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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영혼-156화 (156/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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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광기가 춤추는 숲.

“진짜 짜증나네.”

그녀의 말에도 테드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녀를 살폈다. 얼굴의 절반 이상을 가릴 정도로 커다란 고깔모자 아래에는 미간에 주름 잡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테드와 마찬가지로 검은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아있다.

테드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기억을 되짚었다. 그녀 정도의 미녀, 거기다 로브속에 입고 있는 검은 속옷같은 비키니 아머까지. 잊고 싶어도 쉽게 잊을 수 없는 인상인데 기억에 없었다. 즉, 전생에서도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 년? 스승님을 알고 있나?”

세르미나의 눈썹이 꿈틀 거렸다. 알고 있냐고?

“알다마다. 이 세상에서 나보다 그년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은 없을 정도로!”

마력에 의해 세르미나의 로브가 거세게 펄럭이며 허공에 붉은 빛을 띈 수 십 개의 마법진이 나타난다. 1초도 걸리지 않아 완성된 마법진은 불로 이루어진 창, 파이어 스피어(Fire Spear)를 그대로 발사했다.

테드를 노린 불의 창들은 어느새 테드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푸른색 물의 장막(Water Shield)에 의해 막혀 거센 수중기를 내뿜으며 증발한다.

“그래. 그 캐스팅 속도! 그년의 제자답네!”

“스승님과 무슨 관계지?”

테드가 물었다. 말투를 보아하니 좋은 관계는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 모른다. 그는 스승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그녀와 적으로 돌아서면 여러 가지로 힘들다.

“그년에게 듣지 못 했어?”

듣지 못했다. 아니, 테드의 스승은 마법에 관한 것만을 말할 뿐, 자신의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메피아라는 사제가 있다는 것도 이번생에서 처음 알았다. 하물며 눈앞의 여자와는 원수 관계로 보이는데 그녀가 말 할 리가 없다.

“내가 들을 가치도 없다는 거겠지.”

오른쪽, 왼쪽, 후방으로 통해 들어오는 보이지 않는 화살을 윈드 커터로 요격한다. 공중에서 펑펑 불꽃이 터진다. 파이어 애로우를 투명화시켜 쏘아 보낸 것이다.

‘마도사 이상의 실력.’

냉청하게 눈앞의 여자의 실력을 가늠한다. 어쩌면 자신과 같은 대마도사급의 실력자일지도 모른다고 테드는 생각했다.

“제법 하는데. …덤벼오지 않는 거야?”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는 건지. 나 원…. 여기에 있는 하이랜더만 몇 인데. 시간만 끌어도 이겨.”

말과 달리 테드는 하이랜더가 오지 않을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들이 왕성에 일어난 이변을, 워프 게이트 마법을 사용할 때 발생한 거대한 마력의 유동을 모를 리가 없다. 그들이 오지 않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다른 곳도 습격당했다던가.

“하이랜더? 그것들은 미친놈이랑 놀고 있을 거야. 괜한 기대감은 버리는게 좋아.”

“기대는 처음부터 안했어.”

세르미나의 사방에 검은 쇠사슬이 나타나 쇄도한다. 그러나 그녀의 주위에서 나타난 검은 쇠사슬이 테드의 쇠사슬과 부딪혀 상쇄시킨다. 같은 다크 체인이 부딪히고 튕겨져 나가는 순간 그것들은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소멸한다.

“와, 다크 체인까지 사용할 줄 알아? 그년의 애제자였나 봐?”

테드의 눈동자가 붉게 변한다. 달빛을 받아 소름끼치게 빛나는 눈동자로 세르미나를 쳐다봤다. 상대가 다크 체인을 사용하는 대마도사급의 사용자라면 방심 할 수 없다. 다크체인에 묶이는 순간 최악의 상황이 될 테니까.

“너도 제자냐?”

테드가 세르미나에게 물었다. 그리고 돌연 그녀의 얼굴이 석화에 걸린 것 마냥 굳어졌다.

“……하?”

어이가 없다는 웃음소리와 함께 살기가 솟구친다. 살의는 이내 거대한 마력의 유동으로 바뀐다.

“내가… 그 년의 제자… 라고?”

살면서 이런 모욕은 처음이라는 듯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테드는 헛웃음을 삼켰다. 무심코 던진 말이 설마 그녀의 역린을 건드릴 줄이야. 오히려 잘된 일이다. 마법사에게 있어 이성을 잃는다는 것은 패배에 직결되니까.

“…그래. 그 년 앞에 빌어먹을 제자의 머리를 던저 주면 아주 좋은 선물이 되겠지.”

세르미나의 몸속에 있는 거대한 마력이 움직인다. 하늘에 하얀색의 마법진이 천천히 그려진다. 왕성의 크기에 맞먹는 마법진에 테드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최상급 마법인 ‘썬더 샤워(Thunder Shawer)'.

