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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네크로시스
“부르셨습니까. 가주님.”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테드와 아이리스가 이름을 외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 둘은 나타났다. 식당의 문을 열고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 집사와 메이드는 동시에 고개를 숙이고, 동시에 입을 열어 말했다. 따로 행동을 맞췄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호흡이 딱딱 맞았다.
“다름이 아니라 가주님께서 인크론이 더 뛰어나다고 우기지 뭐야. 그래서 사이나. 너의 우수함을 보여주기 위해 불렀어. 혹시 불쾌해?”
“그럴 리가요. 저는 기꺼이 주인님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은발의 메이드는 인형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오랜 시간동안 사이나와 지낸 테드지만,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도 알 수 없었다.
“인크론이 바쁜 건 나도 잘 알고 있어. 그렇지만 테드 님이 조금 큰 착각을 하고 계셔. 인크론이 그 착각을 바로 잡아주었으면 해.”
인크론은 테드와 아이리스의 말을 듣고 단숨에 상황을 파악했다. 평소의 인크론이었다면 아이리스를 달랬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리스가 평소에 어떤 고생을 하고 있는지 잘 아는 인크론이었다.
테드가 저택에 머물고 난 뒤 어느 정도 밝아졌지만, 가주로서의 일과 공부, 수련으로 인해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있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의 기분 전환을 위해 어울려주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그리고 아주 약간 사이나에 대한 흥미도 있었다.
“알겠습니다. 가주의 명이라면 따라야 하지요. 그런데 무엇을 하면 됩니까?”
인크론의 물음에 테드와 아이리스를 서로를 바라봤다. 충동적으로 말을 내뱉은 것이라 깊은 계획은 조금도 없었다.
사용인으로서 실력을 겨룬다면 전투가 아닌 가사능력이 될 것이다. 물론 아이리스는 인크론의 전투 능력을 알고 있기에 자신 있었다. 그녀의 추측일 뿐이지만, 아마도 이 저택에서 가장 강한 건 병사들 보다 집사장인 인크론이 아닐까.
“인크론의 능력을 보여주었으면 해. 물론 자신 있지?”
인크론은 아이리스의 초롱초롱 빛나는 눈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전투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용인으로서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리라.
사용인의 능력은 얼마나 성실한가, 얼마나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는 가에 달려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실이고, 다음으로 일의 처리다.
인크론은 성실함에 있어서 사이나를 인정하고 있었다. 그녀가 늦잠을 자거나 일을 빼먹는건 한 번도 본적 없었다. 자신을 제외하고 저택에서 일하는 그 누구보다 성실했다.
“능력이라면 사용인으로서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저야 상관없습니다만… 그녀는 괜찮겠습니까?”
테드의 앞에 있던 사이나가 고개를 돌렸다.
“메이드로서 주인님에게 능력을 보여드리는 것도 제 일이지요. 저는 충분히 자신 있습니다.”
“당신의 능력은 인정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몇 십년이나 우크사이어 저택에서 일해 왔습니다. 듣기론 사이나 님의 경력은 얼마 되지 않는다지요?”
“지금 여기서 경력은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력이지요.”
“경력이 많다면 실력은 자연스레 따라 붙기 마련입니다.”
차가운 냉기가 그들을 중심으로 흐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테드가 아이리스를 보자 낯선 분위기에 그녀 또한 당황한 기색이었다.
인크론이 아이리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이리스가 움찔 거렸다. 인크론의 호박빛 눈동자가 안광을 내뿜는 것 같은 환각이 보였다.
“가주님. 저택에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제 실력을 보여드리기엔 이미 저택의 상태
가 완벽하기 때문이죠.”
“그, 그럼 관둘까?”
아이리스는 거의 충동적으로 말한 것이다. 깊게 생각하지 않고 입 밖으로 내뱉어버렸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름에 따라 머리가 식으면서 자신의 행동을 돌이켜 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인크론이 사이나보다 못하다고는 절대로 인정할 수 없지만.
“아닙니다. 제 의견은 저택이 아닌 별채에서 일을 진행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저택에 비하면 한눈에 보기에도 낡은 건물이기에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나야 상관없어. 그치만 거긴 사용인들이 사용하는 곳이잖아? 사용인들의 불만이 나올 것 같은데.”
