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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영혼-135화 (135/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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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식혈귀.

19. 식혈귀.

침묵이 가라앉은 밤의 마을이었다. 마을은 평소와 달리 이상하리만치 마을 곳곳에 있어야 할 마광등은 모조리 불이 꺼져 있고, 집의 창문에서 새어나오는 빛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이 마을이 인간들의 마을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우연이긴 해도 모두 불을 끄고 잠들었다는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러나 이곳은 뱀파이어의 마을이다. 그들의 생활은 저녁에서 시작되고 아침에 끝난다. 자정이 넘어가는 지금 시각에는 마을이 떠들썩해야 정상이다.

인기척이 없는 이 마을은 유령도시를 떠올리게 했지만, 결코 유령들의 마을은 아니었다. 어제 까지만 해도 마을에선 희미한 빛들이 넘쳐났다. 이변이 일어난 것은 저녁 부근이었다. 주택 내부에서 흘러나오던 빛이 하나, 둘 사라지더니 이내 마을 전체에 빛이 하나도 없어졌다. 아무리 빛을 싫어하는 뱀파이어라 하더라도 생활을 위한 최소

한의 빛은 필요했다. 지금 상황은 명백하게 이상했다.

마을의 내부, 마을의 입구에서부터 출구까지 이어져 있는 커다란 대로의 고요함을 깨뜨리는 소리가 일어났다.

다급함이 서린 가녀린 다리가, 세차게 퍼붓는 소나기같은 소리를 내며 입구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평범해 보이는 갈색머리의 소녀였다. 머리를 곱게 틀어 올려 후두부에 단단히 고정시킨 소녀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치마를 양손으로 잡아끌어 올려 치맛자락을 밟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했다.

종아리까지 드러난 다리는 구두를 신고 평소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보았다면 조신하지 못하다며 온갖 잔소리를 퍼부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소녀의 어머니는 방금전 소녀의 눈앞에서 싸늘한 시체로 변해 다시는 목소리를 낼 수 없게 되었다.

소녀의 얼굴은 땀으로 뒤범벅이었다. 여름의 무더운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러기엔 소녀는 더위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몸은 춥다고 느끼고 있었다. 치맛자락을 쥔 양손은 미세하게 떨렸고, 말라붙은 입술은 새파랗다. 다리도 쓰러지지 않은 게 용할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속도를 조금이라도 늦춘다면 당장이라도 쓰러지리라.

그때, 소녀의 등으로 차가운 금속같은 시선이 느껴졌다. 소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 볼 여유도 없으며, 자신의 등 뒤에는 공포가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돌아본 순간 어머니와 같은 최후를 맞이하리라.

공포에게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마을을 벗어나 숲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그곳도 안전하진 않지만, 2시간 거리에 커다란 도시가 있으므로 그곳에 도착한다면 공포에게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소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공포의 속도는 소녀가 예상했던 것 보다 더 빨랐다. 발소리나 숨소리같은 인기척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으나, 모순적이게도 그 절망적인 존재감은 확실하게 느껴졌다.

소녀의 시야에 조출한 목책으로 만들어 놓은 조출한 마을 입구가 보였을 때, 공포는 이미 바로 등 뒤까지 도달해 있었다.

송곳처럼 날카로운 손이 뻗어 나와 소녀의 가녀린 목을 사정없이 손에 쥐었다. 새하얀 도화지처럼 창백한 손은 소녀를 허공에 들어 올렸다. 날카로운 손톱이 소녀의 목에 파고들었다. 뜨거운 붉은 피가 밖으로 흘러 나와 소녀의 상의를 적셨다.

소녀의 다리가 허공에서 물장구를 치듯 바둥거렸다. 양손은 목을 조르는 손을 떼어내기에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손을 강하게 꼬집기도 하고 손톱으로 긁어보았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컥, 컥, 하고 소녀가 죽음의 소리를 냈다. 소녀의 다리가 축늘어지고 양팔이 저항을 포기했다. 잔뜩 커진 눈에서 흘러나온 물이 뺨을 타고 주르륵 떨어져 내렸다.

소녀의 눈동자가 위로 돌아가기 직전, 공포가 손을 놓았다. 그리고 다른 한 손이 튀

어나와 소녀의 복부를 감싸고 뒤에서 끌어안았다. 목을 조르던 손은 소녀의 머리채를 잡아 옆으로 끌었다. 피투성이의 목이 그대로 공포에게 노출되었다.

