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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영혼-117화 (117/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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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브리드론의 밤.

테드는 백금발의 여인 앞에서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가 또 다시 덮칠 수 있기 때문에 2M의 거리를 유지했다.

“일단 침착하게 들어요.”

그녀의 눈동자가 테드의 눈에 향했다. 흥분한 몸과 달리 차분한 태도였다.

“전 지나가던 여행객이고 우연히 길을 가다 전복된 마차를 발견했죠. 그리고 마차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당신을 구했어요.”

“유, 유일하게? 그럼 제톡은…….”

테드는 그녀가 말하는 제톡이 마차를 몰던 마부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마부를 말하시는 거라면 마차가 쓰러지면서 목이 부러져 죽었어요.”

그녀가 마차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황금색 눈동자가 처참한 관경을 담았다. 그녀는 잠시간 멍하니 마차를 보더니 이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송곳니가 부드러운 입술을 베어 피 한 방울이 맺혔다.

그녀는 후들 거리는 다리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와 흙투성이의 검은 드레스와 백금색 머리카락은 더 이상 고귀하지 않았다.

“그 정도만 말해주셔도 괜찮아요.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했으니까요.”

그녀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쇄골 부위에 있는 커다란 사파이어 목걸이를 한 손으로 매만지며 확인했다.

“그리고…… 정말 염치없는 부탁입니다만…. 돈을 빌릴 수 있을까요? 샤론 휘트크니의 이름으로 열배 이상으로 보답해 드릴테니…!”

테드는 샤론 휘트크니란 이름을 처음 들어보지만 대충 그녀가 브리드론에서 유명한 귀족임을 알 수 있었다. 이름을 건다는 것은 자신의 명예를 건다는 것이니까.

“돈이야 빌려드릴 수 있죠. 그런데 어디에 쓰려고요?”

“마을로 돌아가 말을 구할거에요. 저는 한 시라도 빨리 하스트로 가야해서…!”

하스트 대도시.

테드가 지금 향하는 곳으로 걸어서 이틀거리로 가까운 곳이다. 말을 타면 몇 시간이면 도착할 것이다.

“그렇게 서둘러 도착해야 하시는 이유라도?”

“…….”

테드의 물음에 샤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금색 눈동자를 몇 번 구르면서 뒤늦게 테드와 사이나의 형색을 살폈다. 겉보기에는 메이드와 그 주인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종족은 인간이고 귀족들이 브리드론으로 관광온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면 다른 목적으로 브리드론은 방문했거나.

샤론은 자신을 구해준 그들을 믿기로 했다. 그들이 적이라면 자신을 구해줄 이유는 없다.

“……제가 가지 않으면 브리드론에 내전이 일어 날거에요.”

샤론은 말하고 나서 아차 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타국의 사람이다. 내전이 일어나도 본국으로 돌아가면 그 뿐이다. 오히려 내전을 반길 수 있다.

샤론은 생각이 짧은 스스로를 원망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아, 그렇군요. 그런 깊은 사정이 있으셨다니… 돈정도야 빌려드려야죠. 꼭 내전을 막으시길 바랄게요.”

메이드가 아공간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골드를 꺼내기 시작했다.

10골드. 괜찮은 말 한 마리는 쉽게 구입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절대로 은혜를 잊지 않을 게요!”

돈을 받아든 샤론이 고개를 숙이며 하는 말이었다.

사이나는 마을을 향해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긋이 쳐다보다가 테드에게 물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그녀 혼자만 보내는 건 위험한 게 아닌지…?”

테드는 잠시 생각한 뒤에 입을 열었다.

“암살자… 아니, 습격자는 그녀를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야. 마차를 전복 시켰다고 그 안에 있는 사람까지 죽였다고 생각하기 어렵고, 삼류의 암살자라도 시체 확인은 하는 법이니까. 말을 죽인 것으로 봐서 그녀가 빠르게 도착하지 못하는 게 목적일거야.”

습격자는 암살자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우선 바로 떠났다는 점이 그렇다. 지금처럼 샤론이 마을로 돌아가 말을 구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남아서 상황을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마을과 대도시 사이의 중간지점에서 일을 저지른 게 더 나았다.

물론 그녀가 지나가는 상인에게 마차를 얻어 타는 방법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녀를 기절 시키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 경우엔 습격자가 일에 익숙하지 않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가.”

테드가 신경쓰이는 것은 그녀가 말한 내전이었다. 자신이 알기론 브리드론엔 내전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녀의 긴박한 표정을 보면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우린 이대로 가던 길을 갈까. 쓰러진 마차야 그 여자가 알아서 할 테고.”

테드와 사이나는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뒤, 갈색 말을 타고 빠르게 자신들을 추월해 달리는 샤론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땀에 젖은 눈으로 테드와 사이나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리고 한 시간 뒤, 테드는 나이프에 찔려 죽은 말과 함께 바닥에 쓰러져 있는 볼 수 샤론을 볼 수 있었다.

