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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영혼-122화 (122/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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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브리드론의 밤.

“맥시먼 키크코시타 준남작입니다. 이 장부를 얻는데 1년이나 걸렸습니다만, 그의 행적을 조사하는 것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죠. 그는 1년 전 상단의 일로 체페쉬에 와있었죠.”

“여기에 없는 귀족이군. 누가 그를 데려오지 않겠나?”

필리니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는 솔직히 맥시먼이 누군지 모른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부하 귀족들 중 누군가가 멋대로 귀족의 신분을 하사한 인물일 것이다.

필리니 주위의 귀족들은 제각각 서로를 보기 시작했다. 그들도 맥시먼에 대해선 잘 모른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체페쉬의 귀족이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뒤 말했다.

“그는 안타깝게도 반년 전에 도적을 만나 사망했습니다. 그 도적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행방불명이고요. 아니, 애초에 도적들이 아닐지도 모르죠.”

“…….”

조롱이 담겨 있는 그의 말뜻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는 ‘니들이 도적을 움직여 살인멸구 했지.’라고 말하고 있다. 토사구팽. 귀족들의 세계에선 흔한 일이다.

“그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를 이곳에 불러 확인할 수 없지. 그리고 만약 자네들의 증거가 정말 확실하다면, 내가 생각하기엔 맥시먼이 독단적으로 벌인 일 같군.”

“맥시먼 준남작은 하스트의 대귀족에게 명령받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준남작에 불과한 그가 움직일 이유가 없습니다.”

필리니가 그를 바라봤다. 블러드 로드가 아닌 일개의 귀족에 불과한 그는 자신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감을 가지고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필리니는 이 상황에서 할 말이 없었다. 그가 알지도 못하는 증거를 내세우며 자신의 의견에 반박할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스트 님.”

체페쉬 쪽의 귀족이 입을 열었다. 주위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향했다. 그는 그 상황이 만족스러운 듯 보일락 말락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맥시먼이 범인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가 하스트의 귀족이었다는 것도요. 물론 하스트 님의 지시가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스트 님 주위에 있는 대귀족의 짓일 수도 있지요. 중요한 것은 그가 하스트의 귀족이었고, 그가 저지른 일의 책임은 하스트 님께서 지셔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전대 체페쉬 블러드 로드 님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하스트 님에게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이런 건방진 놈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것은 하스트의 옆에 있던 늙은 귀족이었다. 체페쉬 쪽의 귀족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일어서 얼굴을 붉히며 씩씩 거렸다.

중간에 앉은 중재자들이 몸을 움찔거렸다. 그들은 조마한 시선으로 늙은 귀족을 바라봤다. 돌발 행동을 막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필리니가 조용히 그의 행동은 만류했다. 여기서 날뛰어 봤자 조금의 도움도 되지 않는다.

“자네 진정하게. 여기서 날뛰어 봤자 얻을 건 아무것도 없지. 우리가 결백한 것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나.”

“……죄송합니다. 하스트 각하. 신이 추한 꼴을 보였습니다.”

“실수는 누구나가 하는 법이지. 앞으로 반복하지만 않으면 되네.”

침착한 필리니의 모습에 하스트의 귀족들은 제각각 안심이 되는 것을 느꼈다.

필리니는 체페쉬의 귀족… 아니, 체페쉬의 젊은 블러드 로드인 애드 체페쉬를 바라봤다.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만약, 자네들의 주장이 모두 맞다고 친다면 자네들이 내게 원하는 것은 무엇이지? 내 목숨인가?”

이번에도 체페쉬의 귀족이 나서려고 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애드 체페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금, 또 다른 블러드 로드인 하스트 님께서 죽는다면 브리드론에는 필시 혼란이 찾아 올 것입니다. 그리고 하스트 님의 목숨을 원했다면 굳이 회담까지 열지 않았습니다. 기사단을 꾸리고 병사들을 모아 전쟁을 준비했겠지요.”

“……그래서 원하는 게 뭐지?”

필리니가 애드를 쏘아보았다. 누군가를 패기 있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의 눈에는 건방진 놈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스트 님은 3개의 광산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개의 철광산과 1개의 금광이죠. 저는 그중 하나, 서쪽에 있는 철광과 필리니 님의 진심어린 사과를 원합니다.”

“……금광이 아니라?”

이익은 철광이 아니라 금광 쪽에서 더 많이 들어온다.

“하스트의 수입 중에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금광을 넘길 리 없지 않습니까. 아까도 말했듯 저는 전쟁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

물론 금광이 아닌 철광이라 할지라도 간단히 넘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스트의 귀족들은 과분한 보상이라며 분노하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우리가 정말 잘못했더라면 자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도 발뺌할 생각이십니까. 그것도 아니면 저희들의 주장에 오류라도 있습니까?”

애드는 양손으로 깍지를 끼고 자신의 가슴위로 올렸다. 할 말이 있다면 들어주겠다는 자세가 필리니의 심기를 건들었다.

