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결한 영혼-94화 (94/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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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우크사이어.

제니의 반응은 빨랐다. 순식간에 자리에서 일어나 테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암살자로서 받은 교육이 동물의 본능 같은 움직임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소매에서 나이프를 꺼내들고, 그야말로 표범처럼 날카로운 손톱을 휘두르듯 테드의 목을 노리고 나이프를 휘두른다.

나이프의 날카로운 날이 허공을 가른다.

제니가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5M정도 떨어진 거리에 테드가 있었다. 붉은 모자 아래 검은색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난다.

“……어떻게 알았어? 모습과 연기는 완벽했다고 생각하는데.”

“완벽은 무슨. 얼어 죽을.”

“…….”

테드가 재미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녀를 보며 잠시 생각한다. 겉모습은 확실하게 엘리제였다. 스킬인 ‘고결한 눈’을 통해서 그녀의 이상한 모습이 보였다. 마나를 사용해 인체를 비틀어 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고결한 눈을 사용하면 약간의 피로함을 느끼기에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아침에는 조금도 눈치 채지 못했다. 아침의 해프닝이 있었지만, 그동안 잠잠하던 반항심이 드디어 도졌나 싶었다.

“아침에는 몰랐어. 던전에 와서야 눈치 챘지. 그 녀석은 수업 태도는 나쁘지 않았거든. 수업에서 배운 것도 곧잘 활용하는 녀석이지. 던전에서 너 같은 실수는 하지 않아.”

그 성격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지만, 실력만큼은 테드도 인정하고 있었다. 순수하게 실력

만 평가한다면 그가 가르치는 녀석들 중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다.

“……이 던전의 난이도가 너무 높은 거야. 학생들 수준 치곤 심하지 않아?”

제니의 불평에 테드가 코웃음 쳤다.

“어차피 훈련용 던전이야. 죽지도 않지. 어렵지 않으면 훈련이 되지 않아. 그리고 그편이 진짜 던전에서 살아남을 확률을 더 높여주지.”

귀찮은 일은 하지 않지만, 일단 맡은 일은 확실하게 하는 게 테드였다.

학생들 중에서 정말로 던전이나 미궁을 탐색하는 모험가가 될 인물은 적을 것이다. 대부분이 졸업식 때 스카웃을 받아 귀족 혹은 국가 소속의 전투 마법사가 될 것이다.

이 학원의 창시 목적이 그것이다. 국가에 도움이 되는 마법사를 양육하는 것. 모험가가

되면 국가의 입장에선 손해를 보는 것이다.

“그보다 엘리제는 어디에 있지? 죽였나?”

“…….”

제니는 대답하는 대신 테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녀의 손에 쥔 나이프가 테드의 가슴을 향해 달려들었다. 테드는 눈 하나 까닥하지 않고 나이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의 앞에 검은 마법진이 전개되고 검은 쇠사슬이 3줄이 나타난다.

제니가 순식간에 반응했으나, 조금 늦고 말았다. 팔과 몸, 다리에 쇠사슬이 감긴다. 마나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느끼는 순간 그녀의 몸이 변하기 시작했다.

육체가 비틀린다. 체격이 조금 커지고 그녀가 입은 교복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붉은 머리카락이 갈색으로 변하고, 매서운 눈 꼬리가 처진다. 제니는 빠른 눈치로 자신의 역용술이 풀린 것이 검은 사슬의 탓임을 알아차렸다. 벗어나기 위해 몸을 이리저리 움직인다. 그러나 꼼짝도 하지 않는 쇠사슬에 포기하고 말았다.

“예상은 했는데 역용술인가….”

테드가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그녀가 커진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역용술을 알고 있어? 너, 뭐하는 놈이야?”

역용술은 네메스 대륙에 알려지지 않았다. 제니와 같은 암살자들 중에서 역용술을 알고 있는 이들은 적었다. 그 이름은 물론이고 효과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역용술에 관해선 정보 길드에서도 특급으로 분류되어 있는 고급 정보다.

“블랙 로즈. 네크로시스. 블루 트와일라잇.”

테드에 말에 제니가 저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그가 중얼거리듯 말한 3개의 단어는 모두 암살자 길드의 이름이다. 그것도 상당히 유명한 암살자 길드. 그렇다곤 해도 모험가 출신의 마법사가 알만한 이름은 결코 아니었다.

“아니, 블랙 로즈는 아닌가. 거긴 현재 딥크스 쪽에서 활동하니까. 거길 제외하면 역용

술을 사용하는 암살자가 있는 곳은 네크로시스와 블루 트와일라잇인데….”

“…….”

제니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아무리 훈련을 받았다 해도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테드의 말대로 두 곳 중 하나가 바로 조직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확정할 수 있는 거지? 어떻게 역용술을 사용하는 암살자 길드를 알고 있는 거지?

의문 투성이였다.

조직에서 자신을 버리기 위해 함정을 판 것이 아닐까하고 말도 안 되는 상상까지 할 정도였다.

