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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영혼-119화 (119/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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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브리드론의 밤.

“생각해보니 그렇군요. 그럼 적당히 하시고 오시면 되지 않습니까.”

“네 말대로 적당히 했다가 내전이 일어날 수 있으니 문제지.”

시온이 미간을 좁히며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는 테드와 사이나 쪽으로 읽어보라고 말하듯 서류를 내밀었다.

서류의 첫 장에는 회담의 장소와 참석인물들에 관한 정보가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회담의 양측이 원하는 것과 회담이 벌어지게 된 원인까지 상세하게 나타나 있다.

“자세히 조사했는데. 네가 한 거야?”

“나는 정보를 모아 서류에 정리했을 뿐이야.”

서류에 따르면 회담에는 체페쉬와 하스트뿐만이 아니라 브리드론을 구성하는 다섯의

블러드 로드 세력이 전부 참석한다. 시온은 힐데가르트 쪽의 인물이었다.

“응? 체페쉬와 하스트의 블러드 로드도 참여하네. 체페쉬의 블러드 로드는 사고로 죽은 거 아니었어?”

샤론에게 듣기로는 취미로 하는 몬스터 사냥에서 사고로 죽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이게 바로 회담이 일어나는 원인이다.

“사고로 죽은 건 맞아. 그는 죽은 체페쉬의 블러드 로드인 오드 체페쉬의 아들인 애드 체페쉬야. 체페쉬 쪽 진영은 오드 체페쉬의 죽음이 하스트와 관련 있다고 철썩 같이 믿고 주장하고 있어.”

“철썩 같이 믿는다라… 그럴싸한 증거도 없이?”

테드가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몬스터 사냥에서는 어떤 사고라도 일어날 수 있다. 목숨을 잃은 것은 안 된 일이지만,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오드 체페쉬가 죽기 전에 하스트와 상권 다툼이 있었어. 제법 상당한 이익이 걸려 있는 일 이었나봐. 이 다툼에서 체페쉬가 상권을 얻었고, 그로인해 하스트가 보복했다는 것이 체페쉬 진영이 주장하는 동기야. 그런데 몬스터 사냥 사고에 관해선 확실한 증거는 없어.”

“확실한 증거가 있었으면 여기까지 끌고 오지 않았겠지.”

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체페쉬에도 증거는 없고, 하스트 쪽에도 자신이 범이 아니라는 증거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1년이 넘게 끌고 온 문제다.

“정말 골치야. 저번 회담의 정보를 봤는데 결론은 없고 유야무야 넘어간 게 전부야. 회담도 뭣도 아닌 서로 물어뜯는 짐승들의 전투 같았어. 그리고 이번엔 분위기가 정말 안 좋아. 어쩌면 진짜 내전이 일어날지도 몰라.”

반년 전에 체페쉬에서 첫 번째 회담이 있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귀족이 중재자로서 참석했고, 그는 이번에 중재자가 된 자신을 불쌍하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아니, 내가 볼 땐 내전까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데.”

테드는 회귀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뱀파이어들의 나라인 브리드론은 조용한 국가였다. 외교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도 아니었고, 내전 같은 복잡한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다.

테드는 자신이 알고 있는 미래를 근거로 말했다. 그러나 그것뿐만이 아니다. 우선 체페쉬와 하스트는 브리드론의 5개의 세력 중 2개에 불과했다. 그 2세력이 싸우면 나머지 3세력이 이득이 볼게 뻔할 뻔자다. 수뇌부가 생각이 있으면 내전까지 가지 않을 것이다.

“아니, 내전은 일어 날거야. 체페쉬 쪽에 사탄교가 있다는 정보를 최근에 입수했어.”

“…….”

테드가 움찔 몸을 떨었다. 지금 들려서는 안 될 이름이 들린 것 같았다.

“미안. 순간 잘못 들었나봐. 체페쉬에 뭐가 있다고?”

“잘못 들은 거 아니야. 체페쉬에 사탄교가 있어. 체페쉬에서 구슬 형태의 ‘사탄의

피’가 유통되는 걸 확인했어.”

“……구슬 형태.”

테드는 루크에이스 미궁 공략대를 떠올렸다. 거기서 처음으로 구슬 형태의 사탄의 피를 봤다. 그 이후로 본적이 없어 머릿속에서 지우고 있었다.

“먹으면 일시적으로 능력치를 강화시켜줘. 대가로는 흥분해서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게 되는 것과…… 너무 자주 복용하면 데비크가 된다는 점. 사탄의 피가 확실해.”

