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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영혼-155화 (155/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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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광기가 춤추는 숲.

테드는 아우티리아 왕성에서 가장 넓고 가장 위엄이 넘치는 곳에서 무릎 꿇고 앉아 있다. 그의 주위에는 십수명에 달하는 하이랜더가 절도 있게 서있었으며, 그의 정면에는 높은 단위에 있는 왕좌에 앉아 있는 한 명의 여인이 있었다.

부드러운 눈 꼬리와 새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는 엘프다. 드레스까지 하얘서 현실감이 떨어질 정도의 금발 그녀의 머리위에는 은빛으로 반짝이는 티아라가 장식하고 있었다.

왕좌에 가는 다리를 붙이고 조신하게 앉아 있는 그녀의 오른손에는 커다란 사파이어가 장식된 하얀 스태프를 쥐고 있으며, 왼손은 꼭 붙인 허벅지위에 내려와 있다.

“저, 에리온 알 아우티리아는 진심으로 테드 크루시안, 그대를 환영해요.”

테드는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잘 알 수 없었다. 하이랜더를 따라 왕성에 들어서자말자 다짜고짜 이곳으로 끌려와 그녀와 대면하게 됐다.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여왕과 만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갑자기 이러면 부담스러울 뿐이다.

“저도 여왕님과 공주님들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여왕의 바로 옆에 모두 제각각의 개성을 가진 4명의 공주들이 줄줄이 서있다.

1공주인 데키나는 상냥한 얼굴로 서있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2공주인 제아는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적의를 내뿜으며 테드를 노려보고 있다.

3공주인 메온은 긴장했는지 딱딱히 굳은 얼굴로 뻣뻣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4공주인 루키나가 환하게 웃으며 순수함을 내보이며 반가움을 표시하고 있다.

“여왕님.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몸에 걸어두었던 정령빙의는 해체 된지 오래다. 현재 테드의 몸을 속박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테드에겐 이상한 일이지만 제아의 말대로 정말로 초대를 받게 된 것 같았다.

“네. 뭔가요?”

싱글거리며 웃고 있다. 1공주인 데키나가 여왕과 가장 닮아 있다고 생각하면서 테드는 침을 꿀꺽 삼켰다.

표리부동. 웃음 속에 본심을 숨기는 자들. 가장 상대하기 껄끄럽다.

“그, 제가 성에 초대된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에요. 테드님.”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인 여왕이 존칭을 붙여 말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테드는 마냥 편하지 많은 않다. 오히려 부담이 느껴진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왕은 테드가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존칭을 붙인다는 사실이다.

“테드님은 아이언 우드의 인정을 받으셨지요. 그 이유라면 충분히 성에 머물 자격이 된답니다.”

인정이란 말에 테드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아이언 엘프 마을 제누에서 밴시로 인해 고통받는 아이언 우드를 구해준 것을 떠올린다.

인정이라고 할까. 테드는 아이언 우드에게서 나뭇가지를 하나 받았다. 마땅히 사용할 곳이 없어 아공간에 처박아두고 잊어 먹고 있던 사실이다.

“그리 대단한 일은 한건 아니라 생각합니다만….”

“테드님이 아니었다면 아이언 우드의 회복이 더욱 느려졌을 거에요. 부족함 없이 대접할테니 부디 편안히 계셔주세요.”

여왕의 입에서는 처음 만났을 때의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공주들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녀의 귀에 들어가지 않은 것일까? 아닐 것이다. 공주가 보고 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감사드립니다.”

테드가 의문을 삼키며 말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 어차피 아우티리아에 오래 머무를 생각은 없고, 대접을 해준다면 받는 게 좋다.

“아, 제아와 루키나가 그대를 몹시 반가워하더군요. 부디 상대해주세요.”

“무, 물론입니다.”

여왕은 테드의 말을 듣고서 자리에서 일어나 데키나와 함께 어딘가로 사라졌다. 하이랜더 중 절반 이상이 그녀와 1공주를 따라 사라졌다. 기가 약해보이는 3공주도 자신의 호위를 거느리고 빠르게 사라졌다.