“그들에게 해가 가는 일은 아니기에 괜찮을 것입니다. 이 기회에 반쯤 방치되었던 별채
를 손볼 수 있겠군요.”
인크론을 솔직히 별채가 거슬렸다. 지나치게 낡은 건물은 우크사이어 저택과 어울리지 않았다. 기회가 되면 별채 자체를 허물고 다시 짓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우크사이어의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참고 있었을 뿐이다.
“좋아. 인크론의 의견대로 하자. 테드 님도 불만은 없지요?”
사이나와 대화하던 테드가 아이리스를 바라봤다. 그리곤 씨익 웃는다. 자신만만한 웃음이었다.
“물론. 결과는 변하지 않으니까요.”
“저와 같은 생각이시군요. 어떤 장소든 결과는 변하지 않지요.”
테드와 아이리스는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리고 의자를 밀어 일어나려는 찰나였다.
“가주님. 우선 식사부터 끝내시지요. 아직 절반도 드시지 않았지 않습니까.”
“주인님. 식사가 입에 맞지 않으십니까? 아니면 수저를 드는 게 귀찮아 지셨는지요? 그럼 제가 대신하여 수저를 들어드리겠습니다.”
아이리스와 테드는 식사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사이나의 경우 정말로 떠먹여 줄 생각인지 수저를 들었다. 테드는 그녀를 만류하고 자신의 손으로 수저를 들었다. 숟가락을 들지 못할 정도로 글러먹은 것은 아니었다.
⁂ ⁂ ⁂
인크론과 사이나에 관한 소문은 순식간에 저택의 내부로 퍼졌다. 근무를 서고 있는 병사와 일을 준비하는 사용인들에게 알려졌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지만 지나치게 빨랐다. 30분도 되지 않아 우크사이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범인은 저택에서 일하는 요리사들이었다. 식당에서 하는 이야기를 우연히 엿들은 요리사 한 명이 동료들에게 이야기 한 것이다.
때마침 대부분의 사용인들이 점심 식사를 하는 시간이었다. 사용인들은 별채에 모여서 식사를 하기 때문에 빠르게 소식을 접한 것이다. 요리사들이 가진 화제거리는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우크사이어에 간만에 활기가 돋았다. 사용인들은 저마다 자신의 의견을 말하며 승부를 예측했다. 거의 대부분의 사용인들은 인크론이 더 뛰어나다고 의견을 보냈다. 인크론의 경
력과 능력은 누구나가 알 정도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허나 소수의 인물들의 의견을 달랐다. 그 중에서 레미는 열성적으로 사이나를 응원했다. 사이나가 이길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레미의 옆에 있던 마릭은 쓴웃음을 지었다.
레미를 처음 봤을 때, 인크론을 동경하고 있다는 것을 곧바로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녀
는 무언가를 숨기는 것에 서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요 근래 사이나와 몇 번 어울리더니 사이나의 추종자 비스무리한 것이 되어버렸다. 인크론에게 향하던 동경이 사이나에게로 노선을 바꿔 탄 것이다.
“언니가 이길게 틀림없어. 물론 인크론 님도 만만치 않지만, 언니는 마법까지 사용할 수 있는 걸!”
“알겠으니까 진정해!”
열정적으로 말하는 레미를 향해 마릭이 양손을 내뻗었다. 진정하라는 듯 손을 내밀었지만, 흥분한 레미는 진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레미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우크사이어의 가주, 아이리스가 할 일이 없거나 당장 처리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는 사용인들을 별채에 모아 놓은 것이다. 그 목적은 결과를 판정하기 위해서다. 여기에 레미와 마릭이 뽑힌 것이다.
“마릭! 마릭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 글쎄.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거니까.”
성에 차지 않는 마릭의 대답에 그를 한 차례 노려본 레미가 홱하고 고개를 돌렸다. 저택 쪽으로 돌린 그 눈은 얼른 사이나와 인크론이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내심 마릭은 인크론보다 사이나가 더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마릭은 레미와 움직이다 보니 사이나가 일하는 것을 몇 번 본적 있었다. 평범한 여성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뛰어난 신체능력과 필요하다면 주저하지 않고 사용하는 마법. 그녀가 왜 메이드 일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뛰어난 능력이었다.
