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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영혼-124화 (124/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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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브리드론의 밤.

“여기가 마계였다면 이미 전투는 끝났을 텐데. 아쉽군.”

목을 노리는 백색의 섬광을 여유롭게 피해내며 아스타로트가 말했다.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꽂아 넣은 채 가볍게 몸을 움직이는 모습은 전투가 아니라 마치 산책을 하는 듯 했다.

사이나는 그의 여유로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을 상대하면서도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있었다.

“계속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영원히 피하고 싶은데, 그건 아무래도 힘들겠지.”

사이나의 검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스타로트도 슬슬 한계

였다. 사이나는 영악하게도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지 않고 서서히 힘을 내보이고 있었다. 아스타로트는 그녀가 자신의 힘을 파악하기 위함임을 일찌감치 파악했다.

검이 한번 휘둘러지면, 그 다음번 공격은 미세하게 조금 더 빠르다. 그렇게 검을 완벽히 제어하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아스타로트는 살짝 혀를 차며 사이나와 거리를 벌렸다. 그녀의 검은 더 이상 여유롭게 피하기 힘들었다.

“솔직히, 난 이해가 가지 않는군. 왜 네가 나와 싸워야 하지? 우린 같은 악마가 아닌가.”

아스타로트는 왼손을 주머니에서 빼내며 말했다. 굳은 손가락의 근육을 깨우듯 왼손에 힘을 준다. 우드득하고 살벌한 소리가 주위의 공기를 진동시켰다.

“당신이 주인님의 적이기 때문입니다.”

사이나가 오른손에든 얇은 백색의 검, 나찰의 검신을 왼손의 검지로 훑었다. 그녀의 가녀린 손가락이 차갑고 매끈한 검신을 지나갈 때마다 푸른빛으로 이루어진 마법어가 새겨진다. 마법으로 검을 일시적으로 강화시키는 것이다.

마법에 대해 약간의 조예가 있는 아스타로트는 그 마법이 냉기의 속성임을 알아보았다. 속성이 불인 자신을 겨냥한 것이다.

“그 주인님이란 저 인간을 말하는 건가. 아무리 힘에 제한이 있다지만 여섯 장의 날개와 고리를 가지고 있는 천사와 비등하게 싸우는 것을 보면 평범한 인간은 아니군.”

“주인님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하신 분입니다.”

아스타로트는 피식 하고 웃었다. 그는 사이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마계에 있을 시절의 사이나를 떠올리면 결코 그녀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었다.

“언제부터 악마가 인간의 노예가 된 거냐.”

아스타로트의 왼손에서 시뻘건 불꽃이 화르륵 타올랐다. 힘의 제한 때문에 겁화는 사용이 불가능하지만 염화는 문제없었다.

“전 노예가 아닙니다. 메이드지요.”

사이나의 검에 푸른색의 아지랑이 피어오른다. 동시에 백색의 기운, 냉기가 검신에 맺힌다. 아스타로트는 그녀의 검이 위험하다고 직감했다. 냉기의 상극이 화염이라고 하지만, 자신의 몸은 유난히 냉기에 약하다. 아스타로트는 냉기에 약하기 때문에 화염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거나, 그거나. 인간의 시중을 드는건 똑같지. 마계에 있을 네 아버지가 알면 땅을 치고 분노하겠군.”

“…….”

사이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블링크를 이용해 순식간에 아스타로트의 앞에 나타나 검을 휘둘렀다. 아스타로트는 불꽃을 일으켜 그녀의 검을 막으려고 했지만, 백색의 아름다운 검은 유려하게 붉은 불꽃을 베어내고서 아스타로트의 심장을 노렸다.

검극이 아스타로트의 가슴을 관통하기 직전, 그의 몸이 뒤로 스르륵 빠졌다. 마치 좌석에 몸이 이끌려가는 것처럼 이상했다.

“……깜빡했습니다. 여긴 당신의 공간이었지요.”

