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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영혼-98화 (98/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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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네크로시스

마릭은 자신의 상자가 드러났을 때부터 몸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춘 마법사라면 상자의 내부를 보는 순간 눈치 챘을 것이다. 상자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물건들은 모두 마도구와 관련되어 있는 것을.

오늘 별채에서 일어나는 일은 마릭의 입장에서 정말 예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숨기고 있는 것이 있는 마릭에겐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뜬금없이 떨어진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별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옷장에 있는 검은 옷은 조금 특이할 뿐이고 지하 창고의 상자는 개인의 것이기에 열릴 일은 없다. 설령 열린다고 해도 알아볼 수 있는 이는 몇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마릭은 비교적 낮은 담장이 있는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곳이라면 자신의 신체능력으로도 충분히 뛰어넘어 시내 쪽으로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달리는 와중에 마법을 사용한다. 헤이스트 마법으로 민첩성을 극대화시킨다. 할수만 있다면 블링크 마법을 사용하고 싶으나, 마릭은 지팡이도 없이 전력으로 내달리면서 블링크를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마법사가 아니었다.

‘제길! 되는 일이 없어!’

참으로 재수 없는 날이라고 속으로 불평하며 고개를 살짝 뒤돌아 자신을 쫓아오는 인물이 있는지 확인한다.

너무 갑작스럽게 자신이 뛰었기 때문일까. 뒤에 쫓아오는 인물은 없었다. 대부분의 사용인들이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쯤이면 부리나케 쫓아올 것이다. 사병들이 움직이기 전에 저택의 밖으로 나가야 한다.

마릭이 정면으로 고개를 다시 돌렸다. 그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이 떠졌다. 앞에는 어느새 도착한 것인지 은발의 메이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의 지친 기색도 없는 은발의 메이드는 붉은 눈동자로 마릭을 노려보았다.

전력으로 달리는 중이었기에 당장 멈추는 것도 힘들었다. 그리고 멈출 생각은 없었다. 그녀의 옆으로 빠져나갈 생각을 하며 마릭이 입을 열었다.

“자, 잠깐만요! 사이나 씨!”

같은 저택에서 함께 일하다보면 알게 모르게 정이 쌓이기 마련이다. 마릭은 그녀가 멈칫한 순간을 노리려고 했다. 그러나 의도와 달리 사이나는 조금의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오른발을 마릭을 향해 휘둘렀다. 사이나의 구두가 마릭의 복부를 향해 작렬했다.

마릭의 몸이 뒤로 몇 번이나 땅바닥을 구르고 나서야 멈추었다.

쿨럭. 나온 기침에 피가 섞여 있었다. 몸이 부들부들 떨려서 당장 일어날 수도 없었다. 온몸을 관통하는 고통에 머리 안이 백지가 되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정신없는 와중에 마릭이 눈앞의 공간을 살폈다.

사이나는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릭은 그 이유를 알았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지금 상황을 타파할 수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리라.

“…아으으….”

쉽게 가시지 않는 고통에 기괴한 신음을 내뱉으며 눈에 맺힌 눈물을 한 차례 닦아 냈다. 깨끗해진 시야 사이로 생각한다.

장비가 없는 현재 상황에선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마법 중에서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마법은 없었다. 끝이었다.

마릭이 뒤로 엎어졌다. 삶든지 굽든지 마음대로 하라지.

사이나가 그를 향해 다가갔다.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굵은 밧줄이 들려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

마릭이 힘없는 어조로 물었다.

“상자 안에 있는 물건들입니다. 그것들은 전부 마법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용인들 몇몇은 마릭의 상자 안을 보았다. 지식이 없는 그들은 잡동사니라고 치부하면서 넘어갔을 뿐이었다. 그런데 설마 오늘처럼 어이없게 걸리게 될 줄이야.

“……날 어떻게 할 생각이야?”

“그건 제가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저는 당신을 주인님에게 넘길 뿐이죠.”

사이나가 밧줄을 이용해 마릭을 꽉꽉 묶기 시작했다. 양팔을 뒤로 돌린 채로 손목을 묶고 양 팔목과 몸통을 묶는다. 시간이 지나자 마릭은 고개를 흔드는 것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마나를 억제하는 종류의 특별한 밧줄은 아니었다. 마법을 이용해 태우거나 자른 뒤에 도망칠 수 있었다. 발차기로 인해 입은 작은 내상과 눈앞에 있는 메이드만 없다면 말이지.