“너는 운이 좋군.”

“반가워요! 테드님. 10년만인가요!”

제아는 적의를 숨기지 않고, 루키나는 반가움을 담아 다가오며 말했다.

루키나는 금발 단발머리에 밝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여왕의 자식이란 점에서 그 모습이 진심인지 의심이가는 테드였지만, 적어도 공주들 중에선 가장 순수해보였다.

“하하, 반갑습니다. 공주님들.”

대충 인사를 하는 테드의 시선이 은밀하게 제아의 가슴팍에 꽂힌다. 풍만하게 부풀어 올라 있는 커다란 가슴 때문이 아니라, 목에 걸쳐져 있는 화려한 목걸이 때문이다. 각종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는 목걸이에 눈이 간다.

“음? 아아, 알아보는 건가. 이건 아우티리아의 보물 중 하나인 ‘정령의 은혜’다. 제법 안목이 있군.”

제아는 자랑스럽게 허리를 피며 말했다. 제딴에는 목걸이를 강조한 것 같았지만, 목걸이보다는 그 커다란 가슴이 더욱 강조된다.

“언니의 가슴을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다… 테드님도 어쩔 수 없는 남자네요.”

“아, 아뇨. 목걸이를 본겁니다. 불순한 의도는 조금도 없었어요.”

테드가 고개를 획획 내저었다. 목걸이가 주된 목적인건 틀림없었으나, 남자인 테드다. 당연히 가슴에도 시선이 갔다.

“그렇게 당황하실 필요는 없으신데.”

“질리도록 훔쳐 봤을거 아닌가?”

루키나와 제아의 말에 테드는 어색하게 웃었다. 제아의 말투에는 유독 가시가 박혀 있었다.

“나는 어마마마와 달리 너를 믿을 수 없다. 아무리 아이언 우드의 인정을 받았다 하더라도 말이다.”

루키나가 무언가 말하기 전에 테드가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더 없이 단호하고 흔들림 없는 말투로 말했다.

“공주님의 의견은 타당해요. 저를 감시한다고 해도 변명 할 수 없을 정도죠. 그래도 저는 공주님을 사탄교에서 지킬 겁니다.”

“……그 사탄교가 우리를 노리가 뭔지도 설명하지 못하면서 말인가?”

제아의 말에 테드는 슬쩍 웃어보였다. 본래 미래에서 1공주는 살해당하고 2공주는 실종된다.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사탄교가 노리는 것은 제아 공주님이에요. 이렇게 가까이 보니 알겠더라고요.”

제아의 미간이 찌그러진다.

“그놈들이 나를 노린다고?”

“정령의 축복.”

“……!”

제아의 눈동자가 크게 떠진다. 정령의 축복이란 엘프들 중에서도 극소수가 가지고 있는 체질을 말한다. 인간으로 따지자면 마법에 대한 재능으로, 엘프에게는 정령사의 재능이다.

“악마들이 가장 선호하는 게 정령사죠. 다음으로 마법사고요.”

그 이유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조사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사탄교는 중간계를 노리는 악마들이 지배하는 집단이죠. 이제 이유를 알겠나요?”

테드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러나 제아는 고개를 저었다.

“정령의 축복이 흔하지 않다고 해도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놈들이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노릴 필요가 있나?”

“정령의 축복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아직 30살도 되지 않은 공주님께서 최상급 정령을 다루시죠. 정령의 축복 중에서도 최상급이 아닌시가 싶은데…. 어쩌면 공주님의 목걸이를 노리는 것일수도 있고요.”

“……목걸이인가. 과연. 그거라면 이해가 가는군.”

목걸이에 대해 말하자 그녀는 단번에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테드는 그녀가 목걸이에 가지고 있는 가치가 상상이상임을 알 수 있었다. 그 목걸이에 대해 좀더 자세히 물으려는 순간이었다. 테드의 오른손을 루키나가 두손으로 꽉 부여잡았다.

“테드님!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저 엄청 궁금한데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물어온다. 의도적인지 아니면 무의식적인지 남성의 마음을 콕콕 건드렸다.

