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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재회.
22. 재회.
아스타로트는 석문 앞에서 한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의 입으로 탁하고 습한 공기가 입을 통해 들어왔으나 개의치 않았다. 그는 붉은 머리칼에 먼지 한 톨 남아 있을까 싶어 머리카락을 몇 번 매만졌다. 불안함이 담긴 손으로 머리 정돈을 끝내고 준비한 선물을 확인한다.
투박한 나무 상자다. 오래된 세월 탓에 여기저기 상처가 많은 나무 상자였지만, 내부는 마법이 걸려 있어 문제없이 선물을 보존하고 있다.
옷도 깔끔하고 머릿속에는 준비한 대답까지 완벽하다. 다시 스스로가 확인해 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안에 있는 상대가 누군지 알기에 석문을 여는 것이 꺼려졌다.
아스타로트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대악마의 체면이 말이 아니군.”
다행인 점은 이 석문을 통해 안과 밖은 완전히 차단되어 아스타로트의 한숨소리가 새어나가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아스타로트는 그 후에도 한참을 서 있다가 조심스럽게 석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겉보기에는 단단한 돌덩어리다. 아무런 문양도 없고, 손잡이도 없어 벽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투박한 문이다. 그가 석문을 밀듯이 천천히 힘을 주자 신기하게도 석문은 뒤가 아니라 옆으로 밀려났다.
쿠르릉,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온 광경은 굉장히 넓은 공간이었다.
검은색의 매끄러운 대리석으로 되어 있는 바닥은 끊임없이 이어져 있고, 벽이 없어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다. 사방에 거대한 돌기둥이 몇 개 있었으나, 돌기둥은 천장을 바치지 않고 있다. 아니, 천장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늘에는 그저 보라색의 이질적인 보름달만이 떠있다.
그리고 이 공간의 중심. 석문에서 약 50M 정도 떨어진 곳에 왕좌가 하나 있다. 소재를 알 수 없는 검은 무언가로 만들어진 커다란 왕좌에는 한 명의 소녀가 누워있다.
새하얀 피부에 감싸인 작고 가는 다리가 의자 옆으로 삐져나와 있으며, 손은 귀찮다는 듯이 축 늘어져 있다. 그녀는 연보라색의 긴 머리칼을 가지고 있으며 반쯤 뜬 눈으로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외향은 7~8세로 소녀라기보다는 유녀에 가깝다.
유녀는 검은색의 핫팬츠와 탱크탑을 걸치고 있다. 허벅지라던가 어깨, 매끈한 복부 등이 고스란히 보이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노출도가 높은 복장이었다.
석문의 앞에서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아스타로트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감히 석문 앞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기다렸을까.
허공에서 느닷없이 나타난 어둠이 아스타로트의 몸을 휘감았다. 본능적인 공포가 아스타로트의 정신을 장악했다. 신음하나 내뱉지 않은 것은 그간 살아온 경험과 서열 17위의 대악마라는 자존심 덕분이다.
아스타로트는 저항하지 않았다. 아주 약간의 반항이라도 내비치는 순간 어둠은 본성을 드러낼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유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그에게 향하고, 유녀의 희고 작은 손이 살짝 손짓했다.
쾅! 어둠에 의해 왕좌의 앞에 처박힌 아스타로트가 충격에 몸을 떨었다. 어둠이 몸을 짓눌러 감히 일어서지 못하게 한다. 어둠은 고개를 드는 것 마저 허락하지 않는다.
“이봐, 아스타로트.”
바알이 천천히 작은 입을 열었다. 외모에 걸맞은 앳된 음성이었으나,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는 아스타로트는 결코 귀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마계 서열 3위. 광폭의 바알.
격이 다른 5위권의 대악마 중에서도 가장 흉포한 악마.
그 압도적인 강함에 악마들이 경의와 찬사를 담아 부르는 5명의 마왕 중 한 명.
