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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힐데가르트의 드래곤
테드는 힐데가르트에 도착한 첫날은 휴식을 취하고 다음날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공식적으로 테레사의 초대를 받은 손님이기 때문에 성에서 불편한 점은 없었다. 뱀파이어와 달리 밤시간에는 자고 낮시간에 활동하니 뱀파이어 귀족들과 마주칠 가능성도 적었다.
“정말로 네가 드래곤을 퇴치할 수 있을지 의심되는군.”
채린은 작은 램프를 들고 비밀통로를 걸어가며 말했다. 그녀는 여기저기 뻗어 있는 비밀통로의 길 안내역이었다. 그녀의 듬직한 등을 보며 뒤를 따라 걷고 있는 테드 일행은 채린의 말에 제각각인 반응을 보였다.
시온의 경우 자신의 스승이 무시당해 살짝 발끈했고, 사이나는 언제나처럼 무표정했다. 테드는 피식하고 웃었다.
채린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다. 작은 드래곤이라 하더라도 사냥하기 위해선 수준 높은 모험가들이 파티를 이룬다. 이번에 사냥할 드래곤은 드래곤 중에서도 상당한 크기를 가진 놈이다. 테드의 실력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못한 채린이 의심하는 것은 당연했다.
“굳이 피터지게 싸울 생각은 없어요. 일단 이번엔 정찰을 목적으로 가는 것뿐이니까요.”
테드가 말했다. 물론 그 자리에서 끝을 볼 수 있다고 판단되면 바로 전투를 개시해 사냥 할 예정이었다.
“……드래곤에게서 도망치는 것도 힘든 일이다. 어머니에게는 내가 잘 말해주지. 목숨이 아깝다면 여기서 포기하는 게 좋을 거다.”
“그 대사는 꼭 적이 하는 것 같네요.”
테드가 말했다. 채린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긴장감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은 그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드래곤 따윈 긴장할 것도 안된다는 건가. 아니, 설마 그럴 리가.
“그리고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수는 없죠. 애초에 여기서 포기할거면 오지도 않았고.”
“…….”
채린은 입을 다물고 어두컴컴한 비밀통로를 램프의 빛으로 비추며 저벅저벅 걸었다. 대화는 끊겼다.
테드의 마법을 보겠다는 일념하나로 따라온 시온은 긴장으로 몸이 굳어있었다. 그녀는 드래곤과의 전투는 처음이었다.
사이나는 원래부터 말수가 적었다. 그녀는 똑바른 자세로 천천히 걷고 있었다.
테드도 촐싹거리며 말을 하는 성격은 아니었기에 침묵을 유지하며 걷고 있었다. 그러나 곧 심심함이 그를 덮쳤다. 아무것도 없는 지하 통로는 상당히 길어서 재미가 없었다. 처음에는 신기하기라도 했으나, 시간이 지나며 적응하자 감옥을 걷고 있는 느낌이었다.
루크에이스 미궁을 탐사할 때도 이 정도로 심하지는 않았다. 미궁에선 함정을 피하거나 몬스터를 사냥하기 떄문에 심심할 틈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굳이 공녀님이 우릴 안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채린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물론 고개를 살짝 돌려 목소리의 주인인 소년을 확인하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산전수전 다 겪은 중년의 남자 같은 중저음의 목소리로 말했다.
“비밀통로의 길을 알고 있는 인물도 적으며, 네가 허튼 짓을 하지 않는지 감시하기 위해서다.”
비밀통로는 그 주된 목적은 비상 탈출이다. 여러 가지의 길이 있으며 제각각 나오는 장소가 달랐다. 이 비밀통로의 길은 시온도 모른다.
“허튼 짓이라뇨?”
“네가 어머니에게 했던 말을 생각해라.”
“에이, 설마. 그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이야긴데요.”
“설마가 사람 잡는 법이라지.”
테드는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테드는 그저 만일을 상황을 대비해 했던 말에 불과했
다. 설마 정말로 보물창고가 부서지고 그 안의 고이 모시고 있던 보물을 자신이 훔칠까. 그럴 생각은 없었다. 재물에 별달리 관심 없는 테드는 드래곤의 시체를 온전히 얻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채린 공녀님.”
돌연 사이나가 입을 열었다. 테드의 눈동자가 그녀에게 향했다. 그녀가 먼저 말을 건 것은 의외였다.
“무례한 질문입니다만, 테레사님의 친딸이 맞으신지요?”
“…….”
시온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사이나를 바라봤다. 사이나의 질문은 결투 신청을 받아도 할말이 없는 모욕이기도 했다.
테드마저 아연실색한 기색이었다. 물론 자신도 그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테레사와 채린은 모녀지간이라 하기에는 닮은 구석이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없으니까. 기껏해야 하얀 머리카락과 푸른색의 눈동자를 닮은 것이 전부다.
“정말 무례한 질문이군.”