“사, 살려 주세…….”

소녀의 말이 끝마치기 전에 날카로운 송곳니가 튀어나와 목을 깨물었다. 소녀가 헉하고 한껏 숨을 들이마셨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치마가 뜨거운 액체로 젖어지며, 노란액체가 나뭇가지같은 다리를 타고 바닥으로 떨어져 고였다.

송곳니는 정상적으로 박혔으나, 공포는 그것에 만족하지 못한 듯 소녀의 목을 힘껏 깨물었다. 살점을 바닥에 뱉어내고 분수처럼 끊임없이 나오는 피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고요한 침묵 속 마을에는 목을 축이는 소리만이 울러퍼졌다.

⁂⁂⁂

힐데가르트 성에는 4개월 전에 새로운 집무실로 개조된 방이 있었다. 원래는 창고용으로 사용하던 방이었으나, 지금은 벽지를 비롯한 가구까지 싹 바뀌어 훌륭한 집무실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집무실의 주인은 힐데가르트 성에 있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아, 아아~.”

테드는 잠긴 목소리를 풀어주듯 입을 크게 벌려 자신의 목소리를 확인했다. 그리고 이내 못해먹겠다는 듯 적당히 편안한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의 의자는 2번의 시행착오 끝에 정해진 의자다. 첫 번째의 경우엔 너무 편안해서 졸음이 폭포처럼 쏟아졌고, 바꾼 2번째 나무의자는 너무 딱딱해서 등이 아팠다.

등받이에서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뒤로 한껏 젖혀졌다. 테드의 반쯤 뜬 눈에 등뒤 창밖의 풍경이 보였다. 지금 시각은 오후 1시. 한창 태양이 활발히 활동할 시기지만, 힐데가르트 만큼은 언제나처럼 검은 밤하늘이었다.

그러나 밤하늘의 일부가 찢어져 태양의 밝은 빛이 안으로 들어와 도시를 밝혔다. 아무 생각 없이 보면 환상적인 관경이었지만, 결계가 찢어진 결과임을 알고 있는 테드로선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저 결계를 고치는 일을 자신이 해야 한다.

입술을 비집고 나오려는 한숨을 간신히 삼키며 등에 힘을 주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허나 책상위에 널브러져 있는 서류를 직시하자 의욕이 급속도로 떨어졌다. 테드는 입술을 깨물며 서류 한 장을 들어 올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파오는 복잡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는 서류였다. 이 서류야 말로 집무실내에 있는 어떠한 서류보다 기밀을 요하는 서류다. 바로 힐데가르트의 결계인 ‘영원한 밤’의 마법진이기 때문이다.

테드는 이 복잡한 고대 마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이유는 물론 결계의 수리를 위해서다. 4개월 동안 시간이 날때마다 매달렸지만, 아쉽게도 소득은 전혀 없었다. 아니, 있다고 한다면 고대 마법에 대한 지식 몇 개를 얻은 것 뿐이다.

“어떻게 브류나크보다 어렵냐.”

테드가 참지 못하고 불평을 내뱉었다. 브류나크를 습득하는 것에도 이렇게 오랜 시간 정성을 쏟지 않았다. 더욱이 절망적인 것은 결계 수리의 핵심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다 힐데가르트 성에서 평생 일에 파묻혀 썩어가는 것은 아닐까.

테드가 진지하게 주반도주를 생각하고 있을 때, 집무실의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힐데가르트 성에서 생활하기를 4개월, 테드는 노크의 소리만으로 대충 상대가 누군지 가늠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 그리고 지금의 노크 소리는 힘이 들어가 있고 급한 느낌이다. 이런 종류의 노크는 시온이었다.

“스승. 들어가도 될까?”

예상대로의 목소리를 들으며 테드는 자연스럽게 마법이 걸려 있는 책상 서랍을 열어 ‘영원한 밤’과 관련된 서류를 대충 집어넣었다.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말라는 테레사의 엄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들어와.”

테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이 열리고 로브를 뒤집어 쓰고 있는 시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만, 시온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다른 한 손으로 사이나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사이나는 시온의 뒷통수를 노려보며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테드는 그 장면만으로 대충 상황을 예상할 수 있었다. 일을 하고 있는 사이나를 다짜고짜 손을 잡아서는 여기로 끌고 온 것이겠지.

