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결한 영혼-106화 (106/277)

106====================

14. 네크로시스

10명이 되는 암살자는 굳게 닫혀 있는 침실의 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복면은 뒤집어쓴 그들은 각각 어둠과 동화되듯이 숨어 있었다. 그들은 구석구석 그늘진 곳에서 목석이라도 된 듯 꼼짝도 하지 않았으며 숨소리도 최대한으로 숨겼다. 바로 옆을 지나가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10명 중 한 명, 침실 문의 정면의 벽에 붙어 있는 조키드는 이곳에서 가장 직위가 높았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는 다른 10명 정예 암살자들도 조키드 보다는 경력이 짧았다. 그는 단체 임무를 나설 때면 대장역할을 자연스레 맡았다. 허나 오늘만큼은 달랐다.

네크로시스의 마스터인 포굴이 직접 움직인 것이다. 암살자인 동시에 마법사인 포굴은 ‘천재마법사’라는 별명이 있는 암살 타겟에 흥미를 가졌다. 그리고 무거운 몸을 일으키고 직접 나섰다.

조키드를 비롯한 20명의 정예 암살자들은 그의 명령에 따라 은신한 상태로 대기하고 있었다. 조키드는 마스터인 포굴의 선에서 일이 끝날 것이라 예상했다. 포굴은 여타의 마법사처럼 동료의 뒤에서 주구장창 입만 놀리는 마법사가 아니었다. 마법을 흉기처럼 사용하는 탁원한 암살자였다.

포굴이 들어가고 얼마 되지 않아서 침실의 문이 열렸다. 조키드는 포굴이 암살을 끝내고 나온 것이라 생각했다. 커다란 폭음이나 전투로 인한 요란한 소리가 없었기에 암살은 순조롭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조키드는 타겟에 실망한 포굴이 복면 아래에 인상을 잔뜩 쓰고 있으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조키드의 예상은 빗나갔다.

침실 문을 열고 나온 것은 복면을 뒤집어쓴 포굴이 아니었다.

군더더기를 찾아 볼 수 없는 우아한 걸음걸이.

깐깐한 교사라도 트집을 잡을 수 없는 단정한 옷차림.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듯한 은발과 인형을 연상케 하는 이목구비.

타겟 중 하나 인 메이드였다. 오른손에는 새하얀 검이 들려 있다.

사이나는 정면에 숨어 있는 암살자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급할 것 없다는 듯이 침실 문을 닫았다. 그리고 양 발을 나란히하고 등을 세우며 붉은 눈동자를 굴러 숨어 있는 암살자들의 위치를 확인한다.

벽에 붙어 있는 암살자. 화분 장식 뒤에 수그려 숨어 있는 암살자. 소파의 옆에 기대고 있는 암살자 등등. 불청객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지저분한 쥐가 제법 많군요.”

“…….”

옥구슬이 구르는 듯한 청아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조키드를 비롯한 10명의 암살자들은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다.

조키드가 왼손을 들어올렸다. 9명의 암살자들이 조키드의 왼손을 시야에 담았다.

활짝 퍼진 왼손이 정해진 수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검지나 중지가 접혔다가 퍼지고 손바닥이 부채질을 하듯 흔들렸다.

침실문과 가장 가까이 있던 2명의 암살자가 메이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의 손에는 날

카로운 단검이 들려 있었다.

하얀 섬광이 어둠을 가로 질렸다. 메이드의 오른손으로부터 시작된 섬광은 달려드는 두

명의 암살자의 목을 순식간에 베어버렸다. 목은 바닥으로 떨어져 떼굴떼굴 구르고 머리를 잃은 몸은 목 부위에서 막대한 양의 피보라를 허공중에 내보이더니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

조키드는 바닥에 떨어진, 시체가 된 암살자들을 힐끗 보고서 다시 시선을 은발의 메이드에게 옮겼다. 메이드는 가증스럽게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가만히 서있었다.

그녀의 실력은 조키드가 알고 있는 정보와 천치차이였다. 아무리 암살자가 기습이 아닌 정면에서 덤볐다고 해도 이렇게 쉽게 당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혹독한 훈련을 극복한 우수한 정예 암살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카페트에 피가 묻었군요.”

사이나가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카페트는 손이 많이 가는 세탁물이다. 피같은 얼룩이 있으면 차라리 카페트를 바꾸는 게 더 빠르고 간단한 방법이었다.

