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결한 영혼-84화 (84/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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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우크사이어.

레미는 인크론이 말했던 사람이 눈앞의 그녀를 가리키는 것을 알았다. 사용인과 손님의 신분을 두 개 모두 가지고 있는 인물.

“저, 전 레미에요. 그런데 저건 마법인가요?”

자신을 소개한 레미는 허공에 떠있는 옷바구니를 손으로 가리켰다. 미동도 하지 않고 부유하고 있는 옷바구니는 떠있다기보다는 공중에 고정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법입니다.”

사이나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 힘의 진짜 정체는 권능이다. 사이나는 그녀에게 권능을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마,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거예요?!”

두 눈과 입을 크게 벌려 놀랐다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마법까지 사용할 수 있으면서 왜 굳이 메이드를 하는 것인가? 의문이 들었다. 자신에게 그런 힘이 있었다면 메이드 따윈 하지 않았을 텐데.

“간단한 마법일 뿐입니다.”

사이나는 옷바구니를 향해 두 손을 뻗었다. 가녀린 팔에 어떤 힘이 있는지 몰라도 보기에

도 가볍게 옷바구니를 든 그녀가 레미를 바라봤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이건 어디에 널면 되는 거죠?”

“아뇨! 이건 제일이에요! 도와주신 건 감사하지만, 제 일은 제가 할게요.”

레미가 사이나에게서 옷바구니를 빼앗아 들었다. 잠시 생각하던 사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메이드의 일을 빼앗는 것은 터무니없는 무례다. 자신이라도 일을 빼앗기면 화가 날 것이었다.

“오늘부터 일하게 되었습니다. 이 저택에 관해서 전혀 모르고 있기에, 저택의 구조를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일하게 됐다는 건… 우크사이어의 메이드가 된 거죠? 인크론 님에게 구역을 배정받지 않았나요?”

“제 주된 일은 주인님을 보살피는 것인지라, 배정받지 않았습니다. 인크론 님은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하더군요.”

“그 인크론 님이 하, 하고 싶은걸 하라 했다고요?”

레미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인크론은 일을 계획적으로 처리한다. 사용인의 구역 배치까지 전부 계획되어 있다고 들었다. 완벽한 계획이 효율이 더 높다는 것이 인크론의 지론이었다. 사용인의 특기를 고려할지언정 하고 싶은 대로 두지는 않는다. 맡은 구역과 일을 준다.

메이드이면서도 손님이기 때문일까.

“그는 제가 나설 곳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금 저택을 둘러보았지만, 크게 눈에 띄는 문제점은 없더군요.”

“그렇군요. 그런데 그… 주인님이라는 건?”

우크사이어 저택에 일하는 사용인들은 주인님이라 부르지 않는다. 대부분이 가주님이라 부른다.

사이나가 붉은색의 눈동자를 반짝였다.

“테드 크루시안. 그 분이 저의 주인님입니다. 이 저택에서 약 1년 동안 머물게 되었지요. 주인님의 일은 제가 모두 할 테니 레미님께서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요컨대 신경끄라는 말이었다. 레미는 묘한 압박감이 느껴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팔이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빨랫감을 널러가는 중이었다.

“아, 죄송하지만 일 때문에 먼저 가볼게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다시 넘어지지 않게 조심히 발을 움직인다.

뒤에서 겹쳐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몇 번 정도 걷던 레미가 신경 쓰이다 못해 뒤를 돌아 자신을 따라오는 사이나를 바라봤다.

“……저기.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요?”

“저택의 구조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방해하지 않을 테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

방해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레미는 그녀에 대해서 신경 끄기로 했다.

빨래를 너는 곳은 우크사이어 저택의 뒤쪽에 조금 떨어진 별채가 있는 곳이다. 3층짜리의 건물인 별채는 사용인들이 사용하는 건물이다. 사용인들의 숙식을 바로 이곳에서 해결한다.

저택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자신의 집이 있는 레미는 식사와 휴식 시간을 제외하면 자주 사용하지 않는 곳이다. 별채의 뒤쪽, 그곳에 넓은 공간이 있는데 햇볕이 좋고, 바람이 많이 불어서 빨래를 너는 곳으로 지정되어 있다.

“여기가 사용인들이 사용하는 별채에요. 사이나 씨는 여기서 생활하나요?”

레미가 살짝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정말로 신경 쓰진 않을 순 없었다.

“아뇨. 지금 이 별채를 알았습니다. 저는 주인님과 같이 생활하기에 따로 방을 배정받지 않았습니다.”

“가, 같이 생활한다니… 한방에서요?”

사이나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밤에도 제가 필요할 수 있으니 메이드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그… 혹시 주인님이 여자에요?”

“남자입니다.”

“나, 남자…….”

레미의 얼굴이 붉어졌다. 사용인들 사이에서, 특히나 메이드들 사이에서 주인님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는 흔했고, 실제로 이루어진 이야기를 몇 번 들어보았다. 밤에도 주인님과 같은 방을 쓰는 경우는 하나 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밤시중.

