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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아이리스 우크사이어.
신트론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접견실 문 입구에 나타난 테드를 바라봤다. 겉모습은 자신보다 어린 소년이었다. 귀티가 흐르는 옷과 자신만만한 얼굴은 사용인의 것이 아니었다.
신트론은 빠르게 머리를 굴렀다. 건들면 안 되는 귀족, 후작이나 공작 등의 아이를 떠올리고 얼굴을 대조해본다. 찾을 수 없었다.
“넌 또 어느 가문의 귀족이지?”
신트론이 으르렁거리는 듯 말했다. 가문의 이름을 알아내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팍팍 느껴졌다.
“네가 애타게 찾는 우크사이어의 손님이고 가문은 크루시안 가문.”
“……크루시안 가문?”
처음 들어보는 가문 이름이었다. 신트론이 미간을 좁히며 올크린스를 바라봤다.
그 무언의 물음에 올크린스가 여전히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얼마전 우크사이어 백작님이 임명하신 자유기사입니다.”
“……자유 기사?”
신트론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듯 했다. 그러나 올크린스는 정정하지 않았다.
신트론이 배를 부여잡고 웃기 시작했다.
“푸하하하하!”
배에 주먹이라도 맞은 듯 허리를 접고 머리를 아래로 향한 채 웃어댔다. 너무 웃은 나머지 침 몇 방울이 바닥에 떨어졌다. 한동안 접견실에서 그의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
“올해 들어 최고로 웃긴 상황이었다. 고작 자유 기사가, 그것도 우크사이어 백작의 자유 기사가 내게 대들다니! 아버지도 이 말을 들으면 배를 잡고 폭소 할게 틀림없겠지!”
신트론은 분노 했던 아까와 달리 이번엔 즐거워 보였다.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테드는 그의 머리가 어딘가 잘못 된 것으로 생각했다. 감정 조절 장애라던가.
“날 웃게 해준 대가로 이번일은 넘어가주마. 대신, 네 아래에 있는 은발 메이드를 내게 넘겨라.”
“내가 왜?”
“예상했던 대답이다. 그 정도의 미녀다. 넘기는 게 탐탁지 않겠지.”
신트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눈에 시선을 빼앗는 여신같은 여인이다. 자신이라도 넘기라고 하면 순순히 넘길 수 없었다.
“하지만 내게 넘기지 않는다면 넌 죽는다. 너에겐 그녀는 너무 분에 넘쳐.”
신트론은 테드를 위협하듯 앞으로 한 발자국 걸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을 잇는다.
“무지한 너도 들어는 봤을 거다. 보물에는 마땅히 그에 걸 맞는 주인이 있다고. 그게 꼭 보물에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거든?”
주먹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신트론이 멈춰 섰다. 그는 연신 즐거운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머릿속에는 은발의 여인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오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나도 어느 정도 공감하는 말이긴 한데… 넌 해당사항이 없을 것 같다.”
날카롭게 치켜뜬 눈으로 테드가 말했다.
신트론의 볼이 움찔 경련했다. 머릿속에 여신을 그리며 폭발하려는 감정을 참았다.
“대화가 안 되는 군.”
신트론이 한 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테드는 그를 무시하고 앞으로 나서려는 인크론과 아이리스를 향해 손을 들어 제지했다.
“내가 직접 그녀와 얘기하겠다. 지금 여기서 맞아 죽고 싶지 않다면 지금 당장 그녀
를 내게 데려와라.”
“…….”
테드는 손을 들어 자신의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자신의 혈압이 상승하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테드는 회귀전에 그를 만난 적이 있기에 그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상대는 귀족, 펠리스 왕국에서 그런대로 이름 있는 하이리스 가문의 소가주. 별명은 하이리스의 개망나니. 회귀 전에는 전쟁터에서 그를 몰래 죽여본적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사정이 달랐다. 혼란한 전쟁터도 아니었고, 목격자도 많았다. 더군다나 여기서 문제를 일으키면 우크사이어에 폐가되기 때문에 최대한 참고 있지만, 그것도 슬슬 한계였다.
‘여기선 일단 참자. 펠리스 왕국을 떠날거지만, 여기서 내가 문제를 일으키면 우크사이어가 곤란해.’
밑바닥에 있는 인내심을 모조리 긁어모은다.
