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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영혼-136화 (136/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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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식혈귀.

베이키리아 워프게이트의 입구에는 어느 도시나 그렇듯 갑옷으로 온몸을 감싼 병사가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병사가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숫자가 지나치게 많았다. 보통 4~5명의 병사가 워프게이트의 주위를 지킨다면 베이키리아의 워프게이트 주위에는 10명이나 되는 병사가 진을 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베이키리아의 공포의 대명사인 식혈귀를 생각하면 치안이 높은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병사들은 테드 일행을 보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모종에 연락을 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투구 아래에 보이는 그들의 얼굴은 심하다 할 정도로 굳어 있었는데, 테드 일행을 보는 시선에는 희미한 기대와 희망이 담겨 있었다.

베이키리아에 처음 온 테드는 워프게이트의 밖으로 나오자마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반면 몇 번 와본 적이 있는 시온은 자연스럽게 북쪽에 있는 베이키리아 후작의 저택을 가리켰다.

“일단 우리는 베이키리아 후작의 저택으로 가서 그에게서 직접 식혈귀에 대해들을 거

야.”

“굳이 가서 들을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보고서는 읽었고, 주민들에게 물어 봐도 상관없잖아.”

테드의 말에 시온은 주위를 가리켰다. 그리고 뒤늦게 테드는 도시가 지나치게 조용하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뱀파이어가 야행성이라고 한다 하더라도 썰렁한 길거리는 위화감을 느끼게 했다. 물론 주민들 모두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야간에 일하는 사람이 있듯, 주간에 일하는 뱀파이어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은 지나칠 정도로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으며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주민들이 제대로 협조 해줄지 알 수 없어. 또 식혈귀에 대해선 조사한 그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

테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생각해보면 주민들이 식혈귀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다고 할 수 없다. 기껏해야 소문으로 주워들은 이야기가 전부 일 것이다.

“그렇다곤 해도, 주민들이 그 식혈귀라는 놈을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것 같은데.”

때마침 도시를 지나가는 병사들의 무리를 보며 테드가 말했다. 어느 도시라도 치안을 위한 병사들의 순찰은 있다. 보통은 3~4명이 한조가 되어 행동하는데 베이키리아는 그 5배 정도인 20명이 한껏 몰려다니는 것이다.

“식혈귀는 인간으로 치면 식인귀라 할 수 있어. 그것도 마을 하나를 몰살시킨 식인귀. 그렇게 생각하면 무섭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면 당연히 무섭긴 한데……. 뱀파이어는 원래 피를 빨잖아? 딱히 특이할건 없다고 생각하는데.”

마을 하나를 몰살한 것 빼면은. 하고 테드가 덧붙였다.

“아무리 뱀파이어라도 동족의 피를 빨지는 않아. 하지만 그래도 주민들이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있다는 건 동감이야. 아무리 식혈귀라도 도시를 습격하지는 않을 텐데…. 이래서야 식혈귀에게 좋은 일이잖아.”

뒷말은 시온이 작게 투덜거렸다. 테드는 그녀의 뒤를 걸으며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베이키리아의 유명한 건 뭐야?”

“스승. 우린 관광하러 온 게 아니야.”

“알고 있어. 어쩌면 그게 식혈귀를 잡는 단서가 될지도 몰라서 묻는 거야. 식혈귀는 베이키리아 근처에서 사건을 일으켰잖아? 어쩌면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지.”

새빨간 거짓말이었지만, 시온의 입장에선 뭔가 그럴싸하기도 했다.

“옷감이야. 베이키리아의 근처에 대규모누에치기가 있어. 아, 참고로 이 누에들은 거머리 누에라고도 하는데 동물의 피부에 달라붙어 피를 빨아 먹을 수 있어. 피를 먹이면 고운 빛깔의 실을 뽑아내서 옛날에는 일부러 동물들의 피를 먹였어. 지금은 금지되어 있는 일이지만.”

“거머리 누에라니….”

테드는 머릿속으로 상상하고는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지구에 있을 때, 시골의 개울가에서 놀다가 거머리에게 물린 적이 있었다. 불현 듯 떠오른 그 기억은 정말 끔찍했다.

“그거 커서 흡혈 나방이라도 되는 거 아냐?”

“이게 조금 특이한데… 피를 먹지 않은 거머리 누에는 보통의 나방이야. 반면에 피를 먹은 거머리 누에는 스승의 말대로 흡혈 나방이 돼. 거머리 누에에게 피를 먹이는 게 금지된 주된 이유야.”

일반적으로 나방은 모기보다 크니 모기 이상으로 피를 빨아 먹을 것이다. 흡혈 나방이 어느 정도 빨아먹는지 알 수 없으나 모기보다 위험한 것은 명백했다.

거머리 누에의 시커먼 모습을 상상하며 시온의 뒤를 따르고 있자니, 사이나가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조용히 오른쪽의 건물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야?”

