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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브리드론의 밤.
시온은 연신 방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현재 시각은 회담이 시작되는 10시 정각 5분 전이다. 귀족들에게 있어 시간 개념은 중요하니 아마 회담 장소에는 대부분의 귀족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네들끼리 먼저 회담을 시작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시온은 시간에 딱 맞춰서 갈 생각이었다. 힐데가르트 측의 대표인 그녀가 회담장소에 먼저 가서 기다리면 체페쉬 혹은 하스트 쪽이 자신을 구슬리기 위해 온갖 감언이설을 해댈게 뻔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지금의 경우 혼자가 아니라 사이나가 있다. 사이나
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최대한 귀족과의 접촉을 피하고 싶었다.
회담이 시작하는 순간 들어가서, 회담이 끝나는 순간 빠르게 나간다. 시온이 생각한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시간이야. 가자.”
3분이 남은 시점에서 시온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방에서 회담 장소까지 3분이면 정확히 도착할 것이다.
“미리 말해두는데 거기에서 네가 나설 필요는 없어. 넌 중재자가 아닌 증인으로서 서는 거니까.”
“알고 있습니다. 제 임무는 회담이 아니라 혹시 모를 사탄교의 인물에 대처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이나가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흐트러짐 없는 동작은 메이드가 아닌 잘 교육받은 귀족의 영애를 떠올리게 했다.
“난 아직도 스승을 이해할 수 없어. 아무리 사탄교가 위험하다곤 하지만 회담 장소에는 2명의 블러드 로드와 각 진영의 귀족과 대표자들이 전부 모여 있는 장소야. 상식적으로 그곳에 사탄교가 나타 날 리 없잖아. 자살하려는 것도 아니고.”
“시온님은 악마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군요.”
시온은 방의 문을 열면서 날카롭게 사이나를 노려보았다.
“악마라면 알고 있어. 그들은 강력한 힘을 가졌지만, 네메스 대륙에서 그 힘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도.”
시온은 악마에 관해서 설명해줄 말은 머릿속에서 준비를 마쳤다. 악마의 외견, 악마의 힘, 악마의 역사 등등. 입을 삐죽이 내밀며 사이나의 질문을 기다렸다.
“제가 말하는 건 대부분의 악마와 네메스 대륙의 생명체를 어떻게 생각 하냐는 것입니다.”
“…….”
준비해두었던 말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시온의 머리는 반사적으로 대답을 찾고 있었다. 사이나는 그녀가 대답을 찾기 전에 결론을 말했다.
“대부분의 악마는 네메스 대륙의 생명체를 하등생물 이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마족이든 천족이든 종족과 상관없이 말이죠. 그건 천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인격체로서 대우 해주는 것은 극히 일부분의 악마와 천사들뿐입니다.”
“……그래. 그렇겠네. 그들은 특별한 힘을 가졌고, 수명도 우리와 다르니까. 사탄교에 악마가 있는 건 알아. 나도 직접 봤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이야?”
“제가 말하고 싶은건 악마와 천사는 문화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문화를 따르는 것이 효율이 높기 때문에 따르는 것뿐입니다. 여차하면 모습을 드러내 날 뛸 수 있습니다. 그들 앞에서 한 나라의 왕이든, 귀족이든 똑같은 하등한 종족일 뿐입니다.”
“네가 하고 싶은 말을 알겠어. 아마 스승도 그걸 걱정하겠지. 사탄교의 악마가 회담 장소에서 앞뒤보지 않고 날 뛰는걸 말이야.”
사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온은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걸 말하듯 자신만만하게 입을 열었다.
“타당한 우려지만, 회담 장소에는 체페쉬와 하스트의 블러드 로드가 있어. 아무리 악마라고 해도 그 2명은 동시에 상대하지 못할 거야. 그리고 아직 사탄교의 인물이 회담 장소에 나왔다고 확신할 수도 없어.”
“……시온님이 그렇게 까지 말한다면 그렇겠지요. 그럼 저는 회담 장소에서 인형처럼 조용히 있겠습니다.”
“부디 그 말대로 해주길 바랄게.”
말을 끝마치고 습관적으로 벽을 바라본 시온의 얼굴에 당혹성이 떠올랐다. 분침이 12를 진즉에 넘기고 있었다.
황급히 문을 열고 뛰쳐나와 복도를 달리려고 할 때, 느긋이 걸어 나오는 사이나가 보였다. 분명 시간은 봤음에도 무표정한 얼굴은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뭘 인형처럼 느긋하게 있는 거야! 지금 3분이나 늦었다고!”
