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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대마도사의 시작.
올린버크는 달리는 마차 안에서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는 시골이란 말이 부족할 정도로 문명과 떨어진 곳에서 생활했다. 근처에 작은 마을이 있긴 했지만, 하녀와 병사들 때문에 마을에 나간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한 달 전에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가 자신을 불렀다. 후계자로 자신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올린버크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다. 그저 그렇구나하고 넘어갔다. 조금의 흥분도 없었다.
올린버크는 어렸을 적부터 이상할 정도로 감정이란 걸 느끼지 못했다.
슬픔이 없는 대신 즐거움도 없었다.
분노가 없는 대신 사랑도 없었다.
그저 유모가 시키는 대로 살아왔다. 잘 시간이 되면 잤고, 일어날 시간이면 일어났다. 오전에는 책을 읽고 오후에는 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그의 선생들은 모두 천재라고 침을 튀기며 칭찬했지만, 정작 올린버크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어렸을 적부터 돌봐온 유모만이 기분 좋은 듯 웃을 뿐이었다.
어린 시절 전문서적이 아니라 소설을 읽고서 자신의 이상함을 깨달았다. 아무리 생각
해도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과 자신이 너무나도 다른 것이다.
올린버크는 지나가는 시녀 한 명을 강제로 범했다. 외모도 고만고만한 시녀였다. 범한 이유는 단순히 성관계에서 쾌락을 느낀다는 구절을 책에서 봤기 때문이다. 그 쾌락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시녀를 범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별로였다. 단지 번식을 위한 행위로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올린버크는 사랑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랑하면서도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속의 주인공을 사랑하는 이를 잃고 난 뒤에서야 사랑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자신도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자신이 알게 모르게 사랑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은 어렸을 적부터 자신을 보살펴준 유모였다. 그래서 그는 유모를 죽였다. 자고 있는 유모의 심장에 식칼을 박았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유모를 죽인 죄의 벌은 없었다. 그를 벌할 수 있는 인물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올린버크는 자신이 잘못됐는지 아니면 책이 잘못됐는지 고민했었다. 그리고 자신이 잘못됐음으로 결론을 내렸다. 문제가 있는 책을 저택 안에 들여놓지 않았을 테니 책과 다른 자신이 잘못 된 것이다.
“지루하십니까?”
올린버크는 창에 놓은 시선을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돌렸다. 기사의 예복
을 입은 마족이 있었다. 이마에 3cm 정도의 뿔 2개가 돋아나 있는 그는 현 황제의 측근이자 딥크스의 무력을 대표하는 ‘십이각(十二角)’의 일원인 모리스다. 그를 세간에서 다섯 번째 뿔, 천살의 모리스라고도 불렸다.
짧은 갈색머리를 가진 중년 기사, 모리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지루 하구나.”
시간이 잘 가지 않는 것이 지루함이라고 한다면, 그는 분명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다.
“폐하가 어떤 인물이신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아바마마에 관해선 알고 있느라.”
“태자 전하계선 폐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태자 전하의 생각이 궁금하군요.”
올린버크는 모리스를 한차례 바라봤다. 아주 약간의 시간동안 고민한 뒤 가차 없이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는 멍청하다.”
“……예?”
“멍청하다 했노라. 아바마마는 즉위한 몇 십 년 동안 평화를 고집해왔다. 특별한 업적을 세운 것도 아니며, 치명적인 실책도 하지 않았다.”
예상외의 반응에 모리스는 식은땀을 흘렸다.
“폐하는 성군이십니다.”
“폭군이냐, 성군이냐 묻는 다면 성군이겠지. 그러나 모리스여. 정말로 아바마마를, 무소불위의 힘을 가지고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그를 성군이라고 생각하는가?”
“…….”
모리스는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섣불리 대답하면 그건 황제에 대한 모욕이다. 황태자 올린버크와 자신은 신분과 입장이 달랐다.
“그럼… 태자 전하께서는 어떤 황제가 되시려는 것입니까?”
“황제는 나라의 주인이다. 모든 것의 위에 서는 대신 나라를 발전시킬 의무가 있느라.”
“……우매한 저로선 그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저는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올린버크의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공허한 눈이 모리스의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모리스는 옷 아래에 숨겨진 피부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너는 운이 좋구나.”
모리스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으려 할 때, 올린버크가 기다려주지 않고 모리스가 만일을 대비해 무릎에 올려둔 장검을 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의 평화를 유지하고 싶다면 여기서 그 검으로 나를 죽여라. 황궁에는 유능한 누이가 있으니 제국은 문제없이 돌아갈 것이다. 반대로 딥크스 제국이 대륙 최고라는 수식어가 붙기를 원한다면 조용히 지금 들은 것을 잊어라.”
