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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힐데가르트의 드래곤
“내 정체는 너희들이 잘 알고 있지 않나. 테레사 힐데가르트의 딸, 채린 힐데가르트. 그게 내 정체다.”
채린은 날카로운 검이 자신의 목을 베어 날릴 수 있는 상황에서도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가 연기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지 알 수 없으나 지금 이 순간에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통의 여자는 아니었다.
“저 드래곤과는 무슨 관계입니까?”
“…….”
사이나가 물었다. 테드와 시온의 시선이 채린에게 향했다. 당장 질문에 대답하라고 재촉하는 것 같았다.
채린은 고민했다. 사실대로 말하는 가, 아니면 입을 꾹 다물고 비밀을 유지하는가. 그녀는 선택을 해야했다.
시간이 약간 흐름에도 침묵이 이어지자 사이나가 검에 힘을 주었다. 아주 약간의 힘인데도 검날의 예기가 범상치 않아 채린의 목에 생채기가 생겼다. 상처를 통해 피가 한 방울 맺히더니 주즈륵 떨어져 내렸다.
《다크 체인》에 포박된 드래곤이 날뛴 것은 바로 그때였다. 몸을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을 텐데 이리저리 움직여 거대한 소음을 일으켜 자신의 불만을 표출해냈다. 그 눈동자는 채린에게 향해 있었다.
꼭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 여자는 건들지 말라고.
“일단 저 드래곤부터 죽일까.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키메라 드래곤은 쉽게 죽일
수 있을테니.”
테드가 미간을 찌푸리며 키메라 드래곤을 노려봤다. 키메라 드래곤의 무서운 점을 마
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해 특수한 능력을 발동한다는 점이다. 불을 일으키거나, 저주를 날린다거나 거의 마법 수준이다. 그러나 육체 능력은 다른 드래곤에 비하면 떨어지는 편이다. 비늘도 생각만큼 단단하지 않고, 힘도 성체의 지룡에 비하면 약한 편이다.
“……그만. 말해주지. 우라크는 건들지 마라.”
침묵을 깨고 채린이 말했다.
“……우라크?”
테드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네가 말하는 키메라 드래곤의 이름이다. 키메라 드래곤이라는 종류인지 몰랐다만, 이름은 내가 지어주었지. 기왕이면 저 녀석을 우라크라는 이름으로 불려줬으면 하는군.”
테드는 키메라 드래곤… 아니, 우라크를 바라봤다. 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테드가 최대한의 정성을 다해 포박했기에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쉽게 벗어날 수 없을 것이지만, 쇠사슬이 끌리는 소리와 땅에 부딪히는 소음이 장난 아니었다.
“좋아. 그럼 일단 우라크를 진정시켜.”
명령조의 말이었다. 채린은 신경쓰지 않았다. 그보다 그녀도 소음이 거슬렸다.
“진정해라. 우라크. 나는 무사하다.”
그녀가 말했고, 우라크는 거짓말처럼 얌전해졌다. 크르르르 거리는 소리를 내며 적대적인 눈으로 테드 일행을 노려보긴 했으나 아까에 비하면 나았다.
“드래곤인지 개인지.”
테드가 어이없어 작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몬스터 이상으로 흉포한 마수를 길들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납득할 수 있도록 잘 설명해야 할 거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거든.”
테드가 채린을 보며 위협적으로 말했다. 살기도 투기도 담지 않고 무덤덤하게 건넨 말이었다. 그러나 채린은 그의 말이 진심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너희들이 날 어떻게 할 수는 없을 텐데.”
“뭔가 비장의 수라도 있나?”
테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날 죽이면 어머니가 가만히 있으시지 않을 거다. 적어도 브리드론에서 모든 뱀파이어가 너희를 죽이려 달려들겠지.”
“그거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협박인데.”
시온이 테드의 시선을 피했다.
테드는 채린의 눈을 바라봤다. 채린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죽이진 않아. 단지 죽음만큼 고통스럽게 만들 뿐이지.”
“고문이라도 할 생각인가? 미안하지만 나는 고문 따위에 굴복하지 않는다.”