시온이 아주 살짝 이를 갈았다. 그녀는 사탄교에게 파티를 한 차례 잃은적 있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테드가 아니었다면 자신 또한 그곳에서 사탄교에게 죽음 당했으리라. 시온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체페쉬는 사탄교의 힘을 믿고 하스트와 전쟁을 벌일 생각일거야. 나머지 3개의 세력은 전쟁에 참여해 굳이 피해를 보고 싶지 않을 테고, 사탄교의 도움이 있으면 이길 수 있을 테니까.”

“사탄교가 개입했다면 왜 알리지 않았어? 모험가 길드에 알리면 그들이 직접 움직일 거야.”

“그리고 브리드론은 망신당하겠지. 특히나 체페쉬는 사탄교와 손을 잡았어. 어쩌면 비난만으로 끝나지 않을지도 몰라.”

“굳이 쉬운 길 놔두고 어렵게 돌아가는 이유를 모르겠는데.”

“국가의 체면이란 건 스승이 생각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해.”

테드는 시온의 푸른 눈동자를 바라봤다. 그녀는 테드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조금의 미동도 없는 푸른 눈동자로 마주 보았다. 의견을 무를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내가 모험가 길드에 사탄교를 알릴 수 있는데.”

“브리드론의 적이 되겠다면 말리지 않겠어. 다만, 한 가지는 알아둬. 스승은 밤에

잠을 못 자게 될 거야.”

서슬퍼렇게 말하는 시온을 보며 테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앞에 있는 서류를 그녀에게 다시 건네주었다.

“스승에게 하는 말 하고는.”

“어쩔 수 없는 걸. 이래보여도 나는 브리드론의 귀족이니까.”

시온이 쓴웃음을 지었다. 원하지 않는 신분이지만 어쩔 수 없다. 그 신분으로 인해 받은 혜택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으니까.

“체페쉬가 북쪽에 있는 호텔을 통째로 빌린거 확실하지?”

“그렇긴 한데. 갑자기 그건 왜 묻는 거야?”

시온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테드를 쳐다봤다.

테드는 슬쩍 사이나를 바라봤다. 무표정한 그녀의 어깨를 한 차례 두들기며 시선을 주목시킨다.

“사이나. 넌 시온을 따라가. 어쩌면 사탄교의 인물이 나올지도 모르니까. 네가 대처할 필요가 있어.”

사탄교의 인물, 예를 들면 악마가 나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악마가 나와서 회담 자체를 망칠 수도 있다. 회담에서 체페쉬의 인물이 하스트를 공격하면 곧바로 전쟁일 일어날 테니까. 사이나를 시온과 함께 보내는 것은 최악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서다. 시온으로선 악마를 막을 수 없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사이나는 자세히 묻지도 않고 대답했다. 주인이 명령하면 따르면 된다. 그녀에겐 아주 심플한 이유가 있었다.

“어, 잠깐. 갑자기 왜 멋대로 일을 진행시키는 거야?!”

시온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 지르는 것을 무시하고 테드는 자신이 할 일을 담담히 말했다.

“나는 체페쉬의 호텔에 침입할거야. 사탄교가 정말로 체페쉬와 손을 잡았다면 이런 중요한일에 개입하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회담장소로 따라가거나 호텔에 남아서 기다리거나 하겠지.”

물론 사탄교가 없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테드는 그들이 하스트에 와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테드는 자신의 감이 의외로 잘 들어 맞는걸 알고 있었다.

“설령 사탄교 녀석들이 없다고 해도 체페쉬가 머무는 호텔에서 단서를 발견할지도 몰라.”

“……스승은 한 번씩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는 구나.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내가 말

리면 하지 않을 거야?”

“이건 이미 정해진 일이야.”

테드는 절대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아 말했다.

사탄교가 아니었다면 테드도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내전이 일어나도 시원하게 무시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사탄교가 잘 되는 꼴은 조금도 보고 싶지 않았다. 어떠한 이익도 줄 수 없다. 그것들은 발견하는 즉시 죽여야 한다. 그게 옳은 일이다.

“시온.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사탄교는 훨씬 더 위험해.”

그리고 어쩌면 브리드론이 사탄교의 본거지일지도 모른다. 사탄교 자체를 끝장낼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

⁂⁂⁂

해가지고 주변이 어둑히 변했을 때, 하스트는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낮에 잠을 자던 뱀파이어들이 일어나 자신들의 일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밤의 하스트는 과연 대도시라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테드는 밤이 되면서 옷을 갈아입었다. 검은색 복면과 검은색 옷을 입는다. 복면은 두 눈 부분만이 오픈되어 있고 나머지는 전부 막혀 있었다. 검은색 옷의 아래에는 체형을 속이기 위해 여러 가지 부속물은 안에 집어넣었다.

테드는 거울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키높이 신발까지 완벽하게 구사하고, 상하의에 살을 붙이자 완전히 다른 체격의 사람이었다. 그래도 일반인 보다 작은 체격이지만, 겉으로만 봐서는 그 내부의 인물이 소년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할 수 없다.

