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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영혼-154화 (154/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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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광기가 춤추는 숲.

테드는 다크 체인에 속박된 녹색의 최상급 정령, 제피로스를 바라본다. 허공에서 튀어난 7개의 검은 쇠사슬에 팔, 다리, 몸통, 머리, 검 할 것 없이 칭칭 감고 있다. 중간계에 모습을 나타난 정령의 신체는 소환자의 마나로 이루어져 있다.

마나를 봉인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다크 체인은 정령에게 있어 상극이나 다름없다.

마나가 봉인되었기에 완력으로 다크 체인을 부수는 것도 불가능하다.

제피로스는 움직여 보려하지만 움찔움찔 거리는 게 전부였다. 그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던 테드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제피로스에게 한 질문이 아니다. 제피로스와 이어져 있는 정령사에게 물은 것이다.

본래 정령은 정령사를 제외한 생물들에게 말을 하지 않는다. 궁금증도 느껴 말을 걸지 않는다. 그건 최상급 정령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정령이 알려주었다. 너는 무슨 목적으로 보고 있었지?]

테드는 고민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적당한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하면 가장 좋겠지만, 거짓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중간하게 속이려 들면 오히려 더 큰 화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나마 다행히도 제피로스의 정령사, 2공주 제아는 하이랜더를 부르지 않은 모양이다. 하이랜더를 이곳으로 불렀다면 전투밖에 없었다. 아니면 하이랜더가 올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이거나.

“감시하고 있었어요. 공주님들을 위해서.”

[……우리들을 위해서? 환상으로 모습까지 숨기면서 까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묻는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테드 자신이라도 믿을 수 없을 테니까.

“공주님들에게 해를 끼치려는 건 멩세코 아니에요.”

이왕이렇게 된거 진실을 말하기로 한다. 자신이 지켜주는 것보다 그녀가 스스로의 위험성을 알고 조심하는 쪽이 훨씬 안정성있다. 물론 그녀가 자신의 말을 믿을 경우에 한하지만.

[그 맹세를 내가 믿으리라 생각하나?]

“믿지 못하시겠죠. 제가 누군지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니까요. 전부 설명 해줄테니 진정해요.”

제피로스는 얼굴도, 움직임도, 목소리에도 감정이 묻어 나오지 않기에 테드로선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어이 없는 일에 당황하고 있을까. 분노를 활활 태우고 있을까.

[……왕도의 어디에든 정령이 있다. 허튼 생각을 하는 것이라면 관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한… 우리들을 위해서라는 이유가 시덥잖은 것이라면…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1공주인 데키나에 비해 알려진 것이 별로 없는 2공주는 테드가 생각했던 것보다 냉철했다.

“사탄교라고 아시나요?”

모를 리가 없다. 모험가 길드는 시간에 지남에 따라 은근슬쩍 사탄교에 대한 정보를 아무것도 모르던 시민들에게도 풀었으니까. 하물며 공주에 위치한 그녀다. 모르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알고 있다.]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네요.”

테드는 자신의 몸에 걸려 있는 환상 마법을 해제했다. 물론 정령시(精靈視)를 가지고 있는 그녀는 보는 순간 본모습을 꿰뚫어 보았을 테지만.

“제 이름은 테드 크루시안. 탐… 아니, 모험가죠.”

테드가 바지주머니에 양손을 집어 넣으며 시니컬하게 웃었다. 공주 앞에서 무례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 공주는 무례함따위에 관심도 없었다.

[테드 크루시안…. 과연. 사탄교를 처음 발견하자인가. 그러나 더더욱 믿을 수 없군.]

제아의 의지를 대변하고 있는 제피로스의 목소리가 더더욱 높아진다. 그녀가 가진 적의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네놈은 지명수배자가 아닌가. 황태자를 암살했다지?]

테드가 슬그머니 주머니에서 양손을 뺐다. 그놈의 지명수배가 문제다.

[나를, 아니 우리를 암살하기 위해서 온 것 일수도 있지.]

“그게 그러니까… 사탄교 때문에….”

[왕도는 정령이 가장 충만한 곳이다. 사탄교가 숨어 들 수 있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사탄교는 대륙 전체의 눈을 피해 숨어있어요. 악마의 힘이라면 충분히 정령의 눈을 속이는게 가능하죠.”

[……하, 그건 그렇다 치지. 하지만 사탄교가 왕도내에 있다는 이유만으로는 네가 우리를 감시하는 이유의 대답이 되진 않는다.]

“사탄교가 공주님들을 노리고 있어요.”

차분하게 그러나 진실성을 담아 말했다. 믿고 안 믿고는 그녀의 자유지만, 그녀로선 얼토당토 없다며 마냥 흘러 들을 수는 없다.

