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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네크로시스
입을 떠억 벌리게 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그들이 가장 먼저 도달한 곳은 1층의 입구와 가까운 식당이었다. 주방과 이어져 있는 식당에서 행동을 개시했다.
사용인들은 스크린이 비추는 영상을 보며 배속으로 영상을 돌리는 것이 아닌지 의심해야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스크린에는 어떠한 조작도 없었다.
스크린 속에 집사와 메이드는 깨닫고 보니 손에 청소도구를 쥐고 있었다. 잔상이 일어날 정도로 빠르게 도구를 사용하며 식당을 청소한다. 그들이 지나갈 때마다 눈에 보일 정도로 깨끗해지는 식당이 보였다.
“자, 잔상이 보여.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속도잖아….”
마릭은 어이없다는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마릭의 눈에는 그들이 더 이상 집사와 메이드로 보이지 않았다. 인간이 맞는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역시 사이나 언니! 인크론 님에게 전혀 밀리지 않아요!”
뭐가그리 좋은지 눈을 반짝이며 마법 스크린을 집중하고 있는 레미가 있었다. 마릭이 옆에서 레미를 살폈다. 그녀는 최근 들어 변화를 보였다. 소녀에서 여자가 되어간다고 해야 할까. 부쩍 외모에 신경 쓰는 게 눈에 보였다.
동료 메이드들에게 화장의 기술을 배우거나, 항상 땋던 붉은색 머리카락을 사이나를 따라하듯 긴 생머리로 푸는 등의 여성스러움이 보였다. 생각해보면 그녀도 18살이었다. 자신의 외모가 신경 쓰이는 것도 당연한 것이겠지.
“그래도 왜 스커트를 줄이는 건지 모르겠어.”
검은 스타킹에 감싸인 무릎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레미의 복장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롱스커트가 아닌 숏스커트였다.
레미가 유난히 심하게 스커트를 줄이긴 했지만, 다른 메이드들 또한 제각각 스커트를 줄이기 시작했다. 아이리스가 복장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선까지 허락한 것이다. 그렇다 해도 대부분이 종아리까지 밖에 줄이지 않았다. 롱스커트를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마릭이 스타킹 위에 가터벨트를 착용하고 있는 걸 보지 못한 것은 다행인 일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레미는 그런 아이가 아니라며 레미의 변화를 있는 힘껏 부정했을 테니까.
“역시 사이나야. 못하는 게 없어.”
아공간 주머니에서 망치와 못을 꺼내더니 살짝 삐그덕 거리는 의자를 뚝딱 고치기 시작했다. 망치질 한 번에 못이 전부 들어가는 것은 기본이었고, 대충 눈대중으로 한 것 같은데 자로 잰 것 마냥 완벽했다.
“대단하네요. 그렇지만 인크론에 비하면 멀었어요!”
아이리스가 말했다. 테드가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자 별채의 마당을 보고 있는 게 보였다. 어느새 별채의 밖으로 나온 인크론이 아예 테이블을 만들고 있는 게 보였다. 수리가 아닌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테드는 기가 막혔다.
테드의 뛰어난 기감은 인크론이 마나를 사용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그는 진심
으로 하는 모양이다.
마나를 사용한다고 해서 육체능력이 강화되는 것이지 손재주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빠르게 완성된 물건은 어디에 팔아도 손색이 없는 테이블이었다. 원래 가구라는 것이 저렇게 찍어내듯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식당을 해결한 사이나는 주방에 들어섰다. 저택에 비하면 상당히 좁은 주방이었지만, 있을 요리 기구는 빠짐없이 전부 있었다.
음식들을 조리하는 중요한 곳이다 보니 사용인들도 신경 써서 관리한 티가 났다. 그러나 사이나의 눈에는 차지 않았다. 바닥은 갈라진 곳이 있었고, 벽의 일부는 뜯겨져 있다.
손댈 필요가 없는 곳은 조리기구들 뿐이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커다란 냉장고를 열어본다.
냉장고 안에 빽빽하게 들어 있는 음식들이 보였다. 대충 훑어본 결과 상태가 나쁜 것은
없었다. 정돈 또한 기준을 통해 제대로 되어 있다. 냉자고 안의 식재료는 건드릴 필요가 없었다.
‘바닥과 벽을 보면 깨진 타일이 여럿이군요. 이건 아예 갈아엎는 게 빠르겠습니다.’
사이나가 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가련한 손은 벽에 붙어있는 타일을 무참히 뜯어냈다. 얇은 천을 뜯어내듯 벽을 뜯는 모습에 아이리스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사이나의 능력은 그녀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법도 사용하지 않은 채로 저 정도의 완력을 보유하고 있을 줄이야. 겉보기에는 자신보다 약해보일 정도인데.
“굉장한 힘이네요. 마력을 사용한 걸까요?”
“어, 음. 그렇지요.”
테드가 말끝을 흐렸다. 아이리스의 짐작과는 다르게 사이나는 마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순수한 완력이 바로 저 정도이다. 겉보기에는 인간이지만, 그녀는 악마다. 타고난 육체 능력이 달랐다.