사정없이 내려치는 번개로 왕성 자체를 쓸어버릴 생각일 것이다.

“망할년이.”

테드는 마법을 깨트리는 대신 그녀의 목숨을 앗아가기로 정했다. 에너지 블레이드(Energy Blade)를 오른손에 생성한 뒤 블링크로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노리는 것은 그녀의 심장.

“커억…!”

푸른색 에너지로 이루어진 검날은 너무나도 쉽게 세르미나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리고 1초뒤 그녀의 몸이 진득한 검은 액체가 되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테드가 표정을 구겼다. 세르미나가 화를 낸 것이 연기임을 깨달았다.

마리오네트 도플갱어(Marionette Doppelganger). 최상급의 흑마법의 일종으로 테드의 눈으로 가짜임을 꿰뚫어 보지 못할 정도로 정밀했다. 사용자의 역량이 엄청나다는 뜻이다.

‘……흑마법이군.’

테드는 허공에 뜬 체로 고개를 하늘로 향했다. 마법진은 이제 막 10%정도 그려졌다. 마법진의 마력을 따라서 세르미나의 위치를 찾는다. 그리고 뒤뜰임을 순식간에 파악한다.

“디스펠(Dispel).”

짜증을 담아서 하늘의 마법진을 향해 마법을 발동했다. 그러나 마법진에 걸린 프로텍트(Protect)가 발동하며 테드의 마법이 튕겨나간다.

“……다크 체인(Dark Chain).”

허공에 나타난 마법진 속에서 검은 쇠사슬이 뻗어나가 프로텍트를 무시하고 거대한 하얀색의 마법진을 꿰뚫는다. 거침없이 그려지던 마법진이 도중에 멈춘다. 그 장면을 보며 테드는 혀를 찼다.

본래라면 마법진은 깨져야 정상이다. 사슬의 의한 갑작스런 마나 봉인에 의해 마법진을 유지하지 못하고 흐트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슬의 원리를 알고 있는 그녀는 사슬의 효과를 최소화시켜 마법진을 고정시켜났다. 그래도 사슬이 있는 한 마법진이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테드가 블링크를 사용하기 직전이었다. 허공에 나타난 쇠사슬이 마법진을 꿰뚫은 쇠사슬과 부딪혀 상쇄되어 사라진다. 마법진이 다시 그려지기 시작한다.

굳이 마법진을 박살낼 필요 없이 시전자를 노리면 될 일이지만, 일종의 자존심이 걸려 있다.

“……익스플로전(Explosion).”

마법진의 중심에 폭발이 일어나며 박살낸다. 테드는 숨을 내쉬며 성쪽을 쳐다봤다. 하이랜더들도 놀지는 않고 있는지 성 곳곳에서 불기둥이 나오거나 땅바닥이 솟구치는 등 소란스러움이 그대로 전해졌다.

테드의 몸이 사라지고 성의 뒤뜰에 모습을 드러낸다.

기다렸다는 듯이 사방에서 검은 사슬이 덮쳐오지만, 테드는 이미 한 번 더 블링크를 사용해 세르미나의 앞으로 다가가 에너지 블레이드를 휘둘렀다. 비록 앱솔루트 배리어에 막혀 상처하나 주지 못했지만.

“마법사 주제에 접근전을 하는 거야? 그년이 그렇게 가르치든?”

뒤를 노리고 날아오는 검은 쇠사슬을 옆으로 피한다. 테드의 쇠사슬이 그녀를 노리고 쇄도하지만 마찬가지로 쇠사슬에 상쇄되어 사라진다.

“괜한 소릴 하는군.”

테드가 그녀에게 달려갔다. 앱솔루트 배리어라고 해도 테드의 에너지 블레이드를 마냥 막아낼 수는 없다. 앞으로 대여섯 번 막아주는 것이 고작 일 터다.

그녀가 블링크로 도망치면 블링크로 따라가서 에너지 블레이드를 휘두른다. 다크 체인으로 공격해오면 상쇄시키고 자잘한 공격마법은 디스펠로 무력화 시킨다. 세르미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디스펠로도 쉽게 무력화 시킬 수 없는 고위마법을 사용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스승님이랑 얼굴이 닮았군.”

지면과 함께 다리를 얼리려는 마법을 플레임으로 불태우며 테드가 말했다. 세르미나가 거리를 벌리기 위해 뒷걸음질 칠 때 모자가 살짝 뒤로 넘어가서 얼굴이 훤히 보였었다.

“스승님의 가족이냐?”

“아니.”

세르미나가 단호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젠 아니야.”

“……뭐?”

익스플로전. 테드의 바로 앞에서 폭발이 일어난다. 배리어로 방어했기에 데미지는 없으나 눈앞의 검은 연기가 시야를 발휘했다. 테드가 바람을 일으켜 연기를 치웠다.

