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결한 영혼-134화 (134/277)

134====================

18. 힐데가르트의 드래곤

아무리 어두컴컴한 밤이고, 드래곤이 칠흑같은 검은색이라지만 하늘에는 별들이 촘촘하게 박혀있고 뱀파이어는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밤눈이 맑다. 더군다나 존재감을 있는대로 뿜어내며 하늘을 나는 드래곤을 못 알아 볼 리가 없다.

도시 힐데가르트는 그야 말로 난리가 났다. 드래곤을 확인한 뱀파이어들은 테레사 힐데가르트가 처리할 것임을 믿으면서도 만에 하나 가능성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상상했다. 몇몇 뱀파이어들은 피난을 준비했고, 몇몇은 멸망의 징조라며 아연실색하며 주저앉았다. 그리아 소수의 뱀파이어들은 드래곤이 향한 힐데가르트의 성으로 움직였다. 모험가 혹은 병사 출신의 그들은 스스로를 희생해 힐데가르트를 지킬 생각이었다.

시민들의 반응이 제각각 다르듯, 힐데가르트의 귀족들의 반응도 제각각 달랐다. 찢어지는 비명을 내지르며 사방으로 도망치려는 귀족과 병사를 애타게 부르는 귀족, 몸을 타고 올라오는 두려움에 몸이 굳어 제 자리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귀족. 그리고 맞서 싸우려는 귀족.

혼란이 멈추지 않고 가중되어갔다. 그리고 이때, 테레사 힐데가르트가 큰소리로 외쳤다.

“진정하세요!”

순간 혼돈이 멈췄다. 마법, 그 중에서 악질적인 저주라고 할 수 있는 드래곤 피어의 효과가 그녀의 목소리 한 번에 어느 정도 풀렸다.

귀족들의 시선이 테레사에게 꽂혔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테레사는 귀족들에게 시선을 주는 대신 하늘에 떠있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검은색 드래곤을 바라봤다. 검은색 드래곤, 그 크기와 모습은 기억 한구석에 있는, 전해들은 창고 입구에 있는 드래곤의 모습과 일치했다.

“우선 싸울 수 없는 귀족들은 모두 성의 안으로 대피하세요. 그리고 성 안팎의 병사

들을 모아 주세요. 싸울 수 있는 귀족들은… 저와 함께 이곳에 남습니다.”

“적어도 각하께서는 이곳에서 도망쳐야 합니다!”

“아뇨. 저는 여러분들의 지도자. 어떤 상황에서도 도망칠 수 없습니다.”

테레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한쪽 구석에 있는 테드를 바라봤다. 테드와 눈이 마주쳤다. 테드가 어색하게 웃을 때, 테레사는 조금도 웃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가 느껴지는 눈빛으로 테드를 한 차례 바라보고서 다시 드래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연회장 사방에서 병사들과 나이트 워커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키메라 드래곤이 하늘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의아했으나, 덕분에 큰 희생없이 전투를 치룰 수 있게 되었다. 아무리 드래곤이라 해도 수의 폭력 앞에서 쓰러질 것이 분명했다.

테레사가 전투 진형을 잡는 병사들에게 어떤 명령을 내려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에, 연회장의 끝에서 조용히 와인을 즐기고 있던 채린이 헐레벌떡 테레사의 앞으로 뛰어왔다.

테레사는 이 긴박한 상황 중에서도 딸이 매우 당황한 표정을 보는 것이 얼마만인지 가늠했다. 5년 만이었던가.

“어머니! 아닙니다!”

테레사는 당연히 그녀의 두서없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채린은 무질서한 기둥처럼 서있는 귀족들 사이를 요리조리 잘도 움직이며 테레사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돌연 무릎을 꿇었다. 바닥과 부딪힌 무릎에서 쾅하는 범상치 않은 소리가 울렸다.

“……갑자기 무슨 짓이니?”

테레사가 미간을 좁히며 딸의 갑작스런 이상행동에 관해 생각할 때, 도망칠 기회를 엿보고 있던 테드가 시온과 사이나의 손을 잡아 이끌어 채린의 옆에 도착했다. 그리고 테드는 다짜고짜 무릎을 꿇었다. 시온의 경우엔 얼떨떨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고,

사이나는 꿇지 않았다. 무릎을 꿇을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테드의 채근의 못이겨, 정말 하기 싫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천천히 무릎을 땅에 밀착시켰다.