“최상급에 속하는 저주 마법이 하나 있어. 평범한 마법사는 발동하는 것 자체도 어렵고, 성공 가능성도 별로 없지만 효과하나는 진짜 끝내주는 저주 마법이지. 각성 혼수라고 알아?”
“……각성 혼수? 모순되는 말이군. 말장난이라도 하자는 건가?”
“간단히 말해 몸은 혼수 상태인데 정신은 온전히 깨어있는 걸 말하는 거야. 상대방의 말이나 움직임이 똑똑히 느껴지는데 말은 당연히 할 수 없고 눈동자 하나 굴릴 수 없게 되는 거지. 자유를 빼앗는 것. 최고의 고문이자 저주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
채린은 상상했다. 그리고 오싹한 공포가 몸을 내달렸다. 몸을 움직일 수 없다. 거기에 자신의 생각을 밖으로 표출 할 수 없다. 의식이 있는 식물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녀가 누렸던 모든 것들이 할 수 없게 된다. 그 상태에서 차라리 죽는게 더 나을 것이다.
채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내가 졌다.”
“졌기는. 우린 싸우지도 않았어. 난 그저 가능성이 있는 미래를 말했을 뿐이지. 이제 네가 과거를 말할 차례야.”
“전부 듣고 나서 어떻게 할 생각이지?”
“그건 일단 들어보고.”
“……그럼 우선 이 목에 있는 검 좀 치워주지 않겠나? 섬뜩해서 제대로 말을 할 수 없군.”
“잘만 하는데 뭘.”
테드가 투덜거리면서도 눈짓했다. 사이나가 그녀의 목에서 검을 거뒀다. 채린은 한결 나은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7년 전 쯤 인가. 어머니에게서 처음으로 비밀 통로에 알게 된 나는 길을 익히기 위해 자주 이곳을 들락거렸지. 그때는 어렸을 때라 꼭 탐험하는 기분이라 재미도 있었거든.”
채린이 기억을 더듬거려 찾으며 말했다. 생각해보면 이런식으로 과거를 떠올리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대략 10살 무렵이었던 그때의 채린은 지금의 믿음직한 근육이 조금도 없는 작은 여린 여자 아이였다. 채린은 천성적으로 겁이 없었다. 어두컴컴한 지하 비밀 통로를 램프 하나 들고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닐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어느날. 보물 창고의 안에서 하나의 검은색 알을 발견했다. 몇 번 창고의 안으로 들어가본 적이 있고, 전에 본적이 없던 물건이라 단숨에 발견했지. 나는 누군가 갖다 놓았다고 생각했고, 호기심으로 알을 만져 보았지. 따뜻하더군. 그리고 알에서 심장 고동 소리가 울리는 것을 느꼈다. 품에 안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져서 틈 만나면 찾아와 품에 안았지.”
채린은 그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어렸을 적의 채린은 블러드 로드의 딸로서 여러 가지 교육을 받고 있었다. 전투 훈련은 물론이고 귀족들의 예의와 네메스 대륙에 있는 모든 국가의 역사등을 말이다. 머리를 쓰는 교육에 서툰 그녀는 전투 훈련을 가장 좋아했다. 그리고 교육중 휴식시간에 찾아와 알을 두손으로 안았다. 그것만으로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으니까.
“그리고 품에 안고 있을 때, 알에서 저 녀석이 태어났다.”
검은색의 어린 용이었다. 처음에는 용인 줄 몰랐다. 특이한 도마뱀이라 생각했었다.
채린은 별달리 의미 없는 우라크라는 이름을 녀석에게 붙여 주었고, 보살펴 주었다.
“파충류를 혐오할 정도로 싫어하는 어머니에겐 비밀로 했다.”
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테레사는 파충류를 심하게 싫어했다. 특히나 뱀 종류가 그랬다. 그녀는 뱀이란 말만 들어도 얼굴 안색이 굳어졌다. 어렸을 적 뱀에게 물려 사경을 해맨 기억이 일종의 트라우마로 적용하는 것이다.
“물론 신하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신하들은 모두 어머니의 편이었으니까. 말하면 곧바로 어머니가 눈치 챈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나 홀로 몰래 우라크를 키웠다. 녀석이 똑똑해서 인지 내 말을 알아듣고 잘 따라주어 힘들진 않았다.”
