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18. 힐데가르트의 드래곤
18. 힐데가르트의 드래곤
힐데가르트를 이동하는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하스트 성에서 필리니 하스트가 온갖 이유를 대면서 테드를 하스트에 붙잡은 것이다. 필리니는 자신의 딸들을 계속해서 테드와 이으려고 했다. 테드가 인간임에도 적극적으로 자신의 딸을 밀어주는 것은 그가 그만큼 테드의 힘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딸들도 처음에는 적극적으로 테드에게 다가왔으나, 테드의 철벽같은 무관심함과 냉혈한 메이드에 기가 질려 다가갈 생각을 못했다. 필리니는 필사적으로 딸들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딸들도 한계가 있었다. 필리니가 아무리 테드가 대단한 인물이라고 설명해도 딸들의 입장에선 인간 꼬맹이 일뿐이다.
다른 종족간의 사랑이 흔한 일이긴 하나, 그건 평민들의 이야기였다. 신분이 높은 귀족, 그중에서도 왕족이라 할 수 있는 블러드 로드의 핏줄인 그녀들이다. 아버지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테드에게 접근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시간이 지나자 테드는 신경도 쓰지 않았으며, 필리니의 말도 듣지 않았다. 결국 필리니 로선 아쉬움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브리드론의 귀족이 되지 않겠나?”
힐데가르트로 떠나려는 테드에게 필리니가 간절함을 담아 말했다. 그도 알고 있었
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구차하게 왜 그러십니까.”
이미 여행준비를 끝마치고 사이나와 시온과 함께 성문의 밖으로 나가려던 찰나 자신을 붙잡으며 말하는 필리니에게 인상을 쓰며 말했다. 사실 인사는 방금 전에 끝났다. 귀족들의 무수한 인사도 받았고, 작별 선물이라는 것도 받았다.
“자네를 그냥 보내기엔 아쉬워서 그렇지.”
테드는 최근 필리니에게 시달렸다. 그는 지나치게 끈질겼다.
“이미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테드는 딱 잘라 말했다. 딱딱한 말투를 사용하며 그에게 노골적으로 불편하다는 기색을 내보였다. 그에게 그나마 남아 있던 정나미가 완전히 떨어졌다. 앞으로 두 번다시 하스트에 오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내 딸 아이들이 마음에 들지 않나? 하스트 제일 미녀라고 소문이 자자하다만!”
테드는 그의 딸들을 떠올렸다. 블러드 로드의 영애로서 어렸을 때부터 몸을 가꾸어 온 그녀들은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미녀였다. 아마도 어머니 쪽의 유전자를 많이 물러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테드는 피식 코웃음치며 비웃음을 흘렸다.
“제일 미녀요?”
테드가 눈동자를 옆으로 움직여 사이나를 가리켰다.
필리니는 윽하고 침음을 삼켰다. 사이나가 하스트에 들어온 순간부터 하스트 제일 미녀라는 칭호는 그녀의 것이었다.
필리니는 아무리 자신의 딸이라지만 사이나보다 아름답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양심이 박살날 것이다.
필리니의 어깨가 힘없이 축 늘어졌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였다.
“그렇게 까지 말한다면 더 이상 붙잡지 않겠네.”
테드는 순간 욱하는 감정을 간신히 내리 눌렀다. 떠나기 직전까지 붙잡아 놓고 하는 말이 저거다.
“그래도 다시 찾아오지 않겠나? 자네라면 언제든지 환영하네!”
“기회가 되면요.”
테드가 빈말을 하며 몸을 돌렸다. 그러나 필리니가 다시 테드를 잡았다.
“아, 잠깐! 아직 할 말이 있네!”
“……뭡니까?”
테드가 짜증스레 필리니를 쳐다봤다.
“아, 아니. 자네를 위한 말이네. 힐데가르트를 만나러 간다고 하지 않았다. 그녀를 조심했으면 하네.”
