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결한 영혼-93화 (93/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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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우크사이어.

제니가 속한 4조는 가장 마지막에 인공 던전의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예상대로 엘리제는 전위에 섰기에, 제니 또한 전위에 섰다.

그녀는 레인저로서의 교육은 받은 적이 없었다. 그녀가 조직에서 배운 것은 암살 기술과 연기가 전부였다. 연기의 경우엔 역용술을 십분 활용하기 위해서다. 그렇다고 해도 암살자로서의 민첩함과 탐색 능력은 가지고 있다. 학생들의 수준에 맞춰진 인공 던전의 함정 정도는 무리 없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제니는 힐끗 뒤를 바라봤다. 긴장한 몸으로 자신의 뒤를 따르는 3명의 학생이 보였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뒤에 빨간 모자를 쓴 테드가 있었다. 뒷짐을 쥐고서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엘리제가 학생 치곤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다지만 결국은 학생이다. 적당히 실수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마법도 사용해야 한다. 그래야 의심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제니는 실수하는 연기는 자신 있었지만, 마법이 조금 걱정이었다.

마력이 없는 그녀는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 조직에선 엘리제가 곧잘 사용하는 마법인 파이어볼을 발동할 수 있는 아티펙트를 하나 주었지만, 싸구려다 보니 자주 사용할 수 없다. 기껏해야 2~3번이 전부다.

가장 좋은 것은 마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될 상황이 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좋게 상황은 흘러가지 않을 것이다. 마법을 사용해야 할 때는 반드시 온다. 아니, 오지 않더라도 의심을 피하기 위해선 사용해야 한다.

제니가 한 걸음 한 걸음 조심히 앞을 보며 걸어가는 순간이었다. 천장에서 툭하고 무언가가 떨어졌다. 털에 감싸여 있는 대형견 크기의 거대한 거미였다. 6개 달린 맨들맨들한 눈동자는 구슬 같았고, 8개의 뾰족한 다리는 나이프처럼 날카로워 보였다. 두껍고 커다란 이빨이 마치 개미 더듬이처럼 징그럽게 움직인다.

“……!”

“꺄아아아악!”

후위에서 크리스가 비명을 내질렀고, 제니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아차한다. 인공 던전에 나오는 몬스터는 브라고들이 하는 대화를 엿들어 알고 있었다. 생각에 잠기다 보니 천장을 살피는 것에 소홀이하고 말았다. 명백한 그녀의 실수였다.

전위에 있던 두명이 빠르게 앞으로 나왔다. 브라고는 주먹을 뻗었고, 메듀는 손에든 검을 휘두른다.

브라고의 주먹을 맞아 퍽하는 소리와 함께 거미의 몸이 흔들렸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메듀가 곧바로 검을 휘두른다. 거미가 베여서 사라진다. 환상인 주제에 소리까지 리얼했다.

“……미안. 실수 했어.”

제니가 곧바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했다. 제니가 엘리제에게서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점이 바로 이것, 자신의 실수를 인정할 줄 아는 점이었다. 귀족으로서의 책임감이다.

“괜찮아. 우리도 설마 여기서 바로 자이언트 스파이더가 나올 줄은 몰랐어. 전에는 조금 깊은 곳에서 나왔으니까.”

“…….”

브라고에게 굳어진 표정으로 제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는 왜 마법사가 마법을 쓰지 않고 주먹과 검을 휘두르냐고 묻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제니는 다시 움직이기 직전, 뒤에 있는 테드의 눈치를 살폈다. 감점 요인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 무표정이라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함정을 이용해서 암살할 수 있지 않을까?’

목숨을 빼앗는 치명적인 함정이 없다고 해도 한순간 패닉 상태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의 시선이 없어진 틈에 테드를 해치운다. 그러나 곧 계획을 지운다. 우선 테드와 떨어져 있다. 그녀가 전력으로 움직인다 해도 다가가는 것만으로 생각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둘째로 함정에 걸렸다 해서 학생들이 당황할거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자이언트 스파이더를 냉정하게 덤벼드는 행동을 목격했다. 함정을 아무렇지 않게 대처할 느낌이다.

이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조심스럽게 걸었다.

그리고 얼마안가 제니는 이 던전을 설정한 자의 악의를 느낄 수 있었다. 평범하게 나타나는 몬스터는 단 한 마리도 없었다. 천장에서 뚝 떨어지는 자이언트 스파이더는 거의 없었지만, 모퉁이를 돌자마자 좀비가 나타나거나, 넓은 공간에 땅바닥에 매복하고 있는 스켈레톤이나, 느닷없이 파티의 가운데에 생성되는 몬스터 등. 악취미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함정이다. 학생들의 수준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수준이 높았다. 바닥에 누가봐도 함정 같은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있어 피해가려고 하면, 바로 옆에 진짜 함정이 있어 발동한다. 땅이 꺼지는 것은 물론이고 아무런 전조도 없이 천장에서 촉이 뭉툭한 화살비가 내리는 등, 암살자인 제니가 질릴 정도의 함정이었다.

