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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힐데가르트의 드래곤
“우라크.”
채린이 나직이 드래곤의 이름을 불렸다. 우라크는 그에 반응하듯 목을 한 차례 울렸다.
“난 더 이상 널 보살펴 줄 수 없다.”
그 성장이 적당한 시점에서 멈췄다고 해도 언젠가는 우라크를 밖으로 보내야 했다. 내보내기 싫다는 이기적인 감정이 없잖아 있었지만, 언제까지나 감옥 같은 지하 통로에서 살게 할 수는 없다. 이미 7년이나 그곳에 살게 해두었다. 채린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미안함을 가지고 있었다. 우라크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세상을 두리번거릴 때 마다 미안함을 더 커졌다. 조금 더 빨리 내보내주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긴말하지 않겠다.”
구구절절하게 말할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우라크가 똑똑하다고 해도 단어하나하나의 의미를 알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고, 어째서 인지 머리가 멍한 느낌이다. 하고 싶은 말은 있는데 떠오르지 않았다.
채린은 떨리는 입술이 느껴져 살짝 깨물었다. 오른손을 척하고 들어 나무가 우거진 산
을 가리킨다.
“가라. 이제부터 저곳에서 자유로이 살아라.”
브리언트 산맥에는 몬스터가 많기 때문에 우라크를 만나기 위해 다시 이곳으로 찾아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채린의 신분상 성을 벗어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우라크의 날카로운 머리가 채린의 손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하지만 곧장 그곳으로 가지 않고 힐끔힐끔 채린을 보며 머뭇거리고 있었다. 망설이는 그 모습은 채린과 떨어지기 싫은 눈치였다.
“…….”
호통을 쳐 다그칠까. 아니면 달래듯 다시 말할까. 채린은 망설였지만, 결국 입을 떼지 못하고 우라크의 황금빛 눈동자만을 바라봤다.
무언의 재촉에 우라크는 어쩔 수 없다는 양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걸음 발을 내딛자 육중한 무게로 인한 충격이 주변으로 퍼졌다. 걸어서 떠나려는 드래곤을 보며 채린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우라크. 어렸을 적, 네가 공중을 날았던 것을 기억하나?”
그건 우라크가 작았을 적의 이야기다. 그 작은 체구에 달린 검은 날개로 창고 앞의 마음껏 날아다녔다. 그러다 서서히 몸집이 커지면서 날게 되는 것이 불가능했다. 날개는 몇 년이나 사용하지 않았지만, 훌륭하게 성장해주었다.
채린은 날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걸어서 브리언트 산맥으로 향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혹시 날개를 사용하는 방법을 잊어 먹은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채린의 말을 알아들은 것일까. 우라크는 등에 접혀 있던 날개를 활짝 펼쳤다. 검은 피막의 날개가 한 차례 크게 날갯짓 했다.
강력한 폭풍이 사방으로 몰아쳤다. 몸이 가벼운 시온의 경우 비틀거리며 5M정도 뒤로 물러날 정도다.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테드의 경우 양 다리가 살짝 허공에 떴었다. 뒤에 사이나가 그의 어깨를 잡아주지 않았다면 분명 날아갔으리라.
채린은 양다리에 힘을 준채 바람을 버텼다. 눈도 감지 않은 채 우라크를 바라봤다.
우라크는 몇 번이나 거대한 바람을 일으키고서야 겨우 공중에 뜰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랜만의 비행이 쉽지 않은 듯 육중한 몸이 기우뚱거렸다.
채린은 조마조마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곧 있으면 떠난다. 다시는 만날 수 없으리라. 이걸로 괜찮은가? 스스로에 대한 물음에 정답을 내기 전에 지면이 흔들렸다. 처음에는 우라크의 움직임 때문이라고 했으나, 지진은 시간이 갈수록 커졌다. 무언가가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지진이 극에 달했을 때, 지면에서 갈색의 지룡이 아래에 튀어나와 우라크를 향해 입을 쩍 벌리고 달려들었다. 하얗고 날카로운 수 십개의 이빨이 우라크의 뒷다리를 노렸으나 아쉽게도 우라크는 이미 공중에 날아가 있었다.