“임프린팅이에요. 키메라 드래곤은 옛날 한 악마가 인공적으로 만든 용으로 편하게 다룰 수 있게 태어나자마자 보는 인물을 따르게 되어 있어요.”
시온이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끼어들면서 말했다.
“비밀 통로는 내 방과도 이어져 있어 키우는 것에 큰 문제는 없었다.”
우라크는 음식을 엄청나게 먹어 댔다. 평범한 어린아이였다면 기르는 것이 불가능했을 테지만, 채린은 블러드 로드의 딸, 공녀라는 직위를 가지고 있었다. 가지고 있는 용돈만 해도 웬만한 평민의 재산보다 많았다. 그녀는 대충 어설프게나마 변장하고 시장에 나가 음식을 구입한 뒤 우라크에게 주었다. 어머니와 전혀 닮지 않은 얼굴이 고마웠던 점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가발을 하나 쓴 것 만으로도 사람들이 잘 알아보지 못했으니까.
“어머니가 뒤늦게 알아차리고 병사를 보내려고 했으나 내가 만류했다. 뭐, 그것도 한계가 있어 너희들이 우라크를 처리하러 찾아오게 된 것이지만…. 솔직히 우라크가 이렇게 손쉽게 당할 줄은 몰랐다. 너는 내 생각보다 더 우수한 마법사인 것 같군.”
“사정은 대충 알겠어요. 공녀님이 우라크를 길렀다는 거군요. 몸속에 가진 마력은 우라크의 영향을 받은 것일테고. 생각했던 것보다 시시한 이유네요.”
테드가 말했다. 채린은 그가 반말이 아닌 존댓말을 사용하는 것을 눈치 챘다.
“근데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죠? 설마 여기서 계속 기를 생각은 아니겠죠? 내가 알기론 키메라 드래곤은 100M가 넘게 크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기록으로는 최대 120M야.”
시온이 테드에게 말했다. 테드는 초를 치는 그녀에게 인상을 팍 썼다.
“지하 공간을 넓히는 것도 한계다. 그 정도로 커지면 당연히 지하가 무너지고 우라크는 밖으로 나오게 되겠지. 나도 그게 고민이다. 이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채린이 사슬에 묶여 있는 거대한 검은 드래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의 의미를 알고 있는 것일까. 발버둥 치던 우라크가 얌전해지더니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너는 이제 어떻게 할 거지?”
채린이 다시 테드를 보며 물었다.
“애석하게도 전 남의 애완동물을 죽이는 취미는 없어요. 근데 제가 힐데가르트 님에게 드래곤을 처리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했거든요. 남자의 자존심이 있지. 그냥 넘어 갈 수는 없지요.”
테드의 말에 채린은 괜히 짜증이 치솟았다.
“그래서 결론은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우라크를 죽일 거냐?”
“키메라 드래곤은 짝퉁 드래곤이라 얻을 수 있는 게 거의 없거든요. 비늘은 비싸게 팔리겠지만 거기엔 관심 없고. 그러니 공녀님과 거래를 하려고 합니다.”
“거래?”
“나쁜 것은 아니에요. 오히려 공녀님에게 좋은 일이죠. 우라크를 다른 곳으로 옮기게 도와드리겠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겐 눈에 띄지 않고요. 대신 보물 창고 안에 있는 물건 중 하나를 주시는 겁니다.”
“그건 어머니의 권한이다. 내겐 창고의 보물을 네게 줄 권한이 없다.”
“드래곤과의 격렬한 전투로 인해 보물 중 하나를 잃어버리는 거죠.”
자연스럽게 말하는 테드를 보며 채린은 어이가 없었다.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하라고?”
“어렵지 않은 일이죠. 거짓말을 싫어하는 사람은 있을지언정 안 해본 사람은 없으니까요. 공녀님도 지금까지 사실을 숨겨왔잖아요?”
채린은 반박할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해왔다. 우라크를 옮겨 주겠다는 테드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 거짓말이 될 것이다.
“……좋다. 하지만 네가 한 말을 반드시 이행해야 할 것이다.”
“물론이죠.”
