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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재회.
네메스 대륙에서 도적을 만나는 일은 흔하지 않다. 도적이 있다는 소문만 돌아도 여행객들의 발걸음이 눈에 보일 정도로 떨어지기에 국가나 모험가 길드가 최우선적으로 움직여 토벌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개입이 없는 중립구역에서는 도적이 비교적 많다고 하지만, 지금 현재 테드가 있는 곳은 치안이 아주 뛰어난 아우티리아다. 그것도 네미슈 왕국으로 넘어가는 국경지대에 가까운 곳이다. 이곳에서 도적질을 한다는 것은 아예 대놓고 국가 권력에 도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테드 일행은 그들이 눈치 채지 못하는 거리에서 상황을 살폈다. 도적과 상단은 대치하고 있었다. 상단은 마차 3개와 용병 10명 정도로 구성되어 마차를 등지고 무기를 빼들고 있다. 반면 포위하고 있는 도적들은 20명 정도다. 도적들 전원이 머리에 동물의 귀나 골반 부근에 꼬리가 나있는 수인족들이다.
“아무리 국경이 근처라고 해도 수인족 도적이라니… 이거 자칫하면 국가 문제로 넘어갈 수 있는 문제인데요. 저들은 알고 있을까요?”
애쉬가 웃으며 말했다. 그는 은근히 국가 문제로 번지기를 원했다.
“그럴 리가요. 겨우 도적들로 국가 문제가 된다면 이미 전쟁이 일어났겠죠.”
네미슈에선 도적들을 그대로 사형시키면 그만이고, 아우티리아도 사무적인 문서 몇 개 날리고 적당히 물러날 것이다.
“그래도 네미슈의 도적들이 아우티리아로 원정 오는 것은 드문 일인데요.”
“아예 없는 건 아니죠. 애초에 도적들 대부분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친 자들이니까요. 망명이라도 하려나보죠.”
지구의 중세처럼 뒤떨어진 문명도 아니고, 네미슈와 아우티리아는 선진국이라 할 수 있는 국가들이다. 순전히 생활이 어려워서 도적이 된 자들은 없다. 대부분이 가벼운 법죄를 일으키거나 평범하게 일하기 싫은 멍청이들이 도적을 한다. 전문적으로 뒷 세계의 일을 하는 이들이라면 말은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눈앞에 있는 수인족 도적들은 범죄 조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주인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이나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테드에게 물었다. 어중이떠중이 도적따윈 그녀가 나서면 10초도 되지 않아 목과 머리가 이별할 것이다.
도적과 상단은 대치하고 있다. 수적으로 우세하고 기습의 이점을 생각한다면 도적들은 단숨에 상단의 인원을 죽이고 원하는 상품을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도적은 협상, 아니 협박을 하고 있다. 목숨이 아깝다면 물건을 버리고 가라는 진부적인 협박을.
“그러게. 어떻게 할까.”
테드가 오른팔을 뻗어 사이나의 어깨를 감쌌다. 사이나가 몸을 움찔 떨었으나 저항은 없었다. 오히려 은근슬쩍 어깨에 기댔다. 테드는 옅은 웃음을 지었다. 그날 밤 이후로 그녀는 묘하게 적극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솔직히 쫓기는 몸이라 웬만해선 관여하고 싶지 않은데.”
테드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발은 착실하게 사건의 중심으로 걸어가고 있다. 머릿속으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생각한다. 그 결과 어떻게 행동해도 이득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테드님. 알고 계시겠지만, 테드님은 쫓기는 몸이에요. 저들은 우리를 인식하지 못했고, 우리가 무시하고 조금 돌아서 간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죠.”
애쉬가 말했다.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 같으나 그는 테드의 옆에서 망설임 없이 걸으며 조잘거렸다.
“지나가다 곤란해 보이는 사람이 보이면 도와줄 수도 있죠.”
테드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에게 올 불이익을 생각해 무시하는 일이죠.”
“제가 그 대부분의 사람이 아니라 좀 특이한 사람이라 그래요.”
테드의 말에 애쉬는 긍정했다.
“뭐, 테드님이야 놔둬도 모험가 길드에서 알아서 할 사탄교를 뒤쫓는 특이한 분 이시니까요.”
“아니, 말이 나와서 그러는데 모험가 길드, 그것들 말이죠. 의외로 무능하다고요. 이번 아우티리아 사태만 봐도 알 수 있잖아요?”
말하다 보니 불평이 입 밖으로 나왔다. 모험가 길드에서 막대한 혜택을 받고 있는 테드지만, 길드의 항상 한 발 늦은 대처는 욕이 나올 정도다.