“무시하는 건가. 하이리스의 소가주인 내 말을 고작 자유기사 따위가?!”
신트론은 통통한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고 흔들었다. 하얗고 굳은살 없는 손은 사람의 주먹 같지 않았다.
“아쉽게도 네게 보여줄 여자는 없어. 용건이 끝났으면 잠자코 집으로 돌아가.”
“하! 이젠 명령까지 하는 거냐?!”
신트론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통통하고 둥근 얼굴이 달아오르자 사람의 머리보다는 붉은 풍선을 떠올리게 했다.
테드는 씩씩거리는 그를 보면서 툭 내뱉듯이 무의식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하이리스의 개망나니.”
“이 빌어 쳐먹을 놈이!!!!!”
갈라진 목소리가 접견실을 외친다. 테드의 뺨에 신트론의 침이 튀었다. 그 불쾌감에 저도 모르게 마력을 끌어 올릴 때, 신트론이 손을 들어 올려 주먹을 내지르기 위한 준비 자세를 취한다.
그리고 테드의 눈에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린 속도로 주먹이 얼굴을 향해 다가온다.
테드는 이 주먹을 맞아줄 생각이었다. 네메스 대륙에도 법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현재 펠리스 왕국의 법은 수많은 환생자들을 통해 다듬어진 법이다. 중세시대의 어처구니없는 법은 아니었다. 전문적인 판사도 있으며 변호사라는 직업도 버젓이 존재했
다. 그러나 귀족 사회인만큼 법이 귀족에게 더 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테드가 노리는 것은 정당방위다. 귀족의 근거 없는 폭력은 행사할 수 없다. 법으로 금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목격자가 존재한다. 아이리스 우크사이어라는 훌륭한 목격자가. 법정에 간다고 해도 전혀 불리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일단 한 대 맞고, 한 대 돌려줄 생각이다. 물론 그 한 대가 어느 정도 위력인지 테드만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주먹은 닿지 않았다.
테드의 얼굴 바로 앞에서 멈췄다.
그 솜주먹은 물론이고 희미한 바람조차 테드에게 닿지 못했다.
테드가 눈을 크게 떴다.
주먹이 허공에 고정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주먹의 주인인 신트론은 자신의 주먹이 움직이지 않는 것에 당황해 입을 벌리며 연신 어버버 거리고 있었다.
테드가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잠시.”
귓가를 부드럽게 간질이는 듯한 고운 미성이 들렸다. 테드가 한 차례 몸을 움찔거렸다가 멈췄다.
테드의 후두부에 사이나의 풍만한 가슴이 닿았다. 그녀는 양팔을 뻗어 테드의 목을 끌어안듯이 감쌌다.
“더러운 액체가 뺨에 묻었습니다.”
그녀가 손에 쥔 새하얀 손수건으로 테드의 뺨을 닦았다. 시야 한 구석에 그녀의 부드러운 은발이 보였다.
테드는 몰래 쥐고 있던 주먹을 풀었다. 신기하게도 그녀의 품에 안기는 순간 분노가 눈녹듯이 사라졌다.
눈앞에 있는 망나니는 아무래도 좋은 기분이었다. 어차피 그가 할 수 있는건 없을 테
니까.
“드, 드디어 왔군!”
신트론이 허둥거렸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던 주먹이 다시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을 깨닫고 한껏 팔을 옆으로 벌렸다. 그리고 과장스럽게 허리를 숙이며 팔을 접었다. 테드는 그 우스꽝스러운 모양이 귀족식 인사임을 알았다.
그녀의 품안에 있는 테드는 신트론의 눈에는 안중에도 없었다.
“오, 그대여! 처음 뵙겠소! 본인은 신트론 하이리스라 하오. 본인은 그대에게 할 말이 있소.”
“……테드님의 전속 메이드인 사이나 루키페르라고 합니다. 무슨 볼일이신지?”
신트론의 시선은 사이나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다. 무뚝뚝한 그 얼굴마저도 사랑스러워 보였다. 저 얼굴에 미소가 담기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본인이 그대를 고용하고 싶소. 아니, 그대와 결혼해 평생을 함께 하고 싶소. 하이리스의 안주인이 되지 않겠소?”