‘저번에도 암살자 행세를 했었는데……. 너무 편해서 어쩔 수 없단 말이야.’

눈동자 색까지 빨갛게 변하자 살벌한 분위기를 품어내는 암살자가 있었다. 테드가 위협적으로 거울을 향해 주먹을 내뻗었다. 주먹은 위협적인 바람 소리를 냈다. 멋진 자신의 모습에 만족한 테드가 몇 번 고개를 끄덕였다.

테드는 마법을 발동했다. 그러자 그의 신형이 옅어지더니 배경속으로 녹아들었다. 거울을 확인해 자신의 모습이 비치지 않는 것을 보고서 움직인다.

체페쉬가 머무는 호텔은 엄중했다. 호텔 건물 주변에 생각이상으로 많은 병사들이 호텔을 지키고 서있다. 아무리 이곳이 사이가 좋지 않은 하스트라고 해도 체페쉬의 귀족 대부분이 하스트의 성으로 향한 지금 수 십 명에 달하는 병사가 호텔을 지키는 것은 이상했다.

‘안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겠지.’

삼엄한 경계였지만 테드에겐 무용지물이었다. 건물 내부를 투시한 뒤, 블링크를 이용해 안으로 침입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호텔의 내부로 침입할 수 있었다.

호텔의 3층으로 들어온 테드는 곧바로 내부를 투시해서 살펴보기 시작했다.

호텔의 안은 밖과 달리 경계가 느슨했다. 병사는 보이지 않았고, 간혹 일을 하는 호텔 직원들이 보였다. 2층과 3층에는 직원들밖에 없었다.

‘사탄교에 대한 단서는 없는 것 같고….’

호텔방의 내부도 특별한 것은 없었다. 어쩌면 사탄교에 대한 정보가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 체페쉬에서 사탄의 피가 유통되었다고 해서 사탄교가 있다곤 단정할 수 없으니.

그래도 섣불리 결론을 내릴 순 없다. 이 건물은 총 7층까지 있었다. 적어도 7층까지 살펴본 뒤 결론을 내려도 늦지 않다.

‘3,4층도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없어.’

테드는 5층으로 움직였다. 거기서 병사들이 들어가 있는 방을 발견했다. 뱀파이어로 보이는 병사들은 잠들어 있었다. 아마도 낮에 경계 근무를 서고 야간에 교대한 병사들일 것이다. 테드는 그들이 있는 방을 한 번 살펴본 뒤 6층으로 움직였다.

방에서 쉬고 있는 체페쉬의 귀족 몇몇을 발견했다. 사탄교에 대한 단서는 발견하지 못했다.

테드는 마지막 7층으로 블링크로 이동했다. 그리고 투시를 발동해 주위를 살폈다. 7층의 한 방에 침대에 누워있는 아름다운 여자 같은 남자를 발견했다. 얇은 하얀 천을 몸에 두른 그는 가슴 위에 양손을 가지런히 올리고 죽은 듯 잠들어 있었다.

테드의 시선이 그에게 꽂히고 몸이 자연스레 긴장하기 시작했다.

침대위에 누워 있는 그는 긴 하얀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으며, 백옥같은 피부와 가녀린 몸을 가지고 있다. 웬만한 여자보다 아름다운 그가 조용히 침대에 누워 있는 그

모습은 동화속의 백설공주를 연상케했다.

테드의 복면아래 얼굴에 식은땀이 맺혔다. 설마하니 저 놈이 여기에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여기서 만났기에 오히려 다행인 일이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가 얼마만큼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느냐다. 온전히 힘을 발휘한다면 지금의 테드로선 아무것도할 수 없다. 설령 암브로시아를 사용한다고 해도. 그러나 그 절반 정

도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었다.

‘아니, 일단 여기서 물러나자. 저 놈이 여기에 있는 걸 확인했으니 충분히 이득이야. 이건 모험가 길드를 움직여야해.’

자신이 어느 정도 성장한 후에 만났다면 당장 싸움을 걸었을 테지만, 아직 성장중인 자신이다. 지금의 힘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된다. 테드가 조용히 벗어나려는 순간이었다. 침대위의 그가 눈꺼풀을 올렸다. 신비한 은색의 눈동자와 테드의 붉은 눈동자가 마주쳤다.

테드의 기분 탓이다. 테드는 투시를 하고 있는 상태고, 상대는 그저 벽을 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테드를 눈치 챈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곧바로 벽을 부수고 테드의 앞으로 나타났으니까.

그의 새하얀 후두부 위에 떠있는 금빛으로 이루어진 링과 등허리에 펼쳐져 있는 새하얀 6익의 날개를 보며 테드는 양 주먹을 꽉 쥐었다.

“……메타엘.”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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