이 카페트가 호텔의 것이 아니었다면 사이나가 곤란함을 느끼지 않았을 테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카페트는 호텔의 것이었다. 호텔 직원이 피 묻은 카페트를 보면 당장에 물어내라고 청구서를 들이밀 것이 틀림없었다. 사이나가 곤란한 이유는 호텔 직원의 짜증서린 목소리를 듣는 것이 아닌 직원이 내밀 청구서 쪽에 있었다. 최근에 테드는 수입에 비해 지출이 많았다. 그 지출이 어디로 빠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무시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사이나는 메이드로서 테드의 재산이 걱정되었다.

사이나는 검은 쥐들을 모두 처리하고 마법을 이용해 카페트의 청소까지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쓸데없는 지출은 피해야 한다.

조키드가 다시 왼손으로 수신호를 보냈다. 조키드를 제외한 암살자 7명이 일시분란하게 움직였다. 시체가 된 2명처럼 메이드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조심성 많은 고양이처럼 천천히 메이드를 향해 다가갔다. 제각각 흉기를 손에 쥐고 있었다.

사이나는 포위하듯 다가오는 암살자를 확인하고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만약 조키드에게 마음을 읽는 스킬이 있었다면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사이나는 20명의 암살자를 호텔에 피해주지 않고 가장 깨끗하게 처리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으니까.

암살자들의 포위망이 2M내로 좁혀졌을 때, 사이나가 결론을 내렸다. 그냥 빠르게 죽이고 청소를 하는 것으로.

사이나가 마력을 일으켜 다리를 움직였다. 정면에 있는 암살자의 바로 앞에 나타난 그녀가 하얀색 검을 휘둘렀다. 암살자가 반응했으나 너무 늦은 뒤였다. 암살자의 목에 가느다란 혈선이 그려진다.

주위에 있던 암살자들이 굶주린 메뚜기 떼처럼 사이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의 흉기가 사이나의 몸에 닿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이나의 몸이 한차례 흔들리면 여지없이 암살자가 죽어나갔다. 메이드 복의 치마가 팔락였다. 붉은색의 피는 꽃이라도 된 듯 흩뿌려졌다.

사이나가 몸을 회전시킨다. 하얀색 섬광이 꼬리마냥 달라붙었다. 암살자들은 소리 없이 죽어나갔다. 동료가 바로 옆에서 죽음에도 암살자들은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인형처럼 메이드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달려들었다.

약 10초가 지났을 때, 사이나의 주변에는 암살자의 시체가 어질러진 장난감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메이드는 몸에 피하나 묻지 않았다.

“…….”

조키드는 꿀꺽 침을 삼켰다. 그는 똑똑히 보았다. 사이나를 향해 떨어지던 핏방울이 중력의 법칙을 조롱하듯 튕겨져 나가는 것을.

마스터인 포굴의 아래에 있길 수 십 년. 마법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그는 마법이 아님을 단숨에 파악했다. 그리고 판단 내렸다. 눈앞의 메이드는 마스터에 버금가는… 혹은 마스터 이상의 괴물이라고.

조키드는 단검을 들어 올렸다. 승산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등을 보이고 살아날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냥 죽어 줄 수도 없다. 이렇게 된 이상 되든 안 되는 해보는 수밖에.

조키드가 사이나를 향해 신속하게 움직였다. 하얀색 섬광이 조키드를 갈랐다.

⁂⁂⁂

“……후우.”

호텔의 복도에서 사이나가 몸의 긴장을 숨에 모아 내뱉었다. 이마에서 땀 한줄기가 모습을 보였다.

그녀의 주위에 검은 복면을 쓰고 있는 시체가 가슴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사이나는 방에 있는 10명의 암살자를 처리하고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는 나머지 10명의 암살자까지 모두 처리했다. 방에 있던 암살자처럼 덤벼들면 더 빠르게 끝났을 텐데 바깥에 있던 암살자들은 치고 빠지는 것을 택했다.

만약 네메스 대륙에 막 소환된 사이나였다면 긁힌 상처 정도는 생겼을 수도 있었다. 그 만큼 치고 빠지는 암살자들의 실력은 뛰어났다. 마력을 아낀다며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지 않았더라면 전투는 더 길어졌을 것이다. 괜히 정예 암살자가 아니었다.

사이나는 시선을 아래로 돌려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메이드 복은 무사했다. 권능을 발휘하며 최대한 신경 쓴 덕분에 피한방울 묻지 않았다. 몸에는 약간의 상처도 존재하지 않았다. 마력은 절반가량 남아 있었다.

“아직 큰 쥐가 하나 남아 있었지요.”

사이나가 다시금 몸을 긴장시켰다. 그리고 테드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거대한 마력이 느껴졌고, 청각이 한 순간 마비될 정도로 커다란 천둥소리가 울러 퍼졌다.

“…….”

