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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영혼-95화 (95/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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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네크로시스

14. 네크로시스

“……제가 보고할 건 이게 전부에요.”

“…….”

테드의 이야기를 전부 들은 디커드는 입을 열지 않았다. 시선은 의자에 앉아 있는 테드에게 향해 있었지만, 눈동자에 비추는 것은 그가 아니었다.

생각에 잠긴 디커드를 보며 테드는 잠자코 기다렸다.

상대가 네크로시스만 아니었다면 학원장인 디커드에게 굳이 보고까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혼자서 움직여서 암살자의 본거지로 쳐들어가 일을 끝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가 네크로시스였기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

네크로시스는 치밀하고, 잔혹하며 끈질긴 놈들이다. 회귀 전에 상대해 본적이 있기에 잘 알 수 있었다. 테드는 그때 완전히 박멸하지 못했다. 암살해오는 놈들을 모조리 쓰러뜨렸지만 본거지만은 알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암살의 발길이 뚝 끊겼기 때문이다. 회귀 전의 삶에서는 그것으로 인연이 끝났다.

그런데 이번에도 놈들의 표적이 되었다. 아니, 표적이 자신인지 알 수 없다. 테드가 생각하기에 놈들의 표적은 자신이지만, 증거가 없는 만큼 확신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암살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아카데미에 잠입한 것일지도 모른다.

“……보고해주어서 감사하군. 엘리제라는 학생은 무사한가?”

“자택에서 세상모르게 자고 있더군요.”

테드가 약간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폭사한 암살자의 시체를 마법으로 처리한 뒤 곧바로 엘리제를 찾기 위해 움직였다. 패밀리어 마법까지 사용해 도시 구석구석까지 살펴봤는데, 정작 당사자는 자택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그거 참 다행이군. 그럼 자네는 이 일에서 손을 떼도 상관없네.”

디커드는 이 일을 자신이 처리하겠다고 말했다.

테드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손을 뗴고 싶지만, 놈들이 노리는 것은 아마도 저겠죠. 이유는 모르겠지만.”

“놈들의 목적이 자네라곤 꼭 단정할 수 없지. 금서를 노리고 온 것일지도 모르고.”

디커드는 테드에게서 붙잡은 암살자의 몸이 폭발했다는 것을 들었다. 펠리스 왕국의 현자라고 불리는 디커드가 들어본 적 없는 현상이었다. 아마도 비전 마법의 일종이리라.

“설마 놈들이 책 따위를 훔치기 위해 들어왔겠어요?”

장난하지 말라는 듯 테드가 손을 저으며 피식 웃었다.

디커드의 이마에 혈관이 솟아났다. 머리 한 올 없는 깨끗한 대머리라 그런지 유난히 눈

에 띄였다.

“책 따위라니…! 자네는 교사라는 자가 아카데미의 금서의 가치를 조금도 모르는군! 모든 마법사가 원하는 책, 그것이 바로 본 아카데미의 금서네! 화폐로 따지면 값을 매길 수 없고, 금서를 보기 위해 어떠한 희생마저 치를 수 있는 마법사가 넘쳐나네!”

얼굴이 붉어져라 열변을 토하는 디커드를 보며 테드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 예. 그렇군요.”

디커드가 갑갑하다는 듯이 주먹을 말아 쥐고 자신의 가슴팍을 몇 번 두들겼다. 금서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무지몽매한 테드에게 말해주기 위해 입을 크게 벌렸다가, 한숨을 내쉬며 몸에 힘을 풀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테드의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한 디커드다. 주구장창 말해봤자 자신의 입만 아파올 것이 뻔했다.

“그럼 놈들이 자네를 노리는 이유는 뭔가?”

“모르겠는데요.”

조금의 시간도 지체하지 않고 테드가 즉답했다.

네크로시스는 펠리스 왕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놈들이다. 중립지대였다면 테드를 시기한 모험가들이 그들을 고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펠리스 왕국에선 이야기가 달랐다. 펠리스 왕국에선 한 것이 얼마 없다. 타인에게 원한을 살만한 일을 아예 저지르지 않았다.

“…….”

자신을 가지고 장난하는 것일까. 말똥말똥 쳐다보는 테드를 어이 없는 눈으로 쳐다보던 디커드의 머릿속으로 문득 하나가 스치듯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자네. 우크사이어에서 머물고 있다지?”

“그렇긴 한데… 왜 갑자기 우크사이어가 나오죠?”

“자네가 표적이 된 이유 말일세. 내가 생각하기론 우크사이어 때문이 아닌가 싶네.”

굳어지는 테드의 표정을 보며, 디커드는 그가 섣불리 생각해 오해하기 전에 서둘러 말을 이었다.

“우크사이어가 의뢰 했다는 게 아니네. 오히려 우크사이어를 노리고 있을 가능성이 크지.”

“그럼 왜 나를… 아니, 자신들의 입장에서 방해되니까, 인가.”

디커드에게 물으려던 테드가 말을 흐리며 중얼거렸다.

목격자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리는 것이 암살자 길드다. 목적에 방해된다고 생각하면 어린아이라도 죽일 것이다.