채린이 슬쩍 사이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곧바로 고개를 돌렸지만, 표정과 목소리에는 불쾌한 기색이 없었다.
“확실히 어머니와 나는 닮은 점이 거의 없지. 그것 때문에 곤란한 상황이 몇 번 있기도 했다. 그러나 단언하지. 나는 어머니의 친딸이다.”
채린은 어머니를 닮지도, 아버지를 닮지도 않았다. 그것 때문에 귀족들이 자신의 출생을 의심하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어렸을 적에는 그것 때문에 울기도 했다. 어머니는 자신이 보아도 아름다웠고 그 아름다움을 조금도 물러 받지 못한 자신은 스스로를 의심하기도 했다. 정말 나는 친딸인가, 하고.
그나마 위안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와 같은 순백색의 머리카락과 푸른색의 눈동자였다. 순백색의 머리카락은 뱀파이어들 중에서도 희귀했다. 수도인 힐데가르트에서도 백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자는 3명 이하일 정도다.
“아니, 제가 의문을 가진 것은 외모적인 부분이 아닙니다.”
사이나가 그녀의 착각을 바로 잡았다. 확실히 외모적인 부분도 미심쩍긴 하나, 그건 그녀에게 있어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채린이 가지고 있는 마력이다. 어제 저녁 부터 찜찜함을 털어내고자 기억력을 되짚은 결과 오늘 아침에 떠올릴 수 있었다.
“공녀님이 가진 마력. 그건 네메스 대륙의 생물이 가질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던 채린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뒤를 오리새끼마냥 졸졸 따르던 테드 일행도 자연스레 멈추었다. 채린은 획하고 몸을 뒤로 돌려 사이나의 붉은 눈을 마주 보았다.
“……내가 마력을 가지고 있는걸 눈치 챘나. 내 마력은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났다. 마력에 대해 알고 있다면 너도 마력이 선천적인 요소가 크지만, 아주 희미하게 후천적으로 마력을 각성하는 자들이 있는걸 알겠군. 내 몸안에 있는 희미한 마력을 눈치 챈건 대단하긴 하지만 네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군.”
“말씀대로 마력은 후천적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만, 공녀님의 마력은 그것들과 조금 다릅니다. 오히려 선천적인 마력보다 더 진짜 같은 마력이라 할 수 있지요.”
“……그게 무슨 뜻이지?”
“마력이란 본래 마계의 생물이 가지고 있는 기운입니다. 네메스 대륙의 마족이 가진 마력과 비슷하지만 다르지요. 공녀님은 자신의 안에 마력이 있음이 알고 계시면서도 사용하지는 못하실 겁니다. 그렇지요?”
“……마계의 생물이라… 넌 내가 악마의 자식이라 생각하나?”
“아뇨. 악마의 피를 가지고 계시다면 선천적으로 마력을 타고 날테고 사용하지 못할 일은 더더욱 없습니다. 저는 공녀님이 어떻게 그 마력을 얻었는지가 궁금합니다.”
“말하지 않았나. 후천적으로 각성해 마력을 얻었다고. 자세히 말해주고 싶지만 수련중에 느닷없이 각성한 것이 전부인지라 뭐라고 할 수도 없군.”
“각성해서 그 마력을 얻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만…….”
사이나가 말을 잇기 전에 테드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분위기가 조금씩이지만 험악해지고 있었다. 사이나의 의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말에 들어보면 채린이 가진 마력은 악마의 것이니까.
그러나 채린은 말하는 것을 껴려하는 기색이었다. 괜히 여기서 싸워서 좋은 것은 없다.
“진정해 사이나. 그녀가 어떤 마력을 가지고 있든, 설령 그녀가 악마라고 해도 우리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괜히 그녀와 마찰을 일으킬 필요는 없어.”
“……알겠습니다. 주인님.”
테드의 말에 대답한 사이나가 채린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공녀님. 제가 너무 흥분해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아니, 괜찮다.”
채린이 무뚝뚝하게 말을 이었다.
“너희들은 사탄교의 악마와 전투를 치뤘다고 들었다. 마력에 민감한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 그리고 혹시나 해서 묻는 것이다만, 이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나? 네 말대로 나는 이 마력을 사용하지 못한다.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적은 량의 마력이지만, 사용하지 못하면 있는 것 보다 못하지.”
“마력이 공녀님과 맞지 않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마력을 특수한 방법으로 정제하거나, 끊임없는 수련만이 답입니다.”
“끊임없는 수련이라… 그건 내 특기이기도 하지.”
⁂⁂⁂
도착한 보물 창고의 앞은 거대한 광장이라해도 믿을 정도로 넓은 공간이 있었다. 그러나 공간의 벽은 인공적으로 만든 것처럼 깔끔하지 않았다. 단면이 거칠고 여기저기 드래곤이 날뛴 흔적이 보였다.