“싸우러 가는 것도 아니고… 조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녀는 겉보기에는 20대의 아름다운 미녀지만 사실은 40대 후반의 아줌마네. 아래
에 곧 성년이 되는 딸이 한 명 있지.”
“그녀의 딸을 조심하라는 거군요.”
테드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테드가 생각하기에 필리니는 자신의 딸이 안됬으니, 힐데가르트의 딸도 안 된다는 마음일 것이다.
“아니, 내 말은 그 딸이 아니라 어미 쪽인 테레사 힐데가르트를 조심하라는 거네. 그녀는 젊은 시절 남편을 잃은 과부네.”
“…….”
테드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필리니는 정말로 걱정하는 표정으로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그녀는 뛰어나 미모 때문에 젊은 뱀파이어 귀족들의 구애를 받고 있지. 그런 그녀가 자네를 유혹한다고 생각하면, 나는 걱정이 되어 도저히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네.”
“……딸에게 구애하는 건 아니고요?”
“절대로 아니네. 내 듣기론 그녀의 남편이 연하의 소년이었다고 하더군. 내 생각이
지만 그녀의 취향이 어린 남자가 아닐까 싶네. 자네는 필히 조심해야해.”
테드가 진위여부를 묻는 눈으로 시온을 바라봤다. 시온은 필리니의 말에 당황하고 있다가, 테드의 시선을 느끼고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니야! 그분이 그럴 리가 없어!”
“내 말엔 거짓은 없다만.”
필리니가 당당히 말했다. 시온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 분이 어린 남자를 좋아한다는 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거죠?!”
“힐데가르트 쪽은 모르는 은밀히 떠도는 소문이네. 젊은 귀족들의 구애를 전부 거절하고 있는걸 보면 사실이지 않은가.”
“헛소문이에요! 그분은 남편을 잃고 줄곧 혼자서 생활해오셨어요. 내연이나 불륜은 전혀 없어요!”
“너무 깨끗하면 뒤가 구린 법이지. 솔직히 그 미모를 가지고 몇 십 년이 지나도록 남자와 관련된 소문이 없다는 건 이상하지 않나.”
“하스트 각하! 그건 심각한 모욕이에요!”
“어이쿠! 난 그냥 내 생각을 말해본 것 뿐이네.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걸 보니 뭔가 있나 보구만.”
시온이 매섭게 필리니를 노려보았다. 평소에 예의를 차리던 그녀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테드는 그녀가 테레사 힐데가르트 라는 인물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걸 알 수 있었다.
“뭐, 필리니 님의 말씀을 알겠습니다만, 솔직히 사이나보다 예쁜 건 아니지 않나요.”
테드가 정리를 하듯 필리니와 시온의 사이에 끼어들며 말했다. 사이나의 허리에 조금 힘이 들어가 뻣뻣해졌다.
“……음.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네.”
“메이드의 미모는 나도 인정해. 하지만 그분의 아름다움도 그에 뒤처지지 않아.”
테드는 생각에 잠겼다. 그는 사이나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 쉽게 상상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여인들 중에 사이나가 제일이었기 때문이다.
무의식적으로 눈을 굴러 사이나를 살폈다. 메이드 복을 입은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다. 사이나가 앙 다물고 있던 입술을 열었다.
“필리니 님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주인님의 곁에는 제가 있습니다. 걱정은 고이 접어 쓰레기통에 버리시면 됩니다.”
“……똑 부러진 자네가 붙어 있으니 크게 걱정이 되진 않네만… 아무래도 연륜이란
게 있지 않나.”
“연륜이라면 지지 않습니다.”
“…….”
자신감이 가득 차 있는 말이었다. 필리니와 시온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이나의 정체를 알고 있는 테드만이 수긍할 뿐이었다.
사이나, 그녀는 200살이 넘었다. 연륜으로는 결코 밀리지 않았다. 마계에선 200살 정도는 어린아이로 취급하는 것이 함정이지만.
