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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영혼-140화 (140/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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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식혈귀.

오른팔을 잃은 메시아는 왼팔을 이용해 보자기에 감싼 짐을 들고 마을 뒷산을 향해 뛰었다. 그가 들고 있는 짐은 피를 먹인 거머리 누에를 통해 뽑아낸 실로 만든 옷감이다. 현재 집에 있는 물건 중 가장 비싼 물건이기도 했지만, 거래 대상이 가장 원하는 물건이었다.

만일의 사태가 일어나면 옷감을 가지고 은신처로 도망쳐오라고 말했다. 옷감을 가져오라는 조건을 덧붙인 것은 순전히 상인의 탐욕이었다. 지금에 이르러 피를 먹인 거머리 누에에게 얻은 옷감의 가격은 일반 옷감에 비해 1~20배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옷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희귀한 걸 좋아하는 수집가들이 원하기 때

문이었다.

메시아는 이번일로 아버지에게 거래를 끊자고 제안할 것이다. 가끔 일이 지긋지긋하다고 말하는 아버지였으니 자신의 의견을 선뜻 받아들일 것이다. 더군다나 그 동안 몇 십 년에 걸친 거래로 인해 은행에 쌓여 있는 돈은 귀족 작위를 살 수 있을 정도다.

은신처는 이 산을 넘고 10분정도 달리면 나오는 마을에 있었다.

바닥에 어지러이 떨어져 있는 나뭇잎을 밟으며 산을 올라가던 메시아는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뒤에서 커다란 충격음이 긴장해 있는 귀에 어렴풋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메시아는 슬쩍 뒤를 돌아봤다가 다시 내달렸다. 아버지라면 무사할 것이다. 상대가 평범하지 않다고 해도 그래봤자 소년이었다. 자신의 팔을 찢어버린 메이드가 걱정되긴 했으나, 자신이 전력을 다한 주먹으로 복부에 중상을 입혔으니 치료하는데 제법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그 생각은 얼마안가 수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식혈귀.”

살아생전 처음 들어보는 아름다운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다리를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뒤로 돌렸다. 5M는 족히 넘는 나무위에 은발의 메이드가 있었다. 풍성한 나뭇가지와 나뭇잎으로 달빛조차 들어오지 못해 어두컴컴했으나 뱀파이어인 메시아는 어렵지 않게 어둠속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메이드복이 흙먼지로 더러운 것을 제외하면 오른손에 쥐고 있는 백색의 세검까지 처음본 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그때와 다른 게 있다면 무작정 자신에게 덤벼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

메시아는 메이드를 올려다보며 망설였다.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처음에 그녀의 복부를 가격한 것은 요행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결과 오른팔을 잃었다. 상인을 만난다면 모종의 방법으로 오른팔을 구해주겠지만, 여기서 죽으면 그것도 없다.

‘……도망쳐야하나.’

아니, 싸운다면 이길 수 있지 않을까. 처음엔 기습에 대처하느라 오른팔을 잃었지만, 지금은 마주보고 있는 상황이다. 기습은 통하지 않는다. 거기다 싸워서 이기면 승자로서 전리품을 얻을 수 있다. 저 아름다운 여인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꿀꺽. 메시아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어떤 맛이지?’

피의 맛은 개개인마다 조금씩 다르다. 뱀파이어만이 알 수 있는 미각이지만, 상대적으로 외모가 뛰어날수록 피맛 또한 좋았다. 눈앞의 은발의 메이드는 지금껏 만나온 어떤 여자보다도 아름다웠다. 그러니 그 피맛 또한 최고에 달하지 않을까.

그 생각에 도달하는 순간, 몸 안의 피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식혈’ 스킬의 부작용이라 할 수 있는 지독한 갈증이 찾아왔고 시야는 급격히 좁아져 메이드의 하얀 목덜미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메시아의 의지에 따라 육체가 반응했다. 우지직 거리는 소리와 옷이 찢어지며 멋지다기 보다는 괴물같은 근육이 모습을 드러냈다. 2배 이상 체구가 커졌고, 눈동자가 피와 같은 붉은색으로 변했다.