새빨간 대지와 하늘, 이 공간은 바로 그의 공간이었다. 그의 뜻에 따라 중력을 조절하거나 기온을 높이는 등의 일이 가능했다. 그가 미지의 힘에 뒤로 끌려간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아스타로트가 왼손을 들어 올렸다. 사이나의 발아래에서 화염의 기둥이 솟아났다. 그의 손짓을 눈치 채고 빠르게 피했지만, 푸른색의 드레스 자락이 타는 것 까지 막지 못했다.

사이나는 치렁치렁한 푸른색의 드레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치마 길이가 길어서 전투 중에도 신경 쓰였다. 치마를 밟았다가 넘어져서 상대에게 큰 빈틈을 보여 패배하고 말았다. 그 만큼 웃기는 이야기도 없으리라.

타버린 드레스 자락을 한 번 본 사이나는 검을 이용해 잘라 버렸다. 종아리가 훤히 노출되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방금전보다 나았다.

아스타로트가 손가락을 튕겼다. 사이나의 주위에 화염이 치솟았다. 벽을 이루어 포위하듯 나타난 화염은 더욱더 크기를 더해갔다.

사이나는 대응하지 않았다. 그대로 블링크를 사용해 벗어나 아스타로트를 공격했다.

그녀의 검이 아스타로트의 붉은 머리카락 일부를 잘랐다. 접근전에 서투른 아스타로트는 식은땀을 흘리며 그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도약했다.

“변했군. 마계에서는 검술만을 고집하더니… 이젠 마법까지 사용하는군.”

사이나는 마법보다 검술을 추구했다. 복잡한 마법을 사용하는 것 보다 검을 한번 휘둘러 상대를 베어내는 것이 더 효율이 좋기 때문이었다. 마계에서도 네메스 대륙에서도 그녀의 일검을 피할 수 있는 상대는 적었다.

전투에서 마법을 활용하게 된 것은 테드의 영향이 컸다. 마법에 비해 비교적 검술 실력이 떨어지는 테드는 마법을 이용해 극복했다. 순수한 검술보다 복잡한 마법을 함께 상대하니 상대방 입장에서는 죽을 맛이다.

특히나 블링크는 전투면에서 활용도가 굉장히 높았다. 일반적으로 움직이기 위해선 발을 움직여야 한다. 아무리 빨라도 발을 내뻗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블링크의 경우 중간과정을 완벽히 생략하기에 전투에 알맞았다.

사이나는 도망치는 아스타로트를 따라 붙으면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그녀의 검은 위력적이었고, 드디어 요리조리 피해내는 아스타로트의 몸에 상처를 냈다. 아스타로트는 목덜미에 흐르는 피를 닦아낼 틈도 없이 주머니에 꽂은 오른손을 빼냈다.

그녀를 상대로 적당히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여기서 죽을 순 없으니 지금부터 진심으로 간다.”

아스타로트가 이글거리는 화염 같은 붉은 두 눈을 빛냈다.

사이나는 바라던 바라는 듯 아스타로트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거대한 화염의 파도가 그녀를 덮쳤다.

⁂⁂⁂

“아직 멀었나?!!”

필리니는 메타엘을 상대한지 20초도 지나지 않아 테드에게 외쳤다. 땅바닥에서 포션을 이용해 마력을 회복하고 마법을 준비하는 테드로선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1분이 지나면 자신들이 처리하겠다는 패기는 어디다 갖다 버린 것인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필리니를 비롯한 뱀파이어들은 죽을 맛이었다. 그들은 테드가 혼자서 메타엘을 상대하는 것을 보며 메타엘을 어느 정도 얕보고 있었다. 자신들은 날개와 다수라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생각과 조금도 일치하지 않았다.

메타엘이 너무 빨라 가까이 다가가기도 쉽지 않았으며, 설령 가까이 다가갔다고 해도 뱀파이어들은 방어막을 뚫고 직접 메타엘을 공격할 수단이 없었다. 뱀파이어 중 유일하게 블러드 웨폰인 ‘블러드 레퀴엠’을 장비한 필리니 만이 방어막을 뚫을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공격하려는 순간 몸이 무거워지며 순식간에 바닥으로 추락한다는 것이

다. 그리고 추락한 결과 손바닥에 찍힌 모기 꼴이 된다.