“자네는 우크사이어에 일어난 비극을 알고 있나?”

비극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는 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크사이어에 오기전에 조사를 해본적이 있었다. 그때 약간이나마 알게 되었다.

“2년 전에 있었던 사고 말이죠. 설마 그게 네크로시스의 짓이에요?”

2년 전, 우크사이어는 우연히 던전을 발견한다. 세상에는 조금도 알려지지 않은 미탐사 던전이다. 그리고 던전에는 막대한 보물이 있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아무도 모르고, 탐사도 되지 않은 던전. 우크사이거만이 유일하게 알고 있다면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당시 우크사이어의 가주와 소가주는 병력을 이끌고 던전에 들어갔다. 그리고 실종됐다.

후에 알려진 던전은 모험가들에 의해 클리어 되었지만, 우크사이어의 가주와 소가주의 시체는 그 일부분도 찾지 못했다.

“그 질문의 대답은 내가 섣불리 대답할 수 없네. 다만, 던전에 관한 것을 어떻게 우크사이어가 알았는지 의심스럽네.”

우크사이어는 펠리스 왕국에서 제법 이름 높은 귀족 가문이다. 그러나 알려진 이름과 달리 강력한 힘을 보유한 가문은 아니었다.

이곳, 베진만 해도 우크사이어보다 강력한 힘을 보유한 귀족 가문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 우크사이어가 다른 가문을 젖히고 던전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했다. 우연히 우크사이어 일족이 던전을 발견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지만.

“네크로시스가 일부러 우크사이어에 던전에 관한 정보를 흘렸다고 생각해요?”

“증거가 없는 가설일 뿐이지. 전대 우크사이어의 가주를 알고 있는데 자신을 파악하고 있는 현명한 자지. 솔직히 그가 이끄는 병사들이 던전에서 한 명의 생존자도 없이 전멸했

다는 건 쉽게 믿을 수 없네. 그는 욕심은 있을지언정 목숨 귀한 줄은 아는 친구였네. 그는 필시 던전에서 철수를 명령했을 것이고 한 두 명 정도는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을 것이네.”

“우크사이어가 목적이고 놈들에게 내가 방해가 된다면, 왜 굳이 아카데미에서 날 노렸을

까요?”

테드가 가장 헷갈리게 만드는 이유를 디커드에게 물었다. 코스모스 아카데미는 뛰어난 실력을 가진 교사들이 있는 것은 물론이고 건물 자체에 결계까지 쳐져 있다. 암살자 입장에

선 가장 성가신 장소다.

테드는 아카데미 기숙사에 생활하지 않고 자택에서 출퇴근하기 때문에 굳이 아카데미의 안에서 테드를 노릴 이유는 없었다.

“그럼 자네. 평소에 아카데미 말고 가는 곳이 있나? 우크사이어 저택을 제외하고 말일세.”

“……움직이는 건 싫어하는 편인지라.”

“주말에 어딘가로 놀러가기라도 하나?”

“교사 생활로 인해 지친 몸을 달래주기 위해 휴식을….”

생각해보면 아카데미를 제외하면 가는 곳이 없었다. 가끔 산책삼아 도시를 걷긴 하지만 정말로 가끔이다.

“하지만 암살은 굳이 아카데미가 아니어도 우크사이어 저택에서도 가능하잖아요?”

“아니, 저택에는 그 집사가 있어서 불가능하네.”

해는 동쪽에서 뜨고, 물은 아래로 흐른다는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단언했다.

“그 집사라면 인크론이요?”

“자네는 그에 대해 잘 모르는 모양이군. 그는 집사를 하고 있지만, 실상은 터무니 없는 실력자네. 나는 그 실력을 알아보고 집행자의 일을 권했지만, 그는 가주를 모셔야 한다고 거절했지.”

“…….”

테드는 집사의 모습을 떠올렸다.

사이나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집사.

집사복을 입은 그가 검을 하나 꼬나쥐고 복면을 쓴 암살자들을 향해 덤비는 것을 그린

다. 무쌍을 찍는 인크론의 모습이 무섭도록 쉽게 그려졌다.

“어떤 의미론 아카데미보다 그가 있는 저택이 더 안전할 수 있지. 혹은 또 다른 이유가 존재하거나.”

그 이후로 테드와 디커드의 대화를 계속되었다. 디커드는 따로 네크로시스에 대해서 조사한다고 했다.

디커드는 펠리스 왕국의 집행관으로서 그들의 존재를 허락할 수 없으며, 코스모스 아카데미의 학원장으로서 그들의 침입에 굴욕을 느낀다고 말했다.

의욕에 불타는 그의 눈동자를 본 테드는 디커드에게 알린 것이 잘한 일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괜한 사람을 끌어들인 것이 아닌지 조금 걱정되었다.

⁂ ⁂ ⁂

그것은 자부심에 의해 시작되었다.

아카데미 휴일 날의 아침에 테드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아이리스의 수련을 봐주었다. 대마도사의 입장에서 보면 기도 차지 않을 정도의 낮은 실력이었으나, 그녀의 마법 실력은 조금씩이나마 정진하고 있었다. 아니, 테드가 붙어 있는데도 실력이 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리스의 수련이 끝나고 오전 무렵, 테드는 모처럼 그녀와 함께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다.

