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결한 영혼-99화 (99/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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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네크로시스

테드는 마릭의 상자에서 거울을 하나 꺼냈다. 손바닥 크기의 작은 거울을 들여다본다. 검은색 눈동자의 소년이 비춰졌다. 눈썹 바로 아래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이발을 할 필요성을 느꼈다.

먹구름으로 인해 햇빛이 가려져 있는 루크에이스의 날씨 탓인지, 아니면 바깥 활동을 하지 않아서 인지 피부가 뽀얗다. 테드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성장하면 미남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지구시절의 생김새와 판박이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키도 문제없을 것이다. 그때도 허우대만큼은 멀쩡했으니까.

‘가장 중요한 곳은 거기지. 지구에서의 나는 평균… 아니, 평균 이상의 사이즈였어. 확실해.’

편리한 지구에서는 인터넷을 통해서 키든 뭐든 평균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세계에선 대충 눈대중으로 평균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네메스 대륙의 인간의 경우 평균 키가 170 정도이다. 의외로 이 세계에서 굶는 이들은 적기 때문이다.

테드가 가장 궁금한 곳의 평균은 아쉽게도 알 수 없었다.

인종으로 따지면 백인이 많으니 평균도 높을 수도 있다. 아니, 이 세계의 인간은 백인 같지만 백인이 아니다. 파란색이나 분홍색의 천연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백인이라 하기엔 머리카락색이 너무 알록달록했다.

‘거울은 정상적인 마도구인데. 인증 절차 같은 건 없겠지.’

테드는 거울을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투시를 이용해 내부의 마법진마저 확인했다. 특이한 점은 없었다. 정상적인 마도구였다.

원래는 마릭에게 시켜서 이 거울을 발동해 네크로시스의 본거지에 대한 정보를 빼내려고 했었다. 그러나 마릭이 거부했다. 자신은 네크로시스의 말단이라며 정보를 가르쳐 줄 이유가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테드는 마릭의 주장을 받아 들였다. 암살 길드는 불법의 집합체다. 지구의 범죄자와 비교하면 테러리스트 같은 놈들이다. 아니, 테러리스트 보단 한 단계 아래에 있다. 적어도 무분별하게 살육을 하지 않으니까. 그렇다 보니 국가는 암살 길드의 정보를 얻는 족족 그들을 토벌하려고 한다. 암살 길드는 살기 위해서라도 정보를 최대한 감추는 수밖에 없었다. 범죄 집단이 대게 그렇듯, 암살 길드도 점조직 형태로 되어 있다.

마릭은 이 거울을 통해 행동을 지령 받았다.

“거울 속 인물의 이름이 사우스였다고 했지.”

마력의 말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마릭은 이상할 정도로 순순히 협조했다. 따로 고문이나 협박 등을 할 필요도 없이 묻는 족족 말해주었다. 너무 쉽게 정보를 주어서 진위여부가 의심이 될 정도였다.

마도구를 발동하기 전 테드가 하나의 마법을 사용한다.

거울 속에 비치는 소년의 얼굴이 변한다. 짧은 검은 머리카락의 부드러운 인상의 청년, 마릭이었다.

“아, 아.”

시험 삼아 목소리를 내본다. 마법은 완벽하게 발동 된 듯 앳된 소년의 목소리가 아닌 청년의 목소리였다.

테드가 사용한 마법은 두 개다. 모습을 속이는 환상마법과 목소리를 변조 하는 마법이다. 역용술처럼 몸 자체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눈과 귀를 속이는 환상일 뿐이기에 조금만 실수해도 상대는 위화감을 느낀다.

‘가능성은 그다지 없다고 생각하지만… 시도 해보지 않는 것보단 낫겠지.’

직접 보는 것이 아닌 거울을 통해 마주하는 것이기에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했다.

테드는 마릭의 말투 등을 떠올리며 거울에 마력을 흘려 넣었다. 테드를 비추던 거울이 검게 변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울 속에서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은 물론이고 몸까지 시커멓다. 검은 그림자가 형상을 가진 것 같았다.

“무슨 일이지? 정기 보고 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을 텐데. 변수가 일어났나?”

아이리스는 사용인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에 비밀을 명령했다. 네크로시스는 마릭이 붙잡힌 것을 모른다.

“그래. 사우스. 변수가 일어났어.”

테드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마릭의 말에 의하면 네크로시스의 계획은 우크사이어의 몰락이었다. 네크로시스는 우크사이어가 이미 몰락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에 그대로 놔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몰락해 사라질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은밀함을 추구하는 네크로시스가 굳이 몰락이 정해진 우크사이어를 건드릴 이유가 없었다.