신트론은 그녀가 거절할 것이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메이드인 그녀는 평민이라는 뜻이다. 단숨에 상위 귀족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결과야 이미 당연한 게 아닌가.
사이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했다.
“죄송합니다만.”
사이나가 테드의 등에 몸을 기댔다. 그녀가 테드를 감싸고 있는 양팔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턱에 부드러운 테드의 머리카락이 닿았다.
그 모습을 본 아이리스는 인형을 끌어안고 있는 공주님을 떠올렸다.
“제 몸과 마음은 모두 주인님의 것입니다. 당신이 개입할 여지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사이나가 아주 잠깐 미소를 그렸다. 순식간에 사라진 미소였지만, 그녀를 주시하고 있던 인물들을 모두 멍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품에 안겨 있는 테드를 제외하고.
“……그렇게 까지 말하면 내가 부끄러운데.”
테드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중얼거렸다.
사이나의 미소에 정신을 빼앗겼던 신트론이 테드의 목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그는 터지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로 얼굴을 붉히고서 테드를 향해 삿대질했다.
“내가…, 그 놈 보다 못하단 말이오?!”
사이나의 한쪽 눈썹이 한 차례 꿈틀거렸다.
“네.”
고저 없는 목소리는 북풍처럼 날카로웠다.
“당신은 주인님의 발끝도 미치지 못합니다.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게 상당히 불쾌하군요.”
신트론이 분노를 토해내기 위해 시원한 숨을 한껏 들어 마셨다. 그러나 그가 뜨거운 숨결을 토해내기 전에 아이리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그만하시지요. 아무리 소가주님이라 할지라도 무례를 봐드리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아이리스의 마력이 몸에서 뿜어져 나와 접견실을 가득 채운다.
신트론은 사방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큿하고 이를 다물었다. 신트론은 하이리스의 직
계치고는 재능이 없었다. 그렇다고 노력하는 것도 아니었다. 통통한 몸이 그 증거였다.
“우크사이어 백작! 지금 시위하는 건가?!”
신트론이 이를 악물며 아이리스를 노려보았다. 아이리스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이곳은 우크사이어입니다. 부디 소가주님께서 예의를 갖쳐 주시지요.”
아이리스가 담담히 말했고, 그때까지만 해도 한발자국 뒤에 서서 상황을 보고 있던 올크린스가 신트론의 곁으로 움직였다.
“소가주님. 돌아가시지요. 더 이상 여기에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올크린스 남작…! 나는 저들에게 모욕을 당했다. 그런데 그냥 넘어가자고?!”
“명분은 그들에게 있습니다. 나중을 기약하시지요. 가주님도 소란을 일으키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트론을 아버지를 언급하는 말에 쓰레기라도 씹은 듯 인상을 구겼다.
“……올크린스 남작. 이 상황에 웃음이 나오나?!”
신트론이 괜한 화풀이를 하기 시작했다. 올크린스가 재빨리 웃음을 지었다. 무표정한 얼굴은 그를 냉혹하게 만들었다.
“죄송합니다. 항상 웃고 다니는게 습관인지라… 소가주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신트론은 이놈이나 저놈이나 마음에 드는게 하나도 없다면서 거칠게 혀를 찼다.
그는 떠나는 그 순간 까지도 사이나를 힐끗 거렸다.
“……죄송합니다. 테드 님. 괜히 저희 일에 휘말리셨군요.”
아이리스가 테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테드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요. 사이나가 너무 예뻐서 그런 거지.”
“너무 예뻐서 죄송합니다. 주인님.”
“아니… 뭐, 죄송할 것까지야.”
사이나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테드가 농담이었다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나저나 문제군요. 보아하니 하이리스의 소가주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인크론이 우려를 표했다. 테드는 그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받은 대로 돌려줘야겠죠. 하는 김에 여러분의 몫까지 제가 돌려주죠.”
갑작스런 그 말을 이해하는 자는 접견실에 없었다. 아이리스와 인크론이 당황할 때,
테드의 등 뒤에 바로 붙어 있던 사이나가 테드의 양어깨를 꾹 눌렀다.
“주인님. 우선 얼굴부터 씻으시지요. 불치병에 걸리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아, 소독도 잊어선 안 됩니다.”
단호함이 담긴 사이나의 말에 테드는 반박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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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