“난 네가 마음에 들어. 지금 상황에 안주하고 있는 머저리같은 악마들에 비해 넌 야망이 있고 행동할 줄도 아니까.”
“…….”
바알이 몸을 일으켰다. 자세를 되잡는다. 등받이 깊이 등을 묻고 다리를 꼬고서 바닥에 처박힌 아스타로트를 내려다봤다.
“그런데! 그 놈의 계획은 몇 번이나 실패하고, 미친 개새끼한텐 목줄 하나 제대로 못 채워서 다루지도 못하지! 내가 도대체 어디까지 실망해야겠냐? …아, 혹시 그거냐? 지금 한심스러운 모습으로 내 방심을 이끌어내는 거. 그거면 아주 잘 먹혔어! 방금전만해도 너 새끼가 너무 한심스러워서 무심코 먹어버릴 뻔 했잖아!”
그녀가 손을 움직이자 어둠에 의해 아스타로트의 상체가 위로 끌려 올려졌다. 아스타로트는 그녀의 살의와 광기가 줄줄 흐르는 황금색 눈빛에 식은땀을 흘리며 그녀를 불렀다.
“바알.”
“그래. 변명하겠지. 천사놈들의 발닦개인 천족 놈들이 덮쳤나? 기사라는 잡것들에게 물렸냐? 모험가에게 잡혔냐? 루시퍼의 딸년이 문제냐? 아니면 또 그놈의 테드 크루시안이라는 인간 놈에게 강간당했냐?”
몸을 감싸고 있는 어둠에게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아스타로트는 이를 꽉 깨물었다. 어쩌면 정말로 그녀에게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테드 크루시안. 그의 방해가 있었….”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바알의 주먹이 아스타로트의 얼굴에 꽂혔다. 아스타로트의 몸이 뒤로 날아가며 바닥을 족히 100M 이상을 굴렀다.
그는 충격에 떨리는 몸을 가누며 상체를 일으켰다. 이 정도는 아직 괜찮다. 이 영역 내에서 완전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바알이 전력을 다해 쳤으면 이미 몸은 박살났을 것이다.
“5년이야! 이 빌어먹을 곳에 갇힌 지 5년이나 지났어! 처음 나와 계약할 때, 너는 내게 미카엘라 씨발년의 목을 딸 기회를 준다고 말했지! 도대체 넌 내가 언제까지 성에 갇힌 공주처럼 이곳에서 썩어있어야 기회를 줄 거지?!”
100M나 떨어져 있음에도 아스타로트의 귀에는 그녀의 목소리가 코앞에서 들리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렸다.
“정말로 마지막이다. 이번 계획이 실패하면 더 이상의 가능성은 없다. 내 영혼을 가져가든 마음대로 해라. 다만,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
바알이 검지를 까딱였다. 아스타로트의 시야가 변했다. 그는 왕좌의 앞에 무릎을 꿇은 체 있었다. 왕좌에서 일어난 바알이 그의 멱살을 잡아들었다. 그녀의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아스타로트의 귀를 때렸다.
“벨리알을 죽여 그 심장을 네게 주었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이곳에선 5년을 기다렸어. 그런데 뭐, 이젠 계약에도 없는 일을 하라고?!”
“마지막이다. 네 도움이 있다면 확실하게 성공할 수 있다.”
“너 말이지. 내가 오냐오냐 해주니까 아주 만만해 보이나봐? 아니면 이딴 감옥이 날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 응?”
바알의 작은 몸에서 어둠이 슬금슬금 피어난다. 그 모습을 정면에서 목도하고 있는 아스타로트는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메타엘이 죽지만 않았어도 바알에게 손을 뻗는 미친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광폭의 마왕, 너를 만만하게 보는 이는 마계에도 천계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네가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이라도 나를 소멸시킬 수 있겠지. 하지만 그럴 경우 너는 미카엘라를 만나지 못한다. 어쩌면 영원히.”
“……쯧.”
아스타로트의 무표정한 얼굴에 혀를 찬 바알이 그를 옆으로 내던졌다.
