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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영혼-153화 (153/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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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광기가 춤추는 숲.

아우티리아의 왕도로 이어지는 문지기는 근래 들어 피곤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10년 이상 일한 그도 ‘개성의 날’ 시즌만 되면 몰아치는 여행객들 덕분에 쉴 틈 없이 업무를 봐야했기 때문이다. 그저 입구를 지키는 일도 편하지 않다. 수 백, 수 천 명이 왔다 갔다 하는 입구에서 불순분자가 없는지 확인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가 질 무렵 다음 문지기 조와 교대하기 직전에 왕도로 들어서려는 한 남자를 봤다. 눈을 마주치는 순간 이유를 알 수 없는 소름이 돋았다. 그저 눈을 마주쳤는데 오싹해지는 느낌.

지명 수배자는 한 명도 빠짐없이 꿰뚫고 있는 문지기는 혹시나 싶어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머리카락이 모조리 밀어 스킨 헤드를 하고 있는 그는 녹색의 눈동자를 하고 있으며 입가에는 남을 깔보는 듯한 일그러진 웃음이 걸려 있다. 가죽바지와 가죽 재킷을 걸친 그는 주머니 양손을 찔러 넣고서 천천히 걷고 있다.

그의 이마에 갈라져 있는 I자 모양의 틈은 레안족의 특징이다.

남자의 왼쪽 옆에는 검은색 망토를 쓰고 고깔모자를 쓴 미녀가, 오른편에는 여행가들이 자주 입는 흔한 로브를 쓰고 있다.

저녁이 되어서도 입구는 모여드는 인파로 인해 복잡하기 그지없지만 어째서인지 그들의 주위만큼은 한산했다. 아니, 문지기는 대충 알고 있다. 중앙에 있는 스킨헤드의 남자가 내뿜는 위험한 분위기가 사람들을 물리고 있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온다. 문지기는 오른손에 쥐고 있는 창을 꽉 쥐었다.

“후하하하. 당신이 그 유명한 아우티리아의 문지기 씨? 고생이 많네!”

서슴지 않고 다가온 남자는 웃으면서 말을 걸어왔다.

“……나를 알고 있나?”

“그럴 리가. 나는 여기에 처음 온다고?”

그가 문지기의 어깨를 탁탁 두드린다. 단단한 철판이 캉캉 소리를 낸다. 문지기는 그 무례한 행동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분노보다는 오히려 긴장이 되었다. 될 수 있으면 빨리 떨어지고 싶었다.

“……신분증은 가지고 있겠지?”

“물론이야. 여기에 오는데 안 가지고 오는 사람도 있어?”

간혹 있었다. 이곳까지 오는 도중에 신분증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그럴 경우 처리가 복잡해지기 때문에 상당히 귀찮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신분증을 문지기에 내보였다.

바론 크로우. A등급의 용병.

문제 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A등급의 용병이면 귀족과 맞먹을 정도로 신분은 확실하다.

“……따라와라. 서류를 작성해야 한다.”

나머지 일행들의 신분증까지 확인한 문지기는 바론 일행들을 데리고 입구 한 편에 마련된 방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서류를 나눠주고 작성하게 한다.

기본적인 인적사항부터 방문한 목적까지 소소하다면 소소한 것을 기록하게 한다. 빠르게 쓴다면 1분도 걸리지 않는 간단한 서류다.

그리고 바론은 30초 만에 서류를 내밀었다.

“다 썼어. 이제 왕도 안으로 들어가도 돼?”

문지기가 바론의 서류를 받아 들고서 한 차례 훑었다. 짧은 시간 만에 작성한 것처럼 서류에 적은 글은 굉장히 단답형이다.

“방문 목적이 엘프 왕녀인건 뭐지?”

날카로운 눈으로 바론을 노려보며 그가 물었다. 날카로운 창의 끝이 바론을 향한다. 대답 여하에 따라선 곧바로 찌를 것이다.

“아, 그거? 사람들이 말이야. 아우티리아의 왕녀가 절세미녀라고 칭송하지 뭐야. 궁금해서 찾아 왔어. 이번 개성의 날 때 볼 수 있잖아? 그러니 이 눈으로 확인해보려고.”

바론이 자신의 이마를 가리켰다. 소리 소문 없이 이마의 3번째 눈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문지기의 몸에 힘이 풀린다. 빳빳하던 창이 축 늘어지고 반짝이던 동공이 썩은 것 마냥 빛을 잃었다.