그리고 공간의 중심, 보물 창고의 문으로 보이는 철문앞에 웅크려 잠들어 있는 검은색의 드래곤이 보였다. 그 거대한 몸은 드래곤이 숨을 쉴 때마다 수축되었다가 팽창하는 것을 반복했다. 귓가를 때리는 커다란 숨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시온은 드래곤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순식간에 압도 되었다. 길이가 30M. 말로만 들었을 때는 그러려니 했었다. 그러나 직접 눈으로 본 것은 차원이 달랐다. 움직이는 커다란 건물이었다. 자신은 물론이고 강대한 체구인 채린마저 한입에 삼켜버릴 정도로 커다란 입과 단단하고 칠흑같은 비늘은 무기가 통하지 않는 최고의 갑옷으로 보였다.
그저 그 거대한 몸을 본 것뿐인데도 몸이 살짝 떨렸다.
‘드래곤 피어라는 것일까.’
드래곤이 무의식적으로 내뿜는 기운, 드래곤 피어. 생물에게 본능적인 공포를 일으키게 한다.
시온이 고개를 돌려 테드를 찾았다. 이 상황에서 가장 의지되는 것은 스승인 테드였다.
그리고 무섭게 굳어 있는 표정의 테드가 보였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인지라 그에게 말을 거는 것이 주저될 정도였다.
“막상 보니 겁이 나나? 그래도 운이 좋군. 드래곤이 수면을 취할 때 찾아왔으니.”
채린이 말했다. 그녀는 드래곤을 보고서도 침착했다. 시온은 그녀가 드래곤을 몇 번 보았음을 알고 있었기에 익숙하다고 생각했었다.
“이건 좀 많이 잘못 됐는데…….”
테드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 두 눈은 잠자고 있는 드래곤에 집중되어 있었다.
시온은 안심했다. 테드의 굳은 얼굴이 중얼거림과 동시에 풀어지면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포기해도 상관없다. 어머니에겐 내가 잘 말해 주지. 너희들은 단지 여기서 본 것들을 잊으면 된다.”
채린의 말에 테드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을 당혹케 한 것은 그녀가 생각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제가 말하는 건 저건 드래곤이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드래곤이 아니에요.”
“드래곤이 아니라고? 그게 무슨 뜻이지.”
채린이 날카로운 눈으로 테드를 쏘아보았다. 그때 테드의 옆에 있던 사이나가 마법 주머니에서 백색의 검을 꺼내 채린의 목에 검날을 가져다 대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순간 베겠다는 듯이 그녀의 몸에서 살기가 흘러 나왔다.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 것은 당사자인 채린이 아닌 시온이었다.
“가, 갑자기 무슨 짓이야? 스승도 가만히 있지 말고 메이드 좀 말려!”
테드는 손바닥을 들어 날뛰려는 시온을 진정시켰다.
“방금전, 내가 말했지. 저건 드래곤이지만 드래곤이 아니라고.”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해도 지금 상황을 이해 할 수 없어!”
테드는 드래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대한 날개와 날카로운 뿔이 달려 있는 머리. 전체적으로 보면 커다란 날개달린 검은색 도마뱀이다. 그러나 그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마나가 아니라 마력이었다.
“상식적으로 에이션트 드래곤을 제외한 다른 드래곤들은 지능도 높지 않고 마력을 가지지 못해. 모두 마나를 가지고 있지.”
테드의 말에 뒤늦게 시온은 드래곤에게서 마력을 감지했다. 그녀는 검은 드래곤의 거대한 모습에 압도되어 마력을 느끼지 못했었다.
“제자야. 마력을 사용하는 몬스터를 뭐라고 부르지?”
테드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드래곤을 바라보는 두 눈 만큼은 더 없이 진지했다.
드래곤의 주위에 검은색의 마법진 수십 개가 나타난다. 검은색의 마법진 속에서 굵은 검은 쇠사슬이 나타나 수면을 취하고 있는 드래곤의 몸을 칭칭 휘감는다.
시온은 테드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마수. 키메라 드래곤.”
하나의 검은 사슬이 채린의 몸을 감는다. 목에 닿아 있는 사이나의 검에 채린은 순수히 당할 수밖에 없었다.
“정답. 그리고 이 놈의 마력이, 공녀님의 마력과 완전히 똑같아.”
테드의 뒷말을 이해하지 못한 시온이 채린과 드래곤을 번갈아보고 있을 때, 검은색 드래곤이 수면에서 깨어나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위압적인 황금색 눈동자가 요동쳤고, 입을 벌려 포효를 내지르려 했으나 쇠사슬로 감겨있어 입을 여는 것이 불가능했다. 뿐만이 아니라 꼬리, 다리, 날개, 몸을 구분 할 것 없이 수 십 개의 굵은 쇠사슬에 묶여 있다.
크르르르, 드래곤의 목울림이 공간을 가득 메웠다.
“당신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사이나의 질문에 채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