“물론 모험가로서 모험을 하며 지냈죠. 제 모험담을 들으시려면 밤을 새도 모자랄겁니다. 하하하!”

테드가 호쾌하게 웃었다. 대륙의 온갖 장소를 여행하다보니 자부심이 쌓이고 쌓여 있는 상태였다. 미녀가 자신의 업적이 궁금하다는데 안가르쳐 줄수도 없는 노릇이다. 거기다 자랑도 하고 싶었다.

“제가 오크 왕국에서 오크놈들에게 쫓기다가 얼음마법으로 지형까지 싹다 얼려버린 이야기를 하자면…….”

테드는 묻지도 않은 것부터 시작해서 주절주절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수다중에서도 재미 있는게 여행자랑이다. 특히나 루키나처럼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감탄을 해준다면 더욱더 재밌다.

덤으로 곁에 있던 제아까지 흥미를 내보였다. 그녀들은 공주, 왕도에서 나가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이며 나간다 해도 국외로는 힘들다. 자유로운 여행은 꿈속에서나 가능하다. 그들에게 있어 여행담은 흥미롭기 그지 없다.

테드는 그들에게 자신의 여행을 자랑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여왕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시녀들의 마사지를 받으며 사이나와 연락하고 있었다.

평소 공주를 비롯한 고위 귀족들의 마사지를 전문적으로 해온 그들의 손길을 굉장히 기분 좋았다. 정령력을 이용한 마사지 때문인지 피로도 확실하게 풀려나간다.

“어, 그러니까. 거기에요. 거기. …어우, 좋다.”

가벼운 차림으로 매트에 엎드려 있는 테드는 등을 마사지하는 시녀의 손길에 감탄사를 내뱉으면서도 사이나와 연락하고 있었다.

‘제단이라… 제아 공주를 제물로 악마를 소환하려는 건가. 최상급의 정령의 축복을 가지고 있는 제아 공주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는데.’

악마든 천사든 의식소환에서 제물이 마음에 안 들면 대답도 해주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자신을 놀리는 것이냐며 소환자에게 저주를 내릴 수도 있다.

양이 아닌 질로 따진다면 최상급 정령의 축복을 가지고 있는 그녀라 해도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제물이다.

그러나 한 가지. 악마를 소환하는 자가 사탄교라는 사실이다. 사탄교에는 악마가 있다. 그 악마의 연줄을 이용해 악마를 소환한다면 최소한의 제물로도 충분히 소환할 수 있다. 비록 온전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사이나. 나는 안에서 감시할게. 넌 밖에서 감시해줘.’

알겠습니다. 라는 대답이 곧바로 들려왔다. 내일은 개성의 날, 공주들이 행진을 하는 날이다. 테드는 하이랜더로 위장해 공주들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 생각이다.

그리고 다음날이 찾아왔다.

⁂⁂⁂

개성의 날.

아침 6시부터 15시간 동안 감춰져 있는 아우티리아 왕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사람들이 모이지만, 이번에는 왕위 즉위를 대비해 공주들이 나와서 왕도를 행진한다.

솔직히 말해 테드로서는 반갑지 않은 일이다. 여왕에게도 건의해 이번 행진을 무를 수 없냐고 했을 정도로. 다만, 여왕은 정중히 거절했다.

행진을 막기에는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번 행진은 차기 여왕인 제 1공주인 데키나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한 행진이다.

테드는 여왕의 대답에 그녀가 자신을 확실히 믿지 않고 있음을 알았다. 그렇지 않다면 행진 따위보다 공주들의 목숨을 우선시했을 테니까. 한숨이 나오지만 참는다. 사이가 좋지 않은 딥크스의 황태자를 암살했다고 해도, 지명수배자다. 아이언 우드의 인정을 받았다 해도 완전한 신뢰까지 얻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그렇다 해도 놈들의 뜻대로 되게 할 순 없지.’

그러나 테드의 결심과 달리 이루어진 4시간의 행진은 허무하리만치 간단하게 끝났다. 분명히 개성의 날, 행진 중에 덤벼 올 것이라 예상했는데 습격하지 않음에 안심하면서도 찝찝함을 느꼈다.