드래곤이 나타난 상황에서 무릎 꿇은 4명은 그곳의 시선을 모조리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테레사는 그들이 무릎 꿇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니, 하늘에 떠있는 드래곤을 생각하면 간단히 유추할 수 있었다.

“그대는 제게 거짓말을 했군요.”

테드는 무언가 말하기 위해 입을 뻥긋 벌렸다가 소리를 내지 못하고 다물었다. 무어라 변명하기란 쉽지만, 여기까지 와서 변명하면 구차할 뿐이다, 라고 생각했다. 거기에 상대방의 입장에선 변명은 화를 돋을 뿐이다.

“아닙니다. 어머니. 그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테레사는 이해했다.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고. 그녀는 슬쩍 하늘을 살폈다. 키메라 드래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노란 눈동자로 내려다 볼 뿐이었다. 공격하지 않는 드래곤에게 몇몇 귀족들도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겠니?”

“전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전투를 미뤄주십시오.”

“…….”

아무리 사랑스러운 딸의 부탁이라도 주저될 수밖에 없는 부탁이었다. 전투는 먼저 공격하는 자가 유리하고, 드래곤이 계속 하늘 위에 떠있으면 시민들의 불안감을 증폭시킬 것이다.

그러나 채린의 말을 무시하기에는 너무나도 절박해보였다. 결국 테레사는 드래곤이 조금이라도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다면 망설임 없이 전투를 벌이겠다고 생각하며 그녀의 말을 듣기로 했다.

채린이 7년전 보물 창고 안에서 발견한 것부터 테드와의 이야기까지 모조리 설명했다. 물론 보물 창고의 보물을 빼돌린 것에 대해선 함구 했다. 그거 까지 말한다면 테드가 당장 여기서 사형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채린의 설명에는 약간의 각색, 거짓말이 있었다. 예를 들면 키메라 드래곤, 우라크가 저항을 하는 바람에 창고의 입구가 박살난 것. 정도의 아주 작은 거짓말이었다.

“…….”

이야기를 전부 듣고 난 후 테레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주변에 있던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야기에 따르면 저 키메라 드래곤, 우라크는 채린의 애완동물이나 다를 바 없으니까. 그 위험성은 사냥개 이상이지만.

“그러니까 낮에 보았던 그 검은 고양이가… 저 드래곤…?”

테레사가 미간을 좁히며 묻는 말에 테드가 고개를 들어 대답했다.

“마법으로 일시적으로 모습을 변환시켰지요. 덩치가 너무 커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하 통로에서 빼낼 수 없었어요.”

“그대는 말만 번지르르한 사기꾼인 줄 알았는데… 마법 실력만큼은 진짜군요.”

드래곤을 고양이로 바꾸는 마법은 들어본적도 없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마법이다. 그러나 눈으로 고양이를 확인한 테레사로선 믿을 수밖에 없었다.

“채린. 네 말은 저 드래곤… 그러니까 우라크가 조금도 위험하지 않다는 거니?”

“예. 어머니. 우라크는 위험하지 않습니다. 먼저 공격하지만 않는다면… 우라크가 먼저 이빨을 드러낼 일은 없습니다.”

“내 등에는 힐데가르트 시민들의 목숨이 달려 있단다. 아무리 네 의견이라도 맹목적으로 신뢰 할 수는 없구나.”

채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브리언트에서 여기까지 날아온 우라크에게 미안하지만, 다시 브리언트로 돌아가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잠시, 발언을 해도 괜찮을까요?”

테드가 무릎을 꿇은 자세로 손을 들고 말했다. 테레사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저건 일반 드래곤이 아니에요. 낮에도 설명했듯이 악마가 인공적으로 만든 키메라 드래곤이죠. 아마, 우라크는 공녀님의 명령이면 죽는 시늉도 할 거에요. 공녀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있으니까요.”

“그대의 말이라면 안전하겠군요. 하지만 그대의 말을 어떻게 믿죠?”

테레사의 불신은 당연한 것이다. 그녀는 이미 테드에게 한번 속은 적이 있다.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멍청이다.

“채린 공녀님의 몸속에 우라크와 똑같은 마력이 있어요. 공녀님은 수련 중에 우연히 각성했다고 말했지만…, 제가 볼 때는 일종의 증표에요. 우라크의 주인이라는 증표

말이죠.”