공격에 실패한 지룡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쿠웅 하는 소리가 주변에 울렸다.
지룡의 외견은 어딘가 악어와 닮아 있었다. 짧은 4개의 다리와 비교적 납작한 몸이 그렇다. 다만, 앞발 2개의 경우엔 악어보다는 두더지에 앞발과 닮아 있었다. 그렇다 해도 높이는 6M에 길이만 15M에 필적하는 거대한 놈이다. 등에는 날개가 있지만, 몸에 비하면 작은 날개다. 지룡은 주로 땅속에 있다 보니 날개가 퇴화되어 날지 못 한다.
그 대신이라고 할까. 땅속에선 두더지처럼 빠르게 움직일 수 있고, 점프력도 상당하다.
달리 그라운드 드래곤이라 불리기도 하는 지룡은 공중에 떠있는 키메라 드래곤을 향해 포효했다. 시끄러운 고음이 테드 일행의 고막을 때렸다. 드래곤 피어가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아, 그러고 보니 브리언트 산맥에는 지룡이 살고 있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지.”
거대한 소리에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테드가 말했다. 슬그머니 테드의 옆으로 다가온 시온이 보기엔 어딘가 즐거워 보였다. 마치 뜻하지 않은 행운을 맞은 것처럼. 예를 들면 길가다가 우연히 돈을 주운. 그런 느낌이었다.
“지금 이 상황 상당히 위험하지 않아?!”
시온이 다급하게 말했지만, 테드는 여유로운 태도였다.
“지룡이 튀어 나올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는데… 아마, 여기가 지룡의 영역인가 봐.
본능적으로 키메라 드래곤의 존재감을 느끼고 영역을 지키기 위해 공격한 거겠지.”
테드가 느긋하게 분석하듯 말했다. 그의 말대로 지룡은 자신의 영역에 침범한 적을 처리하기 위해 튀어나왔다. 대부분의 드래곤은 영역에 민감하고 침범하는 적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
시온은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억지로 진정시키며 지룡과 가까운 곳에 있는 채린을 보며 악을 쓰듯 외쳤다.
“공녀님!! 얼른 이쪽으로 오세요!!”
그러나 시온의 목소리는 이어서 들리는 드래곤 하울링에 묻혀서 채린에게 닿지 못했다. 공중에 날고 있는 우라크가 내지른 것이다. 지룡의 포효보다 더 커다란 목소리였다.
“스승! 스승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야?! 이러다 공녀님이 위험해!”
“진정해. 공녀님이 가까이 있긴 한데 지룡은 우라크를 노리고 있어. 공녀님은 안중에도 없을 걸. 게다가 이건 영역 전투야. 내가 나서기엔 뭣한 생태계의 당연한 일이지.”
지룡은 키메라 드래곤의 거대한 체구에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체격 차이를 봐. 우라크가 배는 크고 공중을 날기까지 하지. 거기에 마력까지 사용한다면 우라크가 질래야 질수가 없어.”
지룡이 바닥을 박차고 높이 뛰어올랐다. 짧은 팔과 다리로부터 도약했다곤 믿을 수 없는 높이였다. 지룡은 우라크를 향해 꼬리를 채찍처럼 휘둘렀다. 몸의 회전력이 들어간 꼬리는 치명적인 위력을 품고 있을 것이다.
다만, 테드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우라크는 지하 통로에서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다는 점이다. 전투를 몇 번 치루었지만, 좁은 곳에서 치루는 제대로 된 전투도 뭣도 아니었다. 전투 경험이 압도적으로 부족했다.
지룡의 꼬리가 우라크의 옆에 작렬했다. 우라크의 거대한 몸체가 크게 흔들리고 결국 바닥으로 떨어졌다. 흙먼지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뒤늦게 지룡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지룡은 곧장 우라크를 향해 뛰었다. 그 목숨을 끝장내기 위해서다.
