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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영혼-116화 (116/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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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브리드론의 밤.

17. 브리드론의 밤.

테드는 펠리스의 국경을 벗어나기 전 하이리스의 비극에 관한 소문을 들었다. 네크로시스라는 암살길드가 하이리스 백작가를 습격한 것이다. 그 결과 가주인 기지노 하이리스가 죽었으며, 신하들 대부분이 죽었다. 다행스럽게도 소가주가 살아남아 직위를 양위 받았으나, 소가주가 어떤 인물인지 알고 있는 이들은 이미 하이리스가 끝장난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사실 테드는 불안한 마음도 어느 정도 있었다. 자신이 행한 일에 허점이 있기 때문이다. 네크로시스의 마스터가 죽었으며 길드가 사실상 해체된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테드가 알기로 현자라 불리는 디커드와 펠리스의 국왕인 라이거가 그랬다.

그들이 의문을 갖고 하이리스의 사건에 정식으로 파고든다면 상당히 귀찮아질 수 있다. 물론 만일의 가능성이다. 일반적으로 네크로시스의 잔당이라고 생각할게 뻔하니까.

그리고 마법약. 마나를 봉인하는 약과 자정이 되면 수면에 들게 하는 약은 지금의 네메스 대륙에선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악용될 우려가 있었다. 만일을 대비해 일주일이라는 유통기한을 걸어 두었지만, 그 이전에 마도사급의 마법사가 마법약을 분석하는 것에 성공했을 수도 있다.

“관두자. 그렇게 계속 생각하면 끝이 없어.”

테드가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정면에 있는 다리를 바라본다. 사람이나 마차가 지나가고 있다. 주로 상단 출신의 사람들이 이 벽돌로 지어진 튼튼한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강의 위에 지어진 이 다리는 아래에 흐르는 하누비스 강의 이름을 따서 하누비스 대교라고 불린다. 현재 테드가 있는 곳은 펠리스 왕국이지만, 저 다리를 건너면 바로 뱀파이어의 국가인 브리드론이다.

양쪽 다리의 입구에는 병사들이 지키고 있다. 지나기 위해선 그 목적과 신분을 그들에게 밝히고 허락을 받아야 했다. 테드는 자유기사의 직위를 가지고 있기에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바로 왕국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주인님. 절차를 끝냈습니다.”

메이드 복장위에 레드와인색 코트를 걸쳐 입은 사이나가 테드의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일종의 출입국관리다. 국가인 만큼 어찌 보면 당연히 걸쳐야 하는 절차다. 그렇다고 그리 복잡한 것은 아니다. 범죄자가 아니면 대부분이 간단히 통과된다.

사이나가 테드의 신분증과 허가서를 건네주었다. 그녀가 테드를 대신해 절차를 한 것이다.

“그래. 그럼 가자. 아, 브리드론에선 좀 조심해야 될 거야.”

“무엇 때문에 말입니까?”

사이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테드와 자신의 실력을 생각하면 조심해야 될 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뱀파이어의 나라잖아. 뱀파이어 남자 놈들은 미인을 좋아하거든. 성욕이 아니라 식욕 쪽으로.”

“아, 그렇군요. 그렇지만 문제없습니다. 제가 그리 쉽게 당할리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테드는 납득했다. 사이나의 강함이면 뱀파이어 한 무더기가 와도 문제없을 것이다.

참고로 뱀파이어 전부가 정신 나간 놈들만 있는 게 아니다. 아무리 미인이라도 무작정 덮치지 않는다. 그들도 지성체인 만큼 욕망을 제어할 줄 알았다. 그러나 인간들 중에서도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는 만큼, 뱀파이어들 중에서도 앞뒤 구분 못하는 멍청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미인이란 카테고리엔 남녀 구분이 없었다. 기준에 충족하면 남자라도 덮친다.

“뭐, 우린 낮에 활동하니 그런 일은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해.”

뱀파이어는 기본적으로 야행성이다. 종족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낮에 활동하는 뱀파이어의 수는 엄청나게 적다. 테드와 사이나는 밤에 잠을 잘 예정이니 뱀파이어와 마찰을 일으킬 가능성은 낮았다.

테드와 사이나는 하누비스 대교를 걸었다. 대부분이 펠리스에서 브리드론으로 가는 사람들이고, 브리드론에서 펠리스로 향하는 사람은 적었다. 그 중 대부분이 인간이고 뱀파이어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테드와 사이나는 무료한 얼굴로 인도 영역을 걸었다. 바로 옆의 넓은 영역은 차도 영역으로 마차들이 지나가는 길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달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마차가 하나 쌩하고 지나갔다. 이곳이 다리 위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지나갔기에 테드의 시선이 자연스레 마차 쪽으로 향했다.