“갑자기 무슨 일이야. 네 교육시간은 아직 멀었을 텐데.”

테드의 업무 중에선 시온을 성심성의껏 가르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테레사가 직접 부탁한 것으로 테드를 이용해 뛰어난 마법사를 육성할 계획인 것이다. 테레사의 부탁도 있고, 그간 소홀히 대한 것도 있기에 최근 테드는 군말 없이 시온의 스승노릇을 똑똑히 하고 있었다.

“힐데가르트 각하의 명령이야. 나랑 베이키리아에 가야해.”

사랑스러운 제자가 또 귀찮은 일을 물어왔다.

“……베이키리아가 뭔지는 둘째 치고,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 보다 수십 배는 바빠.”

만일 시온이 뭐가 그리 바쁘냐고 묻는다면 테드는 자신의 업무에 대해 차근차근 공들여 설명해줄 용의가 충분히 있었다. 시온의 작은 입을 바라보며 질문을 기다리고 있자니, 드디어 입술이 열렸다.

“그저께에 사이나와 함께 여름축제에 갔다 왔다며?”

“…….”

“그그저께는 최고급 레스토랑 탐방?”

“네가 받은 명령에 대해서 당장 설명해.”

일주일 전의 일이 그녀의 입에서 나오기 전에 서둘러 말했다. 테드는 내심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분명 은밀하게 움직였는데 어떻게 시온이 알고 있을까.

“따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각하의 명령이 우선이니 이번만 넘어갈게.”

그녀는 열린 집무실의 문을 닫고 나서야 사이나의 손을 놓아 주었다. 그리고 로브 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낸다.

“이건 베이키리아 근처 마을에서 일어난 일을 정리한 보고서 중 일부야. 보고서의 작성자는 베이키리아의 귀족이고.”

서류를 받아든 테드가 내용을 훑었다. 빠르게 마지막 한 문장까지 읽은 테드는 시온에게 다시 서류를 주었다.

“이 사건은 내가 할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서류에는 ‘기리즈’라는 마을사람 120명이 하루 사이에 몰살당한 암울한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마법사인 테드가 나설 일은 아니었다.

“사건을 맡은 경비병들과 나이트워커는 상대가 한 명이라 생각하고 있어. 피해자는 모두 목에 물어뜯긴 상처가 있고 피가 빨린 모습이라 범인을 ‘식혈귀’라 부르며 주민들이 두려워하고 있어.”

“내가 나서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잖아. 나는 경비병도 아닐뿐더러 탐정도 아니야.”

일이란 자고로 합당한 사람이 있다. 치료사가 건설일을 하지 않듯, 마법사가 사건을 수사하는건 기본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범인이 마법을 사용했더라면 몰라도 마법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문장은 단 한 줄도 없었다.

“힐데가르트 각하는 내게 스승과 함께 이 사건을 해결하라고 명령했어. 뭣하면 힐데가르트 각하를 여기에 데려올까?”

한없이 진지한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테드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데려올 것 같았다.

“알았어. 알았어. 하면 되잖아. 하면.”

사실 테드는 시온이 테레사를 언급한 순간 이 일을 맡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저 혹시 모르기에 반항했을 뿐이다. 반항은 혹시 모르는 것으로 끝났지만.

“그런데 힐데가르트 님은 왜 내게 이 사건을 해결하라 한 거야?”

시온이 침묵했다. 그리고 이내 배시시 웃었다. 최근 테드와 반대로 편안하게 생활한 탓인지 다크서클도 사라지고 피부에도 윤기가 도는 그녀의 미소는 아름다웠다.

“내가 스승을 추천했어. 스승은 다재다능하잖아?”

“……사이나. 한 대 때려.”

주인의 명령에 사이나는 망설이지 않고 주먹을 쥐고서 시온의 머리에 쥐어박았다. 너무 빠른 동작에 시온은 막지도 피하지도 못했고, 쿵하는 소리가 그녀의 정수리에서 울러 집무실을 가득 채웠다.

시온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테드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건을 해결할 자신 따윈 없었다.

시온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테드는 풀리지 않는 일로 인해 답답한 기분을 시원한 바람을 맞아 풀 겸 나가는 것이다.

“미리 말해두겠는데, 나라고 해서 전부 할 수 있는 건 아니야.”

“스승이 약한 소리를 할 줄은 몰랐어.”

“약한 소리가 아니라 사실을 말한 것뿐이야.”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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