“그래, 네 말대로 내겐 그년을 만날 지식이나 방법이 없지. 하지만 기고만장하지 않는 게 좋아. 어디까지나 내가 너를 봐주고 있는 거니까.”
그는 흐트러진 옷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어둠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다행히도 그는 목숨을 부지했다.
“3년. 3년이다. 바알. 3년이 되었을 때 너는 바람대로 미카엘라를 만날 거다.”
다시 왕좌에 앉은 바알은 왼팔로 턱을 괴고서 황금빛 눈동자만을 굴려 아스타로트를 바라봤다.
“넌 다른 건 몰라도 자신감하나 만큼은 끝내주는구나. 부디 그 자신감 뒤에 합당한 능력이 있기를 바랄게.”
“이번엔 너의 도움까지 받으니 실패할 리가 없다.”
“아부도 잘하네.”
아스타로트는 바닥을 구르면서도 놓지 않은 나무 상자를 들고 왕좌로 걸어갔다. 포장인 나무상자는 여기저기 조금씩 부서졌지만 내용물은 무사했다.
그녀에게 나무 상자 채로 넘겨줄까하다가 마음을 바꾸고 직접 나무상자를 열어 내용물을 꺼냈다. 그건 어른 팔뚝만한 초록색 병에 들어 있는 투명한 액체의 술이다.
바알의 시선이 술병에 꽂혔다. 방금 전에 분노도 잊은 듯, 흥미가 깃든 두 눈이 술을 쳐다보고 있다.
“술이냐? 처음 보는데. 보통 술은 아니지?”
“드워프의 조주 장인인 ‘첨처러’가 딱 33병만 담궜다고 알려진 ‘요정이슬’이다.”
“왜 밑둥을 팔꿈치로 팍팍치는 거지?”
“모른다. 일단 병을 따기 전에 이렇게 하라더군.”
아스타로트가 병뚜껑을 따고 그녀에게 술병을 넘겼다.
술병을 낚아채듯 받은 바알이 망설이지 않고 작은 입에 술병을 물었다.
“캬아~! 죽이는데 이거!”
절로 탄성을 내지르는 그녀를 보며 아스타로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하는데 제법 애를 먹었지만, 바알을 달랠 수 있다면 손해는 아니었다.
“바알 지금 네 도움은 필요 없다. 때가 되면 네게 요청하겠다.”
“미리 말해두지만 제 아무리 나라도 시스템 때문에 중간계에서의 현신은 3분이상은 힘들어.”
“그거라면 괜찮다. 네 힘이라면 3분도 충분하니. 거기에 내 힘까지 사용하면 너를 완전한 상태에서 10분 정도는 버티게 해주겠지.”
“야, 근데 술 더 없냐? 넌 어째 이리 좋은걸 한 병만 가져 오냐.”
“……요정이슬보단 못하지만 ‘진짜이슬’이라면 삼십 병정도 있다. 가져오도록 하지.”
“빨리 가져와 인마!”
“…….”
⁂ ⁂ ⁂
테드는 여왕과 공주들의 무사를 확인하고 곧 바로 아우티리아 왕도를 야반도주 하듯 빠르게 떠났다. 목적은 이루었다. 괜히 여왕과 공주에게 붙잡히고 싶지 않았다. 보상을 요구한다면 기꺼이 건네 줄 터지만 그다지 끌리지 않았다. 금전이라면 충분했고, 보물도 필요 없었다. 오히려 미안한 감정도 있었다. 조금 더 제대로 대처했다면 하이랜더가 무더기로 죽어나가지 않았을 테니까.
“그런데 테드님. 네미슈에는 무슨 일로 가시나요?”
말없이 숲길을 터벅터벅 걷고 있자 침묵을 견디지 못한 애쉬가 먼저 물어왔다.
“사도의 신전이요. 업적 점수가 꽤 쌓였거든요.”