더 그로테스크한 점은 베어진 오른쪽 어깨에서 피가 뿜어지더니 팔이 돋아난 것이다. 재생한게 아니라 돋아났다는 점에서 뱀파이어라 부를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추하군요.”

나직이 말한 사이나의 차가운 말에는 드물게도 혐오라는 감정이 묻어 있었다.

사이나는 섣불리 공격하는 대신 시간을 들여 메시아를 관찰했다. 처음 상대를 얕보고 공격해 들어갔다가 낭패를 당했기에 당연한 경계였다.

그리고 관찰의 결과, 메시아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허락한 자신이 수치스러워졌다. 마

나나 마력은 조금도 없으며 무술을 터득하지도 않은 듯 자세도 엉성하며 날카로운 분위기도 없었다.

사이나는 테드의 명령에 받아 급하게 움직였던 스스로를 반성하며 나무아래로 내려갔다. 간단히 착지한 사이나를 향해 기다렸다는 듯이 메시아가 덤벼들었다.

입을 벌려 송곳니를 그대로 드러내고 양팔을 활짝 벌려 붙잡겠다는 듯이 다가오는 꼴은 짐승이나 다름없었다.

사이나가 옆으로 움직였다. 메시아가 그대로 나무와 부딪혔다. 통나무가 나뭇가지처럼 손쉽게 부러지며 뒤로 천천히 쓰러졌다.

“…크르르….”

고개를 돌려 사이나의 위치를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확인한 메시아가 짐승의 소리를 냈다. 그가 다시 손바닥을 사이나에게 뻗었다. 주먹을 내지르지 않는건 온전한 상태로 그 피를 마시기 위해서다.

사이나의 백색 검날에 푸른색 검기가 서린다. 빠르게 뻗어오는 메시아의 손바닥을 간단히 피하고 목을 노려 횡으로 휘둘렀다. 그러나 검은 목을 베어내지 못했다. 생채기도 내지 못하고 튕겨져 나갔다.

“…….”

검기로 메시아의 오른팔을 잘라냈었다. 아마도 모습이 변했던 만큼 신체능력도 한층 더 강해진 모양이다.

“크아아아!”

데미지는 없지 않은 모양인지 메시아가 포효를 내지르며 사이나에게 달려들었다.

사이나가 지면을 박차고 단번에 나무 위로 올라갔다. 권능을 사용해 죽일 수 있으면 편하겠지만, 검기도 통하지 않을 정도의 높은 신체 능력이면 권능도 간단히 무시할 것이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군요.”

메시아가 무릎을 굽히고 뛰어 올랐다. 사이나가 다시 나무 아래로 내려섰다. 나무에 메시아가 부딪혔고, 애꿎은 나무가 다시 부러졌다. 바닥에 떨어진 메시아는 아랑곳 않고 사이나를 향해 성난 멧돼지처럼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사이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완전히 짐승 사냥이지 않은가. 더 이상 시간을 끌어 메시아를 관찰할 이유는 없었다.

속도는 빠르지만 기교는 눈곱만큼도 없었고, 힘을 무시할 수 없지만 위협적이진 않았다.

사이나의 마력이 격렬하게 움직였다. 동시에 검에 푸른색 아지랑이가 나타났다. 아지랑이는 검날을 감싸더니 이내 흔적도 없이 흡수되었다. 백색의 검이 푸른색으로 변하며 은은하게 빛났다.

사이나가 울부짖으며 달려오는 메시아의 옆을 스쳐지나가듯 베었다. 메시아의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되고 피와 내장이 바닥에 쏟아졌다. 역겨운 냄새가 가득 퍼졌다.

“피…, 피를… 피를 내놔…!!”