‘……뭐, 이건 확신할 수 없는 것이지만.’

사탄교의 흔적을 발견하고 미래를 알고 있는 테드가 그냥 연관지었을 뿐이지, 실제로 사탄교가 공주들을 노리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제아가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탄교가 우리를 노린다? 왜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조금의 거짓도 없는 사실을 말했다.

공간에 침묵이 찾아왔다. 테드는 제아가 대답하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제아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반응 없이 서있었다.

이윽고 제피로스가 목소리를 냈다. 날카롭던 고음은 약간이지만 무뎌져 있었다.

[루키나에게 감사해라. 루키나가 아니었다면 네놈의 말은 듣지도 않았을 것이다.]

루키나 알 아우티리아. 아이언 엘프들이 거주하는 마을인 제누에서 만난 엘프 4공주.

“네. 루키나님에게 감사하죠!”

[그렇다고 해도 네놈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성으로 초대해주지. 하이랜더를 보낼 테니 얌전히 오도록.]

루키나가 자신에 대해 어떤 말을 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덕분에 큰사고로 번지지 않았다. 테드는 잘 모르겠지만 아우티리아와 원수 관계인 마족 제국 딥크스의 황태자를 암살한 것도 어느 정도 한몫하고 있다.

그리고.

“걱정되나요?”

옅은 미소를 지으며 테드가 물었다. 약간 기다렸으나 대답은 들러 오지 않았다.

“걱정마세요. 사탄교를 막기 위해 제가 왕도에 온거니까요. 말했잖아요. 공주님들을 위해서라고.”

[……설령 네놈의 말을 사실이라 하더라도, 네놈을 의지하는 않는다.]

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거북한 침묵이 다시금 찾아와 그곳을 지배했다.

할 말이 없는 테드가 시장에 있는 사이나에게 지시를 내리고 멀뚱멀뚱 제피로스를 바라보고만 있을 때, 그의 방안으로 10명의 엘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몇 명은 문을 통해, 몇 명은 창문을 통해 순식간에 들이 닥쳤다.

“테드 크루시안인가. 공주님의 명령이다. 따라와라.”

제 1공주인 데키나를 호위하던 다크 엘프가 묵직한 저음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사슬에 묶여 있는 제피로스를 힐끔 보고서 테드의 어깨를 꽉 잡았다.

정령 빙의(Spirit Enchant). 물의 하급 정령 운디네가 테드의 몸속으로 들어온다. 물론 거부하려면 거부할 수 있다. 그러나 제압의 과정임을 알고 있는 테드는 담담히 받아 들였다. 그러면서도 다크 엘프의 실력에 감탄한다. 정령 빙의를 자신이 아닌 타인의 몸에 강제로 발현하다니. 보통의 실력이다. 마법사로 따지면 마도사라 할 수 있는 실력이다.

“몸안의 피가 역류하는 것을 보기 싫다면 조용히 따라와라.”

그러나 실상 테드에게 있어선 무용지물인 방법이다. 마법을 사용할 것도 없이 마력을 약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벗어날 수 있다.

“그러죠 뭐.”

테드가 간단히 대답하고 다크 엘프가 이끄는 대로 문밖으로 나가려는 찰나,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제아가 말했다.

[잠깐]

하이랜더들이 일제히 멈춘다. 모두의 시선이 정령에게 향했다. 그들도 알고 있다. 제피로스가 제아가 소환한 정령임을.

[가기 전에 이 사슬을 풀어라. 어떤 능력인지 역소환도 되지 않는군.]

“아!”

뒤늦게 테드가 다크 체인을 풀자 제피로스의 녹색 몸이 바람으로 화해 사라졌다.

⁂ ⁂ ⁂

“……어라? 사이나님. 테드님은 없으신가요?”

사이나가 열어주는 문을 통해 들어온 애쉬는 두 눈을 깜빡이며 주위를 살폈다. 어디에도 테드는 보이지 않았다.

“주인님은 지금 왕성에 계십니다.”

사이나의 대답에 애쉬의 눈썹이 아주 약간 찡그러졌다. 갑자기 왕성?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인가.

“위험한…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눈앞의 사이가 가만히 있다. 위험한 상황이라면 여유롭게 있을 리가 없다. 자신이 모르는 무슨 작전이라도 있는 것인가.

“사이나님. 혹시 테드님과 연락이 가능한가요?”

“네. 가능합니다.”

망설임 없는 대답이 들어왔다. 그것도 마법을 통한 연락이 아니라, 테드의 악마 소환 스킬의 숙련도가 상승함에 따라 자연스레 어느 정도 떨어져 있어도 마음속으로 대화하는게 가능하다.

애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테드님은 무슨 일로… 아니, 그건 둘째 치고. 현재 테드님은 뭐하고 있나요?”

