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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영혼-113화 (113/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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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아이리스 우크사이어.

16. 아이리스 우크사이어.

2월말, 차가운 겨울 날씨는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우크사이어의 사용인들은 언제나와 같이 성실하게 일에 임했고, 테드와 사이나는 우크사이어 가문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니, 떠날 준비는 진즉에 끝났다. 그저 테드의 게으른 성격 탓에 미뤄지고 있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아이리스의 부탁이 있었다. 3월, 봄이 시작되는 날에 떠나라고 그녀가 붙잡았다.

테드에게는 마법적인 교육을 더 받고 싶다는 그녀의 생각이 뻔히 보였다. 테드는 그녀에게 어울려주기로 했다. 급하게 움직일 필요도 없었고, 우크사이어에서 생활하며 그녀에게 받은 것도 상당히 있었다.

그리고 그날, 우크사이어 저택에 원치 않는 한 무리의 불청객들이 나타났다.

약 20명에 달하는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그는 나타났다. 자신이 귀족이라고 말하는 듯한 알록달록한 화려한 복장과 통통하게 살이 올라 있는 얼굴의 소년이었다. 나이는 대략 15~17살 정도로 보이는 붉은 머리 귀족 소년은 우크사이어의 대문을 불쾌하게 쳐다보며 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신트론 하이리스는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아버지의 생각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아버지의 목적은 알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딴 몰락해가는 귀족 가문 정도야 힘으로 찍어 누르면 그만 인 것을.

“소가주님,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기사들의 철통같은 호위를 받고 있는 신트론에게 한 명의 청년이 다가왔다. 신트론처럼 화려한 복장을 하고 있는 청년은 덥수룩한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다. 덥수룩한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표정은 서글서글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신트론은 항상 같은 표정의 그, 올크린스 남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키도 크고 재능도 있는 그가 자신을 내려다 볼 때면 그의 서글서글한 웃는 표정이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왜 바로 알아보지 못하는 거지?! 우크사이어는 경비병까지 무능하군!”

신트론은 대문을 열고 있는 경비병이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불평을 내뱉었다. 경비병들의 몸이 한 차례 움찔거렸다가 다시 자신들의 일을 하기 시작했다.

신트론은 기사들의 갑옷, 자신의 가슴팍에 그려져 있는 붉은 개구리를 알아보지 못하

는 우크사이어의 경비병들을 노려보았다. 가문을 지키는 경비병이라면 최소한 귀족 가문을 상징하는 문양 정도는 외우고 있어야 하지 않나.

“우크사이어의 경비병이니 어쩔 수 없지요. 소가주님이 넓은 도량으로 그들의 무식함을 이해해주시면 됩니다. 그러니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계속 바깥에 있을 순 없는 노릇 아닙니까.”

올크린스의 말에 무언가 반박하려던 신트론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이내 열린 우크사이어의 대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간 것이 심기가 상당히 불편해 보였다.

호위를 이끌며 저택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신트론은 우크사이어의 정원을 보고 비웃음을 머금었다. 귀족의 정원은 일종의 과시다. 얼마나 아름답냐에 따라서 귀족의 권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신트론은 공작가의 정원을 한 번 본적 있는데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세련되고 아름다웠다. 연못은 물론이고 희귀한 나무와 희귀한 조각품으로 장식되어 있는 정원이었다. 그런 정원이라면 하루에 몇 번이나 산책을 할 수 있을 정도다.

“초라하군. 돈 많은 상인들 정원이랑 다를 게 없어. 쯧쯧.”

정원을 훑어보던 신트론의 시야에 마침 정원을 지나가는 사용인이 보였다. 붉은 머리를 곱게 땋은 메이드였다. 신트론이 시선을 옮기려는 찰나, 메이드의 치마가 유난히 짧은 걸 확인했다.

치마가 무릎까지 올라가 있었다. 쌀쌀한 날시 때문인지 다리에는 하얀색의 스타킹을 신고 있다. 걸을때마다 검은색 치마가 살짝 흔들렸다.

하이리스 가문의 메이드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것이 사용인의 규정이기 때문이다.

“우크사이어의 메이드는 치마가 짧군.”

“우크사이어 뿐만이 아니라 베이론의 메이드 전부가 치마가 좀 짧습니다. 일종의 유행이지요. 최근에는 주변의 도시로 퍼지고 있고요.”

“……규정이 있을 텐데. 도대체 메이드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건지….”

