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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브리드론의 밤.
사탄교와의 전투가 있은 후 테드는 여러모로 골치를 썩고 있었다. 우선 그는 하스트 성에 2주 동안이나 머물러야 했다.
필리니 하스트가 사건 조사를 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들이 밀면서 테드를 붙잡은 것이다. 어쩌면 한 달 내내 하스트 성에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대우가 좋다는 것이다. 대우마저 엉망이었다면 뱀파이어가 잠든 낮에 뒤도 보지 않고 도망쳤을 것이다.
하스트 성에 있는 테드를 건드리는 귀족이나 병사들은 없었다. 회담장소에 있던 귀족들은 테드의 전투를 직접 두 눈으로 목격했다. 그 압도적인 힘을 보고서 테드의 심기를 건드릴 정도로 그들은 멍청하지 않았다. 그들은 병사나 사용인들이 테드에게 혹시 모를 실수를 할까봐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최근 브리드론은 ‘천사’ 때문에 시끄러웠다. 메타엘과 테드는 하스트에서 전투를 벌였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목격해버렸다. 일반인의 경우는 테드의 정체를 모르지만 메타엘이 천사인 것은 알았다. 하얀색의 날개와 머리위에 있는 금색의 고리. 완벽한 천사의 특징인데 모를 리가 없었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테드는 악이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이 천사는 기본적으로 선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일종의 편견이었다. 천사는 선하고 악마는 악하다.
얼굴과 몸을 가린 인물과 아름다운 모습을 온전히 드러낸 천사. 누가 정의일까.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천사의 출현에 모험가 길드가 움직였다. 또한 천사를 광적일 정도로 추종하는 천족의 무리가 움직였다. 모험가 길드는 진상을 알고 있었다. 네메스 대륙 전역에서 활동하는 그들의 정보망이라면 머지않아 알게 될 것이기에 차라리 테드가 먼저 나서서 말해준 것이다. 덕분에 모험가 길드는 사탄교의 위험성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주인님. 소얀 하스트 님이 저녁식사에 초대하셨습니다.”
하스트의 성의 수 많은 방, 그중에서도 극진한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꾸며진 큰방으로 들어간 사이나가 의자에 앉아서 신문을 살펴보고 있는 테드에게 말했다. 테드는 신문을 의자 앞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처음 일주일은 암브로시아의 효과로 인해 일주일 내내 사이나의 시중을 받으며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문제는 일주일 후에 있었다. 테드가 멀쩡하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브리드론의 귀족들이 감사하다며 선물을 보내 온 것이다.
정말로 테드에게 감사함을 가지고 보내온 자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분위기에 휩쓸려 혹은 테드에게 잘보이기 위해서 보낸 것이다. 테드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귀족들의 저녁 식사 초대는 번번히 일어났다. 대부분은 거절하고 있지만, 테드로서도 거절하기 힘든 인물이 있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하스트’일족이다. 블러드 로드 일족으로 펠리스 왕국으로 치자면 왕족에 가까운 인물들이었다. 일반 귀족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제 했잖아. 거절이야. 거절.”
거절하기 힘들 뿐이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제대로 거절의 인사를 전하겠습니다.”
무덤덤하게 말하는 은발의 메이드를 보자 불길함이 솟구쳤다. 테드는 당장 문밖으로 나가려는 사이나를 붙잡았다.
“자, 잠깐. 이번엔 최대한 조심해서 거절해주지 않을래?”
이전에도 저녁 식사를 초대 받은 적 있었다. 사이나는 테드의 뜻을 받들어 식사 초대에 대한 거절의 말을 전했다. 문제는 초대한 인물이 귀족의 여식이고, 그 귀족의 여식이 다음날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그럴 인간인지 몰랐다며 온갖 하소연을 해댄 것이다. 그때 테드는 대충 흘러들었고, 적당히 대꾸해주자 오히려 그녀가 울면서 뛰쳐나갔기에 그러려니 했었다. 별달리 관심도 없었고.
사이나의 거절 방식이 원인이었다는 것은 깨달은 것은 뒤늦게 자신이 ‘나쁜 놈’을 넘어서 ‘나쁜 새끼’로 소문이 났을 때다.
“평소처럼 정중하게 거절의 말을 전하겠습니다. 주인님이 걱정할 필요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 정중히 독설을 내뱉겠지.”
“독설이 아니라 사실을 말한 것뿐입니다.”
테드는 한숨이 목 끝까지 올라온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사이나의 말에는 조금의 거짓도 없다. 그녀는 정중하게 귀족의 찾아가 정중하게 식사 초대를 거절했다. 그래. 거절 이유를, 외모 지적, 성격 지적, 평판 지적, 가문 지적 등을 정중하게 하면서 말이다. 문제는 그게 전부 사실이라 가슴을 후벼 판다는 점이다. 아스타로트와 싸우는 사이나를 목격한 귀족들은 그녀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사이나 또한 그들의 은인이니까.