평소의 아이리스는 일에 치여 있다 보니 식사도 집무실에서 간단히 하고, 식당에 가는 길도 귀찮은 테드는 방안에서 사이나가 가져오는 요리를 먹었다.

아이리스의 권유로 인해 오늘의 점심 식사는 함께 하게 되었지만, 테드와 아이리스가 먹는 음식은 서로 달랐다.

아이리스의 앞에 놓인 요리는 고급 레스토랑에서나 나올 정도로 화려함과 고급스러움이 넘쳤으며 종료도 다양했다.

반면 테드가 먹고 있는 음식은 기껏해야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음식들로 구성되어 있다. 유일하게 고급러운 요리가 있다면 테드의 앞에 먹음직스럽게 놓여 있는 커다란 포크 커틀릿 뿐이었다.

하나의 식탁을 절반으로 나눈 것 같을 정도로 차이가 보였다. 한쪽은 고급스러움을, 다른 한쪽은 소박함을 표현한 것 같은 식탁이다.

“테드 님은 주방장의 요리가 마음에 드시지 않나요?”

매콤한 칠리소스를 찍은 새우튀김을 입안에 집어넣으려던 테드가 멈칫하고 아이리스를 바라봤다.

“아니, 맛있어요. 그런데 내 입맛엔 사이나가 만든 게 더 맛있을 뿐이에요.”

“그래요? 그럼 이 스프만 조금 맛보시겠어요? 인크론이 만든 거에요. 엄청 맛있죠.”

테드는 그녀가 내미는 스프를 물끄러미 보더니 받아 들였다. 약간 누런 스프속에 있는 야채들이 보였다.

“야채 스프네요.”

테드가 숟가락으로 떠서 한 입 먹더니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아이리스가 그의 반응을 살폇다.

“맛있는데, 사이나가 만든게 더 맛있어요.”

그리고 관심 없다는 듯이 다시 자신의 앞에 있는 요리를 향해 숟가락을 뻗었다. 아이리스의 입가가 조금 떨렸다.

“……저, 그 음식좀 먹어봐도 좋을까요? 맛있어 보이는데.”

아이리스가 가리킨 것은 포크 커틀릿, 테드가 가장 좋아하는 돈까스였다. 테드는 조금 망설이더니 돈까스를 한 조각 잘라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포크를 콕 찌른 뒤에 입안에 넣은 아이리스가 밝은 미소를 지었다.

“인크론이 만든 스테이크가 더 맛있네요.”

“…….”

테드가 모욕이라도 들었다는 듯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불쾌한 감정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아니, 객관적으로 평가해도 사이나의 요리가 인크론의 것보다 맛있잖아요.”

“그녀의 요리 실력은 인정해요. 하지만 인크론은 몇 십 년이나 사용인으로서 우크사이어 가문을 보좌했죠. 인크론이 몇 십 년이나 쌓아온 실력을 고작해야 20대인 사이나 씨가 따라올 수 없어요.”

테드는 사이나의 나이를 까발리고 싶은걸 꾹 참았다.

“아닌데요. 사이나가 인크론보다 더 뛰어난데요. 요리는 물론이고 가사까지. 아마 이 세상에서 사이나를 따라갈 수 있는 사용인은 없을 거에요.”

“테드 님이 사이나 씨를 좋아하는건 알아요. 하지만 가사에 있어 인크론은 무적이에요. 완벽 그 자체죠.”

“……허, 거참. 말이 통하지 않네. 요리든 가사든, 무엇이든 사이나가 더 뛰어나다니까요? 사이나는 마법까지 사용할 수 있어요. 인크론은 마법 사용하지 못하잖아요?”

“인크론은 마법이라는 편범이 없어도 완벽하게 일을 해내죠. 이것만 봐도 누가 더 뛰어난지 알 수 있지 않나요?”

테드는 손에 쥔 포크를 내려놓고 아이리스의 눈을 지긋이 쳐다봤다. 지금이 6월의 막바지이니 거의 4개월 동안 이 저택에서 생활해왔다.

인크론의 일처리를 옆에서 보았기에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가 없으면 가문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러나 사이나가 안해서 그렇지 한다면 인크론보다 몇 배, 몇 십 배는 잘 해낼게 틀림없었다.

“가주님께서 이해하지 못하시겠다면 직접 알려드리는 수밖에 없겠네요.”

“제가 할 말이에요.”

아이리스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인크론은 그녀의… 아니, 우크사이어의 자랑이었다. 인크론은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집사로 일해 왔으며, 그녀가 태어나고서도 일해오고 있다. 인크론은 우크사이어의 기둥이었다.

서로 바라보던 그들은 누가 먼저할 것 없이 큰 소리로 누군가의 이름을 외쳤다.

“사이나!”

“인크론!”

아이리스는 베진에서는 귀족도 무시하지 못하는 완벽한 집사장을 불렀다.

테드는 베진에 있는 모든 메이드들의 치마 길이를 줄인 냉혈의 메이드를 불렸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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