검은색의 쌍두마차였다. 크기가 작고 아무런 표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상단 소속의 마차는 아니었다. 빠르게 다리의 끝에 도달한 마차는 입구를 지키는 브리드론의 경비병들에게 조금도 제지 받지 않고 곧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오히려 경비병들이 마차를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브리드론의 귀족 일 것이다. 브리드론은 신분이란 것은 일종의 절대적인 법칙이었다. 카스트제도처럼 말이다.

“쯧. 위험하게시리… 뭐 저리 급하게 간다냐.”

테드의 앞에 수레를 이끌며 다리를 건너던 2 명의 상인 중 한명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테드는 엿들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귀에 들려왔을 뿐이었다.

“보아하니 귀족이 탄 마차 같은데… 요새 브리드론이 흉흉하지 않나. 중요한 소식이라도 가지고 가는 것이겠지.”

“그건 나도 들었지. 귀족들간의 영역다툼이 있었다면서? 우리가 휘말리진 않겠지?”

상인이 불안감이 담긴 목소리로 동료 상인에게 물었다. 동료는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듯 씩씩하게 대답한다.

“뭘, 우린 일개 상인 일 뿐이네. 하물며 브리드론의 백성도 아니지. 우리야 물건만 팔고 돌아갈게 아닌가. 걱정할 필요는 없네.”

“그래도 그렇지만… 뱀파이어가 갑자기 덮칠 수도 있지 않냐? 인간 피를 그렇게 좋아한다면서?”

“뱀파이어가 꼭 피를 먹어야하는 것도 아니고, 그놈들도 사람 가려서 먹네. 내가 뱀파이어라면 털복숭이 남자인 자네 목덜미를 물고 싶진 않군.”

“아니, 뭐. 그야 그렇지만… 꼭 그렇게 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 망할 자식아.”

“자넨 겉모습과 달리 너무 소심해. 브리드론에 한 두 번 가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자신을 가지게.”

“이번이 두 번째 인데.”

“……여하튼 문제는 없을 거네. 날 믿으시게.”

그들의 대화를 본의아니게 들은 테드는 인상을 찡그렸다. 이야기만 들으면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야기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느꼈다.

테드는 브리드론의 경비병에게 신분증과 허가증을 건넸다. 신분증을 다시 받았고, 허가증은 경비병이 가져갔다. 다른 상인이나 관광객의 경우 입국 절차를 다시 밟아야 했으나, 신자유기사의 신분은 그대로 테드와 사이나를 통과시켜주었다.

“주인님, 오늘은 여기서 머무시겠습니까?”

사이나가 물었다. 테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틀거리에 대도시가 있으니까. 바로 그곳으로 향할 생각이야. 대도시엔 워프게이트가 있으니까. 뭐, 국가 사정상 마음대로 워프게이트를 사용할 수는 없지만. 또 왠지 불길하기도 하고.”

결로부터 말하자면 테드의 감은 정확했다. 그리고 피하지 못했다.

⁂⁂⁂

테드와 사이나는 대도시로 향하는 길목에서 쓰러져 있는 검은 마차를 발견했다. 하누비스 대교에서 질주하던 그 마차였다.

“……젠장. 또 귀찮은 일이야.”

테드는 인상을 팍 쓰며 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귀찮은 것은 싫지만, 누군가의 사고를 그냥 지나치고 싶진 않았다. 사람의 도의란 것이다.

어느 정도 포장된 도로이기 때문에 마부의 실수가 아니면 마차가 쓰러지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마부의 실수는 절대로 아니었다. 다른 누군가의 개입이 있었다.

마차의 나무 바퀴에 1M 정도 되어 보이는 철심이 걸려 있었다. 도로 한 가운데, 주변

에는 풀과 도로밖에 없기에 철심 같은 인조물이 굳이 바퀴에 끼어 있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누군가 일부러 바퀴를 향해 철심을 던지지 않았다면.

마차의 일부는 파괴되어 있었다. 철심이 박힌 왼쪽 바퀴는 완전히 박살났고, 바닥에 깔린 바퀴 또한 일부가 파손되어 바위 전체에 금이 가있다.

2마리의 말은 죽어 있었다. 보니까 목에 작은 단검이 박혀 있다. 누군가가 투척한 것이 틀림없었다. 마차를 몰던 마부도 죽어 있었다. 중년의 남자였는데 마차가 옆으로 쓰러지면서 목이 완전히 부러졌다.

“……사이나. 아직 놈이 주변에 남아 있을지도 몰라.”

테드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이나는 잔말 않고 곧바로 마력을 개방시킨다.

“찾지 못했습니다. 이미 이곳에서 벗어난 듯 합니다.”

