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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영혼-131화 (131/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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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힐데가르트의 드래곤

테드에게 있어 실망스러운 얘기지만 보물 창고에는 복용하는 약이나 희귀한 음식물 같은건 없었다. 비싼 물건, 예를 들면 금으로 만들어진 검이나 큼지막한 보석이 박힌 장신구와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는 미술품 등이 있었다.

창고의 안은 넓었다. 분명 창고 앞을 지키는 키메라 드래곤, 우라크 때문에 청소를 하지도 못했을 텐데도 먼지 한 톨 없이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마법이 걸려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알고는 있겠지만, 여기 있는 것들 중에서 딱 한 가지만 가져갈 수 있다.”

품에는 고양이를 안고, 두 눈을 부릅뜬 채린이 테드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부정행위는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테드는 그녀의 말에 수긍하며 창고의 안으로 움직였다. 특이하게도 창고의 중심에는 말라비틀어진 나무가 하나 있었다. 나무는 갈색이 아닌 붉은빛을 띠고 있었으며 당연히 나뭇잎 같은 생명력이 느껴지는 건 전혀 없다.

채린은 테드의 뒤를 쫄래쫄래 뒤따랐다. 다른 두 명은 그렇다 쳐도 가장 먼저 감시하고 의심해야 할 인물이 그녀가 생각하기에 테드였다. 그가 허튼 짓을 하지 않게 감시해야 했다.

“웬 나무 장식물이… 아니, 장식물이 아닌가. 이건…….”

이 창고 안에 있는 것들 중 순수한 장식물은 하나도 없다. 장식을 할 이유가 없으며, 설령 있다고 해도 상상이상의 가치를 지닌 보물 일 것이다. 창고 중심에 떡하니 있는 말라비틀어진 나무를 향해 고결한 눈을 발동한다.

나무에 대한 정보가 테드의 눈에 보였다.

“이건 죽은 블러드 우드다.”

테드의 뒤에서 채린이 말했다. 그녀는 어렸을 적 어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고 있었다. 네메스 대륙에는 블러드 우드라는 특별한 나무가 있었다. 사람 혹은 짐승의 피를 흡수해서 성장하는 나무다. 듣는 것으로는 무시무시한 몬스터 인 것 같지만, 블러드 우드는 몬스터가 아니기에 생명체를 공격하거나 하지 않는다. 그저 남달리 피를 잘 흡수하는 것 뿐이다.

“블러드 우드 자체가 희귀하고, 이 블러드 우드는 ‘진조의 피’를 흡수 했기에 상징적인 보물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블러드 로드로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마법적 재료로 사용하는 것이 전부다. 연구에 환장한 마법사에겐 비싸게 팔 수 있을 테지만, 냉철히 생각하면 보물이라 불릴 정도는 아니었다.

“아, 그렇군요.”

테드는 블러드 우드의 주변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보물이 있었다. 뛰어난 마법이 걸려 있는 검도 있었으며, 웬만한 마법 정도는 무시해버리는 방어구도 있었다. 착용한 것만으로 능력치를 올려주는 장신구도 있었다. 그러나 테드의 마음을 끄는 것에는 불가능했다.

테드는 창고 안을 돌아다녔다. 그 뒤를 따르던 채린도 자연스레 창고 안을 걸어야 했다.

“……슬슬 고르면 안 되나?”

보물을 선택할 기색이 보이지 않았기에 먼저 지쳐버린 채린이 말했다. 검은 고양이로 변한 우라크는 하품을 쩍 하며 반쯤 감은 눈을 하고 있었다.

“보물들이 너무 기대 이하라 못 고르겠네요.”

채린이 뺨이 경련했다. 보물 창고의 보물이 기대 이하라는 말이 좋게 들리리가 없었다. 그녀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최대한 담담하게 말을 하려고 노력했다.

“안목이 너무 높군. 적당히 아무거나 골라라.”

그녀의 말투가 공격적으로 변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뒤늦게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은 테드는 채린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도 그렇게 화난 것 같지는 않았다.

테드는 입구 쪽으로 다가가 30cm 정도 되는 피리를 손에 집었다. 검보라색의 피리는 그 독특한 색깔 때문인지 불길함이 느껴졌다.

“……그걸로 정했나?”

“아뇨. 그냥 확인해본 것뿐이에요. 공녀님은 궁금하지 않으세요? 이 보물이 뭔지.”

