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결한 영혼-118화 (118/277)

118====================

17. 브리드론의 밤.

알바스는 촉각을 곤두세운 채 하스트로 향하는 길을 걸었다. 창백한 얼굴의 그는 빠른 걸음으로 움직이면서도 한 번씩 걸음을 멈추고 몸 전체를 가리는 검은색 망토를 펄럭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습관이라 하기엔 그의 잿빛 눈동자는 너무 진지했다.

뒤에 따라 오는 누군가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앞으로 걷는다. 그는 이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알바스는 30보정도 걷고 난 뒤에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눈이 좋은 그는 우연히 뒤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물체를 볼 수 있었다. 말은 아니었고, 마차는 더더욱 아니었지만 화살처럼 빠른 속도였기에 알바스는 몸을 긴장시키며 망토속의 손으로 단검을 쥐었다.

검은색 강철의 말은 지상에서 떠올라 빠르게 날고 있었다. 알바스는 정체불명의 마도구에 감탄할 틈도 없이 그 위에 타고 있는 인물을 살폈다.

가장 앞에 있는 것은 검은 머리의 소년이다. 소년의 등 뒤에 착 달라붙어 있는 건 은발의 메이드. 그리고 메이드의 뒤에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재밌다는 듯 주위 관경을 보고 있는 백금발의 여인.

샤론 휘트크니의 모습을 확인한 알바스는 곧장 자세를 잡았다. 말이었다면 그 말을 맞췄겠지만 검은 강철같은 말에겐 단검이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30M내로 진입하는 순간, 확실히 하기 위해 운전자인 검은 머리 소년의 미간을 향해 단검을 내던졌다. 몇 십번의 단련과 수련의 반복 끝에 얻은 실력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기에 알바스는 자신의 단검이 적중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알바스의 생각대로 단검을 적중했다. 그리고 튕겨나갔다.

“……방어막?!”

알바스는 그대로 옆으로 몸을 던졌다. 강철의 말은 앞에 사람이 있음에도 조금도 감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잿빛 머리카락과 망토에 흙을 뭉치며 바람처럼 자신을 스치고 지나간 강철의 말을 노려보았다.

알바스의 임무는 샤론이 오늘 안에 하스트에 도착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이대로 강철의 말을 놓치면 확실하게 임무는 실패한다.

그가 달리려다가 멈칫했다.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던 강철의 말이 예고도 없이 유턴하더니 알바스를 향해 달렸다. 조금의 감속도 없이 자신에게 돌진해오는 그 모습은 중무장한 기병같았다. 알바스는 소년의 눈동자를 보았다. 한치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는 무언가를 각오한 기사의 것과 닮아 있었다.

“미친!”

알바스가 황급히 옆으로 움직였다. 쌩! 하고 검은 강철의 말이 지나갔다.

알바스가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 최대한의 마나를 입히고 다시 기회를 엿봤다. 기회는 얼마지나지 않아 나타났다. 그의 생각대로 강철의 말이 유턴한 것이다.

방어막 정도는 순식간에 파괴할 수 있는 위력을 품은 단검 세 개가 허공을 날았다. 알바스는 소년이 죽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걱정되는 건… 샤론 휘트크니가 너무 강한 단검의 위력에 죽어버리는 것인데….’

알바스의 걱정은 쓸모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세 개의 단검은 강철의 말에 닿지 못했으니까. 단검이 닿기 직전 느닷없이 강철의 말이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알바스의 바로 앞에 나타났다. 그 엄청난 속도를 그대로 품은채로 말이다.

“이런 개…!!”

제트스키를 정면으로 받은 알바스는 하늘을 날았다. 빙글빙글 나선형으로 돌면서 멋지게 바닥으로 추락했다. 피가 호수위의 파문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알바스는 약 30M를 날아 떨어졌다.

테드는 시체 따윈 시원하게 무시하고 앞으로 전진 했다.

“……저기. 회색 머리의 남자. 제가 알고 있던 인물 같았는데…….”

샤론이 떨리는 눈동자로 말했다. 아쉽게도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샤론은 스스로가 기억력이 좋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자신이 한 번에 떠올리지 못했다는 것은 많이

본 인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동료 귀족의 병사겠죠.”

테드가 툭 내뱉듯이 말했다.

