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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영혼-123화 (123/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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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브리드론의 밤.

갑작스런 상황에 패닉에 빠져 있을 때에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몇몇의 사람들은 있었다. 오랜 세월동안 블러드 로드의 자리를 지켜온 필리니와 그의 늙은 신하들이 그랬으며, 모험가로서의 경험이 있는 시온이 그랬다. 그리고 애드 체페쉬는 침착하기 보다는 무덤덤했다.

“몸이 엉망진창이시군요.”

사이나는 재빨리 테드를 향해 달려갔다. 그의 곁에서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도 요란한 겉모습과 달리 생명이 위태로운 치명적인 상처는 없었다.

“드레스가 예쁘군. 잘 어울려.”

“주인님. 지금 그 말이 나오십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사이나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테드는 한 차례 허공을 살폈다. 메타엘은 나타나지 않았다. 제법 멀리 날려버렸으니 다시 이곳으로 오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거다.

“간단히 말하면 놈은 천사다. 거의 다이겼는데 마무리가 쉽지 않아.”

필리니는 테드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천장이 흔적도 없이 소멸한 현재 상황에 대해서 자세히 물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애드 체페쉬는 그가 돌아가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더 없이 차가운 목소리로 주변의 분위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어딜 가시는 겁니까. 아직 제 말을 끝나지 않았습니다. 기껏 목걸이를 발동했는데

듣지도 않고 가시면 제가 섭섭하지 않습니까.”

“자네! 지금 이 상황이 보이지 않나?!”

필리니가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천장이 벗겨지고 불청객이 나타난 것뿐이지 않습니까. 천장의 경우 오히려 이쪽이 제 취향이군요.”

필리니와의 대화 덕분인지 주변의 어수선한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애드는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보란 듯이 진실의 목걸이를 들어 올렸다.

“저는 오드 체페쉬의 죽음에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필리니의 시선이 자연스레 목걸이로 향했다. 애드가 너무도 당당히 말했기에 보석은 초록빛을 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보석은 붉은색으로 빛내며 그의 말이 거짓임을 알렸다.

“……뭐라고?”

필리니는 저도 모르게 애드에게서 뒷걸음질 쳤다. 갑작스런 사태에 이곳은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그가 흐지부지하게 넘어가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굳이 주위의 시선을 모으며 사실을 밝혔다.

애드의 입가가 기괴하게 찢어지며 웃음을 그렸다.

“진실을 맹세한다.”

사파이어가 푸른색으로 빛났다.

필리는 불길함을 느꼈다. 무언가 일이 잘못 되고 있다. 그러나 필리니가 무언가에 대비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었다. 그는 애드의 입을 막지 못했다.

“나는 사탄교의 교주 중 한 명이자, 마계 서열 17위의 대악마 아스타로트다.”

목걸이는 초록색으로 빛났다. 그리고 그 빛에 이끌리듯 허공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사방에 하얀색의 깃털을 흩뿌리며 나타난 아름다운 그는 은색의 금속 같은 눈동자로 천장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위는 패닉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아스타로트의 말을 한순간 이해하지 못했다가, 목걸이가 초록색으로 빛난 것을 다시금 기억해냈다. 저 목걸이는 시스템에 의한 것. 그 효과는 완벽하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메타엘. 꼴이 말이 아니군. 그렇게 힘들었나?”

아스타로트는 흥미롭다는 얼굴로 천사를 향해 물었다. 여섯장의 새하얀 날개를 가진 천사는 그의 말대로 엉망진창이었다. 멀쩡한 것은 날개뿐이다. 오른팔은 잘려서 사라져 있으며, 가지런하던 머리카락은 여기저기 잘려선 거친 짐승을 연상케 했다. 온몸에 있는 자잘한 상처에선 붉은피가 흘러나와 새하얀 옷에 얼룩을 만들었다.

메타엘은 눈동자만을 굴러 아스타로트를 확인했다.

“그는 위험합니다. 여기서 제거해야 합니다.”

아스타로트는 테드를 보았다. 종족은 인간으로 보였고 아직 어린 티가 남아 있는 소년의 얼굴이다. 지금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붉은색의 눈동자는 마음에 들었다.

“과연, 사이나 루키페르의 계약자인가. 확실히 대단하긴 하지만, 그렇게 위험해 보이지는 않는데?”

“그는 위험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직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지금이 처리해야 할 절호의 기회입니다.”

“……여전히 네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조금 거들어주지.”

아스타로트가 오른손을 저었다. 그리고 공간이 변하기 시작했다.

건물의 바닥은 온데간데없고 피처럼 붉은 흙바닥이 나타났으며, 하늘은 석양처럼 붉었다. 이곳이 회담장소가 아닌 것을 깨달은 귀족들은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붉은 암석지대다.