붙잡은 암살자를 보며 지긋이 바라보던 테드가 느긋한 어조로 묻는다.

“세 번째 묻는 거야. 엘리제는 어디에 있어?”

“……죽였다면 어떻게 할 건데?”

제니는 알게 모르게 슬금슬금 몸을 움직였다. 쇠사슬은 앞에서 뻗어 나왔기에 당기는 쪽인 앞으로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테드가 눈치 챈 기색은 없었다.

“그럴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하는데. 제크테리안은 최근 상승세를 이루는 귀족이니까. 암살 표적이 아닌 이상 죽이게 되면 귀찮아 지는 건 암살길드 쪽이야.”

“뭐, 네 말대로야. 죽이진 않았어. 축하해. 사랑하는 제자가 살아 있어서.”

팽팽하던 쇠사슬이 그녀가 거리를 좁힘에 따라 느슨해지며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겨났다. 그러나 묶여 있는 것은 변함없었다. 마나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요지부동이다.

“납치해서 감금이라도 했나. 어디에 있지?”

“말해주면, 풀어 줄 거야?”

요염하게 웃으며 말한다. 요령 좋게 사슬에 묶인 팔을 움직여 가슴께를 풀어 헤친다. 유혹하듯 몸을 비꼰다. 아슬아슬하게 속살이 보일락 말락 한다. 흡사 창관의 인기 높은 창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설마. 그렇지만 어느 정도 봐줄 수는 있어. 그래. 아카데미에 널 넘기는 선으로 끝낼

게.”

그러나 테드의 얼굴은 평온 그 자체였다. 색욕따윈 초탈한 듯한 그 반응에 오히려 제니가 당황했다. 그녀가 아는 남자는 아주 중요한 순간에서도 무의식적으로 여자의 몸을 훑는 짐승들이다. 나이가 적든 많든 상관없이 말이다.

‘…이럴 리 없는데.’

제니는 나이프를 들어 자신의 상의를 찢어버렸다. 새하얗고 풍만한 가슴이 흔들리며 튀어나왔다. 그러나 반응은 조금도 없었다. 테드의 검은 눈동자는 무감정했다.

“……너 고자야?”

“꼴값 떨지 말고 좋게 말할 때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엘리제는 어디에 있지?”

“지금 아카데이 밖에 나가서 직접 찾아보는 게 어때?”

제니는 천천히 테드를 향해 다가갔다. 나비처럼 나긋하게, 뱀처럼 요염하게 움직인다. 만약 여기에 남자들이 있었다면, 그들은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그녀의 행동에 집중했을 것이다.

테드는 잠시 생각했다. 죽이진 않았다고 했다. 그 말은 사실일 것이다. 그녀가 엘리제로 변신한 순간부터 엘리제는 그녀의 표적이 아니라는 것이니까. 엘리제가 표적이었다면 다른 녀석을 연기했을 것이다.

자세히 말하진 않았지만, 어디에 납치 감금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

아카데미에 알리면 알아서 찾겠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테드가 입을 열었다.

“그럼 질문을 바꿔서. 네 표적은 나야? 아니면, 다른 교사나 학생?”

암살자를 상대로 정보를 알아내는 것은 귀찮은 일이었다. 정보 누출을 방지하기 위해 모종의 훈련을 받기 때문이다. 심할 경우 암살에 실패할 경우 바로 자살하는 암살자가 있을 정도다. 아무리 그래도 힘들게 키워낸 암살자를 소모품 버리듯 하는 암살 길드는 거의 없지만.

“내 표적은 네가 아니야. 그러니 못 본 척 해주지 않을래?”

마치 색기로 가득 담은 듯 한 웃음을 지으며 테드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테드가 뒤로 물러났다. 테드의 앞에 있는 검은 마법진이 움직이며 느슨해졌던 사슬이 다시 팽팽하게 늘어났다. 뿐만이 아니라 사슬이 그녀의 몸을 꽉 조이기 시작했다.

“…크윽.”

“개수작 부리지 말고. 묻는 말에 대답해.”

“……알고 있었어? 알고 있는 길드도 그렇고… 암살자에 대해서 너무 잘 아는 것 같은

데.”

그녀의 손톱 아래에는 독이 묻어져 있었다. 당연히 몸속에 들어가면 목숨을 앗아가는 맹독이다.

“일단 브라고는 아니겠군. 브라고가 표적이었다면 진즉에 죽였을 테니까.”

“보는 눈이 있어 죽이지 못한 것일 수도 있잖아?”

그의 의견을 반박하듯 제니가 말했다. 동시에 보이지 않게 주변을 훑었다. 인공 던전이

라 그런지 지금 상황에 도움이 될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화장실을 갈 때라던가, 음식을 먹을 때라던가. 등 죽일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어.”

엘리제를 연기했다는 것은 엘리제와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학기 초인 현재 엘리제와 연관되어 있는 인물은 적었다. 무엇보다 엘리제는 친구라 부를 만한 인물이 거의 없었다. 고작해야 성격이 좋은 브라고가 전부다.