S랭크로 각성한 3번째 눈의 능력. 최면의 효과다. 최면이라고 해도 약한 수준이라 어느 정도 정신 수련이 완료된 자에겐 신경을 툭툭 건드리는 것 이상밖에 되지 않는다. 허나 문지기는 기껏해야 잘 훈련된 병사 수준이다. 저항할 수 없다.

만능은 아니다. 최면으로 조작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5일 정도가 전부다.

“왜 처음부터 그걸 쓰지 않았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2명 중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물었다. 목소리에는 못마땅함이 묻어 나왔다.

“이 능력을 쓰기 위해선 한 가지 조건이 있거든.”

“조건?”

바론이 문지기의 어깨에 팔을 둘러 몸의 무게를 기댄다. 문지기의 몸이 비틀거렸으나 쓰러지지 않았다.

“내가 쓰고 싶을 때 발동한다는 조건이지!”

“…….”

후하하하 웃는 바론을 싸늘하게 쳐다본 남자는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와 함께 다니며 알게 된 것은 하나, 상대를 아예 하지 않는 게 편하다는 것이다.

바론이 문지기를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여기에서 있었던 일은 전부 잊어버려. 그리고… 혹시 가족 있어?”

“네. 어머님이 한 분 계십니다.”

바론의 일행들은 관심없다는 듯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나간 것은 고깔모자를 쓰고 있는 여성이었다.

“그래? 3일 뒤에 강간하고 목매달아 자살해. 그럼 수고.”

“네.”

바론이 문지기의 어깨를 다독여 준 뒤 자신과 일행들의 서류를 챙기기 시작했다.

성실하게 서류를 작성한 인물은 바론 뿐이었다. 나머지는 단 한 명도 작성하지 않았다. 빈 공란의 서류를 바라보던 바론의 입가에 짙은 웃음이 떠오른다. 이왕이니 장난 좀 칠까? 고민하고 있을 때,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하고 있지? 빨리 움직여라.”

산통이 깨졌다. 살짝 고개를 저으며 바론이 밖으로 움직였다.

“근데 리자드맨이 그렇게 엘프 고기를 좋아한다며? 살살 녹는 스테이크 맛이라던데. 한 번 먹어볼래?”

“……왕도 내에서 쓸데없는 짓은 관둬라. 계획을 망친다.”

“이왕 맛집에 온 거 조금쯤은 즐겨도 되잖아. 재미없기는.”

바론이 작게 투덜거리며 아우티리아 왕도의 안으로 들어갔다.

⁂ ⁂ ⁂

테드가 아우티리아에 온 목적은 크게 말하자면 2가지라 할 수 있다.

하나는 사탄교. 애쉬가 전해준 정보에 의하면 아우티리아 왕도 근처에서 사탄교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단지, 사탄교가 일부러 흘린 것인지 아니면 실수로 흘린 흔적인지는 알 수 없다. 교활하게 숨어 있는 그들은 보자면 전자일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아우티리아의 왕도는 정령이 넘쳐나는 곳이다 보니 사탄교가 왕도는 당연히 불가능하고 그 근처 숲에 숨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에도 아우티리아에 온 것은 현재 발견된 사탄교의 흔적이 여기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사탄교는 대놓고 활동하지 않기 때문에 뭘 하는지 몰라 오히려 불안하다. 될 수 있으면 여기서 끝장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다른 하나는 엘프 왕녀 살해, 실종 사건이다. 본래의 일이라면 이 시기에 일어나는 일이지만 확실하지 않다. 테드는 사건이 일어난 정확한 날짜를 모른다. 다만, 개성의 날을 의심하고 있고 어쩌면 사탄교의 행동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 듯 떠올랐다.

그렇지 않다면 시기가 그렇게 절묘할 수 없으니까.

무엇보다 10년전에 테드는 엘프 왕녀를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엘프 마을 제누에서 만난 제 4공주, 루키나 알 아우티리아. 사건으로 인해 여왕이 되는 인물.

그녀가 여왕이 되면 아우티리아의 왕국은 더욱 좋아진다. 그녀가 괜히 성왕으로 불린 게 아니니까.

루키나가 여왕이 되기 위해선 오히려 1공주와 죽고 2공주가 실종 되어주는 쪽이 좋다.

그러나 만약 정말로 사건의 범인이 사탄교라면? 그것들은 이득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더군다나 대륙의 공적으로서 쫓기고 있는 지금. 위험을 무릎쓰고 움직일 정도면 상당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감시하는 것도 지겨운데. 역시 개성의 날에 움직이려나?”