“……녀석은 내 이름을 부르지 않고 통신할 때마다 항상 로브를 쓰지. 넌 누구지?”

테드가 속으로 혀를 찼다. 마릭에게서 그런 세세한 것까지 듣지 못했다. 시치미를 뗄까 고민했으나, 곧 관두기로 했다. 마릭에 대해서 잘 모르고, 연기도 서툴렀다. 어차피 곧바로 들킬 것이 분명했다.

마법이 풀리고 테드의 모습이 드러난다.

“테드 크루시안…!! ……녀석은 죽었나.”

테드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자 거울 속에 비추는 검은 인영이 살짝 흔들렸다. 그러나 목소리는 냉정하며 침착하다.

테드는 거울 속의 인영이 확신조로 중얼거리는 뒷말을 그냥 흘리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코스모스 아카데미에 침입했다가 폭발해 죽은 암살자처럼 마릭이 폭발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안녕. 네크로시스. 이렇게 보니 엄청 반가워. 그래서 말인데 직접 만나서 이야기 하지 않을래?”

“……하. 웃기지도 않는군. 괜한 짓거리는 관둬라. 테드 크루시안. 너 하나가 우리를 상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테드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 오만한 말에 인영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분노를 참고 있는 것일까, 어이가 없는 것일까. 후자 쪽에 가까울 것이라고 테드가 생각했다.

“……아직 늦지 않았다. 테드 크루시안. 우크사이어에서 손을 떼라. 그렇다면 우리는 너를 건드리지 않겠다.”

사우스는 길드 내에서 적지 않은 직위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건드리지 않겠다고 말할 수 없을 테니까. 그렇다고 네크로시스의 마스터는 아닐 것이다. 마스터와 직접 연락하기엔 마릭이 너무 말단이다. 아마 길드의 간부나 마스터의 직속 부하 같은 것이겠지.

“마음에도 없는 소리. 나는 네놈들의 길드원 2명을 죽였다고. 상식적으로 암살 길드인 네놈들이 순순히 물러날리 없잖아?”

“2명 정도는 상관없다. 그들을 대체 할 인물은 길드에 얼마든지 있다.”

“인물이 아니라 쓰고 버리기 좋은 노예겠지.”

테드가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사우스의 반응은 없었다.

“그게 네 선택이라면 조만간 죽여주지.”

“날 죽이려면 길드 마스… 아, 끊었나.”

당연한 말을 내뱉듯이 무덤덤하게 사우스는 일방적으로 거울의 통신을 끊었다. 대화가 지속되면 알게 모르게 정보가 새어나간다. 그걸 알고 있기에 용건만 간단히 하고 끊어버린 것이다.

테드가 거울 속으로 마력을 집어넣었다. 10분 정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달라붙었지만, 사우스가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끼익하고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울을 보고 있던 테드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아이리스가 있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무언가 알아내신 거라도 있나요?”

“아뇨. 생각보다 눈치가 빨라요. 역추적의 대비도 확실한지 그것도 불가능했고요. 괜히 이쪽의 정보만 내준 꼴이죠.”

테드가 바닥에서 일어났다. 그의 진짜 목적은 거울에 걸린 통신 마법을 역추적으로 네크로시스의 본거지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물론 사우스가 본거지에 있다곤 확신할 순 없지만.

“……그건 아쉬운 일이네요.”

아이리스가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말과 달리 그렇게 아쉬워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녀도 알고 있는 것이다. 네크로시스의 본거지를 알아낸다고 해도 현재 우크사이어의 전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을.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네크로시스와의 전쟁보다는 가문의 발전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다.

“말에 따르면 아마도 조만간 저를 노리고 암살자를 보낼 거에요. 마릭까지 합치면 저 때문에 2번이나 실패한 꼴이니 이번엔 아마 정예를 보내겠죠.”

“……2번이라니요?”

테드가 아차한 표정을 지었다. 무심코 생각 없이 말해버렸다. 아카데미에 있었던 일을 아는 것은 테드와 네크로시스, 아카데미의 학원장인 디커드가 유일했다. 잠시 생각하던 테드가 그녀에게 설명했다. 아이리스도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카데미에서 습격 받은 적이 있거든요. 뭐, 아무 피해 없이 끝났지만요.”

“……죄송해요. 저희 때문에 테드 님을 휘말리게 했군요.”

아이리스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네크로시스의 목적을 마릭을 통해 들었기에 본래 이 일에 테드가 관계없음을 알았다. 그가 암살 시도를 받은 이유는 오직 하나, 우크사이어에서 생활했기 때문이다.

“숙여야 할 것은 놈들이지. 가주님이 아니에요.”