“…….”
모리스가 떨리는 손으로 검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이 검을 뽑아 올린버크의 목을 베어내는데 3초도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모리스는 검을 뽑지 못했다.
모리스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태자 전하의 뜻을 미리 알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그러냐.”
올린버크가 다시 시선을 창가로 이동시켰다.
모리스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심장은 수십 초가 지나서야 겨우 본래의 페이스를 찾았다.
마차 밖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장님! 앞에 누군가가 길목에 서있습니다. 이쪽을 똑바로 보고 있는데… 움직일 기색이 없습니다.”
모리스가 올린버크를 살폈다. 여전히 창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관심 없어 보였다.
“이 영관스러운 날에 피를 보고 싶진 않군. 조용히 타일러서 보내라.”
“신기하군.”
올린버크의 말에 모리스가 자연스레 창가에 시선을 던졌다. 투명한 유리 너머로 새까맣게 물든 하늘이 보였다. 별이 총총히 박혀 있는 검은 하늘은 지금 시간대에선 절대로 볼 수 없는 밤하늘이었다.
이상형태의 얼굴을 굳혔다. 마차를 몰고 있는 마부도 당황한 것인지 마차의 속도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당황한 마부가 마차를 세웄다.
“대장님 습격입니다!”
부하의 말에 모리스가 검 집에서 검을 뽑으려던 찰나였다.
마차의 문이 커다란 소리와 함께 덜컥 열렸다. 문의 안으로 얼굴을 내민 것은 갈색 머리의 소년이었다.
모리스는 검집에서 검을 빼냈다. 소년은 루비처럼 빛나는 붉은색의 눈동자로 올린버크의 얼굴을 확인한 뒤 입을 열었다.
“지옥에 갈 시간이다. 《헬 플레임(Hell Flame》.”
시뻘건 불꽃이 허공에서 나타나 순식간에 마차에 번졌다. 모리스는 적을 베는 대신 마차의 벽에 검기를 날렸다. 그리고 올린버크의 몸을 한 손으로 끌어 안고 벽밖으로 나갔다.
밖에선 기사같은 외형의 골렘을 상대하는 부하들이 보였다.
모리스는 황급히 몸에 달라붙은 불꽃은 없애러 올린버크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올린버크의 몸은 약간은 그을림을 제외하면 아주 멀쩡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급한 것은 오른쪽 다리가 활활 타오르고 있는 모리스였다.
“나는 됐으니, 네 몸부터 살피거라.”
마력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지만, 생각보다 불의 화력이 너무 강해서 오랫동안 버티는 것은 불가능했다. 불을 끄려고 이리저리 발을 움직였다. 불은 꺼지지 않았다. 결국 마력을 일시적으로 폭발시켜 불을 꺼버린 모리스는 바람이 찢어지는 소리를 향해 검을 들어 올렸다. 하얀색 세검이 모리스의 검과 부딪혔다. 모리스가 아주 야간 뒤로 밀려났다. 세검에 담긴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누구냐 네놈들은.”
자신의 검을 맞대고 있는 세검의 주인, 어디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검은색 머리의 여인을 향해 물었다. 입고 있는 옷도 평범하지만 어딘가 부자연스러움이 느껴졌다.
환상마법으로 자신의 본모습을 숨긴 사이나는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목소리는 환상마법으로 숨길 수 없기 때문이다.
뒤로 물러나는 것으로 맞댄 검을 떼어낸 사이나는 다시 그를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모리스는 그녀의 검을 막아내면서 올린버크가 있던 곳을 확인했다.
어느새 멀어져 있는 거리에 있는 올린버크는 소년의 주먹을 손쉽게 피하고 있었다. 아니, 주먹뿐만이 아니라 파이어 볼, 아이스 스피어, 윈드 커터 등의 마법까지 완벽하게 회파하고 있었다.
뒤늦게 모리스는 올린버크에 대한 정보를 하나 떠올렸다. 젊은 나이에 마도사의 경지를 이룩한 메피아보다 더 뛰어난, 황족 역사상 최고라 평가받는 재능을 그가 보유했다는 정보를.
저 유려한 움직임을 보자면 지금의 자신과 거의 맞먹을 정도다.
“태자 전하! 금방 처리하고 가겠습니다! 위험하면 절 부르십시오!”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모리스는 그가 분명히 들었음을 짐작하고서 눈앞의 여자
를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천살(千殺)이라는 그의 별명답게 살기가 짙은 검술이었다. 검의 초식 하나 하나가 치명적인 급소를 노리는, 오로지 상대의 생명을 빼앗기 위한 무시무시한 검술.