“보통 직위가 높으면 사용인들까지 신경 씁니다만… 백작 이하의 귀족들은 사용인들에게 관대합니다. 설렁 규정이 있다고 해도 치마길이 정도야 상관없다고 생각하겠죠.”

신트론은 메이드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짧은 치마의 메이드는 그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는 하이리스 저택에 일하는 메이드들을 떠올리며 자연스럽게 비교했다.

“……짧은 치마도 나쁘지 않겠군.”

신트론이 툭 내뱉듯이 말하며 저택의 입구로 향했다. 저택의 입구에는 한 명의 집사가 서있었다. 반백의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긴 중년의 집사는 신트론을 향해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있었다. 신트론은 주위를 살폈다. 중년 집사 한 명 뿐이었다.

“소가주님. 그가 인크론입니다.”

올크린스가 작은 목소리로 귓가에 말했다.

“…아버지는 왜 집사 따위를 조심하라고 한 거지.”

못마땅함이 느껴지는 태도로 신트론이 중얼거렸다. 신트론은 가문을 떠나기 전, 하이리스의 가주인 아버지에게서 인크론이라는 집사를 조심하라는 말을 몇 번이나 들었다. 가주가 아닌 집사를 조심하라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소가주님. 그는 젊었을 적에 기사단 하나를 단신으로 전멸시킨 적 있습니다. 집행

자를 권유받은 적도 있죠. 시간이 흐른 지금, 그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우크사이어에서 가장 조심해야할 요주의 인물이죠.”

“그래봤자 몰락해가는 가문의 집사일 뿐이지. 우리 가문에 비할 바가 아니야.”

“……그렇긴 합니다만, 가주님은 그의 힘을 원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적어도 가주님의 뜻대로 행동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

신트론은 대답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뒤에서 올크린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우크사이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신트론 님. 가주님은 안쪽에 기다리고 계십니다.”

“환영한다고?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만?”

주위를 쓱 둘러보며 신크론이 인크론에게 말했다. 허리를 곧게 핀 인크론이 가식적인 웃음을 지었다.

“공교롭게도 가문의 사용인들이 적고, 현재 있는 사용인들은 전부 빠질 수 없는 일을 하고 있기에 저밖에 마중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 정도로 몰락했나?”

신트론이 이죽이며 말했다. 옆에 있던 올크린스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렸으나, 신트론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인크론은 듣지 못했다는 듯 웃고만 있었다.

“2층 접견실에 있습니다. 기사 분들은 1층에서 기다려 주시지요. 신트론님의 신변은 걱정하시 마십시오. 이렇게 보여도 백작 가문입니다. 이곳에서 습격당할 일은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대답한 것은 올크린스였다. 그는 신트론이 입을 떼기 전에 앞으로 나서며 빠르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기사들에게 대기하라는 명령을 하고, 인크론에게 사과의 뜻을 건넨다.

인크론은 신트론과 올크린스를 데리고 접견실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의 복도를 지나면서 신트론은 우연히 창밖을 스쳐지나가는 여인을 볼 수 있었다.

신트론이 통통한 몸을 고양이처럼 민첩하게 움직여 창문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정원을 지나가고 있는 두 명의 메이드를 바라본다. 한 명은 방금 정원에서 본 붉은 머리카락의 메이드였다. 그리고 그 옆에 키가 큰 은발머리칼의 옷이 다른 메이드가 있었다. 보이는 것은 옆모습뿐이었지만, 신트론은 멍하게 풀린 눈동자로 그녀의 뒤를 쫓고 있었다.

반짝이는 은발과 기품이 느껴지는 발걸음은 메이드 보다는 한 나라의 공주로 보였다. 풍만하게 나온 가슴과 완벽한 곡선을 이루는 허리라인은 시선을 빼앗고, 새하얀 피부의 얼굴은 여신처럼 아름다웠다.

“집사! 저 여인은 누구지?! 이 저택의 메이드인가?!”

은발의 메이드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시선을 돌린 인크론을 향해 큰소리로 물었다. 추잡한 욕망으로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신트론이 돌발행동을 할 때부터 지켜본 인크론이 아주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그녀는 우크사이어의 사용인이 아닙니다.”

“메이드가 아니라고? 그럼 왜 메이드 복을 입고 있지?!”

신트론이 흥분해서 외쳤다. 통통한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은발 여인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현재 가문에 머물고 있는 손님의 메이드입니다.”