“일어서라!!”
채린이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며 외쳤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주변에 울렸다. 평범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녀가 이제껏 사용하지 못한 마력이 상황의 긴박함과 초조함에 따라 조금이지만 목소리에 묻어나왔다.
우라크는 채린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든 듯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달려오는 지룡을 향해 꼬리를 휘둘렀다.
흙먼지 탓에 시야의 대부분이 가라져 있었기에 지룡은 우라크의 꼬리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정면으로 받았다.
지룡의 몸이 초원을 굴렀다. 쿵쿵, 하는 지진이 흔들렸다. 지룡은 약 150M 정도 튕겨나간 후에서야 네발로 땅위에 설수 있었다. 지룡이 크르렁 거렸다. 꼬리를 맞은 어깨 부위가 약간 함몰되어 있었다.
“우라크! 나는 어떤 적이라도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누누이 말했다!”
상대를 경계하듯 가만히 있는 우라크를 향해 채린이 호통 쳤다. 채린의 말을 알아들은 것일까. 우라크가 날개를 펼쳐 하늘위로 떠올렸다. 지룡은 섣불리 달려들지 못했다. 우라크의 힘을 체감한 직후다. 그러길 힘들었다. 다짜고짜 덤비는 것은 꺼려졌다.
결국 지룡이 선택한 것은 숨을 한껏 들이 마시는 것이었다. 배가 위험할 정도로 볼록해지는 것을 보고 테드는 자신이 개입해야 하나 일순간 망설였다. 그러나 뒤이은 채린의 말에 개입할 여지가 없음을 알았다.
“우라크! 브레스다! 처음 시도하는 것이지만, 내가 가르쳐준 대로 해라!”
채린의 말에 따라 우라크가 입을 벌리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채린은 우라크가 드래곤이라는 것을 깨달은 뒤로 어느 정도 훈련을 시켰다. 지하 통로가 부서지지 않는 한해서 말이다. 힐데가르트의 주민의 느낀 지진의 원인이 바로 그것이었다.
브레스를 사용하는 것은 처음이지만 숨을 들이마셔서 내뱉는 것을 가르쳐 준적이 있었다. 물론 숨을 들이마시는 것 까지 밖에 훈련시키지 않았다. 정말 브레스가 뿜어지면 지하 통로는 맥없이 무너질게 뻔하기 때문이다.
배가 볼록해지는 우라크의 모습을 보며 도박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숨을 마시고 내뱉는 것 까진 가르쳐주었지만, 그것만으로 브레스가 발동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지룡의 입에서 투명한 《헤비 브레스(Heavy Breath)》뿜어져 나와 허공을 가르며 우라크를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우라크에게 직격하기 직전, 아슬아슬한 타이밍에서 우라크의 브레스가 발동했다.
《다크 브레스(Dark Breath)》. 시커먼 어둠이 그대로 우라크의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 지룡의 헤비 브레스를 간단히 파쇄하고 직선으로 쭉쭉 뻗어나가 지룡의 몸에 도달했다.
지룡의 몸이 한 순간에 소멸했다. 다크 브레스에 닿자 말자 저항한번 못해보고 그대로 지워진 것이다. 다크 브레스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뻗어나갔다. 땅에 닿으면 그대로 땅이 사라졌고, 나무가 막아서면 나무가 사라졌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다크 브레스 한 방에 산의 일부가 소멸했다.
“…….”
테드는 그 위력을 보고서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약간의 침묵 뒤 사이나에게 질문했다.
“악마는 네메스 대륙에서 힘의 제한을 먹지? 그건… 악마에 한정 된 거야? 마수는 전혀 제한을 받지 않고?”
“아뇨. 마수라도 네메스 대륙에선 시스템의 제한을 받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엔 저 키메라 드래곤은 제한을 받은 것 같지 않군요.”
“…….”
짐작 가는 것이 하나 있었다.