반투명한 커다란 나무. 공간수의 아래에는 숨겨진 성을 바라보며 테드가 중얼거렸다. 보통의 사람은 숨겨져 있는 성을 보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지만 테드는 ‘신안’을 이용하자 성을 보는 것이 가능했다. 투시는 물론이고 천리안의 기능까지 가지고 있는 눈이다 보니 호텔에서 감시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다만 신안을 계속해서 발동하고 있으면 정신적으로 상당히 피곤해진다.

“내일이면 개성의 날인데. 도움이 될 만한건 전혀 못 찾았단 말이지.”

테드가 중얼거리면서도 부지런히 눈동자를 움직였다.

숨겨져 있는 왕성은 백색의 아름다운 성이다. 공간수의 보호를 받고 있기에 특별한 방법 없이는 들어가는 게 불가능한 성은 평화롭기 그지 없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1공주와 2공주는 무사했다. 아니, 무사할 수 밖에 없다.

“움직인다면 개성의 날 밖에 없겠지. 공간수의 보호가 사라지는 날이니까. 거기다….”

이번해의 가을쯤에 1공주의 왕위 즉위식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이번 개성의 날에 원활한 즉위를 위한 홍보 차원으로 곻주들이 백성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 행진을 한다.

테드의 시야에 복도를 조신하게 걷고 있는 금발 머리의 여성이 들어온다. 하얀 드레스를 입고 늘씬한 체구의 그녀가 바로 1공주인 데키나 알 아우티리아다.

약간 처진 에멜라드 색 눈에는 총기가 가득하고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를 달고 있다. 절세미녀라는 말이 전혀 과장된 게 아니다.

“근데 사이나 보단 못하네.”

히죽 웃으며 테드가 말하고서 근처로 시선을 옮긴다. 하얀색 예복을 입고서 허리에 검을 찬 구릿빛 피부의 다크 엘프가 보인다.

하이랜더다. 여왕에게서 직접 왕국 최고의 실력자들이라 인정받은 그들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할 정도의 실력자다. 보고 있는 테드는 그가 움직이는 모습만 보고서도 알 수 있었다.

잠시 뒤 1공주 데키나는 복도에서 누군가 마주치며 상냥한 웃음을 짓는다.

하이랜더의 호위도 없이 움직이는 여인, 데키나와 달리 짧은 은발이면서 냉혹한 인상을 가진 엘프였다.

2공주인 제아 알 아우티리아.

테드의 시선이 그녀의 가슴팍으로 향한다. 풍만하다 못해 거대한 유방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걸치고 있는 온갖 보석을 박아 놓은 화려한 목걸이 때문이다. 과하게 치장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엘프들을 생각해보면 지나칠 정도로 화려하다.

“이상하게 눈이 간단 말이지….”

테드의 시선을 잡아끈다. 그것만으로도 범상치 않은 물건인건 확실하다. 너무 멀리 있어 감정할 수는 없지만, 대충 아티펙트임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저런 화려한 물건을 걸치지 않을 테니까.

잘그락.

공주 두 명은 복도에 만나 간단히 이야기를 하고 헤어졌다. 테드의 시선은 1공주가 아니라 2공주에게 향했다. 1공주는 여왕 즉위로 인해 여러 가지로 바쁜 반면에 2공주는 널널하다. 대부분의 시간을 서재 등에서 보낸다.

“사생활 침해지만 어쩔 수 없어.”

하루 종일 감시 하는 것이 아니다. 비율로 따지자면 1시간에 3분 정도다. 무차별 적으로 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공주들의 속살 등을 보게 되지만 조금의 사심도 없다고 테드는 주장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들은 사이나보다 못하다.

테드가 보고 있던 2공주 재아가 돌연 어느 한 지점을 응시한다. 테드가 보고 있는 방향이었다. 테드는 눈을 감고 신안을 해제했다. 약간의 피로가 몰려온다.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가?]

바람이 비명을 지르는 듯 한 갈라진 고음의 목소리와 함께 잘그락 거리는 쇠사슬의 소리가 울린다. 테드는 자신의 목 바로 옆에 있는 바람이 담긴 검을 슬쩍 피해 천천히 목을 돌려 뒤를 쳐다봤다.

녹색의 기사가 검은 사슬에 결박되어 있었다.

선명한 녹색의 갑옷과 선에는 날카로운 바람이 서려 있다. 투구를 쓴 머리는 내부가 보이지 않으나, 테드는 내부가 바람으로 채워져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바람의 최상급 정령 제피로스.

“되는 일이 없네.”

테드의 중얼거림에는 약간의 짜증이 담겨 있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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