“그래? 그럼 그 손님에게 날 안내해라. 지금 당장!”

“……혹시나 해서 묻는 것입니다만, 만나서 무엇을 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당연히 메이드를 내게 넘기라고 할 것이다.”

“……메이드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래. 물건은 아니지. 그러니 메이드가 직접 내게 오게 만들겠다. 하이리스의 이름과 막대한 돈을 지불하면… 아니, 나의 부…….”

흥분해서 말을 쏟아 내는 신트론의 어깨를 올크린스가 꽉 잡았다. 신트론은 오른쪽 어깨에 느껴지는 통증에 인상을 팍 쓰며 올크린스를 노려보았다.

“……무슨 짓이냐?! 올크린스 남작!”

“너무 흥분하셨습니다. 일단 진정하시지요. 지금 상황을 가주님께서 아시면 적잖게 실망하실 겁니다.”

가주라는 말이 나오자 신트론은 혀를 차며 자신의 어깨를 잡은 올크린스의 손을 탁 쳤다. 올크린스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인크론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소가주님을 대신해 제가 사죄드리겠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생각보다 많이 시간을 소모했군요. 일단 접견실로 들어가지요.”

인크론은 그들을 접견실로 안내했다.

신트론은 접견실에 들어선 순간까지 무례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는 우크사이어의 가주인 아이리스를 무시하고서 소파에 앉았다. 그는 고작 접견실에서 자신을 모신다는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이리스는 개의치 않고 다시 신트론에게 입을 열었다.

“……아이리스 우크사이어 백작입니다. 신트론 하이리스님이시죠? 처음 뵙는군요.”

“신트론 하이리스요. 처음 뵙겠소.”

신트론은 대놓고 아이리스를 훑어보았다. 아버지의 말대로 확실히 미인이었다. 남청색의 단발머리, 새하얀 피부와 드레스를 통해 드러난 슬림한 몸매. 그간 보아온 귀족 영애들과 비교하자면 상위에 속했다.

만약, 방금 정원을 지나가는 은발의 메이드를 보지 못했더라면 아버지의 말을 따라 그녀와 결혼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봐버리고 말았다. 눈앞의 여자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아름다움을 가진 여신을.

“하이리스 가문에서 온 청혼서를 읽어 보았습니다. 오늘 찾아오신 이유가 저의 대답을 듣기 위해서겠죠.”

대충 흘러들은 신트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은발의 여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눈앞에 그녀가 아른거렸다. 지금 당장 만나고 싶었다.

“청혼서를 받은 뒤, 심사숙고를 거듭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아이리스는 숨을 삼켰다. 그녀는 자신의 대답을 하이리스가 어떻게 반응할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갈갈히 분노해 날뛰겠지.

“죄송하지만, 저는 소가주님과 결혼할 수 없습니다.”

“……하?”

퍼뜩 정신을 차린 신트론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아이리스를 보았다. 결혼할 생각이 없었긴 했다. 그러나 자신이 파혼 당했다고? 다 쓰러져가는 가문의 귀족 따위에게?

“지금… 그러니까. 파혼하겠다고?”

“청혼을 거절한 것이니, 파혼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요.”

아이리스가 담담하게 말했다. 신트론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그는 아이리스를 한 껏 노려보더니 신경질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올크린스는 예상했다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나도 이 쓰레기 같은 가문의 여자와 결혼할 생각은 없다.”

“……그 말은 조금 심하시군요.”

아이리스의 말에 신트론은 같잖다는 듯 콧방귀를 끼고서 인크론을 바라봤다.

“집사! 당장 그 손님에게 날 안내해라. 아니면, 그 여인을 내게 데려오던가!”

안하무인격으로 말하는 그를 보며 인크론은 잠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는 수 십 년을 살아왔지만, 눈앞의 개념이 전혀 없는 귀족은 본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어쩌면 일부러 그러는 것일지도 모른다. 약해진 우크사이어를 노리고 하이리스가 이빨을 드러내는 것이리라. 생각해보면 애초에 원수관계인데 청혼서가 온 것 부터가 이상했다.

“뭐하는 거냐!”

신트론이 침을 튀기며 호통 쳤다. 접견실의 문이 열린 것은 그 직후였다.

“그렇게 날 뛸 필요는 없어. 내가 직접 왔으니까.”

테드는 썩은 음식물 쓰레기를 보는 눈으로 신트론을 노려봤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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