‘이게 정말 학생들의 수준이야?’

어이가 없는 점은 학생들에게도 있었다. 익숙하다는 듯이 대처하는 그 모습은 아카데미 학생보다는 숙련된 모험가에 가까웠다.

“엘리제. 무슨 일 있어? 평소라면 진즉에 파악했을 함정에 걸리지를 않나…,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보여.”

“이거 우리조가 꼴찌 하는 거 아니야?”

브라고는 걱정스럽다는 듯이 물었고, 메듀는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제니는 메듀의 목을 그어버리고 싶은 욕구를 꾸욱 참았다. 코스모스 아카데미에서 타겟을 제외한 어떠한 인물도 건들지 말라는 것이 조직의 지령이었다.

테드야 모험가 출신이니 개인적인 원한으로 인해 살해당했다고 생각될 것이지만, 학생들이나 다른 교사들까지 죽여 버리면 코스모스 아카데미가 진심으로 나서게 될 확률도 있어서다. 조직은 왕궁과 이어져 있는 코스모스 아카데미를 부담스러워하고 있다.

“……생각이 많아서 일에 집중하지 못했어. 미안.”

제니는 면목 없다는 듯이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며 기운 없이 말했다. 시무룩한 그녀의 모습에 브라고가 당황한 듯 손을 저었다.

“아, 아니. 괜찮아. 어차피 진짜 시험도 아니고. 지금부터 잘하면 되니까.”

브라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던전 안을 향해 전진한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안가 멈춰야 했다. 두 개로 나눠진 갈림길이 나온 것이다.

“갈림길이네. 슬슬 던전의 끝이라고 생각하니까 둘 중 하나는 보스가 있을 곳이라 생각

해.”

브라고가 확신조로 말하자 나머지 이들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제니와 달리 인공 던전이 처음이 아니었다. 연습삼아 몇 번이나 들어왔기에 대략적으로 던전의 길이를 감으로 잡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길은 항상 변했고, 갈림길이 나타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엇다.

“어떻게 할까?”

브라고가 자신들의 조원을 둘러보며 물었다.

테드는 이런 상황에 대해서도 가르쳐주었다. 파티의 경우, 리더가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것과 파티원들의 의견을 받아 결정하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이 후자 쪽을 선택한다. 리더의 독단은 알게 모르게 파티원의 불만을 쌓기 때문이다. 그리고 파티원들의 의견을 들으면 설령 잘못 됐다고 해도 부담감이 적어진다.

“우리 마을은 길을 알 수 없는 갈림길에선 왼쪽으로 가라고 하지. 나는 왼쪽.”

메듀가 콧수염을 만지며 시원스럽게 말했다. 제니는 정당한 논리 따윈 조금도 들어 있지 않은 말에 그가 마법사인지 심히 의심스러웠다.

“저, 전 오른쪽이요. 왼쪽 보다 오른쪽이 조금 더 밝아요.”

크리스가 갈림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니는 갈림길을 지긋이 바라봤다. 동굴을 밝히는 희미한 빛은 비슷했지만, 자세히 보면 그녀의 말대로 오른쪽이 더 밝아보였다.

“엘리제. 너는 어떻게 생각해?”

“…오른쪽이 좋다고 생각해.”

특별한 이유따윈 없었다. 어차피 가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고 틀린 길이면 돌아와서 왼쪽 길로 가면된다.

“그럼 메듀에겐 미안하지만, 오른쪽 길이야.”

메듀는 불만스럽다는 듯이 인상을 썼지만, 반발은 하지 않았다.

얼마지나지 않아 돔 형태의 넓은 공간이 나왔다. 공간의 주위에 굵은 거미줄이 천장과 벽, 바닥 가리지 않고 이리저리 복잡하게 그물처럼 쳐져 있었다. 바닥에서는 꼼짝도 하지 않는 거대한 거미가 보였다. 고의 코끼리만한 크기의 거미를 보며 제니는 몸을 굳혔다.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면 잠을 자는 것 같았다.

외형은 자이언트 스파이더와 판박이지만, 크기가 엄청났다. 아마도 이것이 던전의 보스 몬스터이리라.

“놈의 머리를 노려서 일시에 마법을 퍼붓자.”

브라고가 소곤거리며 말했다. 주변에 있던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니는 왼손으로 오른 팔뚝을 쓰다듬었다. 체인 같은 아티펙트가 팔뚝에 감겨 있는 게 느껴졌다.