테이블을 만드느라 뒤늦게 주방에 들어선 인크론 또한 벽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그가 판단하기에도 새로 갈아 엎는게 더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인크론과 사이나는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새하얀 타일과 시멘트로 작업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사용인들이 저택의 자잘한 일을 맡아서 한다고 하지만, 인크론과 사이나가 보이고 있는 일은 명백히 직무외의 일이었다. 건축 관련 일은 따로 업체를 사용한다.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사용인들이 건드리게 두지 않는다.
“인크론이야 옛날부터 그래왔는데…… 사이나 님은 도대체 정체가 뭔가요?”
“메이드지요.”
테드가 간단히 대꾸하며 시선을 돌렸다. 잠시 시선을 돌린 사이에 주방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묵은 때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으며, 별채의 외양과 다르게 주방의 내부만큼은
새로이 만든 것 마냥 깔끔하다.
“식당과 주방은 딱히 흠잡을게 없네요.”
아이리스가 감탄했다. 이후 휴게실을 비롯한 1층의 청소를 시작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꼼꼼한지. 지켜보고 있던 사용인들이 사색이 될 정도였다. 평소에는 청소하지 않는 구석진 구역이나, 창틀 같은 곳은 기본으로 들어갔다. 한 뭉텅이의 먼지가 쌓여 있는 곳을 발견할 때마다 그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장소가 저 정도로 더러울 줄은 몰랐다.
집사의 메이드의 1층 동선은 별차이 없었다. 그들이 갈라진 것은 1층의 청소를 끝낸 뒤였다.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인크론은 2층으로 올라갔고, 사이나는 지하 쪽으로 움직였다. 여기서 차이점이 발생했다.
2층으로 올라온 인크론은 우선은 복도부터 정리했다. 빛이 약한 마광등은 새로이 갈아주고, 벽에 묻은 때나 손상된 바닥을 깔끔하게 수리했다. 그런 뒤에 사용인들이 사용하는 방안으로 들어갔다.
지켜보고 있던 사용인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긴장하고 있었다.
아이리스의 부탁은 사전에 들었지만, 갑작스러운 부탁이어서 따로 짐을 치울 시간이 없었다. 개인적인 물건을 치울 시간이 조금도 없었다는 뜻이다. 집사장인 인크론에게 한소리 듣는 것은 물론이고 오늘 밤에 이불을 뻥뻥 차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 구경하고 있는 사용인들 중에서 마음편한 이는 레미 밖에 없었다. 별채에서 생활하지 않고 자택에서 출근 하는 그녀만이 천진난만하게 사이나를 응원하고 있었다.
인크론은 첫 번째 방, 메이드 중 한 명인 루이즈의 방에 들어가자마자 인상을 팍 썼다.
메이드의 방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어질러진 방이었다. 바닥에는 양말이나 스타킹같은 것들이 널려 있고, 침대의 위에는 여러 가지 옷들이 널브러져 있다. 간간히 속옷들이 보였다. 탁자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화장품들이 있으며, 방한구석에는 간식거리가 모여 있었다.
사용인들의 개인사까지 간섭하지 않는 인크론이다. 그러나 눈앞의 벌어친 참상은 심한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인크론의 머릿속에는 사용인들에게 할 잔소리가 끊임없이 생성되어 저축되었다.
“아, 죽고 싶어….”
방의 주인인 루이즈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늘어뜨렸다. 우울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근처에 있던 레미가 위로를 하기 위해 그녀를 향해 말했다.
“괘, 괜찮아요. 인크론 님은 신경도 쓰지 않으시잖아요!”
“…….”
효과는 조금도 없었다. 루이즈의 축 늘어진 어깨를 보며 레미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을 때, 다른 사용인들은 초조함을 느끼며 스크린을 쳐다봤다. 루이즈의 다음 차례가 자신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인크론이 사용인들의 방을 불시 검문하고 있을 때, 사이나는 지하에 내려와 청소를 시작하고 있었다. 우선 지하 창고에 쌓여 있는 상자들을 모두 별채의 마당으로 꺼내 놓았다. 무거워 보이는 상자를 솜이 들어간 베개처럼 번쩍 들어 올린다.
상자를 빼놓자 창고 안에는 상자로 인해 가려져 있던 먼지가 넘쳐났다. 창고 구석에는 곰팡이까지 핀 곳이 있었다.
“…….”
창고의 입구에서 한 차례 둘러본 사이나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검처럼 듬직한 먼지떨이가 척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사이나가 왼손을 들어 올리자 이곳을 정화할 새하얀 걸레가 패기를 내뿜는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기적이 시작되었다.
그녀가 오른손을 흔들자, 파란색의 먼지떨이가 부드럽게 허공을 움직였고, 뭉쳐있던 먼지가 바닥으로 사르르 떨어졌다.
그녀가 시커멓게 오염된 벽을 향해 왼손을 내밀어 한 번 훑어내자, 하얀 걸레가 오염된 것을 빨아들인다. 벽은 순식간에 정화되어 그 본연의 색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더럽기만 하던 창고가 실시간으로 변하는 장면은 신비하고도 놀라운 과정이었다.
흡사 사용인의 여신이 그곳에 강림한 것 같았다.