시온이 히스테릭을 부리며 치마를 들고 뛰기 시작했다. 사이나는 그녀를 보며 한 차례 어깨를 으쓱이더니 빠른 걸음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분명히 빠른 걸음인데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시온의 뒤를 따라잡고 있었다.
⁂⁂⁂
“늦어서 죄송합니다.”
회담 장소에 들어오자마자 도도한 얼굴로 시온이 말했다. 흐트러진 금발을 귀 뒤로 우아하게 넘기며 자신에게 모여든 좋지 못한 시선을 대하고 있었다. 속이 바짝 타들어갔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회담 장소는 하스트 성의 회의실을 일시적으로 개조한 곳이다. 우선 드넓은 회의실을 반으로 나누어 한쪽은 하스트, 다른 한쪽은 체페쉬로 서로 조금 떨어져 마주보고 있다. 그들은 모두 의자 앞에 앉아 있으며, 앞에 테이블이 있다. 테이블 위에는 홍차나 커피 종류의 음료와 서류 등이 보였다. 그들의 중심, 가장 높은 의자에 앉아 있는 이가 바로 체페쉬와 하스트의 최고 권위자인 블러드 로드다.
체페쉬와 하스트의 중간은 의외로 널찍했다. 체페쉬와 하스트가 제각각 자신들 소속의 귀족들과 모여 있는 반면 초라할 정도로 적은 수의 의자와 테이블밖에 없었다. 시온은 비어 있는 2개의 의자를 볼 수 있었다. 거기가 회담의 중재자인 힐데가르트의 자리, 자신과 사이나의 좌석임을 어렵지 않게 눈치 챘다.
“힐데가르트 쪽은 5분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나 보군.”
회담 장소의 중간의 앉아 있는 30대 남자가 말했다. 냉정한 인상의 그를 보며 시온은 속으로 이를 갈았으나, 구차하게 변명을 하지 않았다. 시온은 담담하게 자신의 자리로 움직였다.
시온은 의자에 앉으면서 지각한 자신에게 별다른 말이 없는 것을 알아차렸다. 슬쩍 주위를 살펴보자 귀족들은 모두 시온의 옆에 앉은 사이나에게 향해 있었다. 손을 가지런히 허벅지 위에 올리고 등을 꼿꼿이 세운 그 모습은 가련하고 아름다운 인형 같았다.
꿀꺽. 누군지 모를 이의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시온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뱀파이어로서 당연하다고 할 수 있으니까. 아마 사이나가 귀족이 아니었다면 당장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그녀의 피를 한번 빨아보기 위해 수작을 부렸을 것이다.
“크흠. 뭐, 늦을 수도 있지 않나. 타국의 귀족을 데려오느라 그런 모양인데 우리가 이해해 줘야지.”
냉정한 인상의 남자 옆에 앉아 있는 긴 검은 머리의 사내가 말했다. 시온은 그가 ‘오스크’의 대표자임을 알 수 있었다. 이름이 분명 ‘데르만’이었던가. 냉정한 인상의 남자는 ‘크러스팅’의 대표자다. 이름은 ‘스티거’.
‘힐데가르트’를 대표하는 시온을 포함해 그들은 모두 하스트와 체페쉬 외의 3진영을 대표하는 자들이다. 중재와 증인으로서 회담 장소에 초대 되었다.
하스트와 체페쉬의 귀족들은 회담 시각에 늦은 시온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굳이 나서서 비난하는 이는 없었다. 회담 장소에서 굳이 적을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대부분이 사이나에게 시선과 정신을 한 순간 빼앗겼다.
회담이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지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에 별달리 문제는 없었다. 진행이라고 해봤자 처음은 누구나가 알고 있는 원인 규명이 전부였다.
사이나가 슬쩍 시온의 팔을 툭 건들었다. 시온은 짜증스레 그녀를 힐끗 보고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화장실이라도 가고 싶어 졌어?”
“……어울리지 않게 질 낮은 농담이시군요. 이곳에 악마가 있습니다.”
뜻밖의 말에 시온의 몸이 굳어졌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눈동자를 굴러 주위를 훑어보았다. 붉어진 얼굴로 사건의 원인을 설명하는 체페쉬의 귀족이 보였다. 반대로 하스트의 귀족들은 불만이 가득한, 어딘가 억울하다는 눈으로 체페쉬의 귀족을 말을 듣고 있다.