사이나가 마릭의 뒷덜미를 덥썩 잡더니 한손으로 들어올렸다. 성인 남성을 한손으로 들면서도 힘든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저 가녀린 팔에 이런 힘이 숨겨져 있는 이유가 자못 궁금했다.

사이나에 의해 별채의 앞으로 끌려온 마릭은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들을 느꼈다. 대부분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듯 혼란함을 뛰고 있었고, 그중 머리 회전이 빠른이들은 경멸의 시선을 마릭에게 던졌다.

마릭은 아이리스의 옆에 부동자세로 서있는 집사를 힐끔 쳐다봤다. 무서울 정도로 굳은 은 얼굴로 마릭을 노려보고 있는 인크론이 있었다.

차르르륵. 쇠사슬이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검은색의 쇠사슬이 마릭의 몸을 칭칭 감았다. 마릭은 자신의 마력이 움직이지 않는 걸 단숨에 파악했다.

“저, 저기, 언니! 무, 무슨 일인가요? 혹시 마릭이 큰 잘못이라도 했나요?”

레미가 앞으로 나서며 사이나에게 물었다. 사이나가 그녀를 보고서 입을 열었다.

“그는 마법사입니다. 정체를 숨기고 사용인으로서 저택에서 일했습니다. 아마도 저택에 침입한 첩자일 것입니다.”

“그, 그런 첩자라니!”

믿을 수 없다는 듯, 그 말의 진위를 구하듯 레미가 마릭을 쳐다봤다. 마릭은 그녀의 흔들리는 동공을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레미의 몸이 비틀 거렸다.

아이리스가 뚜벅뚜벅 걷는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스산한 기운이 흘려 나왔다.

“테드 님에게서 첩자라고 들었어. 그 말이 사실이야?”

“사실입니다.”

“…….”

마릭은 손쉽게 대답했다. 솔직히 조직에 대한 사랑이나 충성심은 조금도 없었다. 그리고 조직에 대해서 알고 있는 마릭이다. 그가 붙잡혔다는 사실을 알아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

으리라. 입을 막겠다는 이유로 죽이지 않으면 다행이다.

아이리스가 말없이 마릭을 쳐다봤다. 주변의 웅성거림을 느긴 그녀가 인크론을 향해 명령한다.

“인크론 사용인들을 해산 시켜. 그리고 마릭을 연무장으로 데려가.”

“알겠습니다.”

인크론이 고개를 숙이며 사용인들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제각각 자신들의 일을 하러가는 사용인들의 얼굴은 밝지 못했다. 붙잡혀 있는 마릭이 신경쓰이는 듯 힐끔힐끔 쳐다본다.

“뭐, 뭔가 오해가 있는 게 아닐까요? 마릭이 그럴 리 없어요!”

“그가 스스로 시인했습니다. 레미 님은 이 일에 간섭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사이나의 말에도 그녀는 쉽사리 물러나지 않았다. 마릭은 사용인들 중에서 레미가 가장 친하게 지내는 동료였다. 그녀의 일을 도와주거나 웃으며 말을 걸어주었다.

“그렇지만 마릭은 착한 사람이에요. 첩자라는 것도 뭔가 오해가 있는…….”

“레미. 구역으로 돌아가십시오. 이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인크론이 다가와 말했다. 평소보다 딱딱한 그의 말에 무언가를 말하려던 레미가 고개를 푹 숙였다. 어떤 말을 해도 소용 없다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레미가 힘없는 눈으로 마릭을 바라봤다.

마릭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눈을 피했다.

⁂ ⁂ ⁂

지하의 연무장의 바로 옆에 있는 작은 방은 본래 병사들의 휴게실로 이용되는 방이었다. 지금은 마릭이 그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몸에 칭칭 감은 마릭은 방의 중심, 의자에 앉아 있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자신의 주위에 있는 아이리스와 테드, 인크론과 사이나의 눈치를 살폈다.

비인도적인 고문이나 협박 등은 없었다. 마릭이 순순히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그들에게 나불거렸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아무렇지 않게 팔았다.

마릭이 식은땀을 흘리는 건 그들이 무섭기 때문이 아니었다. 본래라면 자신은 조직에서 걸어 놓은 마법에 의해 몸이 폭발해 산산이 조각나야 했다. 조직에 대한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거나, 자결해야 한다고 강하게 생각하면 자동적으로 발동하는 마법이 조금도 반응하지 않고 있다.