“그건 어쩔 수 없죠. 용병보다 낫다고 해도 그들은 모험가. 결국은 자신의 이득을 최우선으로 해서 움직이자는 자들이죠. 그런 주제에 남이 자신을 건드리는 걸 구토할 정도로 싫어하죠.”
“……제법 신랄하게 말하네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왕도 욕하는데요. 이렇게요. 라이거 전하 망할놈.”
“…….”
테드는 기가 막히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집행자는 왕의 광신도로 알려져 있다. 아무렇지 않게 국왕을 욕하는 애쉬가 집행자인지 의심스러웠다.
“아무튼. 제 본심을 말하자면, 테드님 마음대로 하세요. 저는 테드님의 보좌로 붙어 있는 거고, 보좌라는 것은 쉽게 말해 뒤처리니까요. 이번 뒤처리도 제가 깔끔히 처리하죠.”
“와, 진짜 편하네요. 아예 평생 같이… 아, 아니다.”
평생 같이 다니자고 말하려다가 고개를 저었다. 자신에게는 평생을 같이 다닐 반려자인 사이나가 있다. 아무리 편해도 애쉬같은 남자랑 평생 같이 다니고 싶지 않다.
“적당히 같이 다니죠.”
애쉬는 피식 웃어 보였다.
도적과 상단이 대치하고 있는 곳으로 가까워지자 그들의 목소리가 테드에게도 들려왔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30초 준다. 지금 당장 무기 버려. 안 그럼 전쟁이다!”
외친 것은 도적의 중심에 있는 남자다. 도적들 중에서 그나마 깔끔하고 좋아 보이는 장비를 가진 그는 햇빛에 반짝이는 카타나를 들고 두 눈을 부라리고 있다. 사각형의 턱과 작은 흉터, 구릿빛의 피부는 확실히 위협적이었다. 머리위에 난 하얀색 토끼 귀만 아니었다면 완벽한 도적의 모범이었을 것이다. 한 번씩 쫑긋 거리는 귀가 위엄을 다 말아먹고 있다.
토끼 수인 도적의 말에 대답한 것은 무기를 꼬나쥐고 몸을 긴장시키고 있는 용병들이 아니라, 그들의 뒤에서 보호받고 있는 여성이었다.
“300골드 준다고 했잖아! 그 정도면 너희들한테도 충분히 이득이고, 나에겐 감당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손실이야!”
작은 체구에 갈색의 단발머리, 커다란 눈망울과 분홍빛이 도는 뺨. 겉모습을 보자면 여성이라기보다는 소녀였다. 그녀는 도적의 협박에 도리어 당차게 협상을 시도하고 있었다.
도적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토끼 수인은 기가 찬 듯 얼굴을 찡그렸다.
“같은 수인이라서 목숨까지 뺐지 않는 거다! 우리가 자비를 베풀 때 얌전히 따르라!”
“아니, 내가 너희를 어떻게 믿고?! 다 알아, 무기를 버리게 해놓고 저항하지 못하게 됐을 때 편하게 다 죽여 버릴 속셈이지? 이 비열한 놈들아!”
“아오! 이 멍청한 년이!”
우두머리의 카타나가 허공을 갈랐다. 바람이 갈리는 소리에 소녀가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이내 등을 꼿꼿이 세웠다.
“누구 보고 멍청하다는 거야?!”
“너다! 너! 이 멍청한 상인 년아! 꼭 피를 봐야겠냐?! 상인이면 상황판단 정도는 할 줄 알잖아! 앙?”
“나는 완벽하게 상황판단하고 합리적으로 말하는 거야!”
“쓰으으읍!”
우두머리가 화를 식히기 위해 커다란 콧구멍으로 신선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그의 가슴이 부풀어 오르고, 얼굴이 붉어졌다. 숨을 내뱉자 얼굴에 몰린 피가 빠져나간다.
처음 말했던 30초는 훨씬 전에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은 것은 용병들과 붙어봐야 상처 입은 승리 일뿐이고, 눈앞의 수인 소녀를 단칼에 베어 죽이기엔 양심이 찔렀다.
이제 와서 양심이라니… 스스로도 웃기는 소리라고 도적 우두머리는 생각했다.
“진짜 마지막이다! 마지막으로 설명 할 테니 잘 들어라! 멍청한 상인 년아!”
옆에 있는 부하 도적이 불만이 깃든 눈으로 우두머리를 바라봤다. 우두머리는 애써 부하의 눈빛을 무시했다.
“너희들은 10명! 우리는 20명! 거기에 너희는 포위되어 도망도 못 치지! 전투를 벌이면 누가 봐도 우리가 이겨! 그러니 내가 자비를 베풀어서 무기를 버리고 물건을 넘기면 목숨을 살려준다고! 모르는 것 같으니 알려주마! 살아 있으면 재산은 언제든지 불릴 수 있다!”