필리니는 가장 구석에서 긴장한 채로 딱딱하게 굳어 있는 여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백금발이 아름다운 그녀는 시선을 느낀 것인지 창백한 얼굴로 필리니에게 고개를 돌렸다.

“샤론 휘트크니. 자네의 목걸이를 빌려야겠군.”

본래 샤론 휘트크니는 이 자리에 있지 못한다. 그녀는 휘트크니 자작의 여식일 뿐이기 떄문이다. 지금 그녀가 회담 장소에 앉아 있는 이유는 그 목걸이를 가지고 온 공로를 필리니가 인정했기 때문이다.

“영광입니다. 하스트 각하.”

샤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의 귀족들 몇몇은 그녀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못마땅했다.

샤론이 하나의 상자를 내보이며 필리니에게 다가갔다. 보석이 잔뜩 치장되어 있는 고급스런 상자였다. 그녀는 필리니의 앞에서 직접 상자를 개봉했다. 거기엔 붉은색의 고급천에 감싸여 있는 목걸이가 있었다. 푸른색의 사파이어가 마광등의 빛을 받아 반짝였다.

“고맙군. 이 답례는 반드시 하겠다.”

목걸이를 꺼내 들며 필리니가 작게 속삭였다.

“…아, 아닙니다. 각하!”

샤론은 순식간에 벅차오르는 감정에 말을 조금 더듬었다. 그녀는 그에게서 치하의 말을 듣는 순간 그동안 겪은 고생들이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존재했었음을 깨달았다.

자리에 돌아가 앉은 샤론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필리니는 목걸이를 들고 일어서 중재자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애드 체페쉬는 목걸이에 흥미를 가졌다.

“이건 ‘진실의 목걸이’다. 한 번 정도는 들어본 적이 있을 테지. 이 목걸이를 발

동한 뒤 발언하면 시스템이 그 말의 진위여부를 파악해준다. 직접 감정해보도록.”

모든 시선이 시온에게 꽂혔다. 시온이 뛰어난 마법사인걸 알고 있는 귀족들이 무언의 시선으로 얼른 목걸이를 확인하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시온은 조심스럽게 목걸이를 받아 들였다.

“……사실입니다. 앞으로 총 5번사용이 가능하군요.”

샤론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한구석에 아주 작은 불안함이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시온의 옆에 있는 사이나를 바라봤다. 처음에 봤을 땐 긴가민가했었다. 입고 있는 옷이나 헤어 스타일등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그녀가 낮에 보았던 메이드임을 알 수 있었다.

‘그렇구나! 메이드는 위장 신분이구나!’

그녀를 데려온 시온은 그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지만, 앉아 있는 자세와 기품이 흐르는 외모만으로 귀족임을 알 수 있었다. 지금도 브리드론의 남자 귀족들은 그녀를 힐끗 거리고 있었다.

“그 목걸이로 자신의 무죄라도 증명하시려는 겁니까?”

애드가 물었다. 그는 진실의 목걸이라는 것을 들었어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필리니는 그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 목걸이에는 5번의 제한이 있지. 나와 대귀족들의 수를 생각하면 전원 증명하는 것을 불가능하지. 목걸이를 사용해 증명해야하는 건 우리가 아니라 자네들이야.”

“저희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겁니까.”

“그렇지. 우리들은 하지 않았고, 자네들은 했다고 주장하니 흑백을 가려야하지 않겠나. 자네들의 주장이 조작되지 않았다면 그 주장을 받아들이도록 하지. 요구 조건 또

한 모두 이루고, 내가 직접 오드 체페쉬의 묘에 찾아가 사과하지.”

필리니는 날카로운 눈으로 애드를 바라봤다. 그 장소를 압도하는 기백이 중년의 몸으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단.”

이어지는 그 목소리에는 분노가 서려있음을 누구나가 알 수 있었다.

“자네들의 주장이 거짓이라면 각오해야 할 거야. 하스트를 모욕하고 능멸한 대가는 간단히 치를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닐 테니….”

애드는 가소롭다는 듯 삐딱하게 머리를 움직였다.

“좋습니다. 질질 끌지 않아도 되니 저도 좋군요. 그럼 우리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 제가 그 목걸이를 차고 체페쉬의 주장엔 조금의 조작도 없음을 선언하면 됩니까?”

“우선 이 목걸이를 이용할건 자네가 아니라 아까 대표로 의견을 주장한 저 귀족이네. 사용법은 쉽지. 이 목걸이를 손에 쥐고 ‘진실을 맹세한다.’라고 말한 뒤 자신의 의견을 말하면 되네. 그럼 이 목걸이의 사피어가 반응하지. 거짓말이라면 빨강색으로 변할 거고, 진실되었다면 초록색으로 빛날 거네. 간단하지 않나.”

“간단하군요. 피타베 자작. 뭐하나?”

애드에게서 피타베라 불린 체페쉬 쪽의 귀족은 식은땀을 흘리며 앞으로 나섰다. 긴장으로 떨리는 손으로 목걸이를 받아 들였다. 그는 손에 쥔 목걸이가 마치 잘 연마된 검처럼 느껴졌다. 그것도 적이 아닌 자신의 목을 노리는 검.