민감한 뱀파이어인 그들은 공기 속에 스며들어 있는 피의 존재를 느꼈다. 또한 온도가 굉장히 높았다. 대략 60도 정도 될까. 체질적으로 더위에 약한 이들은 벌써부터 지쳐갔으며 장댓비같은 땀을 줄줄 흘렸다.

“스승!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시온이 테드에게 다가와 다급하게 물었다. 테드는 온몸을 긴장시키며 메타엘과 아스타로트의 행동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가 원하는 만큼 자세하게 설명해줄 시간적 여유 따윈 없었다.

“아스타로트의 권능인 ‘연옥’입니다. 그는 일정 공간을 자신의 연옥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 권능이 온전했다면 그는 연옥의 악마들을 소환했을 겁니다.”

사이나가 말했다. 그녀는 시온 몰래 드레스 품에 숨겨 가져온 마법 주머니를 꺼내 백색의 검을 꺼냈다. 그리고 아스타로트와 메타엘을 경계했다.

“시온. 간단히 말하자면 천사와 악마가 적이다. 그것도 고위급의 악마와 천사지. 보

는 것처럼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하지.”

테드는 암브로시아를 발동한 상태였다. 발동한 상태로 메타엘과 싸웠고 이기지 못했다. 아스타로트까지 나타난 지금 상황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이다.

“이보게! 자네들! 지금 이 상황을…….”

필리니 하스트가 테드 쪽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 그러나 그의 앞을 백색의 검이 가로막았다. 푸른색의 드레스를 입은 사이나는 연옥의 뜨거운 기온과 반대되는 차가움

을 풀풀 풍기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혼란스러운 것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 머리는 장식이 아니지 않습니까. 다섯 살 먹은 어린아이도 아니니 스스로 생각 좀 하시지요.”

“……뭐?”

험악해지려는 분위기를 재빠르게 감지한 시온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지금 상황에 대해선 제가 간단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하스트 블러드 로드께선 당황한 기족들을 진정시켜 주시지요.”

하스트는 주위를 둘러보고 그제서야 우왕좌왕하고 있는 귀족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하고 있었다. 침착한 자들도 일부 있었으나, 그들만으로 상황을 진정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필리니는 지금이야 말로 자신이 나서야 할 때임을 알았다.

“사이나.”

테드는 성력을 모으며 전투를 준비하는 메타엘을 확인하고서 사이나를 불렸다. 혼자서 천사와 악마를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테드라도 불가능했다. 그녀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둘 중에 하나. 그래, 저 악마를 최대한 막아주었으면 한다. 할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사이나가 즉답했다.

테드의 몸이 메타엘의 바로 앞에 나타났다. 테드는 오른손에는 푸른색의 에너지 블레이드가 살벌하게 진동했다. 메타엘이 날개를 활짝 펼쳤고 반투명한 방어막이 메타엘을 감쌌다. 방어막은 에너지를 블레이드를 저항했으나, 완벽히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곧 이어 방어막이 잘렸다. 테드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메타엘의 하얀 목을 노렸다.

메타엘이 날개를 펄럭였다. 그의 몸의 깃털처럼 가벼워졌으며, 단 한번의 날개짓으로 저 멀리 날아갔다. 테드의 에너지 블레이드는 허공을 갈랐다.

“빌어먹을 비둘기.”

테드는 가볍게 착지 한 뒤 하늘에서 공격을 준비하는 메타엘을 노려봤다. 마력의 양이 아슬아슬하다. 아공간을 열어 포션을 마시고 싶은데 그럴 틈이 없었다. 아까 전 기회가 있었을 때는 아스타로트를 경계하느라 하지 못했다. 지금 아공간을 열면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메타엘이 공격할 것이 틀림없었다.

황금색 깃털이 테드를 노리고 떨어져 내렸다. 테드는 옆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황금색 깃털이 바닥에 푹푹 박히더니 펑펑하고 폭발했다.

황금색 깃털이 피부에 박히는 순간 끔찍한 참상이 벌어질 것이다.

“대마법으로 한방에 끝내버리고 싶은데……!”

머리를 숙여 황금색 깃털을 피해내며 테드가 불만에 차 중얼거렸다. 메타엘은 테드가 거대 마법을 준비할 때마다 귀신같이 눈치 채서는 훼방을 놓았다. 메타엘을 상대하면서 몰래 마법을 준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테드의 눈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뱀파이어 귀족들이 보였다. 그들은 테드와 사이나의 전투를 구경만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중심에 시온과 필리니가 있었다.

“시온. 상황이 바뀌었다. 살고 싶으면 니들도 좀 도와라! 아주 약간의 시간만 있으

면 되니까!”