우라크는 알 상태에서 소환되었다. 태어나기 직전에 소환 된 것이면, 시스템의 제한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고 테드는 조심히 생각했다.
우라크는 채린의 앞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말만 사뿐이지, 그 무게로 인해 지면이 한차례 비명을 질렀을 정도다.
우라크가 채린의 앞에 머리를 숙였다. 채린은 그 뜻을 알고서 피식 웃었다. 그는 손을 뻗어 우라크의 거대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언젠간 꼭, 산맥의 몬스터를 상대할 수 있게될 정도로 강해지면 다시 널 만나러 오
겠다. 그러니… 그때까지 건강해야 한다.”
채린이 어렴풋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우라크는 그녀의 손길을 느끼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한편, 테드는 지룡이 있던 곳을 보고서 울상을 지었다. 다크 브레스로 인해 지룡의 몸은 소멸했다. 시체의 일부를 남겼으나, 꼬리의 끄트머리가 전부였다.
“제길! 난 왜 행복할 수 없는 거야?!”
차오르는 분통함에 자신의 가슴을 퍽퍽 때렸다.
⁂⁂⁂
테레사 힐데가르트가 준비한 연회 속에서 테드는 입을 통해 나오려는 하품을 간신히 참았다. 3시간 정도 밖에 못잔 것이 주된 이유이며, 연회자체가 지루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마음에 드는 것은 이번 연회가 성의 밖, 정원에서 실행되었다는 점이다. 시원한 새벽바람과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이 없었다면 저도 모르게 잠들었을 지도 모른다.
테드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찾아온 뱀파이어 귀족들은 노골적으로 옆에 있는 사이나에게 호기심을 드러냈다. 물론 사이나는 언제나처럼 냉담하게 그들을 대했다. 귀족들 중 사이나와 10초 이상 대화한 인물은 적었다. 그나마 30초가 최고 기록이었다.
“스승. 드래곤 나이트라고 알아?”
토마토 주스를 와인잔에 담아 홀짝이고 있자니, 대뜸 시온이 찾아와 말했다. 하얀 드레스 차림의 그녀는 평소와 달리 아름다웠다. 새벽이라 그런지 아니면 화장으로 가려서인지 피곤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알고 있어. 옛날이야기잖아. 그거.”
“……옛날에는 말 대신 드래곤을 타고 다니는 기사가 있었어. 그들은 기사들의 꿈이라고 불렸지. 그런데 어느 날부터, 시스템이 개입 하고나서 용을 조련하는 방법이 사라졌어. 스승은 그 방법이 뭐라고 생각해?”
“몰라. 마인드 컨트롤?”
테드는 생각나는 대로 지껄였다. 시온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는 드래곤 나이트가 드래곤과 친구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마법사에 어울리지 않는, 너 답지 않는 말이네.”
테드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은 몬스터 중에서도 가장 흉포하다고 알려져 있다. 알에서 막 태어난 드래곤을 정성껏 길러도 어느 시기에 도달하면 곧장 주인을 뿌리치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다. 더럽게 매정한 놈들이기도 했다.
“우라크와 공녀님을 보고 어쩌면 드래곤 나이트가 다시 나타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어.”
“…….”
테드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 또한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라크는 키메라 드래곤, 일반적인 드래곤과 다른 드래곤이다. 악마가 이용하기 위해 만든 드래곤이니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그렇다 해도 그 키메라 드래곤은 지금 브리언트 산맥의 패자가 되어 군림하고 있을 것이다.
테드는 와인잔에 담긴 토마토 주스를 우아하게 마시기 위해 턱을 위로 치켜들었다. 그리고 우연히도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검은색 선을 발견했다.
테이블 위에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붉은 액체가 찰랑거렸다.
테드는 어딘가 해탈한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 망했다.”
사이나와 시온이 그 말을 이해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힐데가르트의 상공에 거대한 칠흑의 드래곤이 힘찬 날갯짓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반갑다는 듯 우렁찬 포효를 내질렀다.
힐데가르트는 단숨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