남아서 상황을 지켜보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테드는 마법으로 신체를 강화시켜 단숨에 마차의 문을 뜯어내 바닥으로 던져버렸다. 내부에는 한 명의 여인이 있었다. 나이는 대략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백금발의 여인이었다. 창백한 피부의 미녀는 얼굴과 백금발을 피로 물들이고 있었다. 살짝 벌려진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보였다.

그녀는 죽지 않았다. 충격에 의해 기절했을 뿐이다. 테드는 그녀를 끌어내기 위해 마차안으로 들어갈 자세를 잡았다. 뜯어낸 마차의 문틀을 잡는 순간 고통이 밀려왔다.

손이 베였다. 마차 문을 강제로 뜯어내다 보니 단면이 날카로뤄졌다. 무심코 잡은 부분이 하필이면 가장 날카로운 부분이었다.

테드는 혀를 차고서 마차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마법을 사용해 쓰러진 뱀파이어 여자를 마차 밖으로 끌어냈다.

“주인님은 항상 어딘가 어수룩하시군요.”

사이나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테드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하얀 손수건으로 테드의 피투성이 손바닥을 닦으려고 했다.

“아니, 잠깐. 기왕 이렇게 된 거 이 여자에게 피를 먹이자. 뱀파이어는 신선한 피를 먹으면 몸을 회복하거든.”

물론, 잘린 팔이 자라나는 정도는 아니었다. 치명상은 회복하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사이나는 약간의 텀을 두고 뒤로 물러났다.

테드는 곧바로 땅바닥에 쓰러진 백금발의 여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한손으로 그녀의 뺨을 붙잡고 강제로 입을 벌리게 한다. 피가 고여 있는 다른 한 손을 기울어 피를 입안에 넣었다.

뱀파이어로서 피의 향기와 맛을 느낀 것일까. 그녀가 본능적으로 꿀꺽 피를 삼키기 시작했다. 테드는 그녀에게서 물러 나고 손바닥을 한 차례 털었다. 핏방울이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하아…….”

야릇한 숨소리에 테드의 시선이 여인에게 향했다. 창백한 얼굴은 온데간데 없고 붉게 상기된 얼굴로 거친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반쯤 뜬 눈은 풀려 있었으며, 몸을 비비꼬며 상체를 일으킨다. 한 손으로 자신의 풍만한 가슴을 만지고, 다른 한손으로 자신의 허리를 만진 그녀는 테드를 갈구하듯 쳐다봤다.

“……발정? 아니, 아무리 뱀파이어라도 피를 먹는 걸로 발정하진 않아.”

테드가 머릿속의 지식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피를 먹어서 발정했다는 뱀파이어는 들어 보지 못했다.

멍하니 있던 여인이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팔을 벌리고 테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테드가 반응하기도 전에 사이나의 구둣발이 여인의 복부를 강타했다.

여인은 공벌레처럼 땅바닥을 몇 번 떼굴떼굴 구르고서 멈추었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았다. 기절한 것이다.

“은혜도 모르는 천박한 년이군요.”

사이나는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구두 끝으로 땅바닥을 툭툭 쳤다. 그리고 테드의 곁으로 다가와 하얀 손수건으로 손바닥을 깨끗이 닦고 최고급 회복 포션을 콸콸 부었다. 손바닥의 상처는 흉터도 없이 아물었다.

“자. 잠깐…!”

테드가 감사 인사를 하기 직전 백금발 여인이 복부를 매만지며 상체를 일으켜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테드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을 때, 사이나는 손수건에 묻은 피를 손가락 끝으로 찍었다. 그리고 재빨리 입술의 안으로 쏙 집어넣었다. 비릿한 피맛이 느껴졌다. 그리고 순간 사이나의 눈이 살짝 커졌다.

1초 정도 몸속의 혈액이 빠르게 흐르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몸에 예민한 사이나였기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직접 확인한 결과 테드의 피는 특별했다. 그러나 발정이 날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그건 사이나가 악마이기 때문이다. 악마는 병에 걸리지 않고, 웬만한 맹독 정도는 가볍게 무시한다. 아주 적은 양으로 사이나의 몸에 1초라는 짧은 시간동안 변화를 줄 정도이다. 웬만한 생명체에겐 통하고도 남을 것이다.

사이나는 백금발의 여인을 쳐다봤다. 정신은 차린 모양인데 얼굴이 붉고 숨이 가쁜 것이 그녀가 아직 정상적인 상태가 아님을 알았다.

사이나는 주인님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리고 테드의 뒤를 따랐다.

============================ 작품 후기 ============================

뱀파이어 한정입니다. 물론 남자도 똑같이 반응합니다. 약효는 증발하지 않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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