“저곳에서 누군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사이나가 가리킨 건물은 3층짜리 여관으로 수 십 개의 창문이 건물 벽에 달려 있었다. 열려 있는 창문 중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사이나가 고개를 돌리자 놀란 나머지 황급히 창문에서 떨어진 것이리라.

“식혈귀…는 아니겠지.”

테드가 작게 중얼거렸다. 우연히 창밖을 보다가 본 것 일수도 있고, 한산한 거리를 걷는 이방인이라 눈에 띤 것 일 수도 있다.

“3층 오른쪽 끝에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얼핏 보기엔 입고 있는 가죽 장비로 보아 모험가 여성으로 보였습니다.”

테드 일행과 여관의 거리는 대략 100M가 넘는다. 아무리 시력이 좋다고 해도 한순간에 시선을 느끼고 상대의 용모까지 파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식혈귀는 남자라고 했던가.”

테드는 보고서의 내용을 떠올렸다. 시체 중에선 목에 손자국이 있는 시체가 있었다. 손자국을 조사한 결과 여자가 아닌 남자의 것이라고 판단되었다. 물론 확신할 수는 없다. 남자 손 같은 여자 손 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몇 분 뒤, 베이키리아 후작 저택으로 도착할 수 있었다. 시간 특성상 저택도 마찬가지로 한산했으나, 사용인들 몇몇과 후작이 직접 저택의 입구로 나와 테드 일행을 환영해주었다.

베이키리아 후작은 비쩍 마른 30대 중반의 사내였다. 그는 잿빛의 머리카락을 깔끔히 정리해 이마를 드러냈다. 창백한 피부는 뱀파이어 족의 특징 중 하나였으며 눈가에 주름이 있었고 볼이 안으로 들어가 홀쭉했다. 분명 후작이라는 높은 신분을 가진 귀족인데도 어딘가 굶고 있는 듯한 인상이었다.

베이키리아 후작은 미소로 테드 일행을 반겨주었다. 눈가의 주름이 그를 인상 좋은 뱀파이어로 만들어 주었다.

베이키리아 후작은 테드 일행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테드는 응접실에 들어가는 순간 기묘한 긴장감이 가득 차 있음을 알아차렸다. 긴장감의 원인을 찾아 머리를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문을 열자마자 들어오는 시야에 원인이 있었으니까.

응접실의 중앙에는 커다란 테이블이 있고, 테이블의 양옆에 6명의 남녀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입을 꾹 다물고 서로를 보고 있는 꼴이 꼭 원수들이 노려보는 것 같았다.

잘 보면 그들의 복장이 서로 다른 것을 알 수 있었다. 왼쪽에 앉은 3명은 검은색 롱코트를 입고 있다. ‘나이트 워커’의 예복이다.

반면 오른편에 앉아 있는 3명은 활동하기 편한 가죽 갑옷, 모험가들이 주로 입는 옷을 걸치고 있다. 만일을 위해 단검을 장비하고 있는 모습이 모험가가 틀림없었다. 겉모습으로 보자면 그들은 뱀파이어가 아닌 인간으로 보였다.

“후작님. 그들이 힐데가르트 각하가 보낸 지원군입니까?”

나이트 워커 중 가장 안쪽에 앉은, 날카로운 눈매의 사내가 말했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짧은 금발 머리의 사내는 어딘가 불쾌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렇다네. 매드 경. 테드 님은 비록 인간이지만 각하께서 인정한 마도사네.”

“오오, 마도사!”

마도사라는 단어가 나오자 매드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리고 맞은편의 모험가들도 웅성거렸다.

“마, 마도사라니. 상당히 어려 보이는데….”

“아! 나, 테드라는 이름, 들어 본적 있어. 루크에이스의 천재 마법사! 테드 크루시안!”

방금전의 긴장감은 어디 갔는지 단숨에 응접실의 안은 소란스러워졌다. 물론 그 이유는 ‘마도사’라는 단어가 나와서다.

마도사. 평범한 사람이라면 일평생 보기도 힘든 자들이다. 지금 이곳에 있는 이들은 마도사가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자자, 모두 진정하게. 우선 일을 해야지. 아, 테드 님도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테드는 테이블의 끝자리에 앉았다. 단순히 거기가 가깝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반짝이는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모험가와 나이트 워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실 마도사라는 것을 알릴 생각이 없었다. 여러 가지 귀찮은 상황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힐데가르트 성에서 생활하며 자연스럽게 ‘테드 크루시안은 마도사다.’라는 말이 나돌았다.

“우선 테드 님과 시온 님에게 사과부터 하겠습니다.”

베이키리아 후작은 자리에 앉기 전 망설임 없이 고개를 숙였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시온은 당황했다. 그가 사과하는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다.

“제 독단의 판단으로 베이키리아의 나이트 워커 3명과 A등급 모험가로 구성된 파티인 ‘바람의 파도’를 끌어 들였습니다. 그들에게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불쾌하시다면 그들을 이곳에서 내보내겠습니다.”