그러나 상대는 눈하나 까딱 않고 모리스의 검을 피하거나 세검으로 막아냈다. 일반적으로 세검으로 모리스의 장검을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리스의 검은 장검주제에 대검 이상으로 무겁고 힘을 중시한 검술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마력까지 들어가 있는 그의 검은 얇은 세검을 간단히 부서 버린다. 그런데 푸르스름한 기운을 띄고 있는 세검은 금조차 가지 않는다.
“적이지만 훌륭하다. 나는 다섯 번째 뿔, 천살의 모리스다. 너의 이름을 알고 싶
군.”
“…….”
검을 맞댄 순간 모리스가 사이나에게 말했다. 그러나 사이나는 입을 꾹 다물고 반응하지 않았다. 모리스가 혀를 차면서 세검을 쳐낼 생각으로 검에 힘을 넣는 순간이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사이나는 모리스의 이상사태를 알고 있었다는 듯 맞댄 검을 떼고서 휘둘렀다. 목을 노리고 들어오는 하얀 검을 확인한 모리스가 급하게 옆으로 움직였다. 다행히도 몸이 멈춘 것은 한 순간뿐이었다. 하얀 세검이 왼쪽 어깨를 스쳤다. 피가 튀었고 급히 움직이느라 중심을 잃은 모리스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크윽!”
무슨 수를 쓴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마법인가. 아니, 마법의 느낌이 아니었다.
사이나가 바닥에 쓰러진 모리스를 향해 검을 찔렀다. 모리스가 옆으로 검을 기울어 그녀의 검을 막아냈다. 일어서려고 했지만 폭우처럼 빠르게 쏟아져 나오는 그녀의 찌르기가 방해되었다. 반격은커녕 검면으로 막아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상체를 노리던 검이 돌연 하체, 허벅지를 노렸다. 오른쪽 허벅지가 검에 꿰뚫렸다. 모리스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근육과 마력으로 검이 움직이는 것을 막았다.
세검은 고정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허벅지를 그대로 베어내려 했던 사이나가 미간을 좁혔다. 바닥에 누운 상태의 모리스가 사이나의 오른팔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사이나는 깔끔하게 검을 포기하고 뒤로 물러났다.
“검을 그대로 포기하다니… 네년은 검사의 기본이 되어있지 않군. 어디의 암살자지?”
안타깝게도 돌아온 대답은 침묵이었다. 모리스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허벅지가 뚫렸지만,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상대의 검을 빼앗은 자신이 훨씬 유리했다. 허벅지에 마력과 힘을 푼 순간이었다. 노렸다는 듯이 사이나가 손을 뻗었다. 하얀색 세검이 스르륵 빠져나가 그녀의 손으로 돌아갔다.
“……이기어검? …아니, 그건 아니다. 그 세검, 마검이군.”
이기어검이 본적 있는 모리스는 곧바로 결론을 내렸다. 마법의 기척이 없었으니 마법은 당연히 아니었다. 생각할 수 있는 건 세검 자체가 특별한 힘을 간직하고 있는 경우다. 예를 들면 사용자에게 자동으로 돌아가는 기능같은 걸.
사이나가 모리스에게 달려들었다. 모리스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원하는 바였다. 정면으로 부딪히면 힘에서 자신이 밀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다가오는 상대의 목을 노리고 모리스가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의 대각선 방향으로 검을 휘두르는 순간, 사이나의 몸이 사라졌다.
푹!
모리스는 자신의 심장을 꿰뚫고 가슴팍으로 튀어나온 하얀 세검을 보며 피를 토했다.
“빌… 어먹을… 마검사… 였나….”
마법, 블링크의 기척을 느꼈을 때는 너무나도 늦었다. 상대가 순수한 검사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기에 갑작스런 마법은 예상하지도 못했다.
모리스가 검의 손잡이를 양손으로 꽉 쥐었다. 심장이 파괴 된 이상 자신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적어도 같이 가겠다. 십이각의 모리스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모리스가 검을 치켜들고 자신의 배를 쑤시기 전에 심장을 찌른 세검이 위로 올라가 모리스의 뇌를 그대로 베어냈다.
먼저 모리스의 검이 바닥에 떨어지고 한 박자 뒤에 그의 몸이 검 위로 쓰러졌다.
그는 약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한 편이었다. 사이나의 검을 막아냈으니까. 보통의 기사는 그녀의 검을 막아내기는커녕 검과 함께 베어져 절명한다. 거기에 사이나는 마법으로 신체능력을 강화시키고 있었다.
“……모리스.”
그의 이름을 작게 중얼거렸다.
사이나는 안 그래도 뛰어난 신체능력을 마법으로 강화시켰다. 그녀의 일격을 무리 없이 받아낸 모리스는 확실히 강했다.
사이나는 시선을 내려 그의 죽음을 확인하고서 테드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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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