그 질문을 하는 순간이었다. 애쉬는 사이나에게서 묘한 위압감을 느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사이나는 평소와 같이 무표정한 얼굴이다. 뛰어난 관찰력으로도 달라진 점을 찾지 못했다.

“지금은 엘프 시녀들에게 마사지를 받고 계시는군요.”

“……끌러가거나 잠입 같은 게 아닌가요?”

부럽다는 말을 꾹 눌러 담으며 애쉬가 물었다.

“2공주의 초대를 받았다고 합니다. 호의호식 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군요.”

사이나의 말에 애쉬는 그녀가 모종의 방법으로 실시간으로 테드에게 말해주고 있음을 알았다.

애쉬의 입장에선 다행인 일이었다. 테드에게 보고를 해야 하니까.

“저, 사탄교에 대한 정보 말인데요… 죄송해요. 찾지 못했어요. 숲을 뒤졌는데 본거지라 불릴 수 있는 곳은 없었어요.”

발견한 숨겨져 있는 던전의 안까지 확인했다. 그러나 사탄교와 관련된 것은 발견하지 못했다.

“주인님이 특이한 물건이나 장소같은 건 없었냐고 물으십니다.”

“특이한 물건은 발견하지 못했어요. 장소라면… 나무 동굴이 있었죠. 나무의 뿌리가 형성하고 있는 던전이에요. 나오는 몬스터는 갈색 코볼트로 조용히 살고 있더군요.”

하이랜더 한 명만 파견해도 정리가 가능한 던전이다. 숲에 출입이 거의 없고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다보니 아직 발견되지 않은 던전이다.

애쉬는 주절주절 숲에서 봤던 것을 꺼내기 시작했다. 썩은 나무에서 나오는 맑은 물이라던가, 바위속에 피어난 꽃 등 인상에 남는 것들을 위주로 말했다.

“아, 서쪽 숲 끝 부분에서 제단 같은 곳을 발견했어요.”

“주인님이 자세히 말해보라는군요.”

“사실 제단인지는 확실하지 않은데. 작은 바위들이 모여 있는 모양새가 무언가 꼭 제단같더 라고요. 널찍한 돌과 주위에 세워져 있는 4개의 돌은 상당히 인위적이었죠. 혹시 몰라 조사는 해봤는데 사탄교는커녕 사람의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어요.”

청산유수처럼 이어지던 사이나의 말이 멈추었다. 그녀의 시선은 애쉬에게 향해 있었지만, 의식은 전혀 다른 곳에 가있었다.

“그 제단이 언제부터 있었습니까?”

“……정확한 시기는 정보가 부족해 알 수 없어요. 제가 대충 짐작하기는… 적어도 3개월 전부터는 있었을 거에요. 아니, 쌓여 있던 먼지 등으로 보자면 훨씬 오래전부터 일지도.”

“사탄교의 소행일거라고 주인님이 단언합니다.”

애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쉽게 확신하지 못하는 애쉬는 명확한 이유와 근거가 필요했다.

“확실히 제단은 특이하긴 하지만 그건 어떤 할 일 없는 엘프가 해놓은 걸지도 모르잖아요?”

“제단의 목적은 의식. 그리고 의식에 적합한 제단에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우선은 제단의 모양. 누구나가 제단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으면 상관없습니다. 두 번째로 시간. 제단에 따라 다릅니다만, 시간이 오랜된 것일수록 좋습니다. 그리고 제물.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합니다. 제물이 좋고, 제물을 바칠 상대와 확실한 연결고리가 있다면 제단은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테드님이 생각하시는 의식의 목적은 뭔가요?”

대충 짐작을 하면서도 애쉬가 물었다.

“악마소환. 사탄교에는 악마도 있습니다. 악마가 악마를 소환하는 것이니 충분히 조건에 맞는 제물만 있다면 고등의 마법진 같은건 필요 없이 소환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제물이란건…?”

“제아 알 아우티리아. 현 2공주이자 정령의 축복을 한 몸에 받은 여인입니다.”

무표정한 사이나를 바라보며 애쉬는 차분함을 가장하며 안경을 매만졌다.

“사탄교. 그것들 자살도 하나요?”

아우티리아 왕도는 이번 개성의 날을 맞이해 최대의 경계령을 발동한다. 수 천명이 넘는 병사들이 경계는 서는 것은 물론이고 하이랜더의 절반 이상이 모여든다. 이번 개성의 날에 공주들이 행진을 하기 때문이다. 펠릭스로 따지자면 12집행관 중 절반 이상이 이 왕도에 모여 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왕도에 가득차 있는 정령들까지. 왕도에 잠입은 어찌저찌 하더라도 습격은 미친 짓이다.

“원래 미친놈 집단이라고 주인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미쳤는데요.”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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