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결한 영혼-110화 (110/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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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코스모스 아카데미의 축제.

레이나 델톤.

펠리스 왕국의 12집행관 중 한명.

테드는 초면이 아니었다. 그녀와는 2년 전 루크에이스의 미궁에서 만났다. 테드는 그녀를 도왔고, 그녀는 테드에게 빚을 지었다. 그녀의 성실한 성격을 생각하면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테드는 귀찮아 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루크에이스라면 몰라도 펠리스에서 그녀와 엮이게 되면 이리저리 바빠질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웬만하면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테드는 슬쩍 옆을 바라봤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멈칫하고 있는 라이거가 있었다. 여기사를 바라보는 부드럽고 선해 보이는 눈매가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러나 곧 테드의 시선을 느끼고서 눈매를 다시 바꾸었다.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레이나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본래 표정이 드러난 것이다. 그의 미숙함을 처음으로 목격한 테드는 신선함을 느끼면서 입을 열었다.

“아는 사람이에요?”

“아뇨. 처음 보는 사람인데요. 기사가 도서관 입구에 있어서 조금 특이하다고 생각했어요.”

테드의 물음에 라이거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테드는 그를 지긋이 바라봤다. 라이거를 이끌고 마법 도서관으로 걸어가면서 회귀전의 기억이 자꾸만 떠올렸다.

펠리스 왕국의 국왕 라이거는 테드가 모시는 주군이었다. 그가 주군이라고 해서 테드가 충성을 맹세한 것은 아니었다. 테드는 전쟁을 원했고, 라이거는 테드를 전장터를 제공해줄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종의 거래였다. 라이거는 테드에게 전장를 제공하는 대신, 대마도사급의 실력자를 얻을 수 있었다. 라이거의 입장에선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이득이었다.

테드는 라이거의 밑에서 일했다. 집행관의 자리를 주려고 했지만 거절했다. 테드가

보기에 집행관이라는 자리는 무력을 대표하는 장군같은 자리이면서도 정치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테드는 집행관의 자리를 거절하고 이름을 숨긴 채로 전장에 나섰다.

테드는 라이거가 편했다. 그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고, 귀찮은 수작도 부리지 않았다.

테드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시간이 들어 테드가 전쟁에 진절머리를 느끼며 전장터에

서 벗어나려 할 때도 라이거는 붙잡지 않았다. 그러냐 하는 한 마디와 함께 값비싼 술 한 잔을 끝으로 대마도사인 테드를 시원하게 놓아 주었다. 물론 전쟁에서 벗어나는 것은 실패 했지만.

후에 테드는 그 이유를 알았다.

라이거는 테드 뿐만이 아니라 모든 병사, 심지어 집행관마저 자신의 백성으로 보고 있음을.

라이거는 국왕으로서 펠리스 왕국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 근간이 되는 백성을 존중했다.

테드는 라이거에 대한 평판을 알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를 무자비한 폭군이라고 했으

며, 다른 누군가는 그 어떤 왕보다 다정한 성군이라고 했다. 테드는 후자 쪽이라고 생각했다.

문득 테드는 라이거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 이유를 깨닫는다.

그것은 일종의 그리움이었다.

테드는 라이거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며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이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연기된 모습이 아닌 진짜 모습의 그를 보고 싶었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요. 전하.”

“……어떻게 알았지?”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유순한 봄바람 같았던 분위기가, 단숨에 날카로움을 숨긴 서리바람으로.

“이래보여도 전 마법사라서요.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마법으로 바꿔도 꿰뚫어 볼 수 있지요. 왼쪽의 푸른 눈, 오른쪽의 붉은 눈은 제가 알기로 한 사람 밖에 없지요.”

“…….”

테드의 말에 라이거는 그를 한 차례 지긋이 바라보았다. 마치 그 의도를 알아내려는 듯이. 그리고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과연. 그 테드 크루시안이군. 소문대로 뛰어난 마법사다.”

“절 알고 계시는군요. 어떻게 알았죠?”

“그건….”

질문에 대답하려던 라이거가 눈동자를 굴러 도서관의 입구에 있는 확인한다. 정확하게는 그 앞에 있는 레이나 델톤의 모습을 확인한 것이다.

“우선은 여기서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 저 여기사에게 들키지 않도록.”

테드는 그 말에 찬성을 표하며 라이거를 이끌고 옆으로 움직였다. 시야에 보이지 않게 아카데미 건물의 안쪽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관광객들의 출입이 금지된 빈 교실에서 테드와 라이거는 의자에 앉아 책상을 두고 서로 마주보았다.

“여기가 아카데미의 교실인가. 이런 식으로 되어 있었군.”

