가 준비해왔습니다. 모나 상단주님과 용병분들은 불쾌하시더라도 부디 저와 어울려 주시길 바랍니다.”

“아, 네! 물론 무녀님에게 협력할게요! 그런데 그 방지법이란 건…?”

무사들 10명이 모나와 용병들 주위로 움직였다. 모나의 몸이 흠칫 떨렸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라는 아주 유명한 말이 그녀의 머릿속을 지나갔다.

“후후. 모나 상단주님의 스승 분께서 자주 하시는 말이 있습니다. ‘고객은 부모님처럼 믿을 수 없지만 계약서는 부모님 보다 더 믿을 수 있다.’라는 재미난 말입니다.”

딸꾹. 모나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녀의 말대로 모나의 스승이 계약서의 중요성을 상기시키기 위해 자주 하는 말이었다.

무녀의 옆으로 다가온 무사의 손에는 종이뭉치가 들려 있었다. 모나는 스승의 아래에 있을 때 몇 번이나 본적 있기에 종이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건 시스템이 관여하는 계약서인 ≪맹약(盟約)≫이다.

한 장에 5,000 골드나 하는 정신 나간 가격의 계약서다. 물론 돈값을 톡톡히 하는 물건이다.

무녀는 무사에게서 직접 계약서를 받아 들고서 직접 모나와 용병들에게 한 장씩 나눠주었다. 무지한 용병들은 그냥 무녀가 직접 나눠준다는 것에 의미를 두어 황송하게 받았지만, 모나는 떨리는 양손으로 받았다. 설마 언젠간 꼭 사용해 볼 거라 말했던 계약서를 이런 식으로 쓰게 될 줄이야.

“무녀님. 모나는 제 친구에요.”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며 지켜보고 있던 테드가 불쑥 말했다. 뒷말을 구태여 붙일 필요는 없었다. 똑똑하고 눈치 빠른 무녀라면 무슨 뜻인지 알 테니까.

“…예. 알고 있습니다.”

무녀는 변함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맹약한다.”

가장 먼저 모나가 선언하고, 뒤이어 용병들이 맹약을 선언했다. 계약서는 빛이 되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들은 이곳에 있었던 일을 발설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럼 테드님. 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겠습니다. 부디 잠시만 기다려 주시길.”

“예. 천천히 하세요.”

테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고서 모나의 곁으로 다가갔다.

“잘 했어. 이런 일에 잘못 끼어들면 뒷끝이 안 좋아. 이번엔 무녀님 덕분에 좋게 끝나서 다행이야.”

테드는 말하고서 쓰게 웃었다. 모나는 끝이더라도 그는 아니었다. 이제 시작이다.

“……항상 이런 일을 하는 거야?”

모나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왔다. 이런 식으로 누군가의 걱정을 받는 것은 나쁘지 않다.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감각이 들었다.

“항상은 아니야. 아주 가끔씩 이러지. 이번엔 끝내주는 효능의 부적도 있겠다. 뭐, 잘 풀리겠지.”

“왠지 미안하네…. 친구인데 아무 도움도 못 되는 내가 한심스러워….”

모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차가운 손이 머리의 열을 식혀주었다. 그녀는 이런 무력감을 이전에 한 번 느낀 적 있었다. 어머니가 병에 걸렸을 때다. 이 무력감이 싫어서 상인의 길을 걸었는데 또 느껴버렸다.

무녀가 준비를 끝났다며 테드를 불렸다. 테드는 모나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충분히 도움이 됐어. 널 만났기에 한동안 잊고 있던 걸 다시 떠올릴 수 있었어. 난 생각보다 엄청 유능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다음에 또 만나자.”

“……다음에는.”

나직한 말소리에 멀어지던 테드가 우뚝 멈췄다. 테드의 눈에 허리에 양팔을 올리고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는 모나가 비쳤다.

“다음에 만날 때는 엄청 진귀한 요리를 사줄게! 기대해도 좋아! 입이 딱 벌어질 테니까!”

“매우 유능한 메이드 덕에 내 입맛이 의외로 아주 고급져. 웬만한 걸론 성에도 안차니 확실하게 준비해줘.”

무녀가 준비했던 것은 직사각형의 워프게이트였다. 다만, 마법은 아니었다. 4장의 부적이 사각형의 꼭짓점에서 기본틀을 유지하고 있다. 부적에서 나온 푸른색 선이 직사각형을 이루어 문을 만들어낸다. 문의 안에는 어둑한 하늘과 달을 비추는 커다란 연못이 있는 정원이 있다.

“선문(仙門)이라는 주술입니다. 마법의 워프게이트와 비슷하지만 여러 가지 제약이 있어 남발할 수 없는 주술입니다”

“이런 주술이 있는 줄 몰랐어요.”

테드가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말했고 무녀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

네메스 대륙에서 주술은 마법에 밀려 거의 사라지는 학문이다. 수인들이 주술을 익힌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수인들마저 주술보다는 마법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가장 먼저 문을 넘은 것은 무녀와 무사 몇 명이었고, 그 뒤를 따라 테드 일행이 문을 넘었다.

워프게이트와 비슷한 선문을 넘는다. 감각으로 따지자면 워프게이트나 선문이나 다름이 없다. 큰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워프게이트가 막대한 마력을 사용하는 반면에 선문은 비교적 마나가 적다는 것이다.

문을 넘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정원에 줄지어 서있는 시녀들이었다. 하얀색의 깔끔한 복장을 입은 시녀들은 허리를 약간 숙여 정원 길 양 끝에 서있었다.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건 정원의 8할을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연못이다. 수련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물결위로 달과 기와와 목재로 지어져 있는 궁이 비춰진다.

아주 옛날에 보았던, 기억 저편에 있는 사극 드라마를 떠올리게 만드는 풍경이었다.

“이쪽으로.”

연못에 정신이 팔려 있는 테드를 향해 무녀가 말했다. 퍼뜩 정신이 차린 테드는 머쓱한 웃음을 짓고서 그녀를 따라 궁의 안으로 들어갔다.

봉신월궁. 신을 받드는 달의 궁전. 사도의 신전과 더불어 네미슈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이다. 다만 무녀가 어떤 신을 모시는 지에 관해선 알려져 있지 않다.

“무녀님.”

“네. 테드님.”

무녀가 뒤돌아 봤다. 가지런히 모아 하나로 묶은 금발이 흔들렸다.

“그러고 보니 듣지 못했는데 무녀님의 이름은 뭔가요?”

무녀의 이름을 몰랐다. 회귀 전에도 몰랐다. 사람들은 그녀를 단지 무녀라고만 불렸다.

약간의 침묵이 오가고 이내 무녀는 살며시 웃었다.

“……선대 무녀에게 점지 받은 이름은 나르샤입니다. 함부로 부를 수 없는 이름이니, 부디 무녀라고 불러 주시길.”

“네. 무녀님. 그런데 무녀님은 어떤 신을 모시나요?”

“……저는 신을 기다리는 무녀입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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