피타베는 정면에서 얼른 일을 시작하라는 듯이 보는 필리니의 시선을 못이겨 억지로 입을 열었다.

“진실을 맹세한다.”

사파이어가 푸른색으로 한 차례 빛났다.

“이곳에서 내가 했던 모든 주장은 단 하나의 거짓도 없는 사실입니다.”

피타베의 목소리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만약에 이 목걸이가 하스트 측에서 준비한 함정이라면? 온갖 좋지않은 상상이 떠올랐다.

피타베의 불안과 달리는 목걸이는 자비 없이 판결을 내렸다. 아름다운 초록색. 진실이었다.

피타베는 긴장을 내보내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 뒤, 의기양양한 얼굴로 필리니를 쳐다봤다.

“이제 만족하십니까? 우리 체페쉬는 조금의 조작도 하지 않았습니다.”

“자네는 결백하군.”

필리니는 피식 웃고서 시선을 애드에게 옮겼다. 애드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번엔 자네 차례야.”

“……그의 대답으로는 부족합니까?”

“그는 체페쉬의 일개 자작일 뿐이지. 그가 알고 있는 정보가 조작되지 않았음을 어찌 믿을 수 있나.”

“……뭐, 좋습니다. 제가 확인하도록 하죠.”

애드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다지 큰 체구가 아님에도 주변을 압도하는 분위기를 풍겼다. 애드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와 목걸이를 손에 쥐었다.

“진실을 맹세한다.”

목걸이의 사파이어가 반응했다.

“오드 체페쉬는 몬스터 사냥 중에 오우거에게 죽었으며, 그 오우거는 사트니스를 누군가에 의해 섭취했습니다. 그 누군가는 바로 맥시먼 키크코시타입니다. 맥시먼에 대한 증거자료는 조금도 조작되지 않았으며, 맥시먼은 하스트 측의 지령을 받았습니다.”

애드가 조금 기다리자 사파이어는 녹색 빛을 내뿜었다. 주변이 술렁거렸다. 그가 내뱉ㅊ은 마지막 말 때문이다. 하스트의 지령을 받았다는 확실한 말이 그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하스트 측의 지령을 받았다는 것은 자네가 믿는 사실일 뿐이지. 자네도 모르는 진실도 거짓도 아닌 말을 하지 말았으면 좋겠군. 아니면 내가 그것까지 확인하길 바라나?”

“……애매한 말이었군요. 사과드리죠. 맥시먼은 하스트 측의 지령을 받은 것으로 추측됩니다. 자, 됐습니까? 아니면 진실의 목걸이에 맹세하고 다시 한 번 말씀드릴까요?”

“그것도 그렇지만 자네에겐 다른 걸 부탁하고 싶군. 자네가 오드 체페쉬의 죽음에 아무런 관계도 없음을 목걸이를 통해 증명해주게.”

“제가 아버지를 죽였다고 생각하십니까?”

체페쉬의 진영에서 분통어린 말들이 튀어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다는 말이 필리니에게도 들렸다. 그러나 필리니는 싸그리 무시하고 오로지 애드를 바라봤다.

“오드 체페쉬가 죽어서 가장 큰 이득을 받는건 자네가 아닌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그가 죽어 새로운 블러드 로드가 된 자네가 가장 가능성이 높지.”

“……이건 모독이란 걸 알고 계십니까?”

“아니, 확인 작업에 불과하네.”

“후회하시게 되실 겁니다.”

“자네가 정말로 무죄라면 내가 진심으로 허리 숙여 사과하지.”

애드는 필리니는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곧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진실을 맹세한다.”

사파이어가 빛나는 순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공간이 흔들렸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회담 장소가 격렬하게 떨렸다. 의자에 앉아 있던 몇 명은 바닥에 떨어졌고, 몇 명은 머리를 바닥에 부딪쳤다.

갑작스런 충격에 그들이 어리둥절할 때, 다시 충격음이 울렸다. 아까보다 더 크고 시끄러웠다. 공간의 흔들림도 충격음에 비례하 듯 더 심해졌다. 그리고 그들은 천장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조금의 흔적도 없이 천장이 소멸되어 반짝이는 별이 박힌 밤하늘이 훤히 보였다.

그리고 하나의 인영이 그곳에 빠르게 추락했다. 거대한 소리와 함께 회담 장소의 중앙에 떨어진 그는 먼지 속에서 엉망진창인 육체를 일으켰다.

검은색의 복면은 형체도 없이 벗겨져 있고, 몸의 여기저기는 찢어져 피를 흘리고 있다. 입가에는 피 한줄기가 흐르며 검은 머리카락은 여기저기 그슬려 엉망이다.

테드는 붉은색의 눈동자로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보았다. 그리고 긴장감 없는, 피곤에 찌들어 다 쉰 목소리로 말했다.

“살고 싶으면 당장 여기서 벗어나라. 아니면 날 좀 도와주던가.”

하늘에서 뒤늦게 하얀색 깃털 몇 장이 천천히 허공을 유영하며 떨어졌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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