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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식혈귀.
참극이 일어난 ‘기리즈’ 마을과 2시간 정도 거리에 위치한 농장 마을인 ‘기미스’는 가구수가 상당히 적은 마을이었다. 사람이 살 것으로 보이는 집은 대략 5채 정도가 전부다. 마을이라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다.
“시온. 이 마을에 대해서 설명해봐.”
마을 입구에서 걸음을 멈춘 테드가 말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집들의 창문에 밝은 빛이 새어나왔다.
“베이키리아 근처에 있는 농장 마을 중 한 곳이야. 마을 규모를 보면 알겠지만 이 농
장마을은 소규모야. 대규모의 농장 마을은 인구수 만 해도 500이 넘어.”
누에 농장은 베이키리아 도시를 중심으로 해서 사방으로 퍼져 있었다. 대규모 농장은 3개 정도이고 기미스처럼 소규모의 누에 농장은 10곳이 넘는다.
“일단 기리즈 마을과 가장 가까운 농장 마을이라 조사해보긴 했는데… 딱히 특별한건 없어.”
테드는 불이 들어온 집을 지긋이 바라봤다. 투시를 발동하자 집안에 있는 뱀파이어가 보였다. 중년 남자 뱀파이어는 방금 막 일어났는지 세수를 하고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마을 뒤에 있는 산은?”
마을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작은 산이 있었다. 작아서 산이라기보다는 나무가 심어져 있는 언덕에 가까웠다.
“음…. 저 산은 나도 잘 모르겠어. 아마 이름 없는 산일거야.”
시온의 말을 들으며 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산이 아니라 조금 큰 언덕이라 불러도 상관없을 정도였다.
“……어떻게 할 거야?”
마을의 입구에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테드에게 시온이 물었다. 사실 테드도 그걸 고민하고 있었다. 기세 좋게 마을에 온 것은 좋지만 다짜고짜 집에 쳐들어가서 식혈귀를 찾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리고 이 마을에 식혈귀가 있다고 확신할 수도 없다. 괜히 들쑤시다가 놀란 식혈귀가 도망칠 가능성도 있었다.
“일단 몰래 식혈귀가 있는지 확인하자.”
입구에서 보이는 집은 투시를 사용한 결과 식혈귀가 없었다. 혹시 몰라 지하실까지 꼼꼼히 살폈으나, 지하실에는 옷감 몇 십 개가 쌓여 있을 뿐이었다.
안쪽에 있는 집은 거리와 각도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기에 가까이 다가가야 했다. 테드는 천천히 기척을 죽이며 마을의 안으로 들어갔다.
테드의 긴장감이 느껴지는 움직임에 덩달아 긴장한 시온이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뒤
를 따랐다. 그녀가 한 걸음 한 걸음을 조심스럽게 내딛는 반면에 사이나는 허리를 곧게 세우고 당당히 걸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녀는 발소리는 물론이고 발자국까지 남기지 않았다.
조심히 확인한 결과 4개의 집에는 식혈귀가 없었다. 남은 것은 입구에서 가장 멀고, 뒷산에서 가장 가까이에 위치한 2층 집 뿐이다. 앞에서 확인한 집과 달리 상당히 낡은 집이었다.
집안을 투시한 테드의 얼굴이 굳어졌다. 집안에는 2명의 남자가 있었다. 젊은 남자와 늙은 남자로 부자지간으로 보일 만큼 쏙 빼닮아 있었다. 눈이 썩은 동태 눈 인 것도 똑같았다.
“찾았어. 식혈귀.”
“……!”
테드가 나직하게 말했다. 시온이 몸을 흠칫 떨더니 테드가 바라보는 집을 바라봤다.
평소의 시온이었다면 테드가 어떻게 알아냈는지부터 물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의 머릿속에는 그 좋아하는 마법도 떠오르지 않았다. 식혈귀에 대한 분노와 긴장감이 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두려움도 있었다. 그녀가 섣불리 나서지 못하는 이유였다.
“…시온.”
시선을 아래로 내린 테드가 그녀를 불렀다. 어딘가 싸늘한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무, 무슨 일이야?”
“생각해보니 말이야. 거머리 누에는 피를 먹이면 질 좋은 실을 뽑아내잖아? 그럼 동물이나 몬스터의 피를 이용해서 키우는 것도 하나의 방법 아니야? 질 좋은 실을 얻을 수 있으면 이득이라고 생각하는데. 흡혈 나방이야 부화하는 족족 잡아버리고.”
시온은 갑자기 묻는 질문에 그 의도가 궁금하긴 했으나, 우선 대답부터 했다.
“이상하게도 거머리 누에는 몬스터의 피를 먹지 않아. 그리고 동물의 피는… 구하기가 어려워. 누에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 귀한 가축을 잡을 수 없는 노릇이고 매일매일 피를 주면서 관리하지 않으면 상등급의 옷감을 구할 수 없어. 거기에 일반 농부들은 일일이 흡혈 나방을 잡을 수 없는 노릇이기도 하고. 따지고 보면 이득 보다는 손해이기도해. 굳이 금지가 아니어도 누에에게 피를 먹일 농부는 없을 거야.”