약간 시간이 지나자 사이나와 인크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앞에는 아이리스와 테드가 걷고 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간접적이나마 느껴졌기에 레미와 마릭은 몸이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테드는 3층짜리의 낡은 별채를 힐끗 바라봤다. 그가 이곳에 올 이유는 없기에 오늘 처음 보는 건물이었다.
“낡긴 했네요.”
테드가 말했다.
“이 건물은 제가 태어나기 전에 지어졌어요. 시간으로 따지면 20년 정도 되었죠. 세월이 있는 만큼 그럭저럭 고풍스럽게 느껴지지 않나요?”
“고풍이 아니라 고품을 잘못 말한 것 같은데요.”
귀족들의 취미는 역시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낡은 건물을 보며 테드가 생각했다.
“어느 정도 정리는 되어있네요. 여기서 인크론과 사이나 님이 서로 실력을 겨루면 되지요. 판단은 저희가 아니라 사용인들이 할 거에요. 사용인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들 보다 현직 사용인인 그들이 더 정확하게 판단 할 테니까요. 이견 있나요?”
“이견은 없어요. 어차피 사이나가 이길 테니까.”
“아무리 테드님이라도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네요.”
아이리스가 후후 웃으며 테드를 이끌어 별채의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리스는 오랜만에 오는 별채를 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어렸을 적의 아이리스는 심심하면 우크사이어의 부지를 돌아다녔다. 저택은 물론이고 정원에서부터 별채까지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점점 커가면서 별채에는 들리지 않게 되었지만, 그 구조는 확실하게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다.
“사용인들에게 양해는 구해났어요. 그들의 개인적인 방은 물론이고 1층에 있는 식당과 지하까지. 이 별채 전체를 반으로 나누는 거죠. 한쪽은 인크론이 한쪽은 사이나 님이 하시는 거에요. 시간 제한은 3시간으로 그 안에 이 별채를 정리하는 거죠. 평가는 사용인이 하고요.”
테드는 불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훑어보고 마법을 이용해 경계를 그린다. 인크론과 사이나의 구역을 나누기 위해서다.
그리고 상황을 지켜보기 위해 마법을 사용한다. 마법 스크린의 일종으로 인크론과 사이나의 일을 실시간으로 지켜볼 수 있다.
아이리스와 테드가 밖으로 나오자 별채의 바로 앞에 의자를 비롯한 테이블이 설치되어 있었다. 햇빛을 피하기 위한 파라솔까지 완벽하게 설치되어 있는 모습에 탄성이 나왔다.
사이나는 테드의 취향에 맞는 시원한 음료수가 담긴 컵을 들고 있었고, 인크론은 아이리스가 자주 마시는 홍차 주전자를 들고 있다.
테드와 사이나가 의자에 앉자 기다렸다는 듯이 집사와 메이드가 움직였다. 그 완벽한 시중에 사용인들은 감탄을 연발했다.
의자와 테이블을 준비한 것은 사이나였고, 파라솔을 준비한 건 인크론이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음료와 간식까지 준비했다. 두 눈 뜨고 그들을 보고 있었지만, 그들의 행동을 제대로 본 사람은 적었다.
시작하기에 앞서 사이나가 분홍빛의 부드러운 입술을 열었다.
“마법은 너무 편리하고 불공평하다는 말이 나올 수 있기에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인크론이 사이나를 바라봤다. 사이나는 인형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서있었다. 외모 또한 인간이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기에 정말 인형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생각해보면 그녀는 20대 치고 너무 유능했다. 아는 지식도 많았고, 아이리스 이상의 마
법 실력을 가지고 있다. 천재… 아니, 그 이상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배려는 감사합니다만, 상관없습니다. 마법은 편리할지언정 만능은 아닌 걸로 알고 있습
니다. 그리고 마법을 사용하지 않아 졌다는 변명은 듣고 싶지 않군요.”
“마법에 대해 모르시는군요.”
사이나가 말했다. 그리고 직후, 테드의 시작 신호가 울러퍼졌다.
인크론과 사이나의 신형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그곳에서 사라졌다. 말 그대로 사라진 것이다. 아이리스는 물론이고 사용인들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들이 있던 장소를 바라봤다.
유일하게 테드만이 그들이 이동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웬만한 기사는 감히 따라갈 수도 없는 속도에 놀라며 허공에 커다란 마법 스크린을 띄웠다. 별채의 내부에 있는 사이나와 인크론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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잤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