채린이 피리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외형은 평범한 피리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 자신이 악기에 대해 문외한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보물이 뭔지는 나도 모르겠군.”

“그럼 질문을 조금 바꿔서.”

테드가 한 손에 쥔 피리를 허공에 던졌다가 받았다. 그의 스킬이자 눈인 ‘고결한 눈’은 투시는 물론이고 물건을 감정할 수 있었다.

“키메라 드래곤, 우라크는 알에서 태어났다고 했죠. 그 알은 보물 창고에서 발견했고. 공녀님은 알이 없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있었다고 했죠. 누군가 갖다 놓았다고 했죠? 그럼 그 누군가가 누군지, 어떻게 마계의 생물인 키메라 드래곤의 알을 갖다 놓았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보물 창고에 올 수 있는건 나와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의 최측근들 뿐이다. 나는 그들이 갖다 놓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들은 드래곤의 알이란 것을 모르고 갖다 놓았으리라. 채린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에 보물이 아닌 알을 왜 창고 안에 갖다 놓은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자신만의 세계에 빠지려는 순간 테드가 피리를 탁하고 원래 있던 자리에 내려놓았다.

“이 피리는 이계의 물질을 무작위로 소환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어요. 제가 생각하기에 여기 있는 보물 중에서 가장 좋은 보물이이에요. 사용 횟수 제한이 끝나서 이젠 그냥 평범한 피리일 뿐이지만요.”

“즉, 너는 어머니의 최측근 중 한 명이 그 피리를 사용해 알을 소환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피리는 부는 것만으로도 발동해요. 호기심으로 사용했든, 어떤 목적으로 사용했든 피리에 입을 대고 불지 않으면 발동하지 않죠.”

“내 생각엔 실수 인 것 같군.”

채린이 말했다. 일부러 소환했다면 굳이 알을 내버려 둘리가 없다고.

“이건 진짜 제 생각인데. 타이밍이 나빠서 알을 소환한 직후 공녀님이 창고의 안으로 들어온 거 아닐까요? 당황한 소환자는 창고 안에 몸을 숨겨 그 장면을 지켜보았고

요.”

채린의 팔뚝에 으슬한 소름이 훑고 지나갔다. 자신이 있는 공간에 누군가가 숨어서 지켜보았다고 생각하니 약간의 두려움이 느껴졌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거부하듯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래서? 그 소환자를 찾아내 추궁이라도 할 셈인가? 소환자가 따로 있을지 몰라도 우라크를 기른 건 나다. 이제와서 그런건 아무런 상관도 없다.”

“……그렇죠. 죄송합니다. 쓸데 없는 말을 했네요. 마법사다 보니 원인이란 것을 무심코 알아내려고 하거든요.”

테드는 순순히 사과하고 창고의 중심, 블러드 우드가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나무의 몸통을 슬그머니 매만진다. 차갑고 거친 촉감이 손바닥을 통해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 블러드 우드로 하죠. 물론 힐데가르트님이 눈치 챌 테니 전부 가져가진 않을 게요. 나뭇가지 하나면 충분해요.”

“그 나무에는 아무런 효과도 없다.”

“진조의 피를 먹었다면서요. 그럼 숨겨져 있는 능력이 있을 지도 모르죠. 그리고 왠지 모르게 자꾸만 눈이 가고.”

“……네가 그걸 선택했다면 내가 말릴 이유는 없지. 그 선택에 후회 하지 않길 바라지.”

테드는 적당한 나뭇가지를 하나 꺾어 아공간의 안으로 집어넣었다. 왜 블러드 우드에 눈이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시선을 돌리고 보물 창고의 내부를 둘러보아도 머릿속에 각인 된 듯 블러드 우드가 생각났다.

피리의 사용 횟수 제한이 남아 있었다면 그걸 가져갔을지도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피리는 더 이상 보물이 아니었다.

시온은 테드의 예상대로 책을 골랐다. 물론 평범한 책은 아니고 상위 마법에 대해 적혀 있는 마법서다. 어디서 발견했는지 모르겠지만 얼굴을 붉히고 양팔로 소중이 품안에 안고 있었다.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마법서를 탐독하고 싶었다.

사이나는 의외로 귀금속류였다. 그녀가 양손에 들고 있는 것은 고급스런 은색의 팔찌였다. 테드는 창고를 돌아다니면서 귀금속류를 주의 깊게 보지 않았기에 그런 물건이 여기에 있는지도 몰랐다.