시온은 그의 말에 당황했다. 자신들은 어디까지나 후작에게서 정보를 얻고 독자적으로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왔을 뿐이다. 식혈귀 사건에 대한 권한은 베이키리아를 관리하는 후작에게 있었다.

“아뇨, 괜찮아요. 사람은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니까요.”

나이트 워커와 A등급 모험가 파티를 끌어 들인 것은 오히려 좋은 선택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라면 식혈귀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고, 각자의 능력을 살려 식혈귀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말씀해주신다면 다행이군요. 그럼 제가 가진 식혈귀에 대한 정보를 말해드리

겠습니다.”

그는 응접실 구석에 있는 탁자 위에 놓인 서류를 들고 모두에게 나눠주었다. 서류에는 적혈귀의 행적과 예상되는 행동 방식, 피해자의 시체 사진 등이 있었다.

베이키리아 후작이 식혈귀에 대한 정보를 말하기 시작했지만, 테드의 귀에는 잘 들리지 않았다.

테드는 시체 사진 중 하나를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검은 눈동자에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사진속의 시체는 한눈에 볼 수 있는 소녀였다. 어떤 마을에서든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소녀다. 그 소녀는 싸늘한 시체가 되어 길바닥에 버려져 있었다. 공포에 질린 얼굴이 뇌리에 박혀 사라지지 않는다.

피부에 핏기가 없고 반쯤 뜯겨져 나간 피투성이의 목을 제외하면 비교적 시체의 상태는 멀쩡해보였다.

식혈귀라 불리기에 시체가 말라비틀어질 정도로 피를 빨아 마신다고 생각했지만, 피는 절반도 마시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마을 사람 120명의 피를 전부 빨아먹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테드는 조심스럽게 사진을 넘겼다. 다음 사진도 목이 물어뜯긴 상처가 있었다. 아니, 사진 속 대부분의 시체 상태가 전부 비슷비슷했다.

“제가 발견한 오래된 문헌 속에서 이와 비슷한 사건을 발견했습니다.”

차분한 후작의 말을 들으며 응접실의 내부를 살폈다.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다. 나이트워커와 모험가들은 굳은 얼굴로 후작을 보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시온은 분노가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첫 번째 사진, 소녀가 죽어 있는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이나는 평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이다. 작은 마을의 비극은 그녀에게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문헌에 나온 식혈귀는 뱀파이어가 뱀파이어의 피를 빨면 빨수록 아주 조금씩 강해진다고 주장했습니다.”

“후작 님의 말씀대로면… 120명의 뱀파이어의 피를 먹은 식혈귀는 이미 괴물이 되어 있겠군요.”

한쪽 귀에 무수히 많은 피어스를 박은 갈색 단발머리의 여성 모험가가 말했다.

“……확실한건 아니지만 120명 이상일 수도 있네. 그리고 정말 강해졌는지는 알 수 없네. 문헌의 식혈귀는 5명의 피를 빨아 먹었지만, 눈에 띠게 강해졌다고 적혀 있지 않았네.”

테드는 의문을 제기하지도 않고 조용히 그의 말을 듣기만 했다. 그리고 약 1시간이 지난 후에서야 후작은 자신이 알고 있는 식혈귀에 대한 정보를 모두 전할 수 있었다.

테드는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언가 알아내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너무 당당히 일어났기에 베이키리아 후작이 기대를 가지고 물었다. 허나 테드는 고개

를 저었다.

“이제부터 알아봐야죠. 마법사의 방식으로요.”

그는 인사를 한 뒤, 사이나와 시온을 데리고 비극이 일어났던 마을로 향했다.

⁂⁂⁂

마법은 만능이 아니다. 그러나 만능에 한 없이 가까운 것이 마법이다.

테드가 생각하는 마법이었다. 그에게 ‘다크 체인’을 비롯한 마법을 가르쳐준 스승은 마법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단언했으나, 그는 공감하지 못했다. 마법으로도 불가능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법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많다는 것은 역시 부정할 수 없었다. 테드는 마법의 편리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테드는 테레사가 자신을 베이키리아에 보낸 이유를 도시에 도착하는 순간 깨달았다. 시온의 추천도 있었겠지만, 그녀는 아마 식혈귀로 인해 두려움에 떨고 있는 백성들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식혈귀로 인해 비극이 일어난 ‘기리즈’ 마을 한복판에서 테드는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바닥에 하얀 빛의 마법진이 나타난다.

일반 마법사는 꿈도 꾸지 못하는 최상급의 마법인 ‘대지의 기억’이다. 그 장소에 있었던 일을 보여 주기에, 식혈귀의 정체를 단숨에 확인할 수 있다.

시온은 감히 사용하지 못하는 이 마법이 테드를 테레사에게 추천한 이유다.

“《대지의 기억(The Memory of Earth)》.”

마법진이 새하얀 빛을 뿜으며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그리고 테드 일행은 어느새 공포가 지배하고 있는 어두컴컴한 마을 안에 있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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