하스트의 중심에는 근엄한 얼굴로 체페쉬를 노려보고 있는 필리니 하스트가 보였다. 40대 중반의 나이로 보이는 그는 양팔을 의자 팔걸이에 걸치고 등받이에 깊게 등을 묻히고 있었다. 회의에 임하는 자세가 아니었지만, 하스트의 그 누구도 지적하지 않았
다.
반면 체페쉬의 중심에 위치한 높은 의자에는 젊은 남자가 앉아 있다. 찰랑이는 붉은색 머리칼의 미남자인 그는 무료한 얼굴로 사이나를 힐끗 보더니 다시 하스트 진영을 바라봤다. 그가 죽은 오드 체페쉬의 아들이며 새로이 블러드 로드가 된 애드 체페쉬다. 시온은 젊은 그에게서 카리스마를 느꼈다.
“체페쉬 쪽에 있겠지?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아. 어디에 있는 거야?”
“체페쉬의 중심에 있는 붉은 머리 남자입니다. 이름은 아스타로트. 마계 서열 17위의 대악마입니다.”
“……뭐?”
시온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요동쳤다. 그녀는 사이나의 말에 조마조마해졌다. 그가 정말로 악마라고? 아니, 사이나의 말만 믿고 섣불리 단정 짓기에는 사안이 너무 컸다.
“저는 악마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시온님이 쉽게 믿을 수 없는 내용임을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어리석은 선택은 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좋아. 네 말대로 그가 대악마라고 치자. 그런데 왜 그가 애드 체페쉬의 행색을 하고 있는 거야. 설마, 체페쉬의 다른 귀족들도 전부 알면서 그를 모시는 건 아니겠지…?”
“저에게 물으셔도 곤란할 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를 자극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가 애드 체페쉬라는 자를 연기하고 있을 때, 계속 연기하게 두어야 합니다. 그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을 때 막을 수 있는 자는 이곳에 아무도 없습니다. 설령 주인님이라 하실지라도 힘듭니다.”
“……스승이 힘들 정도라고?”
테드의 실력을 알고 있는 시온이었다. 여기 있는 귀족들 전원이 테드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런 테드가 상대하기 힘들 정도의 괴물이 블러드 로드의 행색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와 두려움이 동시에 몰려왔다.
“여기선 그저 조용히 있는 것이 현명한 선택입니다. 시온 님도 인형처럼 계시는 것을 추천드리지요.”
“…….”
사이나가 말했다. 시온은 대꾸할 여력도 없었다. 그녀는 식은땀을 흘려내며 복잡한 머릿속으로 회담의 내용을 억지로 넣으려고 했다.
“오드 체페쉬님께서 사냥하시던 몬스터는 오우거였습니다. 대형몬스터지몬 블러드 로드인 오드 체페쉬님의 적수가 될 이유는 어디에도 없죠. 그런데 그날 본 오우거는 고통을 못느끼는 듯 했습니다. 광견병에 걸린 것 마냥 미친 듯이 오드 체페쉬님에게 달려들었지요. 오드 체페쉬님의 갑옷이 오우거의 팔짓 한 번에 박살이 났습니다. 그 사실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오우거에게 모종의 약을 투여된 것을 알아냈습니다. ‘사트니스’를 말이죠. 그리고 이 배후에 하스트가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체페쉬 쪽의 귀족이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말하는 내내 하스트의 인물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딴 서류 장난 따윈 집어 치우고 당장 싸우자는 전투 의지를 선보이고 있었다.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군요. 오드 체페쉬님이 오우거에게 죽은 것을 떠나, 왜 우리 하스트를 물고 늘어지는 겁니까. 증거도 없이 심증으로 몰고 가는게 체페쉬의 방식입니까? 나 참, 억측도 정도가 있어야지….”
하스트 쪽의 귀족이 말했다. 그는 조금도 체페쉬의 귀족이 노려봄에도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오히려 덤비려면 덤비라는 태도다.
“우리는 오우거에게 투입된 약, ‘사트니스’를 파헤치기 시작했습니다. 거래처와 판매자들까지. 그리고! 하스트의 인물, 그것도 귀족이! 사트니스를 구매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장부까지 확보했지요. 이제 아시겠습니까?”
체페쉬의 귀족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반면 하스트의 귀족들은 서로를 보기 시작했다. 사트니스를 구입한 귀족이 있다는 말에 당황한 것이다.
지금껏 조용히 있던 필리니 하스트가 오른손을 들었다. 주위가 단번에 조용해졌다.
“그 귀족이 누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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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