처음 보는 교실을 고개를 돌리며 구경하는 라이거의 정신을 집중 시키기 위해 테드가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 전하께서는 왜 왔어요? 원래는 3일째에 오기로 했잖아요.”

편하게 말하던 테드는 아차 한 표정을 했다.

“아, 이런. 말투를 고쳐야 하는데…….”

그래도 회귀 전의 버릇이 나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때는 상대가 누구든 반말을 찍찍 내뱉으며 생활했다. 물론 왕이라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상관없다. 말투는 편한 대로 하도록.”

라이거가 말투 따위엔 별 관심 없다는 듯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는 테드를 눈을 빛내며 바라봤다. 라이거는 신선함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정체를 알고서도 무례하

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거나 편하게 말하는 사람은 적었다.

예의라는 것에 의한 불편하기 짝이 없는 행동과 쓸데없이 치장한 말투를 라이거는 좋아하지 않았다.

“아. 전하의 자비에 가, 감축? 아니, 망극하옵니다.”

테드가 어색하게 말했다. 라이거는 피식하고 웃어 넘겼다.

“과인이 여기에 온 것은 기분전환이다. 따분하기도 했고, 백성들이 어떻게 축제가 즐기는 지 궁금했다.”

“궁금증은 풀렸어요?”

“풀렸다. 대부분의 백성들이 먹거리를 사먹고, 신비한 마법들을 구경하더군. 가족

과 함께 온자도 있었고, 연인과 즐기는 자들도 있었다. 좋아 보이더군. 뭐, 과인은 돈을 가지고 오지 않아 음식도 사먹지 못했다만.”

“그냥 심심해서 오셨다는 거군요!”

테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라이거는 어이없다는 듯 그를 한번 바라보더니 이내 긍정했다.

“그렇기도 하지. 그리고 아까, 그대를 알고 있는 이유를 물었지. 도서관의 앞에 있는 여기사는 그대도 알고 있겠지. 그녀가 그대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 칭찬 일색인 것도 모자라 집행관으로서의 자질이 있다고 하더군. 거기에 디커드 경에게도 들었지. 이번에 암살 길드인 네크로시스를 그대가 혼자 처리했다며 아주 기뻐하며 말하더군. 마법의 귀재라던가 뭐라던가.”

“……학원장이 그렇게 말했다고 생각하니 의외인데요.”

네크로시스 라는 말이 나오자 테드의 얼굴이 눈에 띄게 침울해졌다. 네크로시스와의 전투에서 무언가 일이 있었다고 생각한 라이거는 자세히 묻지 않았다.

“그 뿐만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그대에 대한 정보를 들었다. 과인이 가장 놀란 것은 사탄교에 대한 것이다. 네메스 대륙에 해가 되는 조직을 발견한 것의 공은 크지. 완전히 토벌하는 것은 부족했다만… 잠재적 위험을 미리 알아차렸다는 것이 중요하지.”

“그렇게 치켜 세워주셔도 뭐 안 나오는데요.”

“과인이 그대에게 바라는 것은 없다. 과인은 그저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다.”

라이거는 책상위로 오른 팔꿈치를 올리고 주먹을 쥐어 턱을 괴었다. 왕좌에 앉아 있을 때마다 턱을 괴다보니 나온 무의식적인 습관이었다.

“그렇군요. 그럼 일어나볼까요.”

테드가 의자를 밀고 일어나려고 했다. 그전에 당황한 라이거가 그를 불렀다.

“아니, 벌써 말이냐. 모처럼 만난 것인데 과인에게 부탁할 것은 없나? 본국을 좀먹는 벌레를 처리해준 보답으로 부탁하나 정도는 들어 주지. 물론 전부는 아니고, 과인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예를 들면 그대가 원하는 자유기사의 직위라던가.”

“네크로시스는 펠리스 왕국을 위해서 처리한 게 아니에요. 저를 노렸기에 보복한거죠. 그리고 자유기사에 관해선 괜찮습니다. 우크사이어 가주와의 계약이거든요.”

“……그대는 무욕하군.”

라이거의 말에 일어선 테드의 몸이 멈칫했다. 그리고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욕심이 없지 않았다. 오히려 많았다. 단지 라이거가 모를 뿐이다.

“아뇨. 저는 욕심이 많아요. 단지 전하의 도움이 필요 없을 뿐이죠.”

“그런가.”

라이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여기서 헤어지도록 하지. 델톤 경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하들이 과인을 찾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들은 과인의 변장한 모습을 알고 있으니 걸리는 것도 시간문제다.”