평범한 팔찌는 아니었다. ‘은의 장막’이라는 이름의 팔찌로 착용자의 기운을 감쳐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즉, 마력이나 성력을 감추어 평범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테드는 사이나가 팔찌를 선택한 이유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테드의 목적지는 마족들의 나라인 딥크스다. 마족들은 마력에 민감하기에 사이나의 마력만으로 그녀가 악마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물론 사이나는 자신의 기운을 감추는데 능숙하지만 팔찌가 있다면 더 확실하게 감출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이제 돌아갈까.”

테드는 보물 창고를 나가기 전에 일부러 내부를 어질렀다. 전투로 인해 내부가 엉망이 된 것을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다.

⁂⁂⁂

테레사 힐데가르트는 집무실의 의자에 앉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테드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내역으로 딸인 채린을 보낸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녀가 직접 나선다고 하기에 허락해주었지만, 경솔한 선택이었다. 만에 하나의 이야기지만 채린이 전투에 휘말려 죽는다는 상황도 있었다.

그녀는 가슴과 머릿속에는 딸에 대한 걱정과 괜히 드래곤을 자극한 것이 아닐까라는 불안감이 지배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 있는 서류의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펜에 힘을 줄 수가 없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각하.”

10년 전, 20대 초반이란 나이에 최연소 나이트 워커가 된 데스타가 말했다. 그는 투구를 벗고 서글서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테레사는 그의 얼굴을 보며 불안을 약간 떨쳐낼 수 있었다.

“그래요. 테드, 그 자는 천사를 쓰러뜨렸지요. 상대는 고작 드래곤, 제가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요.”

자신의 감정을 감춘 채 테레사가 말했다. 데스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게 노력했다.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그 아름다운 얼굴을 눈동자에 가득 담는 순간 시커먼 욕망이 고개를 들어 올려 자신을 지배하려고 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미숙함을 알고 있었다. 육체적으로 단련했다고 해서, 남자의 본능까지 제어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이트 워커로서 금욕적인 생활을 하기에 불만이 알게 모르게 쌓여 있었다.

테레사 힐데가르트는 자신이 모셔야 할 군주였다. 그런 분에게 불결한 마음을 품을 수 없었다.

“제가 생각하기엔 테드라는 자보다 옆에 있던 메이드가 더 강자라고 생각됩니다.”

“그 범상치 않은 외모를 가진 메이드 인가요…. 몇몇 귀족들은 저와 그녀가 무슨 관계냐고 궁금해 하더군요.”

대놓고 묻는 귀족은 없었지만, 귀족들은 그녀를 테레사의 숨겨 놓은 딸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기야 그녀의 은발은 얼핏보면 테레사의 백발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을 정도로 아름다운 것이 닮았다.

“제가 그녀를 본 것은 아주 잠시뿐이지만, 일말의 흐트러짐도 없는 걸음걸이를 봐선 결코 평범한 메이드가 아닙니다.”

거기서 데스타는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솔직히 저는 그녀와 싸워 이길 자신감이 없습니다.”

“……데스타 경이 그렇게 말 할줄은 몰랐군요.”

테레사가 놀란 감정을 표현할 때였다. 닫혀 있던 집무실의 문에서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테레사는 습관적으로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5시. 보통 뱀파이어들은 잠들어 있을 시간이었다.

테레사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녀가 또렷한 맑은 음성으로 말했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예상했던 대로 채린과 테드 일행이 나타났다. 그들의 꼴은 가관이었다. 테드 뿐만이 아니라 채린 까지 옷에 먼지가 묻어 있고 여기저기 찢어져 있다. 메이드와 시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커다란 상처를 입은 자는 없어 보였다. 아마도 격렬한 전투를 치르고 포션으로 치료를 한 뒤 자신을 찾아온 것이리라.

테레사는 채린의 품에 안겨 있는 검은 고양이를 의아한 눈으로 보았다가 앞으로 나서는 테드에게 시선을 주었다.

“드래곤을 처치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그 사실을 알리고 싶어서 제대로 정리도 하지 않고 찾아왔지요.”

테드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테레사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먼지 좀 마신다고

해서 죽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보다 드래곤을 무사히 퇴치했다는 소식이 중요했다.

그리고 그때, 크르렁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채린의 품에 안겨 있는 검은 고양이가 데스타를 향해 털을 세우며 노란색 눈동자로 한껏 노려보았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정답은 상의, 티셔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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