그리고 이제 곧 오후 9시, 다시 공간수의 보호아래 왕성은 숨겨진다.

‘미래가 바뀌었나? 아니면 개성의 날에 습격하는게 아닌가?’

가장 좋은 것은 사탄교가 더이상 공주를 노리지 않는 것이다. 그것만 확인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아우티리아를 떠날 수 있다.

그러나 테드의 바람과 달리 습격은 일어났다. 다만, 왕성이 아니라 왕도의 끝부분에서.

먼저 알아차린 것은 왕도의 경계를 맡고 있는 하이랜더다. 그는 하급 바람의 정령인 실프들을 이용해 왕도내를 경계하고 있었다.

“여왕폐하! 습격입니다! 악마가! 왕도를 습격했습니다!”

그가 복도를 뛰어가며 다급하게 외쳤다. 얼마나 큰 목소리인지 저녁식사를 끝마치고 루키나에 의해 강제로 티타임을 가지게 된 테드에게도 들릴 정도다. 루키나의 얼굴이 굳어지고 테드의 표정은 썩어갔다.

“죄송한데 티타임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시녀가 끓어준 따뜻한 홍차를 단숨에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저, 테드님.”

방문을 열고 나가려는 테드를 향해 루키나가 주저하며 말을 걸어왔다.

“…부디 아우티리아를 도와주세요.”

“물론 그러려고 제가 이곳에 있는겁니다.”

씨익 웃으며 방문을 닫았다. 왕성에는 하이랜더들이 포진해있다. 그들이 있는 한 충분히 안전하다.

테드가 복도를 걷는다. 한 걸음, 한 걸음 지날 때 마다 마력이 요동친다.

테드의 앞길에 복잡하면서도 아름다운 푸른색의 마법진이 나타난다. 마법진을 향해 멈추지 않고 걷는다.

‘사이나. 놈들이야.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겠어?’

마법이 아닌 계약의 의한 패스를 이용해 사이나에게 물었다. 사이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해주었다.

‘동쪽 구역에서 거대한 마력이 느껴졌습니다. 지금 그곳으로 움직이는 중입니다.’

좌표를 지정한다.

마법진의 푸른색의 워프게이트가 찌직 거리며 열린다.

본래, 왕도에는 원거리 공간이동 마법을 예방하는 마법이 깔려 있다. 텔레포트 해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고, 워프 게이트도 방해 파장으로 인해 좌표가 흐트러져서 전혀 알 수 없는 곳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러나 테드의 워프게이트는 압도적인 마력을 통해 방패 파장을 무시하며 좌표를 고정시킨다. 어마어마한 마력이 소모되지만 개의치 않았다. 대마도사, 그것도 드래곤 하트를 먹은 대마도사다. 이 정도도 못하면 체면이 안선다.

워프게이트에 발을 들이밀기 직전, 테드는 걸음을 멈췄다.

‘미안한데. 사이나. 그 악마, 혼자서 처리해줘야겠어.’

‘저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망설임 없는 그녀의 대답을 들으며 테드가 미소지었다. 그러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쩌적. 워프게이트를 유지하는 마법진에 금이 간다. 동시에 워프게이트가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마법진의 금은 순식간에 전체로 번져나가고, 미법진이 이내 산산조각나 부서진다.

빛으로 변해 사라지는 마법진을 힐끗 쳐다본 테드는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을 등진 고깔모자를 쓰고 검은색 로브를 걸친 마녀가 허공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로브 사이로 요염한 몸매가 살짝 씩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손을 휘젓자 수 십 개의 창문이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활짝 열린다.

“설마, 그 년의 제자가 여기에 있을 줄 몰랐어. 그리고 그 제자가, 그 정도의 경지에 이룰 줄이야.”

싸늘한 시선이 테드에게 꽂히며 이전과 비교도 되지 않는 적의와 살의를 담은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진짜 짜증나네.”

============================ 작품 후기 ============================

감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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