“……법으로 금지되었다고 해서 수요가 사라지는 건 아니야. 오히려 쉽게 구할 수 없으니 가치가 더 뛰겠지.”
시온의 테드의 말을 이해하고 집을 노려보았다. 물론 그렇다고 그녀가 집을 투시할 수 있는건 아니었다.
집의 지하였다. 다른 집보다 넓은 지하에는 시체 2개가 놓여 있고 시커먼 누에가 시체에 달라붙어 피를 빨아 먹고 있었다. 하나의 시체는 말라비틀어져서 종족을 확인할 수 없지만, 다른 시체는 귀가 길쭉한 엘프 여성의 시체였다.
벗겨진 몸 곳곳에 거머리 누에가 붙어 있다. 그 중에는 고치가 된 녀석도 있었다.
알몸이기 때문에 엘프 여성이 관광객이었는지, 모험가였는지 알 수 없다. 테드는 어림짐작으로 그녀가 모험가 출신이라 생각했다. 상식적으로 엘프가 적대적인 뱀파이어 국가에 관광 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모험가라면 실종 되었다고 해서 일이 커지지 않는다.
모험가의 세계에선 실종은 흔한 편이고. 실종의 이유 대부분은 몬스터에게 잡아먹힌 것이기 때문이다.
“안에는 두 명이 있어. 그리고 내 생각엔 두 명다 식혈귀야.”
그 두 명의 식혈귀는 집안에서 서로 마주보며 식탁에 앉아 조용히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먹고 있는 것은 시체가 아니라 평범한 수프와 빵이다. 부자지간의 대화는 없었다.
“솔직히 놈들이 어느 정도의 실력인지는 난 모르겠어. 사이나는 어떻게 생각해?”
뱀파이어가 동족의 피를 빨수록 강해진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어느 정도 강해졌을 것이다만, 테드의 눈에는 그렇게 강해보이지 않았다.
사이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조심스럽게 기감을 펼쳐 내부에 있는 2명의 뱀파이어를 살핀다. 그들은 보유하고 있는 마력은 없고 마나도 일반인 수준이다.
“……모르겠습니다.”
사이나가 눈을 뜨며 말했다. 경우는 크게 2가지다. 모종의 수단으로 사이나의 기감을 속인 것이거나, 정말로 보이는 그대로 일반인 수준인 것.
사이나의 말을 듣고 테드는 조금 망설였다. 어떻게 집안으로 들어가 식혈귀를 제압할지 고민되는 것이다. 블링크를 이용해 들어갈까. 아니면 문을 박살내고 들어갈까. 고민 끝에 테드는 사이나에게 하나의 지시를 내렸다. 시선을 끌테니 집 옆의 창문을 통해 내부로 침입해 식혈귀를 제압하라는 명령이었다. 테드는 사이나가 손쉽게 식혈귀를 제압할 것임을 의심치 않았다.
똑똑똑.
낡은 나무문을 두드린다. 식사를 빠르게 끝마치고 누에 농장으로 나갈 준비를 하던 중년 남성이 문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확인도 하지 않고 의심없이 문을 열었다.
창백한 주름진 얼굴에 짧은 검은색 머리카락 사이로 듬성듬성 하얀 백발이 돋아나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의 그는 문을 두드린 소년, 테드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이지?”
힐끔, 테드의 뒤에 있는 로브를 입은 시온을 확인한다. 둘다 처음 보는 얼굴로 마을 주민은 아니었다.
“물어볼게 하나 있어서요.”
테드가 그의 경계심을 없애기 위해 최대한 순진무구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러나 그는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너희들은 누구지?”
짧고 무뚝뚝한 질문이었다. 테드는 뭐라 대답할지 순간 망설였으나, 이내 환하게 웃었다.
“저승사자다.”
촤르르륵, 사슬이 굴러가는 소리와 함께 중년 남성의 뒤에서 검은색 사슬이 쇄도했다. 팔과 몸통을 칭칭 휘감고 발목을 붙잡는다. 순식간에 몸이 속박된 남성은 표정은 일그러뜨리더니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사슬이 팽팽해졌으나, 끊지는 못했다.
“……그런가. 들켰나. 예상보다 훨씬 빠르군.”
남성은 테드의 생각보다 훨씬 침착했다. 살아온 세월에 의해 자연스럽게 쌓인 경험 덕분일까. 아니면 이런 일을 여러번 겪은 것일까. 테드는 알 수 없었다.
“메시아!!”
중년 남성은 큰 목소리로 아들의 이름을 불렸다. 그러나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 집안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현관의 바로 앞은 벽으로 가려져 내부가 보이지 않았기에 상황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테드는 돌아가는 상황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투시를 할 필요도 없다.