“불합리해!”
곧바로 소녀가 고함쳤다. 바락바락 대드는 꼴이 죽어도 물러나지 않을 기색이다. 도적 우두머리의 얼굴빛이 붉으락푸르락 변한다.
“도적한테 합리를 바라지마! 에라이!”
우두머리가 카타나를 치켜들었다. 시선이 그에게 모여들었다. 자신은 최대한의 배려를 했다. 자비를 베풀었다. 그 자비를 내친 것은 다름 아닌 소녀다.
“얘들아 쳐라!”
도적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 들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압박감이 도적들의 몸을 휘감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입과 코를 막아 폐를 압박하는 것 같았다.
흙과 나뭇잎을 밟는 발자국 소리가 마차의 뒤쪽에서 들렸다. 도적들의 시선이 절로 그쪽으로 향했다.
3명의 남녀였다. 한 남자는 잿빛머리에 안경을 쓰고 깔끔한 정장을 입고 있다. 옆에 걷고 있는 갈색머리의 모험가 남녀는 눈꼴 시릴 정도로 붙어서 걷고 있다.
갑작스레 변한 도적들의 분위기에 용병과 수인 소녀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뭐, 뭐냐, 네놈들은!”
제일먼저 압박감을 떨쳐낸 우두머리가 말했다. 이유모를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내려가 상의를 적셨다.
중앙에 있는 남자가 약간 귀찮다는 듯 무심하게 말했다.
“지나가던 대마도사.”
날파리를 쫓듯이 왼손을 허공에 휘저었다. 동시에 상단을 포위하고 있던 도적들이 무기를 든 체로 바닥에 쓰러졌다. 몇 초 지나자 그들의 코고는 소리가 울렸다. 수면 마법 ‘깊은 잠(Deep sleep)’의 효과다.
정신계 마법 특유의 성질 덕분에 저항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평범한 일반인 수준의 도적들은 곧바로 마법에 걸려 퍼질러잤다.
용병들의 경계서린 눈초리를 받으며 다가온 테드는 너구리 수인 소녀, 모나에게 다가갔다.
“진짜 오랜만이다. 10년이 지났는데 어째 변한 게 없네?”
아주 친근하게, 정말 반갑다는 듯 테드가 웃으며 말했다. 그에 당황한 것은 모나였다.
그녀는 스스로가 기억력만큼은 좋다고 자부하고 있다. 작은 상단을 운영하면서 이리저리 구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발달된 능력이었다. 거래 장부를 줄줄이 외우고 있으며 한 번이라도 거래한 고객은 이름은 물론이고 나이까지 달달 외우고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갈색머리의 남자는 그녀의 기억에 없었다. 반갑게 맞이하는 것을 보면 스쳐 지나간 인연은 아닐 터다. 그러나 떠오르지 않았다.
“누, 누구세요?”
결국 솔직하게 물었다. 혹시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았을지 걱정도 되었다. 그는 손을 휘젓는 것으로 도적들을 잠재우는 인물이었다.
“아, 이 모습이라면 모르는 건 당연하지.”
테드는 실수했다는 듯 자신의 이마를 팍 쳤다. 일행들 중에서 환상마법을 꿰둟지 못하는 이가 없기에 자연스럽게 잊어 먹은 사실이다. 대외적으로 테드와 사이나는 환상마법으로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
환상 마법을 풀어도 될지 짧은 시간 동안 고민하고 결단을 내렸다. 지명수배 되었다고 해도 용병들 모두가 지명수배지를 꿰뚫고 있는 것이 아니고, 설령 신고한다고 해도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와의 인연을 믿었다.
마법을 해제한다. 그 여파에 마나가 살짝 요동치며 바람이 불었다. 테드의 검은 머리가 살짝 흔들렸다. 테드는 검은 눈동자로 모나를 보며 웃었다.
“어, 테드?!”
“그래. 나야. 설마 모나가 상인이 되었을 줄은 몰랐어. …그리고 어머니는 무탈하시고?”
대륙에 처음 와서 쌓은 인연.
하루도 지나지 않는, 자연스레 잊혀 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인연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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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던 모험가, 지나가던 용병, 지나가던 선비, 지나가던 검사, 지나가던 의사, 지나가던 변호사, 지나가던 대장장이, 지나가던 요리사, 지나가던 암살자, 지나가던 대마도사. 지나가던 악마. 지나가던 절대지존. 지나가던 소드마스터 등등.
직업 앞에 지나가던만 붙이면 왠지 강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