사이나가 호텔방의 문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사이나의 차가운 얼굴

에 당혹감이 서렸다.

“방이 통째로 사라졌어…?”

그곳은 폐허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처참했다. 천장은 흔적도 없이 뜯겨져나가 밤하늘이 훤히 보였으며, 가구나 장식품들이 여기저기 뒹굴어 있었다. 전부 깨지거나 어딘가 파손되어 있었다. 멀쩡한 상태의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사이나가 서둘러 침실이 있던 자리를 보았다. 거기엔 시커멓게 그을린 바닥이 있을 뿐이었다. 침대도 가구도 장식품도 벽도 전부 없었다. 찾아볼 수 없었다.

그곳을 확인한 사이나가 멍한 표정으로 두 눈을 깜빡였다.

테드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 ⁂ ⁂

암브로시아를 발동한 테드는 거칠게 숨을 내쉬며 힘든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암브로시아를 발동하고 나서 더더욱 몸 상태는 나빠졌다. 머리는 어질 거렸고, 심장은 거세게 뛰었다. 성기는 정액을 토해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육체 강화 마법을 사용한 듯 한데… 무슨 마법을 쓴 것이냐?”

포굴은 호기심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마법사다. 마법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족속이었다. 특히나 알려지지 않은 비전 마법은 더더욱.

“네놈을 저승사자랑 맞선 시켜줄 마법.”

테드가 오른 발을 무릎까지 들어 올렸다. 그림자 속에서 새하얀 뼈로 이루어진 손이 테드의 발을 잡지 못하고 헛손질을 했다. 테드가 신경질을 부리듯 오른발을 다시 내려찍었

다. 뼈가 부서지며 그 조각이 산산조각 난다.

“당장이라도 숨 넘어 갈 듯 한 모습 주제에 감각이 상당히 날카로워.”

포굴이 즐겁다는 듯 클클 웃었다.

테드의 몸이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포굴의 앞에 나타난다. 포굴의 명치를 향해 꽉 쥔 오른 주먹을 내지른다. 포굴의 가슴 앞에 새하얀 뼈로 이루어진 방패가 나타나 테드의 주먹을 막아냈다. 쾅! 골방패가 박살난다. 그러나 틈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포굴이 단검을 쥐고서 테드의 오른쪽 어깨를 노렸다.

테드가 왼손으로 단검을 쥐었다. 날붙이가 손바닥에 닿았지만 테드의 피부는 조금도 잘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피해를 입은 쪽은 단검이었다.

포굴은 발차기가 자신의 복부에 닿기전 블링크를 사용해 피해냈다.

“……호오. 육체 강화 마법으로 떡칠을 하더니… 졸지에 금강불괴가 되었군. 마법사가 그런 무식한 방법을 사용할 줄이야.”

침대 위에서 테드를 내려보며 포굴이 말했다. 검은 수염이 즐겁다는 듯 흔들렸다.

“넌 너무 혀가 길어.”

무게 중심을 오른 발로 옮기며 테드가 비스듬히 섰다.

“늙으면 외로워서 말이지. 그런데 말동무를 구하는게 쉽지 않지.”

테드가 상체를 숙였다. 부웅하고 거대한 대검이 스치고 지나갔다. 테드가 왼발을 뒤로 뻗어 돌려 찼다. 단단한 갑옷을 입은 목 없는 전사가 날아가 벽에 부딪힌다.

“포획한다고 하지 않았나. 죽일 생각이 가득하군.”

“나는 살려서 잡는다고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만?”

테드의 주위에 약한 바람이 불었다. 미풍은 사라지지 않고 테드를 보호하듯 맴돌고 있었다.

“……살려서 데려간다는 얼토당토않은 말보단 났군.”

벽과 부딪힌 듀라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철컹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테드의 뒤로 다가와 양손에 쥔 대검을 휘둘렀다. 위에서 아래로, 어깨를 그대로 작살내겠다는 듯이 살벌한 소리를 내며 대검이 떨어진다.

그러나 대검은 테드의 어깨에 닿지 못했다. 어깨의 바로 3cm 위에서 멈췄다. 테드의 몸을 맴돌고 있는 미풍이 대검을 막아낸 것이다.

듀라한의 대검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나 바람을 베어내지 못했다. 미풍이 대검을 타고 듀라한의 갑옷으로 옮겨갔다. 검은 갑옷이 여기저기 베어져 산산 조각나 바닥에 떨어졌다. 갑옷 안에 있던 비쩍 마른 목 없는 시체가 죽어가는 벌레처럼 땅바닥에서 꿈틀거렸다.

“근데 그것도 불가능할거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