테드가 외쳤다. 그들이 메타엘과 아스타로트를 처리하는 것 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약간의 시간, 대마법을 완성할 때까지의 시간만 벌어주면 된다.

“……우리가? 우리가 스승의 도움이 될까?”

시온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하늘 높이 날고 있는 천사와 공간 자체를 바꿔버리는 악마를 떠올리면 도저히 자신감이 생기지 않았다.

테드는 그녀의 주위에 있는 귀족들의 안색을 살폈다. 자신감에 가득 찬 귀족은 온데간데없고 주눅 든 창백한 뱀파이어들 밖에 없었다.

“너희들은 브리드론의 귀족이잖나. 브리드론의 귀족이, 브리드론의 흥망이 걸린 지금 상황에서 손 놓고 구경만할 셈인가?”

“…….”

입술을 깨문 필리니가 귀족들의 앞으로 나섰다. 그는 테드를 한 번 보고서 귀족들을 둘러 보았다. 체페쉬의 귀족과 하스트의 귀족, 다른 진영에서 중재자 겸 증인으로 찾아온 귀족들이 있었다. 그들 모두 브리드론의 귀족이었다.

“체페쉬의 귀족들이여. 자네들은 믿었던 군주에게 배신당했으니 누구보다 당혹스럽겠지. 허나 지금은 잠시 그 일을 잊어라. 이자의 말대로 우리는 브리드론의 귀족이다. 브리드론의 일을 그에게만 맡겨 둘 수는 없지. 이건 귀족으로서, 브리드론의 뱀파이어의 자존심이 걸린 일이네.”

“……하스트 각하의 말이 맞습니다. 긍지 높은 뱀파이어들이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

면 누구나가 부끄러워하겠지요.”

“우리는 브리드론의 뱀파이어. 설령 상대가 천사와 악마라고 해도 결코 두렵지 않습니다.”

그들이 부끄러운 말을 서로 나누고 있을 때, 테드는 하늘에서 메타엘과 맞서고 있었

다. 마법으로 하늘을 날아 메타엘을 따라다니며 에너지블레이드를 휘둘렀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테드에겐 익숙치 않은 공중전인 반면에 메타엘은 물만난 물고기처럼 자유자재로 공중에서 움직였다. 권능인 중력을 이용해 순식간에 무게를 줄여 멀어지거나 테드에게 무게를 가해 단숨에 바닥으로 추락시켰다. 짜증나는 것은 메타엘이 쏘아내는 빛의 구였다. 중력의 힘을 품고 있는 빛의 구는 하나하나가 치명적인 공격력을 가지고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날 노리는 거지?”

블링크를 이용해 자신을 노리는 빛의 구를 피해내며 테드가 물었다. 테드는 달리 그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길어지는 전투의 답답함과 초조함으로 인해 반사적으로 물었을 뿐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도 메타엘이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서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집니다. 그것은 당신같은 인간이 가지기엔 너무나도 위험한 힘입니다.”

테드는 그가 말하는 힘이 영력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힘을 가졌으니 위험하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나는 네가 말하는 그 힘으로 무언가를 할 생각은 없다.”

“당신이 힘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에는 관련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인 당신이 힘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인간인 내가 힘을 가진게 마음에 들지 않다는 건가.”

메타엘이 왼팔을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성력이 모여들며 창의 모습을 이룬다. 그러나 창이 완성되기 직전 아래에서 검은색 어둠으로 이루어진 창이 날아왔다. 메타엘이 날개를 움직여 옆으로 피해냈다.

아래에는 다부진 표정의 시온이 보였다. 메타엘은 그녀를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테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빛의 창을 완성시켜 망설임 없이 테드에게 날렸다.

테드는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필요가 없었다.

아래에서 빛살처럼 빠르게 나타난 피처럼 붉은 창이 하얀 빛의 창을 박살냈으니까.

“자네는 시간을 벌어달라고 했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면 저 괴물을 처리할 수 있나?”

브리드론의 블러드 로드만이 가질 수 있는 ‘블러드 웨폰’ 중 하나인 ‘블러드 레퀴엠’을 양손에 쥔 필리니 하스트가 물었다. 그의 등 뒤에는 박쥐의 날개가 한 쌍 위치해 있었다.

그는 테드의 앞에서 메타엘을 맹렬하게 노려보며 붉은 창을 겨누었다.

“1분… 아니, 40초면 충분해.”

“자네는 우리를 너무 무시하는 군.”

메타엘의 주위에 그를 포위하듯 8명의 뱀파이어들이 나타났다. 그들 모두가 피막으로된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뱀파이어들 중에서 아주 극소수만이 가질 수 있는 날개다.

“1분. 그 이상이 넘어가면 우리가 놈을 해치우겠다.”

“브리드론에 와서 들은 말 중 가장 반가운 말이군.”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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