“이번엔 좀 돌려서 말할 수 없을까? 소얀 하스트는 그 영감의 딸이잖아. 울리게 되면 영감이 찾아와서 뭐라고 할 게 뻔하다고.”
테드가 영감이라 말하는 이는 필리니 하스트였다. 물론 면전에서 영감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가 보이지 않는 곳이기에 막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확실하게 거절하지 않으면 또 다시 식사를 초대해 주인님을 귀찮게 할 것입니다.”
사이나가 거절한 이후로 두 번 다시 식사 초대를 하지 않았다. 테드 또한 그것만큼은 인정하고 있었기에 그녀를 뜯어 말리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상대는 이 성의 최고 권력자인 필리니 하스트의 딸이다. 필리니는 딸을 구실 삼아 자신에게 찾아올 것이 분명했다.
“이번만큼만 부탁할게.”
테드가 사정하자 사이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주인님은 결코 직접 거절하시지는 않으시는 군요.”
사이나의 말대로였다. 테드는 직접 찾아가서 거절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모두 사이나를 시켜 거절했다.
“아니, 귀찮잖아.”
테드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사이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의 주인은 다 좋은데 저 게으름 만큼은 엄청난 문제였다. 어쩌면 완벽한 메이드인 자신 때문에 테드의 게으름이 나아지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때 문에서 똑똑하고 노크소리가 들렸다. 사이나가 문을 열기 전에 문너머에서 테드가 알고 있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스승. 나야. 안에 있는거 알고 있어. 들어가도 되지?”
“들어와.”
시온의 목소리에 테드가 대답했다. 문이 열리며 피곤에 절여 있는 시온이 나타났다. 금색의 머리카락은 푸석푸석했고, 안 그래도 창백한 얼굴은 마치 시체 같았다.
그녀는 그날 이후 계속해서 귀족의 시달림을 받았다. 테드와의 관계 때문이다. 테드에게 다가가기 어려우니 비교적 쉬운 그녀에게 수많은 귀족들이 접근했다. 그리고 테드에 대한 정보를 요구했다.
어떤 귀족은 테드와의 자리를 마련해달라고 했고, 어떤 귀족은 그녀에게 뇌물까지 주면서 테드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다. 그녀가 이렇게 귀족들에게 열렬한 관심을 받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알고 있어? 브리드론의 귀족들은 모두 스승의 친분을 얻고 싶어서 안달이 났는걸.”
시온은 들어오자마자 불평을 토해냈다.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테드는 그녀의 고충을 이해하고 있기에 담담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강력한 힘을 이용하고 싶어 하는 건 어느 나라 귀족이든 똑같지. 그중에는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는 귀족들도 있을 거야.”
자신이 가질 수 없다면 부셔야 한다는 등의 어린아이같은 생각을 가진 귀족들 말이다. 테드는 그런 귀족들이 생각 외로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도 자신이 어떻게 처리할지 머리를 사정없이 굴리고 있을 귀족이 있을지도 모른다.
“반박할 수 없어서 짜증나.”
시온이 테드의 맞은편 의자에 털썩 주저 앉으며 말했다. 사이나가 익숙하게 마법 주머니를 이용해 차를 준비했다.
“불평을 하러 여기까지 들어온건 아니지?”
“……그 메타엘이라 했던가. 그 천사의 깃털을 가지고 왔어.”
시온이 품에서 하얀 날개 깃털을 꺼냈다. 그냥 보면 비둘기의 깃털같지만, 미약한 성력이 깃털에서 느껴졌다. 그녀는 이어서 묵직한 주머니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주머니 사이로 비릿한 혈향이 살짝 흘려 나왔다.
“천사의 시체는 하스트 각하가 가져갔고, 스승의 몫은 이게 전부야. 몫이 너무 적다고 불평하진 말아줘. 모험가 길드하고 천족의 개입으로 이게 최대한으로 챙긴 거니까.”
“메타엘의 날개 일부인가. 잔인한 짓을 하는데.”
테드가 주머니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메타엘이 어떻게 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토막나서 네메스 대륙 각지로 보내질 것이다. ‘연구’라는 목적으로.
“머리와 날개 한쪽은 마도협회. 피와 팔 한쪽은 하스트. 모험가 길드는 날개와 다리. 천족들은 성물이라며 몸통을 가져갔어. 그 외에도 하스트 각하는 천사의 신체 일부를 비싼 값에 팔았어.”