⁂ ⁂ ⁂
하스트 성을 나와서 워프게이트를 이용해 힐데가르트 진영과 가장 가까운 도시로 이동했다. 하스트와 힐데가르트는 서로 다른 블러드 로드의 영역이기 때문에 워프게이트의 이용이 제한되어 빠르게 이동할 수 없었다.
테드 일행은 힐데가르트 진영의 가장 가까운 하스트 도시에서 마차를 타고 힐데가르트 진영의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워프게이트를 이용해 힐데가르트 성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도시에서 고용한 마차 안에서 테드와 시온은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테드의 옆에는 사이나가 조용히 앉아 있다.
마차에 달린 유리 창문 사이로 획획 지나가는 녹색 풍경이 보였다. 빠르게 달리는 마차임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진동도 없는 것은 가장 비싼 최고급의 마차이기 떄문이다. 마차를 이끄는 마부도 경력만 20년이 넘었다.
“시온. 드래곤에 대해서 설명해줘.”
테드가 시온에게 물었다. 시온은 기밀이라는 이유로 하스트의 성에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힐데가르트 각하께서 직접 설명해 주실 거라고 생각해.”
시온은 자신의 입으로 말하기에 껄끄러웠다. 테드를 못 믿는게 아니라 기밀의 중요도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힐데가르트의 귀족들 중에서 이 사실을 아는 인물은 시온을 포함해도 양손을 넘지 않을 것이다.
“상대는 드래곤이야. 정보를 미리 알아두어서 대책을 생각하는게 좋아.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독룡은 아니지?”
“……스승도 드래곤이 상대면 긴장하는 구나. 그런데 독룡이라니? 혹시 독룡이면 포기할 생각이야?”
독룡은 몸에 독이 가득차있다. 입에서 내뿜는 숨결은 몸에 닿기만 해도 치명적이며, 손톱과 발톰은 물론이고 비늘에까지 독이 묻어 있는 경우가 있다. 드래곤 중에서 상대하기 껄끄러운 종류이며 시체가 독에 절여 있기에 식용도 못해 큰돈이 되지 않는다.
“독룡이면 포기야.”
테드가 단호하게 말했다. 시온은 별달리 반응하지 않았다.
“독룡은 아니야. 사실 어떤 드래곤인지도 확인하지 못한 상태야. 지룡(地龍)이라고 추측하고 있긴 한데……. 아, 이건 진짜 기밀이니까. 어딜 가서 발설하면 안 되.”
“안해.”
“거기 건방진 메이드, 너도야.”
“안합니다.”
귀찮다는 듯 대답하는 주종을 번갈아 바라보며 시온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힐데가르트의 성의 지하에 비밀통로가 하나 있어. 비상시 대피하기 만들어진 통로야. 여러 곳과 이어져 있는데 그 중에 힐데가르트의 보물을 모아둔 창고가 하나 있어.”
브리드론의 중심, 수도라 할 수 있는 곳이 힐데가르트다. 비밀 통로 한 두 개 정도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보물 창고가 그곳에 있는 이유는 대피하면서 가져가기 위해서다.
“5년 전에 한 마리의 드래곤이 보물 창고의 앞에 자리를 잡았어. 마치 문지기처럼 그곳을 벗어나지 않아.”
“과연, 지룡이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야. 그것들은 땅속에 한 번 자리 잡으면 좀처럼 움직이지 않으니까.”
“나도 지룡이라고 생각하는데… 듣기로는 비늘이 검은색이야.”
테드는 놀랐다. 지룡은 갈색 계열이다. 진갈색의 지룡도 있지만, 검은색으로 착각할 정도는 아니다. 애초에 드래곤 중에서 검은색 비늘이 가진 놈들은 거의 없다. 드래곤이라 알려진 것들은 대부분이 회색 혹은 검붉은색이다. 독룡의 경우도 진녹색이고.
“검은색이면 암룡(暗龍)이라는 건데… 그 놈들은 사람 근처에 오지도 않잖아. 지하에 살지도 않고.”