그리고 단 20초 만에 3마리의 뱀파이어가 모기처럼 죽어나갔다. 그리고 지금 또 한

명의 뱀파이어가 메타엘이 쏘아내는 빛을 얻어 맞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빌어먹을! 아직 멀었나?!”

필리니가 이를 갈며 외쳤다. 이곳에 있는 귀족들은 어느 정도 전투의 소양을 가지고 있지만, 전문적인 전투원들이 아니었다.

브리드론의 무력이라 할 수 있는 ‘나이트 워커’들이 이곳에 있었다면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을 텐데!

“적어도 30초는 버티고 말해라!”

테드가 짜증스럽게 말하고서 마법진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발밑에 황금색으로 찬란히 빛나는 마법진이 나타났다. 복잡한 도형과 문자가 가득히 이루어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돌아갈 것 같았다.

테드가 지금부터 하려는 마법은 코스모스 마법 도서관에서 발견한 책에 적힌 고대 마법이다. 이 마법을 처음 발견한 뒤부터 틈틈이 연구해왔다. 실전에서 사용하는 것은 처음이지만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테드는 단언할 수 있었다.

필리니는 심상치 않은 마법진을 힐끗 보고서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서 붉은색 창을 꼬나 쥐고 메타엘을 향해 돌진했다. 창끝을 앞으로 내밀며 온몸의 무게를 실었다. 블러드 레퀴엠은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힐시 일정량의 생명력을 흡수해 사용자에게 전달하는 효과가 있었다.

“방해입니다.”

메타엘이 날개를 활짝 펄쳤다. 메타엘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충격파가 퍼져나갔다. 필리니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허공으로 빙글 돌면서 날아갔다. 블러드 레퀴엠의 효과를 발휘할 틈이 없었다.

메타엘이 방해되는 필리니는 처리하기 위해 움직이려는 순간이었다. 저멀리 바닥에서 검은색 창이 방어막을 강타했다. 방어막이 살짝 흔들렸다. 조금만 더 위력이 강했더라면 방어막이 깨졌을 것이다. 메타엘은 방해의 근원지를 내려다 봤다. 자신을 노려보는 뱀파이어 마법사가 있었다.

메타엘의 여섯 장의 날개를 크게 펄럭였다. 황금색의 깃털이 시온을 향해 떨어졌다. 시온은 이를 악물고 방어 마법을 펼쳤다.

“쉐도우 쉴드(Shadow Shield)!”

시온의 그림자가 솟구쳤다. 일렁이는 액체같은 검은 그림자는 시온의 앞에 모여들어

거대한 방패를 형성했다. 깃털이 그림자 방패에 퍽퍽 박히고 폭발했다.

깃털과 그림자 실드가 사라지고 시온은 몸을 덜덜 떨었다. 마력의 대부분을 방어하는데 사용했다. 그것만으로 그녀는 한계였다. 자신의 약함을 탓하면서 힐끗 테드쪽을 바라봤다.

황금색의 복잡한 마법진은 그녀의 호기심을 일으켰다. 시온은 지식에 한해서 마도사에 필적하고 있었다. 그런 자신이 모르는 마법이다.

이 긴박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호기심은 그녀가 마법사라는 증거였다. 그녀가 테드의 마법진을 바라보다가 지금의 상황을 떠올리고 아차했다. 목숨이 달린 일이다. 한눈팔 틈은 없었다. 시온이 메타엘을 바라봤을 때, 메타엘은 붉은색 기운을 온몸에 휘감은 필리니와 공중에서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괴물같은 놈!”

메타엘에게서 떨어진 필리니는 자신의 비장의 수단을 꺼내고서도 겨우 메타엘의 발목을 잡는 것이 전부인 것을 깨닫고 혀를 찼다. 그리고 공중에서 자세를 잡으며 붉은색의 창, 블러드 레퀴엠을 투창할 준비를 한다. 아래에서 마법으로 지원해준 시온 덕분에 시간이라면 충분히 끌 수 있었다. 이것이 아마도 마지막 공격이다.