“저거 마법 아니에요. 오해하면 안 됩니다.”
테드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알고 있어요.”
아이리스가 저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자꾸 시선이 사이나에게 향했다.
“역시 언니야! 인크론 님도 저렇게 하지 못할 거야! 안 그래, 마릭?!”
“어, 어. 그래. 굉장하네.”
레미가 신이나 마릭을 바라보았다. 마릭은 얼빠진 얼굴로 대답했다. 마릭은 스크린이 아닌 마당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자가 쌓여 있는 곳이었다.
“상자가 신경 쓰여?”
“조금 말이야. 내가 저기에 뭘 넣어 놓았는지 기억나지 않지 뭐야.”
마릭이 웃으며 별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레미가 그렇구나하며 시선을 다시 스크린 쪽을 돌렸다. 탐문 수사를 하듯 사용인의 방으로 들어가 정리를 하는 인크론과 지하 창고를 완벽하게 청소하고 있는 사이나가 비춰졌다.
때마침 인크론이 마릭의 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여타의 다른방과 달리 마릭의 방은 지나치게 깔끔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 침대위의 이불도 제대로 개여 있었으며, 쓸데없는 물건은 일제 없었다. 좋게 말하면 깔끔하고, 나쁘게 말하면 황량한 방이었다.
인크론이 딱히 손댈 곳이 없어보였다. 그러나 인크론은 보는 이가 질릴 정도로 꼼꼼히 확인하기 시작한다. 서랍을 뒤지고, 침대 아래를 살피고, 옷장을 연다. 사용인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인크론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짐작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기회에 사용인들의 태도를 다잡을 생각이겠지.
마릭의 방에선 딱히 특이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침대아래에는 약간 먼지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었고, 서랍에는 필기구가 보기 좋게 정리되어 있었으며, 옷장에는 옷들이 정렬되어 있었다.
“우와. 시커먼 옷이네. 저런 옷도 있었어?”
“…어, 응? 옛날 옷이야. 우크사이어의 집사가 되기 전에 입었던 옷이지.”
“참. 마릭은 사용인이 되기 전에 뭐했어? 그러고 보니 듣지 못했던 것 같아.”
“그건… 나중에 설명해줄게. 자, 사이나 씨가 청소를 끝낸 모양이야.”
마릭이 스크린을 가리켰다. 거기엔 깔끔하게 변한 지하 창고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메이드가 있었다. 제대로 보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는데 땀 한방울 나지 않았다.
사이나는 곧 이어 마당으로 나와 다시 상자를 창고 안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 옆에 있던 상자가 열린 것은 정말로 우연이었다. 사이나가 상자를 들어 올리며 옆의 상자를 툭 건드린 것이다. 거리가 좁아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 작은 충격에 상자는 입구를 열어버리고 말았다.
애초에 이곳에 있는 상자들은 낡을 대로 낡아버리고 말았다. 문처럼 여닫는 식으로 만들어진 상자의 뚜껑은 세월의 힘 앞에 그만 손쉽게 뚜껑을 열고 만 것이다.
때마침 사이나의 주위를 비추고 있던 스크린에 상자의 내용물이 나타났다. 상자의 주인은 마릭이었다.
마릭의 얼굴이 무섭도록 굳어졌다.
상자의 안에는 온갖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손바닥만한 거울도 있었고, 알 수 없는 액체가 들어 있는 병도 있었으며, 막대기 같은 것과 책 몇 권이 들어 있었다. 그 용도를 알 수 없는 잡동사니가 가득했다.
사이나는 열린 상자를 닫고서 잠시 멈췄던 일을 재개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도 집사와 메이드의 일은 계속되었다. 3시간의 시간을 주었지만 실제로 그들의 일이 끝난 것은 그보다 30분 정도 이른 시간이었다.
솔직히 아이리스는 3시간도 부족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녀의 예상을 간단히 뛰어 넘을 정도로 경이로운 실력이었다.
“자, 그럼 결정을 내리도록 하죠. 어떤 방식으로 할까요? 간단하게 사용인들을 거수 시킬까요?”
아이리스의 물음에 테드가 절대 안된다는 듯이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거수는 좋지 않죠. 인크론은 그들의 직속상사이기 때문에 공평하지 않아요. 이
럴 경우엔 익명성이 보장되어야 하죠. 비밀 투표가 좋겠어요.”
“좋아요. 그럼 비밀 투표를 하죠.”
“잠깐. 그 전에. 저 둘에게 하나 질문을 하죠.”
무슨 꿍꿍이냐는 듯이 쳐다보던 아이리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리스의 허락에
테드가 사이나와 인크론을 쳐다봤다.
“저택에 해충이 있어. 어떻게 해야 할까?”
간단한 물음이었고, 답은 정해져 있었다.
“처리해야 합니다.”
메이드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쫓아내야 하지요.”
집사가 당연하다는 듯 말한다.
“그럼 추가로 마지막 일은 해충을 잡는 것으로.”
테드의 말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이나가 움직였다. 반면에 인크론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뜬금없는 테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사용인 쪽으로 움직이는 사이나를 바라봤다.
마릭이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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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