⁂ ⁂ ⁂

“……또 구해주셨군요. 정말 감사해요. 저… 그런데 이름이?”

회복 포션을 먹은 뒤 일어난 샤론이 우울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리고 뒤늦게 테드의 이름을 물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정신이 없어 미처 묻지 못했던 이름이다.

“테드 크루시안이에요. 그리고 주변을 확인했는데… 습격자는 발견하지 못했어요.”

아마도 습격자는 길을 걸어서 떠났을 것이다. 그녀가 말을 타고 빠르게 도시로 향하는 것을 확인하고서 나이프를 던져 말을 죽였다.

“……그렇군요.”

샤론은 자신의 몰골을 확인하자 절로 한숨이 나오려고 했다. 드레스는 여기저기 찢어져 있으며 피와 흙투성이다. 아름다운 백금발의 머리카락은 발견할 수도 없었고, 땅을 구르면서 피부까지 엉망이었다.

기어코 한숨을 참아낸 샤론이 테드를 향해 인사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정식으로 인사하지도 않았군요. 저는 샤론 휘트크니. 블러드 로드 중 한 명인 필리니 하스트 님의 9명의 신하 가문인 휘트크니 자작가의 여식입니다.”

“전 모험가 겸 자유기사죠.”

길게 자신을 소개하는 샤론과 달리 테드는 간단하게 자신에 대해서 말했다.

브리드론은 왕이 없다. 대신 다섯 명의 블러드 로드가 브리드론을 이끌고 있었다. 하나의 국가를 다섯 개의 대영지로 나누었고, 대영지 하나를 블러드 로드 한 명이 지배한다. 왕이라 할 수 없지만, 왕에 가까운 자들이다. 직위로 치자면 대공이라 할 수 있었다.

샤론은 목걸이를 한 차례 매만지고 곧바로 걸레짝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엉망인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손으로 쭈우욱 찢어냈다. 하얀 허벅지 아래가 훤히 드러났다.

갑작스런 그녀의 돌발행동에 테드가 당황하고 있을 때, 조용히 있던 사이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앞으로 나섰다.

“갑자기 무슨 짓입니까. 또 발정이라도 났습니까?”

샤론이 얼굴을 붉혔다.

“또, 또 발정이라니! 아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피를 마시자 갑자기 몸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워 졌죠. 당신한테 배를 맞고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아무튼 치마를 찢은 건 편하기 달리기 위해서 에요. 제 생각엔 그게 더 빨리 하스트에 도착할 것 같아요.”

테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샤론을 바라봤다. 지금 보니 마냥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달린다고 해도 오늘 안으로 하스트에 도착하는 건 불가능해요. 중간에 상인들의 마차를 얻어 탄다고 해도 습격자가 눈치 채고 덮칠 가능성도 있죠.”

그래도 테드가 생각하기에 마차를 얻어 타는 게 가장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는 방법이다. 마차 속을 투시하지 않는 한, 습격자도 그녀가 마차에 타고 있는지 모를 테니까. 테드는 그 생각을 샤론에게 말해주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오늘은 하스트로 향하는 상인들의 마차가 하나도 없어요. 마을에서 말을 구입하기 전에 상인 길드에 가서 직접 물어 확인했죠.”

샤론은 상인이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스트의 옆 도시인 우크스트에서 갑작스레 대규모 의뢰가 들어와서 오늘 하루만 마차들 전부가 우크스트로 향한다는 것이다. 대신 마차가 아닌 수레를 이끄는 상인들이 하스트로 향했다고 상인은 말했다.

샤론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샤론의 말을 들은 테드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럼.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데. 제겐 빠르게 도착할 수 있는 방법이 있죠. 아마 해가 지기 전에 하스트에 도착할거에요.”

“어, 어떻게요?!”

테드는 흥분하는 그녀를 향해 진정하라는 듯 오른 손바닥을 내뻗었다.

“단, 조건이 있어요. 아까, 늦게 가면 내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하셨지요? 그거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요.”

“…….”

샤론이 입을 앙 다물었다. 그녀는 탐색을 하듯 테드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테드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무리 은인이라 해도 외부인인데… 그에게 말해도 될까?’

샤론은 고민했다. 테드가 정말 빠르게 하스트에 도착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말해도 되지 않을까. 나쁜 거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알게 모르게 퍼져 있는 내용이기도 했고.

“좋아요. 말해드릴게요. 빠르게 하스트에 도착할 수 있는 건 사실이죠?”

“물론이죠.”

테드의 확신어린 대답에 샤론이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조금 길어요. 1년 전에 블러드 로드 중 한 명인 오드 체페쉬가 사고

로 죽으면서 시작되었죠. 그는 취미인 몬스터 사냥에서 몬스터에게 당했어요. 목격자도 확실히 있었죠. 그런데 체페쉬의 신하들은 타살이라고 주장하며 범인으로 하스트 님을 지목했어요. 그때부터 국가의 분위기가 좋지 않게 흘렸어요.”