필리니의 붉은색의 기운이 블러드 레퀴엠에 모여든다. 붉은 기운은 창대를 타고 창끝으로 나선형으로 회전하면서 움직였다. 창에 담긴 힘이 극에 달했다고 느낀 순간 필리니는 지체않고 투창했다.

섬뜩한 파공성을 울부짖으며 목표물을 향해 질주한다. 메타엘은 창을 피하는 것을 포기했다. 압도적인 속도를 보고서 무의식적으로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는 붉은 창을 향해 한 손을 내뻗었다.

빛의 방패가 나타났다. 성력을 응축시켜 만들어낸 방패다. 거기에 권능인 중력을 부여해 방어력을 최대한으로 올렸다.

붉은창이 빛의 방패와 부딪혔다. 창은 방패와 부딪히고서도 그 추진력을 잃지 않고 반

드시 뚫어버리겠다는 듯이 회전했다. 메타엘은 창에 중력을 걸어 떨어뜨리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무기 자체가 그의 권능을 저항한 것이다. 메타엘은 방패로 막아낼 수 밖에 없었다.

빛의 방패가 깎여나갔다. 아름다운 빛의 입자가 회전하는 붉은 창에 의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메타엘이 여섯 장의 날개를 활짝 펄쳤다. 그리고 창을 향해 움직였다. 붉은 창이 서

서히 힘을 잃기 시작했다. 메타엘은 멈추지 않고 방패를 밀어 붙였다. 곧이어 블러드 레퀴엠이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걸 막아내?”

날개를 유지할 힘도 없어 바닥에 서있던 필리니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메타엘의 은색의 눈이 그를 담았다. 메타엘이 그를 제거하기 위해 날개를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지상에서 눈이 멀 정도로 찬란한 황금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황금빛의 중심속에서 테드는 하나의 창을 한 손에 쥐고 있었다. 자신의 키보다 더 큰, 2M에 달하는 장창이었다. 창은 황금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반짝이는 황금빛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창끝에는 30cm에 달하는 창날이 달려 있었다.

테드는 빛으로 이루어진 쌍두창을 오른쪽 어깨에 기대고서 하늘에 있는 메타엘을 노려보았다. 메타엘은 그 무뚝뚝한 표정에 어울리지 않게 식은땀을 흘리며 당황하고 있었다. 은색의 눈동자가 맹렬하게 흔들렸다.

빛의 창. 브류나크(Brionac).

고대 마법으로 만들어낸 창이다. 그 효과 중 하나는 성력을 극대화 시키는 것이다. 마법인 주제에 성력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라 일반적인 마법사라면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테드는 달랐다.

“《속성 변환(Attribute Conversion)》.”

테드의 마력이 전부 성력으로 변환된다. 그는 이 순간부터 마법사가 아닌 성법사가 되었다.

테드는 자신이 알고 있는 최상위의 성법을 하나 발동시킨다.

“《전투 날개(The Valkyrie)》.”

한 쌍의 날개가 테드의 등으로부터 나타났다. 황금색의 반투명한 날개는 테드의 몸을 감싸고도 남을 정도로 거대했다. 황금빛으로 이루어진 그 날개는 보는 것만으로도 성스러웠다.

테드는 어깨에 기대고 있던 창을 획 휘둘렀다. 황금빛의 창의 날이 바닥을 향했다.

“브류나크 전개.”

창날을 중심으로 4개의 창날이 새로이 나타난다. 허공에 나타난 4개의 빛의 창날은 황금색 창을 기준으로 약간 떨어져 빙글빙글 회전한다.

테드는 아기새가 날개짓을 하듯 익숙치 않은 등의 반투명한 황금빛의 날개를 움직였다. 테드의 등 근육이 아닌 이미지에 따라 날개가 움직였다. 날개가 한 차례 움직였고 빛의 깃털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사라졌다.

이제 끝을 볼 시간이다.

============================ 작품 후기 ============================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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