“……왜 그들의 병사라고 생각하시죠? 그들이 저를 노릴 이유는 없어요! 오히려 체

페쉬쪽이 고용한 암살자겠죠!”

용납할 수 없는 모독을 들은 기사처럼 앙칼지게 외쳤다.

“아니, 체페쉬 쪽이 습격자를 보냈으면 처음 마차가 전복되었을 때 샤론 씨는 시체가 되어 진실의 목걸이도 빼앗겼겠죠.”

테드는 제트스키의 핸들을 능숙하게 움직여 앞에 수례를 끌고 가는 상인의 옆으로 비켜 지나갔다. 상인이 깜짝 놀란 얼굴로 뚫어져라 제트스키를 쳐다봤다.

“하스트 소속의 귀족이기에 샤론 씨가 살아 있는 거죠.”

“……테드 씨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세요?”

“샤론 씨도 그렇게 생각하시잖아요. 이런 일이수록 냉정하게 판단해야하죠.”

“…….”

샤론은 입을 다물고 제트스키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단지, 체페쉬와 전면전쟁을 하려는 하스트의 귀족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뭣하면 돌아가서 병사의 시체를 확인해줄 수도 있어요. 나의 애마라면 충분히 그럴 능력이 되니까요.”

시체를 조사해보면 그 소속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뇨. 그럴 필요는 없어요.”

샤론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가 다시 고개를 세워 활발한 상태로 돌아온 것은 하스트의 도착하고 나서였다. 하스트의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병사들이 있었기에 테드가 성까지 데려다 줄 필요는 없었다.

⁂ ⁂ ⁂

해가지기 전에 하스트에 도착한 테드와 사이나는 우선 숙박시설부터 찾았다. 하스트는 블러드 로드 중 한 명이 다스리는 도시인만큼 거의 수도 수준으로 발전했다.

도시안을 가로지르는 강물과 바닥에 깔린 벽돌 하나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느낌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건물들의 경우 경사지붕이 많았고, 창문이 극단적으로 적었다. 단 한 개의 창문도 없는 건물을 흔하게 발견할 수 있을 정도다. 햇빛을 싫어하는 뱀파이어의 특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건물들이었다.

그러나 창문이 많은 건물도 존재했다. 주택이 아닌 가게의 경우가 그랬다. 여기에 테드와 사이나가 찾는 숙박시설도 창문이 많은 측에 속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이 도시에 한해서다. 펠리스 왕국이나 다른 국가의 도시에 가면 보통 수준의 창문일 뿐이다.

“이 건물이 어떻습니까. 건물도 크고 주변도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사이나가 한 고급 호텔을 가리키며 말했다. 도시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성의 근처에 있는 8층짜리 건물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깨끗한 건물이었다. 1층의 창문을 통해 넓은 내부의 세련된 로비가 보였다.

“괜찮네.”

테드와 사이나는 복잡한 꽃문양이 조각되어 있는 두 개의 문을 열고 호텔의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그들을 반긴 것은 검은 정장을 깔끔히 입은 직원이었다. 창백한 얼굴의 그는 만면의 미소를 지으며 테드와 사이나를 환영했다.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사이나가 앞으로 나섰다. 테드는 그녀가 이 호텔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몇 년간 같이 지내다보면 무표정한 얼굴이라도 생각을 알 수 있는 법이지.’

직원과 얘기하는 사이나의 모습을 보며 테드가 내심 생각했다. 착각은 어디까지나 자유다.

테드는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1층의 로비는 조용한 분위기였다. 몇 개의 푹신한 소파가 놓여 있었는데 그 중에 한 곳에 테드의 시선이 멈췄다. 너무 조용해서 아무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한 명의 사람이 있었다. 테드의 눈이 조금 커졌다.

두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고 다소곳이 소파에 앉아 있는 여인이었다. 웨이브진 긴 금

색 머리카락이 그녀가 손에든 서류를 넘길 때 흔들렸다. 졸린 듯 반쯤 감겨 있는 푸른 눈동자는 서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시온 잔메이든.

뱀파이어 마법사이자 테드의 파티 동료.

자신이 가진 지식을 뽐내는 것을 좋아하며 테드의 제자인 마법사.

“……스승?”

테드가 빤히 쳐다보고 있자 시선을 느낀 것일까. 그녀가 고개를 획 돌려 테드를 발견했다. 테드가 손을 들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1년이 조금 넘었나. 오랜만인데. 변한건 거의 없네. 바로 알아봤어.”