테드는 샤론의 이야기를 들으며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샤론은 정말 억울한 듯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지만, 테드는 이 내용이 ‘내전’이란 상황으로 치닫을 만큼 심각한 것이 아님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밤이 바로 체페쉬와 하스트의 회담의 시간이에요. 하스트에서 회담

이 열리죠. 흘러가는 분위기가 좋지 못해서… 서로 불신만 쌓이다 보니 진상을 확실하

게 밝히지 않으면 바로 전쟁이 일어날 분위기죠.”

그녀는 자신의 목에 걸린 사파이어 목걸이를 꽉 쥐었다. 이건 진실의 목걸이라 불리는 물건으로 진실을 파악해준다. 시스템의 의해 만들어진 목걸이로 네메스 대륙에 단 30개 밖에 없는 물건이다.

사용횟수에 제한이 있기에 왕도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이다. 참고로 샤론의 목걸이는 앞으로 5번의 사용횟수가 남았다.

샤론은 이 목걸이를 이용해 하스트의 무고함을 밝힐 예정이었다.

시스템의 힘은 절대적. 의심의 여지도 없으며, 체페쉬의 신하들은 사과를 하고 물러갈 것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샤론은 생각했다.

“그런 귀한 건 어떻게 얻었어요?”

테드의 물음에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펠리스 왕국에서 몰래 소지하고 있는 귀족과 만났어요. 가문의 보물인 진조의 피와 교환했죠.”

진조의 피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알겠어요. 데려다 드리죠.”

테드는 아공간을 열어 자신의 애마, 제트 스키를 꺼내 들었다. 물이나 모래가 아닌 땅바닥에서 타는 것이라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포장된 도로이기도 하고 마법으로 커버

하면 문제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놀란 샤론을 무시하고 테드가 검은색의 쫙 빠진 제트 스키의 조종석 위로 올라탔다. 제트 스키가 허공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마력을 더 넣어 마법을 걸자 바닥에서 10cm 정도 떠올랐다. 허공을 날아가는 것이다.

사이나가 자연스럽게 테드의 뒤에 탔다. 테드는 그녀가 자신의 허리를 붙잡는 것을 확인하고 샤론을 바라봤다.

“뭐해요. 어서 타요.”

“……어, 뭔가 말투가 거칠어지지 않았어요?”

샤론이 테드의 말투를 지적하며 엉거주춤 제트스키의 가장 뒤쪽에 올라탔다. 본래 2인용이지만 테드와 사이나는 몸집이 작으면서도 딱 붙어 있고, 샤론 또한 그리 몸집이 큰 여인은 아니라 3인은 무리 없이 앉을 수 있었다.

샤론이 사이나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허리를 잡으려고 했다.

“뭘 남의 허리를 잡으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잘 보면 손잡이가 있으니 그걸 잡으시지요.”

“그 손잡이가 여기 의자 뒤쪽에 튀어 나간 부분은 아니죠?”

“맞습니다. 잘 아시는군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손잡이는 아닌 것 같은데요.”

“손잡이, 맞습니다.”

“아까부터 저한테 너무 차가운 거 아니에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사이나의 말에 샤론이 울상을 지으며 의자 뒤쪽으로 손을 뻗어 꽉 쥐었다. 의외로 손에 착 감겼다. 정말 손잡이 일지도 모른다고 샤론이 생각했다.

테드는 어느 정도 준비가 됐다 생각하고서 바로 등뒤에 밀착해 있는 사이나를 향해 말했다.

“자, 그럼. 사이나. 그거 부탁해.”

“그, 그거 말입니까….”

사이나는 대자뷰를 느꼈다.

테드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단숨에 눈치 챈 사이나는 떨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왜인지 이 말을 할 때만큼은 부끄러움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사이나의 얼굴이 약간 달아올랐다.

“오, 오…….”

그녀가 수영을 하기 전 준비 운동을 하듯 목소리를 외칠 준비를 할 때 였다. 돌연 뒤에서 샤론이 큰 소리로 외쳤다.

“오빠 달려어어어엇!!”

“…….”

샤론은 집사에게 들은 말이 불현 듯 떠올라 외쳐보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주위의 반응은 싸늘하다 못해 빙하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집사는 남자들이 이런 상황에서 그 말을 하면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집사의 말과 전혀 다른 반응에 샤론이 적잖게 당황하고 있을 때, 제트스키의 시동이 꺼지며 쿵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갑작스런 충격에 놀란 샤론의 귓가로 테드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와 꽂혔다.

“너 내려.”

============================ 작품 후기 ============================

찬물로 머리감아서 그런지 감기에 걸려 버렸습니다. 머리도 아프고 기침도 계속나오네요.

파가 감기에 좋다더군요. 그래서 파닭을 먹었습니다.

여러분 진짜 감기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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