거래는 이루어졌다. 테드가 채린의 몸을 감고 있는 사슬을 풀었다. 사이나는 검을 다시 마법 주머니의 안으로 넣었다.
시온만이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테드에게 다가갔다.
“잠깐! 스승! 뭘 멋대로 처리하고 난리야! 힐데가르트 각하와의 계약은 어쩌고? 이건 사기라고?!”
테드는 시온의 양 어깨를 붙잡았다. 키차이가 있어서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 봐야했다.
“시온. 너는 내가 어떻게 저 커다란 놈을 아무도 모르게 옮기질 궁금하지 않아?”
“보나마나 이동 마법이겠지.”
“아니, 블링크로는 옮기지 못해. 저 놈은 너무 크니까. 텔레포트는 도시에서 사용하지 못하는 걸 알잖아?”
생각해보니 그렇다. 그럼 무슨 마법을 사용해야 하지? 환상 마법? 아니, 환상 마법이라도 이정도로 커다란 드래곤을 가릴 수 있을까.
“……그럼 어떻게?”
“궁금하지? 이건 진짜 희귀한 마법이니까.”
희귀한 마법이란 말에 시온의 귀가 쫑긋 거렸다.
그녀는 채린을 한번 보고서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공녀님의 의견이 그렇다면, 전 공녀님의 의견을 존중하겠어요.”
“그거 참 고맙군.”
채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테드는 그녀에게 다가가 우라크가 사슬이 풀려도 날뛰지 않게 해달라고 말했다. 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테드가 검은 사슬을 풀었다. 사슬이 허공중에 사라지고 드래곤이 자유로워졌다. 우라크는 당장이라도 테드에게 달려들 자세를 잡았으나, 한발 앞서 채린이 우라크에게 손을 내밀며 가만히 있으라고 말했다. 신기하게도 우라크는 그녀의 말에 개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테드가 저벅저벅 걸어 우라크의 앞에 섰다. 그는 우라크의 딱딱한 입에 손을 댔다.
정확하게는 아래턱이다. 딱딱한 비늘의 감촉이 느껴졌다.
우라크가 한차례 으르렁거렸다.
“팍 씨.”
테드가 위협적으로 인상을 쓰며 말했지만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채린의 말이 아니었다면 당장 입을 벌려 한입에 꿀꺽 삼켰으리라.
“저항하지마. 알겠어?”
“그의 말대로 저항하지 마라.”
테드의 말을 이어 채린이 외국인에게 통역하듯 말했다. 우라크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기세를 꺾었다.
“《변형(Transform)》”
테드의 읊조림과 동시에 하얀색의 커다란 마법진이 우라크의 밑에 나타났다. 채린은 그가 혹시 우라크를 공격하는 것이 아닐지 불안했으나, 그의 말을 믿기로 했다. 마법진은 1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그려졌으며, 한 순간에 발동했다.
하얀색의 빛이 마법진 속에서 뿜어져 나와 우라크의 커다란 몸체를 감쌌다. 그리고 압축을 하듯 작아졌다.
빛이 사라졌을 때, 한 마리의 검은 고양이가 테드의 앞에 앉아 있었다.
테드가 고양의 목덜미를 잡아들었다. 고양이는 불만스럽게 냐오오옹 거렸지만 테드는 신경도 쓰지 않고 채린에게 던졌다. 채린은 어영부영 검은 고양이를 품에 받고서 멍청한 얼굴로 테드와 고양이를 번갈아 봤다.
“설마 이 고양이가…….”
“공녀님의 귀여운 괴물이죠. 스스로 본모습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 한, 24시간 정도는 고양이 상태가 될 거에요. 그 고양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면 되죠. 하지만 그전에…… 이 보물 창고의 문 좀 부술게요. 물론 드래곤과의 사투로 인해 부서 진거죠.”
테드가 주먹을 어깨뒤로 당겼다. 주먹의 앞에 마법진이 나타났다.
“보물 중에 드래곤 하트도 있으려나.”
기대를 담아 중얼거리며 창고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 작품 후기 ============================
각성 혼수는 피체크님의 소설인 영혼파괴자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수면 마비 라고도 하죠. 최근에 읽은 책이거든요.
한 구멍으로 들어가서 세 구멍으로 나오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