“아, 그러고 보니 돈이 없어 제대로 축제를 즐기지 못했다고 하셨죠? 이번만 제가 쏠테니 같이 즐기죠. 저도 마침 축제를 즐기고 싶었거든요.”

“제안은 고맙다만, 방금 과인이 말한 것을 듣지 못했나?”

“스토커 같은 신하들 때문이라면 걱정 마시죠.”

테드가 보란 듯이 손가락을 딱하고 튕겼다.

라이거의 두 눈이 커진다. 그의 두 눈에 비치는 테드의 모습이 바뀌기 시작했다. 검

은 머리카락은 갈색으로, 검은 눈동자는 푸른색으로, 코는 조금 높아졌고, 광대뼈는 들어가고 턱이 조금 나왔다. 눈매가 처지고 눈썹이 진해졌다. 놀라운 것은 체격까지 변한 것이다.

테드가 오른손을 들어 교실 벽에 걸린 거울을 가리켰다. 라이거가 고개를 돌렸다.

거울 속에는 테드의 앞에 서있는 라이거의 모습이 비추어졌다. 연갈색이 아닌 진갈색의 머리카락과 부드러운 인상과 거리가 먼, 입을 굳게 다물고 진한 눈썹과 부리부리한 눈이 인상적인 청년이 거울 속에 있었다.

라이거는 거울속의 그가 자신임을 어렵지 않게 알았다.

“마법… 인가.”

라이거가 어렵지 않게 눈치 챘다. 그것밖에 없었다.

“조금도 어색함이 없는 것이 대단한 마법이군. 그러나 과인의 신하들 중에선 마법에

능통한 자들이 있다. 그들이라면 보자마자 눈치 챌 것이라 생각한다.”

“장담하는데, 학원장 정도가 아니면 눈치 못 챌 거에요.”

들키면 어쩔 수 없고. 테드가 말을 덧붙였다. 라이거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하지. 답례는 나중에 어떻게든 하겠다.”

“아니, 굳이 답례까지 바라진 않는데요. 저도 축제를 즐길 생각이니까요.”

“과인을 은혜도 모르는 박정한 놈으로 만들 셈인가. 그에 걸맞은 답례를 할테니 걱정 말도록.”

“……그럼, 우선 그 말투부터 고치시죠. 말투 때문에 걸리면 웃음거리도 안되니까

요.”

“알았다. 이 모습에는 반말이 어울리겠군.”

⁂ ⁂ ⁂

테드는 라이거를 데리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먹는 것의 경우 배가 가득 찬 테드는 조금 먹었지만, 아침도 먹지 못하고 축제에 몰래 들어온 라이거는 거침없이 음식을 먹었다. 왕의 입맛은 평민과 다름이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장어구이를 싫어하나?”

장어구이를 먹으면서 라이거가 테드를 향해 물었다. 테드는 무언가 질린 눈으로 노릇하게 익은 장어구이를 보고 있었다.

“싫어하지는 않은데…….”

테드가 말끝을 흐렸다. 싫어하지 않는다. 맛도 있고 영양도 좋고, 정력으로 유명한 음식이니까. 그러나 현재 테드는 정력이란 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킬 지경이었다.

그날, 온갖 정력제를 한 번에 먹고 네크로시스의 마스터인 포굴과 싸운 그날. 테드는 발기부전이 되었다.

정력제를 과다 복용한 것이 문제였는지, 포굴과의 격렬한 전투가 문제였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성기능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발기는 된다. 야한 것을 보거나 생각하는 것으로 충분히 발기가 된다. 그러나 유지가 되지 않는다.

최대 20초. 그것이 테드가 발기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터무니없이 적은 시간이었다. 더 절망적인 것은 아침 발기마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후회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테드는 그날 이후 매일 후회하며 살고 있었다. 시간을 돌려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한 번에 정력제를 복용하려는 자신의 뺨을 후려칠 것이다. 그리고 과다복용의 부작용을 하나하나, 조목조목 설명해 조급하게 쳐먹지 말라고 설득하리라.

마법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찾아보면 있을 지도 모르지만, 테드는 발기부전을 치료하는 마법을 몰랐다. 듣기로는 정신적인 문제가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테드는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정신은 문제없기에 정력제 과다복용이 문제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아.”

테드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라이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어구이를 보더니 느닷없이 내뱉은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라이거는 잠시 테드를 보고서 그러려니 하며 장어구이를 향해 젓가락을 뻗었다. 테드는 어딘가 별난 구석이 있다는 것을 진즉에 파악했다.

“누군가는 말하지. 답은 가까운 곳에 있다고.”

어쩌면 그 답이 장어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테드가 젓가락을 들었다.

============================ 작품 후기 ============================

우린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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