어느새 멀찍이 떨어진 그녀를 향해 블링크로 이동하려 했으나, 블링크가 발동되지 않았다. 세르미나가 발동한 안티 블링크(Anti Blink) 의 효과다.

‘잠시 방심한 틈에 많이도 준비했군.’

테드의 사방팔방에 수 백 개의 얼음 화살이 포진해 있었다. 디스펠로 하나하나 순식간에 지워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슷한 실력의 마도사와 마도사의 결투에서 가장 중요한 건, 캐스팅 속도도 고위 마법도 아니야.”

대마도사 정도에 이른다면 캐스팅 속도는 비슷비슷하고, 고위 마법은 상성만 잘 파악하면 하위 마법으로도 파쇄가 가능하다. 그렇다면 비전 마법인데, 서로의 비전마법을 꿰뚫고 있는 테드와 세르미나에겐 무의미하다. 절대적 위력을 가지지만 아주 느린 캐스팅을 가지고 있는 고대 마법은 언어도단이다.

“바로 마력량이야.”

수 십 개의 얼음 화살이 움직였다. 배리어는 장대빗처럼 쏟아지는 얼음 화살에 순식간에 박살나고 테드의 몸에 떨어진다.

파팍. 파파팍.

얼음 화살은 테드의 몸을 꿰뚫지 못하는 대신 그대로 몸 전체를 얼려 버렸다. 새하얀 얼음 속에 있는 테드를 바라보며 세르미나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죽지 않았다고 해도 빙결상태인 이상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이제 확실하게 끝장을 내면 된다.

쩌적. 테드의 몸을 감싸고 있는 얼음이 금이 가면서 순식간에 박살난다.

“어째 검사보다 무식한 것 같다만.”

조금의 타격도 없는 멀쩡한 모습으로 테드가 말을 이었다.

“마음에 드는 방식이다.”

수 천 개의 얼음 화살이 세르미나를 노렸다.

과연 앱솔루트 배리어라고 할까. 에너지 블레이드로 인해 데미지가 누적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수 천 개에 달하는 얼음 화살을 막아 내고 소멸했다. 세르미나의 주변 땅이 그대로 얼어붙었으나 그녀만큼은 무사했다.

“내게 마력량으로 덤비겠다고?”

세르미나가 코웃음 쳤다. 지난 몇 년 동안 바론에게 묶여 온갖 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자연히 마력을 압축해 모아두었다. 그 압축한 마력량만을 따진다면 어지간한 드래곤 보다 더한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그녀의 곁에 수 천 개에 달하는 불꽃 화살이 나타났다. 너무 많아서 단번에 세아 릴 수 없을 정도다. 경악스러운 것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 늘어난다는 것이다. 눈깜짝할 사이에 1만개를 돌파한다.

“아니.”

테드는 그녀를 향해 오른발을 내밀었다. 마력량으로 승부를 봐도 상관없다. 드래곤 하트를 복용한 그날부터 고대 마법 궁그닐 두 세방 정도는 날릴 수 있을 정도니까.

“그럴 시간 없다.”

1만이 넘는 화살이 오로지 테드만을 노리고 쏟아졌다. 그러다 돌연 불꽃 화살이 멈췄다.

말 그대로 날아오는 중간에 멈췄다. 이글거려야 할 불꽃은 멈춰서 조금도 일렁이지 않았다. 아니, 멈춘 것은 1만이 넘는 불꽃 화살뿐만이 아니다. 불어오는 바람에 날리는 먼지가, 흔들리는 풀잎이, 쏟아지는 달빛이, 무수히 흐르는 시간이 멈췄다.

테드가 있는 대로 인상을 찡그렸다. 육체에 압도적인 피로가 덮쳐온다. 코에서 피가 흐르지만 닦을 틈 없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테드가 시간을 멈출 수 있는 시간은 대략 8초.

마법이면서도 마법이 아닌 《시간정지》는 하위 마법처럼 순식간에 캐스팅할 수 있는 대신에 발동하고 나면 엄청난 피로가 몰려온다. 엘릭서도 없는 지금 섣불리 사용할 수 없는 마법이지만, 그녀를 빠르게 처리하기 위해선 이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단점이라고 한다면 시간을 멈춘 상태에서는 마법을 조금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이미 발동된 마법의 경우엔 예외지만.

테드가 에너지 블레이드를 손에 쥐고 달린다.

3초가 경과한 시점에 1만이 넘는 불꽃 화살은 이미 테드의 등뒤에 있었다.

5초가 경과했을 때, 세르미나의 앞에 도달했다.

6초에는 에너지 블레이드를 휘두르기 위해 높이 치켜들었다.

그리고 7초 때, 그녀의 목을 베어내려는 순간 옆에서 하나의 검이 날아와 에너지 블레이드를 스치고 지나간다. 에너지 블레이드가 소멸했다.

8초. 그리고 시간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 작품 후기 ============================

더 월드!

시간이여 멈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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