‘아마도 이 검은 사슬 때문이겠지….’

마법을 발동하기 위해선 마력(마나)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검은 사슬은 마력을 봉하고 있었다. 이런 물건이 있을 것이라곤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 사슬이 풀리는 순간 자신은 폭발하게 될까? 아니면 마법이 발동 되지 않아 무사할까.

“네크로시스… 그 본거지는?”

테드가 마릭을 향해 물었다. 마릭은 고개를 저었다.

“네크로시스엔 딱히 본거지라 할 수 있는 게 없어. 훈련 시설은 있다고 들었지만, 거긴 나도 몰라. 나는 그들에게 스카웃 됐거든.”

테드가 물은 것은 네크로시스에 관한 것이었다. 마릭은 그가 네크로시스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네크로시스는 은밀하게 행동하다 보니 귀족들 중에서도 알고 있는 인물이 드물었다. 그 증거로 아이리스는 네크로시스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듯 테드에게 설명을 요구했었다.

“네크로시스의 목적은?”

“…….”

마릭이 아이리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의 안색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우크사이어의 몰락.”

테드의 옆에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아이리스가 한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그 말 만큼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분노가 담긴 눈으로 마릭을 쏘아 보았다.

“아버님과 오라버니의 실종도 네크로시스의 짓이야?”

“그건 나도 확신할 수 없어. 나는 패밀리어를 이용해 정보를 모아 건네주는 것이 일의 전부였으니까. 네크로시스가 내게 무언가를 가르쳐 주는 것은 드물어. 그렇지만 아마 그건 네크로시스의 짓일 거야.”

최대한 평정심을 가장하며 말했다. 마음속은 조마조마했다. 그녀가 성질을 부리면 자신은 그대로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왕 여기까지 온 거 죽고 싶지 않았다.

테드는 아이리스의 앞으로 나섰다. 부들부들 거리는 그녀의 몸에서 살기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서 마릭을 죽여 버리면 안 된다. 정보를 더욱 캐내야 한다.

“머리 좀 식혀요.”

“…….”

그녀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한 테드가 마릭을 바라봤다.

“패밀리어 마법을 사용한 흔적은 없었어. 최근에는 왜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지?”

“패밀리어 사용하지 않은 건 2년 전부터야.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조직이 사용하지 말라고 명령했어. 그래도 정보는 필요하니 내가 저택에 남아 있는 거지만.”

“우크사이어 저택으로 가족 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 작가가 온 적이 있지. 기억해?”

“기억해. 저택이 떠들썩했으니까.”

“그 때, 쥐 말고. 고양이 같은 패밀리어를 사용했어?”

테드가 복도에 걸려 있는 가족 사진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림자 속에 있는 눈동자가 계속 신경 쓰였다. 이 기회에 속 시원하게 알았으면 했다. 기왕이면 그가 고개를 끄덕여 주기를 바랬다.

“난 마법 실력이 뛰어난 편이 아니라서. 쥐 말고는 사용하지 못해.”

마릭이 담담하게 말했다. 실력이 없기 때문에 사용인으로서 정보를 모으는 역을 맡았다.

“나도 궁금한 게 있는데. 이 검은 사슬에 대해서 그렇지만… 날 어떻게 할 거야?”

약간의 기대와 희망을 담아 마릭이 물었다.

“어떻게 할 거라 생각해?”

아이리스가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테드는 잠자코 물러났다. 대충 마릭에게 들을 정보는 들었다. 물론 도움이 되는 정보는 극히 미미했지만.

“……죽이겠지.”

“아니, 죽이지 않아.”

아이리스가 말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검으로 그 목을 베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아직 중요한 정보를 숨기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아이리스는 가족들을 떠올렸다. 오늘에서야 가족들의 원수의 이름을 알았다. 네크로시스. 결단코 용서할 수 없는 집단을 향해 분노를 키우며 마릭을 향해 말한다.

“넌 아직 쓸모가 있으니까. 네가 죽는 건 조금 뒤의 일이야.”

쓸모없다고 판단되는 순간 곧 바로 자신이 죽일 것이다. 아이리스는 몇 번이나 다짐하며 입을 열었다. 마릭에게 그녀의 질문이 쏟아졌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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