“교사들 중에선 엘리제가 딱히 친하게 지내는 교사는 없어. 귀족 의식이 남아 있어서 교사들이 싫어하는 편이니까. 남은 것은 담임 교사인 나인가.”

학원장을 암살하겠다고 엘리제를 연기하진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학원장은 지금 현재 학원에 없는 상태이고. 오히려 학원장이 없기 때문에 아카데미에 잠입한 것이 아닐까.

“의뢰인은 누구야?”

테드가 물었다. 솔직히 의뢰인이 누군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펠리스 왕국에 오면서 그가한 것이라곤 우크사이어에 머무르며 우크사이어 가주에게 비전 마법서의 마법을 가르쳐주고 코스모스 아카데미의 교사 일을 한 것뿐이다. 학생들을 조금 굴리긴 했지만, 암살당할 정도는 아니다. 아마도.

“말할 것 같아?”

제니가 샐쭉하게 웃었다. 테드를 향해 앞으로 다가가자 팽팽하던 검은 사슬이 느슨해졌다. 잘그락 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제니가 나이프를 들어 올렸다. 노리는 것은 테드가 아니라 자신의 가슴, 심장이다. 무기를 빼앗지 않은 테드를 속으로 비웃는다.

그녀의 몸은 손톱 아래에 묻은 독에 면역이 되어 있기 때문에 손톱으로 인한 자결은 불가능했다. 마나가 봉인된 지금 자결하는 것도 쉽지 않다.

제니가 두 눈을 꼭 감으며 자신의 심장을 향해 나이프를 찔렸다. 미련이 없다는 것은 거짓말이지만, 동시에 후련한 감정이 느껴졌다.

우드득.

그녀의 오른팔이 비명을 내지르며 뒤틀린다. 나이프가 힘없이 바닥에 떨어지며 금속성을 냈다.

눈을 뜬 그녀가 본 것은 어느새 자신의 앞에 당도해 팔목을 잡아 단숨에 부러뜨린 테드가 있었다.

“널 완전히 속박하지 않은 건 일부러야. 적당한 자유는 긴장을 풀게 하니까. 암살자를 상대해봐서 아는데 완전히 구속하는 것보다 적당히 풀어주며 살살 구슬리는 게 더 낫더라고. 뭐, 성공확률은 극악이지만.”

테드가 말하는 와중에 제니는 몇 번이나 그를 향해 손톱을 휘둘렀다. 그러나 이리저리 움직이며 모조리 피해낸다. 도저히 마도사라고 생각할 수 없는 속도와 기술이었다.

허공에 검은 마법진이 그려지고 사방에서 사슬이 덮쳐왔다. 테드는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된 그녀의 머리를 붙잡는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내가 죽여줄게. 다만, 그 머릿속에 있는 정보는 모두 내뱉게 되겠

지만.”

테드의 마력이 손을 통해 그녀의 머릿속으로 들어가고 제니의 몸을 감던 검은 쇠사슬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테드가 블링크를 사용해 그 자리를 벗어났다.

제니의 몸이 커다란 소리와 함께 폭발했다. 피와 육편이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테드를 향해 내장 조각이 나타났으나, 그의 몸을 보호하고 있는 배리어가 내장 조각을 막아낸다. 주르륵 배리어에 붙은 내장 조각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네크로시스.”

테드가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테드는 제니의 머릿속에 마법진을 그려 마법을 발동할 생각이었다. 뇌를 일시적으로 지배해 강제로 정보를 끌어내는 것이다. 한 번 마법을 사용하면 뇌가 타버리기 때문에 일회용 마법이다.

테드는 좀더 편하게 마법진을 그리기 위해 그녀의 머리를 잡는 순간 투시를 발동했다. 그리고 보았다. 마력을 이용해 뇌에 마법진을 그리기 위해 《다크 체인》을 푸는 순간 느닷없이 뇌에 나타난 마법진이 발동하는 것을.

테드로서도 처음 보는 마법진, 그것도 정상적인 마법진이 아니었기에 일단 몸을 피했다.

그리고 제니의 몸이 폭발했다.

암살자를 폭발 시켜 정보 유출을 막는 잔혹함을 가진 암살자 길드. 회귀 전 테드와 마찰이 있었던 네크로시스가 틀림없었다.

“주술과 마법을 이용한 비전 마법. 그때는 마법인지도 몰랐는데.”

테드는 투시를 통해 본 마법진을 떠올렸다. 일반 적인 마법진이 아닌 주술에 쓰이는 기호와 문자가 혼합되어 있는 마법진이었다. 주술에 대한 지식이 없는 테드는 사용하지 못하는 마법이다.

테드는 엉망이 된 공간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벽이나 바닥에 피와 육편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치워야 하는 것도 문제지만, 네크로시스. 그 끈질긴 놈들과 이번에도 관련되었다는 게 더 문제였다. 답답한 것은 왜 자신이 표적이 되었는지 지금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나 이번엔 진짜 선량하게 살고 있는데…!”

억울함을 담아 호소해보지만, 들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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