테드의 말에 아이리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에 수심이 서려있었다. 안 그래도 가주의 일만으로도 벅차서 힘들어 하는 그녀였다. 아예 모를 때는 신경도 쓰지 않았을 테지만, 적의 정체가 드러난 지금은 심적으로도 힘들 것이 분명했다.

“아, 그래도 이번에 사이나의 우수함을 알았지요? 낮에 마릭을 붙잡아 오는 것을 봤다면 더 이상 반론을 제기할 수 없겠죠. 인크론 보다 사이나가 더 뛰어나요.”

“…윽. 화, 확실히 이번엔 인크론이 그다지 활약하지 못했지만…! 인크론이 더 뛰어나요.”

“그건 억지 수준의 말이네요. 오늘 활약한 것은 사이나에요. 사이나.”

“심사를 하는 것은 사용인들의 일이에요! 우리가 뭐라고 할 수 없는 일이죠. 사용인들

은 분명 인크론을 선택 할 거에요.”

사이나의 승리를 인정하지 않는 아이리스를 보며 테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이내 아이리스를 보며 씩 웃었다.

그녀의 옆을 스쳐지나가며 식당 쪽으로 향한다. 저녁 식사를 할 시간이었다.

“사이나는 밤시중까지 완벽하거든요. 인크론은 하지 못하죠?”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의 냉혈한 메이드는 밤에도 성심성의껏 일을 하니까.

“바, 밤시중이라니! 한 방을 쓴다고 했을 때 이상하다곤 생각했지만…! 설마!”

뺨을 붉게 물들인 아이리스가 테드의 뒤를 쫓으며 쫑알쫑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테드는 자신이 내뱉은 말을 도로 줍고 싶은 기분이었다. 설마 이 정도의 농담으로 이렇게 귀찮아 질 줄이야. 생각보다 아이리스가 너무 순진했다.

‘이래서 처녀들이란.’

테드가 기도차지 않는 말을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그녀의 손바닥이 뺨을 강타할 것이 틀림없었다. 식당을 가는 내내 시달린 테드는 그녀의 앞에서 음담패설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다짐했다.

식당에선 이미 저녁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점심에 있었던 일 때문일까. 테드와 아이리스의 식탁 위에 올라있는 음식의 종류가 똑같았다.

“주방장과 상의해 저와 주바장 그리고 사이나님이 만들었습니다.”

아이리스의 의자를 빼내주며 인크론이 말했다. 반면 테드의 옆에는 사이나가 있었다. 테드는 식탁 위를 스윽 훑어 봤다. 좋아하는 음식이 금방 눈에 띄였다. 사이나의 솜씨가 들어간 것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사이나도 함께 만들었다면 분명 맛있겠지.”

간장 불고기 쪽으로 젓가락을 뻗는다. 큼지막한 고기를 한 점 잡아 입에 넣었다. 달면서도 짭조름한 그 맛은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몸에 전율이 흐르는 것 같았다. 밥도둑은 식탁 위에 있었다.

“테드 님. 생각해 봤는데… 역시 사이나 님과는 각방을 쓰는 게 어떠실지?”

밥을 한 숟갈 크게 떠서 입에 넣으니 아이리스가 말했다. 테드가 어이없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이제 와서?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와서 방을 나누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테드가 음식을 삼키기도 전에 옆에 있던 사이나가 입을 열었다. 그녀가 아이리스에게 말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평소엔 그저 인사만 하는 사이였다.

“그래도 한 방에 둘이 함께 있는 건 불편하지 않나요?”

“방이 상당히 크기에 조금도 불편하지 않습니다. 가주님은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경끄라는 말에 아이리스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녀는 아름다운 메이드가 조금 불편했다.

“테드 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아. 예. 지금까지 그렇게 생활했으니… 없으면 오히려 불편하다고 해야 할까요. 문제는 없어요.”

자신의 욕망과 싸우며 정신력을 수련하는 것을 제하면 말이다. 테드는 법력 높은 스님과 정신력 싸움에서 이길 자신이 있었다. 스님이 사이나의 옆에 있다면 아마 밤새도록 불경을 외워야 하지 않을까.

테드를 지긋이 바라보던 아이리스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혹여나 해서 말씀드리는 건데… 저택 내에서 불결한 짓은 금지에요. 아시겠죠?”

테드가 살짝 고개를 끄덕인 반면 사이나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사이나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 테드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최근에 새벽에 일어나 테드를 보니 발기가 되어 있는 그곳을 확인했다. 어린아이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는 남자의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으나 그 빈도가 요즘 들어 급격하게 늘었다.

시선을 느낀 것일까 테드를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

에이프런 위에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있는 청초한 메이드는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 작품 후기 ============================

널 찾아 낼 것이다.

찾아 내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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