테드는 이어서 말을 이었다. 솔직히 키메라 드래곤에 대한 정보는 적기에 확신할 수는 없는 말이다. 증표같은 깊은 의미는 없고 단순히 채린이 우라크에게 영향을 받아 마력을 각성한 것 뿐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워프 게이트를 통해 브리언트로 갔어요. 상식적으로 생각해 우라크가 찾아오는 것은 불가능하죠. 그러나 우라크가 공녀님의 마력을 느끼고 찾아왔다면 전부 설명이 가능해요.”

“채린의 마력이 그 증거라는 것이군요.”

테레사는 마력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밑에는 뛰어난 마법사가 있었다. 그들을 이용하면 테드의 말의 진위여부를 순식간에 밝혀낼 수 있다.

“테레사 님도 ‘드래곤 나이트’를 알고 계시지요? 채린 공녀님은 드래곤 나이트가 될 수 있습니다. 아마도 현재 네메스 대륙에서 유일한 드래곤 나이트죠. 드래곤이라는 병기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죠. 미래를 생각해보면 우라크를 기르는 것이 더 이득이죠.”

이득이라는 부분에 악센트를 주어 말했다. 슬프게도 테레사는 거의 본능적으로 이해득실을 따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 손해는 없었다. 전설속에서나 나오는 ‘드래곤 나이트’라면 시민들도 경의를 품고 채린을 볼 것이다. 그리고 힐데가르트에는 수호룡이 있다고 소문이 날 것이고. 그 외에도 얻는 이득이 많다.

테레사는 채린과 테드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좋아요. 그 의견을 수렴하도록 하죠.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테레사는 우라크를 힐끗 올려다보았다. 힐데가르트 성 주위를 선회하며 돌고 있었다. 보기에 따라 위협적으로도 보이지만, 다르게 보면 주인을 기다리는 애완동물을 떠올리게 했다.

“그대에게는 제 부탁에 대한 보수를 주었지요.”

“그건 지금이라도 돌려 드릴게요.”

“아뇨. 괜찮아요. 대신, 그대는 힐데가르트에서 일해 주어야겠어요. 적어도 우라크

가 결코 힐데가르트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때 까지요. 거기에 저는 당신의 힘을 브리드론을 위해 사용하고 싶군요.”

채린과 짜고서 사기를 쳤을지언정 그 실력만큼은 진짜다. 마도사 이상의 실력을 가진 그를 그냥 보내는 것은 굉장히 아까웠다. 이런식으로 묶어 둘 수 있다면 좋았다.

“……저는 할 일이 있어요. 적어도 내년에는 브리드론을 떠나야 해요.”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었다. 지금은 4월, 내년까지 제법 많은 시간이 남았다. 마도사 경지에 이른 실력자를 돈으로 고용하면… 10,000골드는 조금 많았다.

그러다 테레사의 눈에 어느 한 시점에 집중되었다.

지금 시각은 새벽, 아무리 밤이 길다지만 그 한계가 있었고, 채린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었다. 그러나 힐데가르트에는 해가 뜨지 않는다. ‘영원한 밤’이라는 결계가 해를 가리고 항상 밤을 유지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하늘의 일부에 밝은 푸른색의 빛이 힐데가르트의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테레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차근차근 생각해보면 우라크가 도시의 안으로 침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영원한 밤이라는 결계가 지키고 도시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우라크는 자신을 막는 결계의 장벽을 브레스로 찢어버리고 들어온 것이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테레사는 결계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 밖에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계는 고대 마법이다. 평범한 마법사는 수리할 수도 없다.

그때 테레사의 두 눈에 무릎 꿇고 앉아 있는 테드가 보였다. 테드도 하늘을 보고 한 껏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겨, 결계를 수리해 주신다면 곧바로 브리드론을 떠날 수 있게 해드리겠어요.”

테레사가 더듬으며 말했다. 드래곤의 출몰보다 결계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더 충격이었다. 테드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적인 마법이라면 몰라도 고대 마법의 경우에는 자신이 없었지만, ‘영원한 밤’에 관해서는 흥미가 있었다.

사실 그녀의 조건을 군말 없이 받아들인 이유는 만일의 경우 도주하면 된다는 무책임한 생각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테드는 한동안 힐데가르트에 머물게 되었고, 채린은 드래곤 나이트로 많은 시민과 귀족들에게 경의를 받았으며, 우라크는 힐데가르트의 드래곤이 되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