“현명한 선택이야. 소문이 날대로 난 천사의 시체를 가지고 있어봤자 연구에 미친 마법사들이 습격할 가능성도 있으니까. 그래도 천사를 우상숭배하는 천족이 머리가 아
닌 몸통을 가지고 간 것은 조금 놀란 일인데.”
“나도 그래. 마도 협회와 머리를 놓고 싸울줄 알았는데 의외로 천족들은 시원하게 몸통을 선택했어.”
“뭐, 천사가 죽었는데 천족들이 갈갈이 날뛰지 않은게 더 신기한 일이긴 하지.”
그때 테드와 시온의 앞에 차를 놓던 사이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천사의 뼈와 살에는 특별한 힘이 있습니다. 책에서는 천사의 시체가 금속과 잘 어울렸기에 천사를 통째로 화로에 넣어 무기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성검이 천사의 시체를 이용해 만들어졌습니다.”
“…….”
“…….”
테드와 시온은 할말을 잃고 멍하니 사이나를 바라봤다. 사이나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말해보았을 뿐이었기에 그들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뭐. 천족들이 무기를 만들려고 몸통을 가져간 게 아닐 수도 있잖아.”
“스승 말이 맞아. 몸통은 가장 큰 부위였으니까.”
테드가 어렵게 입을 열어 말을 이었다. 그 뒤를 시온이 맞장구쳤다.
“뼈와 살이 가장많은 부위가 몸통입니다.”
사이나가 딱 잘라 말했다. 테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천족 놈들은 자기들의 우상의 시체를 이용해 무기를 만들기 위해 몸통을 가져 간거겠지. 사실 나도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어. 천족놈들이야 겉으로는 착한 척 하며 위선을 떠는 놈들이지만 뒤가 얼마나 구린지 알고 있었거든.”
“그래도 천사잖아. 천족들이 숭배하는 천사의 시체야. 신성한 물건이라며 떠받들지 않을까?”
“일반 천족들이야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들이 천사의 시체가 어떻게 뭐가 다른지 알까?”
“…….”
시온은 입을 꾹 다물었다. 대신 그녀는 테이블 위의 놓인 주머니를 테드 쪽으로 밀었다.
“필요 없는데. 너 가져도 돼.”
테드가 주머니를 힐끗 보고서 말했다.
“나도 필요 없어. 나는 마법에 관심 있지. 천사의 시체엔 흥미 없어.”
“챙겨 두는 게 좋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날개는 질겨서 식용이 불가능하지만 언젠가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혹을 팔아버릴 수도 있고요.”
테드가 사이나를 바라봤다.
“……먹어 봤어?”
“먹어 보진 않았습니다. 들은 이야기입니다. 가장 맛있는 부위는 허벅지라고 하더군요.”
테드는 고개를 저으며 메타엘의 날개가 들어 있는 주머니와 깃털을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보상금은 따로 하스트 각하가 하사할거라 생각해. 필요 없어도 깔끔하게 일을 끝내려면 군말 않고 받는 게 좋을 거야.”
물론 보상금을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그리고 이게 진짜 본론인데…….”
시온이 뜸을 들였다. 그녀 답지않게 머뭇거리며 테드의 눈치를 보았다. 테드는 잠자코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이내 시온이 결심한 듯 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힐데가르트 각하가 스승을 만나고 싶어 해. 어젯밤 그분이 내게 직접 부탁했어. 스승을 데리고 힐데가르트 성으로 오라고.”
힐데가르트.
하스트와 같은 블러드 로드 중 한명의 이름이다. 다만, 힐데가르트 성은 브리드론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 간단히 말해 국가의 수도라 할 수 있는 최심부가 바로 그곳이었다.
다섯 명의 블러드 로드 중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이 바로 힐데가르트다.
시온에겐 군주가 되는 인물이다. 부탁을 거절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 소문이 퍼질 대로 퍼진 모양이네. 앞으로 귀찮아 지겠어.”
테드가 농담을 하듯 자조적으로 말했다. 필리니 하스트에게 자신에 대해서 숨겨 달라고 부탁했지만, 회담 장소에 있던 귀족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다행이라면 그들 대부분이 정보의 중요함을 알기에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진 않을 것이란 점이다.
마도협회나 천족들이 테드를 찾지 않은 것을 보아 필리니는 충분히 테드의 정보를 숨기고 있었다.
“내 생각이지만, 각하는 스승의 친분을 얻고 싶어서 내게 데려오라 부탁한 게 아닐거야.”
테드의 오해를 바로잡듯이 시온이 말했다.
그럼 무엇 때문이냐고 이유를 묻는 테드의 눈빛에 그녀가 말을 이었다.
“드래곤 사냥.”
테드의 두 눈이 커졌다.
“각하는 힐데가르트의 골칫거리를 스승에게 부탁할 생각일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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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가 안떨어지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