네메스 대륙에서 수인국인 네미슈와 천족 제국인 프리티스에만 존재하는 사도의 신전이다. 사도들을 위한 시설로 이곳에서 업적 점수를 사용할 수 있다.
테드는 지금껏 사용하지 않은 업적 점수가 꽤나 쌓였다. 업적 점수를 사용하면 스킬이나 아이템으로 교환할 수 있었다.
테드가 힐끗 옆에서 걷고 있는 사이나를 쳐다봤다. 사실 사도의 신전에 가게 된 원인은 그녀에게 있었다.
사이나에게 받은 것은 많은데 자신이 해준 것이 없다는 것을 불현 듯 떠올렸기 때문이다. 참된 주인으로서 그녀에게 보상하기 위해서다. 그렇다고 웬만한 물건은 테드의 눈에 차지도 않고, 보물급의 물건은 구하기가 쉽지 않다.
한참을 고민했다. 적당한 던전을 격파하던가 경매장을 이용하는 방법 등을. 그러다 쉽고 빠르게 보물급 물건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떠올렸다. 바로 업적 점수를 사용하는 것이다.
“사도의 신전에 대한 정보라면 저도 알고 있죠. 일반 사도들은 들어가 봤자 눈물만 흘린다고 하는데… 테드님이라면 분명 좋은 물건을 구하실 수 있을거에요. 근데 어떤 물건을 원하시나요?”
“그게 왜 궁금해요?”
테드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애쉬를 쳐다봤다. 애쉬는 여전히 능글맞게 웃어보였다.
“에이, 까칠하시긴. 그냥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글쎄요. 아직 정하지 않아서. 일단 가서 뭐가 있는지 부터 확인하려고요.”
말은 그렇게 했으나, 테드는 사도의 신전에 뭐가 있는지 대충 알고 있었다. 참고로 엘릭서도 상당한 업적 점수로 교환할 수 있다.
“그런데 아쉽지 않으신가요? 아우티리아의 영웅으로 상당한 보상을 받으실 수 있을 텐데.”
“별로요. 그 보상으로 뭘 줄지 알 수 없고 아무거나 막 받았다간 묶이기 십상이죠. 거기다 전 지명수배자라서 오래 머물면 상당히 곤란해요.”
“테드님이 그렇게 말하신다면 제가 뭐라 할 수 없죠. 그런데 드래프리온은 언제 가실 예정인가요?”
드라칸 왕국 드래프리온이 애쉬의 입에서 나오자 테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통해서 사탄교의 다음 목적지가 드래프리온임을 알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드래프리온은 가고 싶지 않았다. 섬나라인 것은 둘째 치고 수호룡이 버젓이 존재하는 곳이다. 괜히 갔다가 트러블에 휘말리면 귀찮아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거기에 사탄교라고 해도 에이션트 드래곤 3마리가 수호룡으로 존재하는 나라에서 활동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저 거기 가기 진짜 싫은데.”
“하하. 그렇게 말하셔도 사탄교를 쫓아 가실거란걸 전 알고 있습니다.”
“…….”
애쉬의 말에 테드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사탄교가 수호룡을 어떻게 한다고 생각되지는 않으나, 그들을 막기 위해 테드는 드래프리온으로 움직일 것이다.
“일단 네미슈부터 들렸다가 계획을 짜던가 해야죠. 이미 실패를 했으니 사탄교라도 마음
대로 움직이진 못 할 거에요. 악마 2명은 제법은 손해가 크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최대한 드래프리온의 정보를 모아두죠.”
그 뒤로 테드는 애쉬의 잡담에 대충 어울려주며 숲길을 걸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네미슈로 넘어가는 국경 근처로 오늘이나 내일쯤에 네미슈로 넘어갈 수 있다. 길에 박식한 애쉬 덕분에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천천히 걸어가던 테드 일행은 이내 멈춰섰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웬 상단 마차가 도적들에게 습격당하고 있었다.
“뭐지 이 뻔한 클리셰는.”
테드가 어이없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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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