바닥에 쓰러진 메시아가 양팔을 허우적거렸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은발의 메이드를 잡으려고 했지만, 손은 닿지 않았다.

사이나는 검을 들어 올리며 끝장을 내기 직전, 힐끗 시선을 돌려 메시아의 상처를 확인했다. 잘려나간 팔이 새로 돋아난 것처럼 하반신이 돋아나지는 않았다. 상처부위가 벌레처럼 꿈틀거리긴 했으나, 그 뿐이었다.

사이나는 그의 목을 베어 확실하게 일을 끝냈다. 아무리 재생력이 뛰어나도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머리가 잘리면 그대로 끝이다. 그리고 그녀의 생각대로 메시아는 끝을 고했다.

검을 갈무리한 사이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 떨어져 있는 보따리를 확인했다. 묶여있는 검은색 보자기를 풀자 새빨간 옷감이 나타났다. 옷감에서 미세한 혈향이 느껴지자 미간을 찌푸렸다. 색도 아름답고, 촉감도 최고라 할 수 있겠으나, 거슬리는 혈향 때문에 혈향을 못 맡는 자들을 제외하면 옷으로 사용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주인님의 옷으로 만들기엔 부적합한 재료군요.”

그래도 버리지는 않았다. 보자기에 감싸 품에 안고 도망갈 정도면 제법 가치가 있는 물건일테니 여차하면 팔면 될 것이고, 어쩌면 테드에게 필요한 물건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보따리를 들고 테드가 있는 농장으로 향했다. 그러다 도중에 달려오는 테드와 마주쳤다.

“벌써 처리 한 거야?”

“예. 주인님의 명령대로 확실하게 죽였습니다.”

“…어, 그래.”

테드의 떨떠름한 반응에 사이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언가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메시아를 붙잡아 정보를 캐물어 얻을 생각이었지만, 이미 죽었다면 그건 더 이상 불가

능하다. 테드는 깔끔하게 미련을 버리기로 했다. 이후에 고생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베이키리아 후작일 것이다.

“아니, 없어. 그럼 돌아갈까. 아직 저녁도 못 먹었잖아.”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무언가 드시고 싶으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오랜만에 야외에서 먹는 거니 바비큐가 좋아. 그런데 들고 있는 건 뭐야?”

“그가 들고 있던 물건입니다. 제법 가치가 있는 것 같아서 가져왔습니다. 안에는 피

냄새나는 옷감이 들어 있습니다.”

사이나는 보자기를 열어 보였다. 붉은색의 옷감이 보였다. 확실히 겉보기에는 비단 이상으로 좋아 보이는 옷감이었다. 테드는 옷감에 아주 가까이 코를 대고서야 피냄새

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딱 뱀파이어가 좋아할 옷이네.”

경매장에 팔면 얼마 정도 할까. 시덥 잖은 생각과 함께 사이나에게 말했다.

“수고 했어. 돌아가자.”

⁂⁂⁂

식혈귀 사건은 그 후로 3개월이 지나서야 완전히 끝났다. 테드는 손을 뗐지만, 베이키리아 후작은 식혈귀가 거래하던 상인까지 테레사의 명령에 따라 끝까지 추적해 결국 잡아낸 것이다. 그리고 상인이 거래하던 귀족까지 연루되어 테레사는 생각에도 없던 정리를 시작하게 됐다.

테드는 다음해 3월에 중후반에 힐데가르트의 결계, ‘영원한 밤’을 완벽하게 고쳤다. 아니, 고쳤다는 말은 어찌 보면 말이 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 마법진을 수정한 게 아니라 그냥 아예 다시 새로 마법진을 그려 다시 결계를 발동한 것 뿐이니까.

요컨대 결계를 컴퓨터로 생각하면 쉽다. 오류가 나서 먹통일 때, 다시 껐다 켜보니 정상으로 돌아와 있는 경우처럼. 결계를 새로이 다시 발동했다.