암룡은 드래곤 중에서도 개체수가 적어 희귀했다. 비늘이 검은색이라 흑룡의 권속이라는 말이 모험가들 사이에서 나돌았다. 물론 소문일 뿐이라 진위성은 없다.
“암룡은 아니야. 암룡이라 하기엔 드래곤이 너무 컸어.”
“……얼마나 큰데?”
“5년 전에 발견했을 때는 3M 정도에 불과했는데… 지금 파악하기론 약 10M.”
“어, 음. 길이가?”
“아니, 높이가. 길이는 대략 30M 이상일거야.”
“미친.”
테드는 저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지룡의 경우 성룡을 기준으로 최대 높이가 6M다. 유난히 큰 것이라 해도 10M는 심했다. 지룡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어쩌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새로운 드래곤일지도 몰라.”
“그런거라면 모험가 길드에 의뢰하지 그랬어?”
“기밀인 비밀통로라니까. 힐데가르트 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길 원하지 않아. 최근에는 어쩔 수 없이 모험가 길드에 의리하려고 했어. 이대로 드래곤이 계속 커지만 지하가 좁게 느껴져 난동을 피울 수도 있으니까.”
“천사를 처리한 내 무용담을 듣고 내게 부탁한다는 거지?”
테드가 말했다. 드래곤과 천사. 어느 쪽이 더 위험하다고 묻는다면 천사 쪽이다.
“물론 그것도 그렇지만, 내 스승이라는 점이 크게 적용했어. 가볍게 입을 놀리지 않을거잖아.”
“고대마법을 사용하면 가능하려나.”
테드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무리 비늘이 단단하다고 해도 브류나크의 창날을 막을 수는 없다. 그건 공간에 영향을 줄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꼬대마법?!”
시온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쳤다. 고대마법이란 말에 발음이 샜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면서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반짝이며 테드를 바라봤다.
테드는 아차한 얼굴로 서둘러 화제를 전환시켰다.
“그런데 드래곤이 지하에 있었다며. 뭘 먹고 그렇게 성장한거야?”
“어… 음. 지하에 사는 생물들을 먹고 자란 게 아닐까? 드래곤은 소식가이고 마나만 먹고 종류에 따라 대기 중의 마나를 섭취할 수 있는 드래곤도 있다고 들었어.”
“길이만 30M인데 소식은 개뿔. 그리고 마나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생물은 없어. 그 드래곤, 한 번도 지하 밖으로 나오지 않았어?”
“나왔다면 소문이 퍼졌을 거야. 내가 알기론 없어. 근데 뒷산 가까이 있는 주민들이 가끔씩 미약한 지진을 느낀다고 했어. 드래곤이 움직이면서 나온 진동이 아닐까?”
“……조금 미심쩍긴 한데 가보면 알겠지. 마차 안에서 머리를 굴러 봤자 답은 나오지 않으니까.”
“그런데 스승. 드래곤은 어떤 마법으로 처리할거야?”
기대감이 담긴 눈동자로 테드를 바라봤다. 그녀는 자신이 모르는 마법이 나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테드는 그녀를 힐끗 보고선 마차의 의자를 뒤로 젖혔다. 자신은 잘테니 건들지 말라는 듯 팔뚝으로 눈을 가리면서 귀찮다는 어조로 말했다.
“몰라. 드래곤이라도 궁니르를 맞으면 죽겠지.”
“그건 궤도 폭격 마법이잖아! 힐데가르트를 소멸시킬 셈이야?!”
대화의 주제가 마법으로 넘어가면 피곤해지는 것은 자신이란 것을 알기에 테드는 《침묵(Silent)》마법을 사용하고서 눈을 감았다.
잠들기 직전 팔뚝 아래로 슬쩍 살펴본 결과 사이나와 시온이 서로 노려보고 있었다. 시온이 테드를 깨우려고 하는데 사이나가 그걸 막고 있는 상황이었다. 테드는 사이나를 믿으며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 작품 후기 ============================
사실 꼬대마법은 제가 오타낸건데 비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