시온의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테드가 말했다. 시온은 약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스승은 키가 커졌네. 그리고 나도 약간이지만 성장했어.”

“내가 보기엔 그대로야. 어떻게 지냈어?”

시온은 탁자위에 서류를 내려놓았다. 혹여 테드가 내용을 볼 수 있기에 서류를 뒤집었다.

“나야 가문의 일을 도우면서 마법을 수련하는 나날 이였어. 그런데 스승이 여기 있다는 건, 건방진 메이드도 여기 있다는 건데…….”

시온은 반쯤 뜬 눈을 한층 더 가늘게 뜨며 테드의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뒤쪽에서 다가오고 있는 은발의 메이드를 볼 수 있었다. 호텔 방 열쇠를 받아든 사이나는 시온과 두 눈이 마주쳤음에도 무뚝뚝한 태도로 테드에게 걸어갈 뿐이다.

“여전하네.”

“여전히 작으시군요.”

시온의 말을 들은 것인지 사이나가 테드의 옆에 오자마자 말했다.

테드가 생각하기엔 시온은 체구가 작기에 옳은 말이었다. 그녀가 화낼 부분은 아니었지만, 시온은 기품 있게 웃으면서 이를 갈았다.

시온은 분위기를 전환하듯 테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유기사가 목표라고 했지. 목표는 이뤘어?”

시온은 질문하고 나서 어리석은 질문이었다며 한탄했다. 자신의 스승이다. 그 실력은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귀족의 직위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뤘지. 그래서 지금 여기에 있는 거야. 그래도… 아직 할 일은 남아 있지만.”

테드는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며 자신의 검은 앞머리를 매만졌다. 전쟁을 막는다는 목적은 한 남자를 죽인다는 것이다. 기회는 내년 5월. 그 전에 죽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테드는 그가 어디에 있는지 전혀 모른다. 그건 정보 길드도 모르는 정보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치면 전쟁을 막기 힘들어진다.

“스승도 고생이네. 생각 같아선 지금 당장 스승을 졸라서 마법을 배우고 싶은데… 아

쉽게도 내게도 할 일이 있어. 이게 상당히 골치 아픈 일이라서 며칠은 마법을 공부할 수 없어. 아, 스승은 언제 하스트를 떠나는 거야?”

“나야 시간은 많으니까. 느긋이 도시를 한 번 훑어보고 떠날거야. 3일 정도.”

마법을 배우고 싶다는 말에 테드의 팔에 소름이 살짝 돋았다. 시온은 설명하는 걸 좋아하는 만큼 집요하게 파고드는 구석이 있었다. 마법하나에도 그 이름의 유래나 방식같은 온갖 잡다한 것 까지 물어온다. 더군다나 알고 있으면서도 확인한다는 이유로 물어오기도 한다.

그는 시온이 눈치 채지 못하게 슬며시 양팔을 문질렀다. 그녀의 열정은 인정하지만, 그녀의 스승이란 자리는 굉장히 피곤했다.

“그 골치 아픈 일이라는 게 혹시 하스트와 체페쉬의 회담 때문이야?”

“…알고 있었어? 호텔을 잡는 것으로 보아 막 도시에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스승이 말대로야.”

시온은 서류를 뒤집었다. 테드라면 딱히 서류의 내용을 알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서류의 내용은 조금만 심혈을 기울여 조사하면 누구나가 알 수 있는 내용이기도 했고.

“난 회담의 증인이자 중재자 역할을 맡았어. 이런 일은 처음이라 솔직히 불안해. 혹시 뭔가 조언할거 없어?”

“미안. 나도 회담에 관해서 잘 몰라. 사이나라면 잘 알거라 생각하는데.”

테드의 옆에 앉아있던 사이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국가에서도 강한 두 세력의 회담입니다. 그에 맞먹는 세력이 뒤에 없는 일개 중재자가 할 수 있는 건 그다지 없을 거라 생각되는 군요. 시온 님은 그저 불똥이 튀지 않게 인형처럼 계시면 됩니다.”

“오, 좋은 조언이네.”

테드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맞장구쳤다. 시온이 테드를 찌릿 노려보았다.

“나도 꿀리지 않은 배경은 있어. 그렇지 않고서 이 정도의 회담의 중재자가 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 작품 후기 ============================

단합력 쩌시네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