테드의 입장에선 도박에 가까운 짓이었다. 3월이 되도록 결계를 수리하지 못해 똥줄이 바싹 탄 테드가 모 아니면 도라는 심정으로 실행한 것이다. 실패할 경우 사이나를 데리고 곧바로 도망칠 각오로 마법진을 지우고 다시 그렸다.

드래곤의 뼛가루라는 희귀한 재료와 힐데가르트에게 요청해 얻은 진조의 피를 이용해 마법진을 잠을 설치며 그린 결과, 마법진은 성공적으로 발동했다. 테드에겐 다행히도 영력이 필요한 고대 마법은 아니었다.

그래도 예정에도 없던 고대 마법 연구 덕분에 얻은 것은 많았다. 가장 큰 이득을 말하자면 결계마법을 하나 만든 것이다. ‘영원한 밤’같은 거창한 결계마법이 아니라, 전투를 위해 만든 결계다.

테레사와의 계약은 이것으로 완전히 끝났다. 테레사는 아쉬운 기색을 내보이며 온갖 달콤한 말로 테드를 붙잡으려 했다. 은근히 자신의 몸을 이용하기도 했으나, 테드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사이나가 없었으면 흔들렸을 지도 모르지만.

“내가 브리드론에 다시 오나 봐라.”

떠나기 직전 테드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진저리를 쳤다. 결계 때문에 고생한 기억때문이기도 했지만, 힐데가르트 성에 머무르면서 틈나는 대로 관광도 즐겼으니 미련도 없었다.

“난 상당히 아쉬운걸.”

시온이 애써 좋은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그녀의 눈이 촉촉해지는 것을 확인한 테드는 고개를 으쓱였다.

“살다보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물론 거기가 브리드론은 아니겠지만.”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시온은 지난해에 후작의 직위를 정식으로 승계받았기 때문이다. 후작으로서 국가를 쉽게 떠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건 메이드와 스승에게 주는 선물이야. 조금 고민했는데 좋아하는 걸 주는게 좋을

것 같아서.”

“이건…… 한천식당의 특제 고추장이군요. 상당히 구하기 어려웠을 텐데… 감사합니

다. 고추장의 비밀을 반드시 밝혀내겠습니다.”

사이나가 비장감이 서린 말로 감사를 표하며 조심스럽게 고추장을 받아들였다. 테드는 앞으로 먹을 음식들을 생각하며 좋은 선물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천식당인지 한전식당인지 전혀 모르지만.

“내건 뭐야?”

“특제 장어 엑기스야.”

“……아니, 뭔가 이상한데 선물이.”

“그런 것 치곤 선물을 너무 꽉 쥐고 있는데.”

테드는 서둘러 아공간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온에게 말한다.

“평소대로 수련하면 앞으로 몇 년이면 마도사의 경지에 이를 거야.”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운걸. 스승의 말이니 확신이 생겼어.”

“그럼 앞으로 잘 지내라.”

“스승도 목적을 한 걸 이루길 바랄게.”

테드와 사이나는 그대로 시온과 헤어져 워프게이트로 움직였다. 아쉽지 않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테드는 이곳에 마냥 머무를 수도 없었다. 그에겐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좋은 소식 하나.

테드의 발기부전이 시간이 지나면서 좋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발기를 30초 이상 유지하게 되었다. 딱히 드래곤 하트를 섭취한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좋아지고 있는 것이다.

테드는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발기부전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다고 드래곤 하트를 노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드래곤 하트가 있다면 그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이 아니라 드래곤 하트는 마법사에게 좋은 영약이기 때문이다.

“몇 년 만 기다려 사이나.”

브리드론에서 마지막으로 묵는 밤, 호텔방 침대의 누운 테드가 잠들기 직전 옆에 누운 사이나에게 말했다.

“……?”

사이나가 의문을 담아 테드를 바라봤다. 갑작스런 테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듯 했다.

테드는 씩 웃으며 눈을 감았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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