먼저 시작한 것은 브라고였다. 그가 허공에 마법진을 그려낸다. 성인 남성의 상체만한 크기의 푸른색의 마법진이 천천히 그려진다. 아이스 볼이라는 파이어 볼의 반대되는 공격마법이다.

메듀의 앞에는 노란빛의 마법진이 그려진다. 스톤 캐논이다. 크리스의 앞에는 붉은색, 파이어볼이다.

그들이 현재 사용할 수 있는 마법 중 가장 위력이 강한 마법이었다.

잠자코 볼 수 만은 없기에 제니가 자이언트 스파이더를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붉은색 마법진이 그려진다. 자신이 마법을 사용한다는 것에 신기함을 느낄 새도 없이 마법진이 순식간에 그려졌다.

브라고를 비롯한 조원들이 놀란 눈으로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엘리제의 마법을 본적 있는 그들이다. 저 정도로 빠르게 마법진을 그려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실력을 숨기고 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제니는 마법이 발동되려는 것을 마나를 이용해 억누르고 있었다. 설마하니 이 정도로 빠르게 마법진이 완성될 줄은 몰랐다. 팔뚝에 감긴 체인 형태의 아티펙트가 얼른 마법을 발동하라는 듯 보채는 것처럼 팔을 조이는 게 느껴졌다.

“모두 준비됐지? 그럼 발동한다!”

주위를 살핀 브라고는 모두의 마법이 완성된 것을 확인하고 외쳤다. 동시에 마법이 자이언트 스파이더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

사람머리만한 불덩어리와 돌덩어리, 냉기덩어리가 먼저 모습을 드러내 날아간다. 그리고 이 마법의 바로 뒤, 앞의 세 개의 마법을 합친 것보다 더 큰 화염덩어리가 날아갔다.

콰아앙! 거대한 폭발과 함께 바닥이 지진이 일어나듯 흔들렸다.

환상으로 만들어낸 거대한 자이언트 스파이더가 사라진다. 주변에 복잡하게 쳐져 있던 거미줄 또한 조금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무, 뭐야 저건. 파이어볼?”

“어, 엄청나네요!”

메듀와 크리스가 경악한 듯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브라고 또한 멍청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엘리제의 마법실력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였단 말인가. 학생 수준이 아니었다. 왜 저 실력을 가지고 코스모스 아카데미에 입학한 것이지? 의문이 치솟았다.

제니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당황하고 있었다. 황급히 왼손으로 오른 팔뚝을 잡는다. 기다렸다는 듯이 팔뚝을 감싸고 있던 아티펙트가 파스슥 소리를 내며 부서진다. 모래같이 부서진 아티펙트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부, 부서졌어? 왜?’

숙련된 연기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 내부는 패닉 상태에 빠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영구적인 아티펙트는 아니었지만 조직의 말대로라면 2~3회 정도는 사용할 수 있다고 했었다. 한 번 사용하고 부서질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엘리제만 남고 여러분들은 돌아갑니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테드가 말했다. 학생들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저, 엘리제가 남는 이유가…?”

브라고가 테드에게 물었다. 테드는 몰라서 묻는 냐는 듯이 그를 쳐다보고서 입을 열었다.

“오늘 엘리제의 태도가 어땠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감점의 요인 대부분이 그녀입니다. 따로 교육이 필요할 정도지요.”

“…….”

브라고는 반박하지 못했다. 인공 던전 내내 평소의 엘리제라면 문제 없을 실수가 계속해서 잇달아 일어났다. 마치 인공 던전은 처음이라는 것처럼.

“아, 입구에 있는 학생들은 모두 교실로 돌려보내십시오. 알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브라고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테드를 보며 멍하니 서있는 엘리제를 한 차례 바라보고서 메듀와 크리스를 이끌고 던전 밖으로 향했다.

정신을 되잡은 제니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테드를 쳐다봤다. 설마 들킨 것인가?

“자신이 뭘 잘못 했는지는 알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당장 박습니다!”

테드의 호통에 제니가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머리를 통해 단단한 지면을 느낄 수 있다.

들통 난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다. 그저 기합을 주기 위해 자신을 남긴 것인가. 어찌 됐든 둘만 남은 절호의 기회다.

테드가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제니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그의 위치를 확인한다.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당장 일어나서 나이프로 테드를 찌를 것이다.

저벅저벅.

앞으로 다섯 발자국. 호흡을 가다듬는다.

저벅저벅.

앞으로 세 발자국. 감각이 날카로워진다. 소매 속에 숨겨놓은 익숙한 나이프가 느껴졌다.

저벅저벅.

앞으로 한 발자국. 몸속의 마나를 움직인다. 그리고 간격 내에 들어오는 순간을 기다린다.

그러나 한 발자국 앞에서 발소리는 멈추었다.

테드는 발을 뻗어 앞으로 나아가는 대신 입을 열었다.

“엘리제는 어떻게 했지?”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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