“소용없어. 아마 댁과 똑같이 제압당해 있을…….”
쾅! 하는 소리가 울리며 테드의 입을 막았다. 현관 앞에 보이는 벽이 부서지고 검은색 물체가 테드의 바로 옆의 벽을 부수고 밖으로 튀어나갔다. 테드가 당황한 기색으로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마당에 쓰러진 사이나가 천천히 흙먼지가 묻은 몸을 일으켰다. 한손으로 복부를 가리고 있고, 다른 한 손에는 하얀 세검이 들려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 피가 흘러 나왔다. 그녀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앞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그리고 사이나의 몸이 옆으로 쓰러지려고 했다. 쓰러지기 직전, 다리에 힘을 주어 꼿꼿이 섰으나 위태로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사이나가 당했어?!’
경악한 테드는 순간적으로 어떤 판단을 내려야할지 몰랐다. 그러나 빠르게 냉정함을 되찾는다. 그의 눈동자가 붉은색으로 변한다.
“시온. 사이나를 치료해라.”
당황한 그녀가 마법을 사용해 사이나의 몸을 치료하는 것을 확인하고 빠르게 고개를 돌린다. 부서진 벽을 넘어 메시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테드는 익히 알고 있는 모습, 마을 하나를 몰살 시킨 식혈귀다. 그는 한쪽 팔이 잘려나가고 없었다.
“아버지. 어떻게 하지?”
“들켰을 경우 내가 어떻게 하라고 했지?”
사크는 아들의 말에 답은 정해져 있다는 듯 망설이지 않고 되물었다.
메시아는 잠시 멈칫했다. 그는 시온의 치료를 받고 있는 사이나를 보았다.
“저 여자. 엄청 강해.”
사크가 곁눈질로 메시아의 잘려나간 오른팔을 힐끗 확인했다. 상처 부위에는 피가 뚝뚝 흐르고 있다.
“내 걱정은 말고 네가 할 일을 해라. 곧 따라 가겠다.”
“……알았어.”
메시아가 대답하며 몸을 획 돌렸다. 그가 바닥에서 발을 떼기전에 약간의 틈을 이용해 마법으로 신체를 강화시킨 테드가 입을 열었다.
“나는 보내줄 생각이 없다만.”
메시아가 힐끗 테드를 바라봤다. 그리고 발걸음을 떼어 집안으로 들어갔다. 테드가 혀를 차며 따라갈려는 순간이었다.
“흠!”
검은 사슬에 몸이 묶여 있던 사크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온몸에 힘을 준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사슬을 끊어버렸다. 사슬이 허공중에 사라진다.
테드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저승사자라고 했나?”
사크가 주먹을 쥐며 말했다. 징그러운 검푸른색 핏줄이 손등위에 나타났다. 창백한 피부 때문에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미안하지만 우리 집엔 사탕이 없다.”
“…….”
테드가 조용히 마력을 움직였다. 사크의 발아래에 푸른색의 마법진이 그려진다. 사크는 피하지 않았다. 해보라면 해보라는 듯 여유롭게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그 눈은 테드를 보고 있지 않았다. 테드의 뒤, 아들이 강하다고 평가한 은발의 메이드를 주시하고 있었다.
저 여자의 상처가 회복되기 전에 죽여야 한다. 사크가 살짝 다리를 굽혀 도약하려는 찰나였다. 마법이 발동하고 그의 다리와 현관이 얼어붙었다.
“날 너무 무시하는군.”
테드가 사크를 따라하듯 주먹을 쥐었다. 핏줄이 튀어나오진 않았으나, 그 대신 손등에 마법진이 나타났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심려를 끼쳐 드렸군요.”
테드가 사이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이나는 회복이 끝나 있었다. 뿐만이 아니라 평소의 말끔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메이드 복에 묻은 흙먼지를 제외하면 평소의 그녀였다. 시온의 회복 마법과 최상급 포션의 덕분이다.
사크의 얼굴이 험악하게 변했다. 자신에게서 눈을 돌렸다. 그 뜻을 모를 리가 없다. 눈앞의 건방진 빨간 눈의 꼬마는 자신을 노골적으로 도발하고 있었다. 다리에 힘을 주었다.
“……방심했나?”
“그의 육체능력이 비정상적으로 강했습니다. 파악하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
사이나는 뒷산 쪽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기척을 느꼈다. 사이나가 뒷산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테드의 시선도 자연스레 뒷산으로 향했다.
“그는 제가 쫓겠습니다.”
“……죽여도 돼. 아니, 죽여.”
“알겠습니다.”
사이나가 고개 숙여 인사하더니 도약해 순식간에 테드의 앞에서 사라졌다.
테드는 다시 사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그의 다리를 붙잡고 있던 얼음이 산산조각 박살났다. 사크가 테드에게 달려들며 거대한 주먹을 내질렀다. 테드는 작은 주먹으로 그에 맞섰다.
크기가 다른 주먹이 서로 맞부딪혔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