메이드 선배들에게 몇 번 들어본 적 있는 그것! 물론 그녀의 선배들도 실제로 해본 것은 아니다. 그저 어디서 얻어 들은 것뿐이다.

레미는 살짝 가쁜 숨을 고르면서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그, 그럼 혹시 밤시중을…?”

“성관계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유감스럽게도 그런 일은 아닙니다.”

“…….”

무덤덤하게 말하는 사이나에 레미가 얼굴을 더욱더 붉혔다. 밤시중이라고 해서 꼭 그런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레미는 저녁이 되면 퇴근하지만, 사용인 중에서는 야간에 일하는 이들도 있다. 밤에 어떤 심부름을 시킬지 모르기 때문이다. 넓게 보면 그들이 하는 것도 밤시중이다.

그런데 유감스럽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한 번 물어볼까 싶었던 레미는 일단 자신이 들고 있는 바구니를 아래에 내려놓았다.

“레미! 이제 오는 거야? 도와줄까?”

별채에서 한 명의 남성이 달려왔다. 검은색의 집사복과 짧은 검은색 머리카락에 말끔하게 생긴 청년이었다. 어딘가 소년티가 남아 있는 그는 레미 보다 2살 나이가 많은 인물로 사용인 중에서 2번째로 나이가 적은 인물이다. 비슷한 나이 덕분인지 레미는 그와 허울 없이 지내고 있었다.

“마릭! 네 일은 전부 끝낸 거야?”

“당연하지. 일은 진즉에 다 끝냈어. 지금은 휴식을 취하는 중이야.”

거짓말을 아닐 것이다. 성실하고 요령이 좋은 그는 빠른 일처리로 인크론에게도 종종 칭찬을 듣기도 한다. 그가 맡은 일은 그 힘들다는 무기고 관리다. 언젠가 한 번 지저분한 무기고를 본적 있는 레미는 어떻게 자신보다 빨리 일을 마치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아. 그런데 옆에 분은…?”

“사이나 루키페르입니다. 오늘부터 저택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인크론님이 말하셨던 분이야.”

정중하게 자신을 소개하는 사이나의 옆에서 레미가 덧붙였다. 멍하니 사이나의 얼굴을 바라보던 마릭이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소개했다.

“마, 마릭입니다. 주로 무기고 관리일을 맡고 있어요.”

안절부절 못하는 마릭을 보며 레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시선이 사이나에게 자꾸 향하는 것을 보면 그도 영락없는 남자였다.

“도와주지 않아도 되니까. 돌아가. 휴식중이잖아?”

“아, 아니. 도와줄게. 레미는 나와 달리 저녁에 퇴근해야 하잖아. 일은 빨리 끝낼수록 좋아.”

마릭이 재빨리 옷바구니를 향해 손을 뻗었다. 레미에 비하면 조금 서툴지만, 그도 전반적으로 가사에 소질이 있었다.

“저도 도와드리겠습니다.”

레미가 말릴 새도 없이 사이나가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녀의 움직임에 할 말을 잃었다. 사이나의 움직임은 너무 빨랐다. 손은 너무 빨라서 잔상이 보일 정도였고, 그녀가 빨랫감을 집어 들었다고 느낀 순간 어느새 빨랫감은 건조줄에 걸려 있다. 신기한 것은 빨래를 털어 주름을 펴는 것 같지 않은데도, 걸려 있는 빨래에는 조금의 주름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이다.

레미는 그녀의 일하는 모습에서 어딘가 익숙함을 느꼈다.

“……마치. 인크론님같네.”

옆에 있던 마릭이 작게 중얼거렸다. 레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빠르고 완벽한 일처리는 확실히 집사장 인크론과 닮아 있었다.

⁂ ⁂ ⁂

레미는 끈질기게 도와주겠다며 따라오려는 마릭을 떼어내고서 사이나와 함께 저택으로 돌아왔다. 넓은 1층 복도를 걷는다. 오른쪽 복도의 끝, 아주 구석진 곳에 창고가 하나 있다. 특별한 용무가 없으면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을 넣어두는 곳이다. 일주일에 한번 씩 정기적으로 레미가 청소를 맡고 있다.

“저 사진은…….”

사이나가 복도에 걸려 있는 사진 중 하나를 보며 흥미를 보였다. 레미가 그녀가 바라보는 사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건 몇 년 전에 찍은 우크사이어 가족들의 사진이다. 그렇게 큰 사진은 아니었다.

배경은 화려한 장식이 가득한 방안이다. 창문이 제법 많은 것이 특징이었다. 사진의 중심에는 다부진 체격의 중년인 남성과 의자에 앉아 있는 화려한 드레스의 귀부인. 그 앞에는 현재 가주인 아이리스가 지금보다 조금 어린 모습으로 있으며, 뒤에는 밝은 웃음이 매력적인 남청색머리의 청년이 있었다.

“가주님의 가족사진이네요. 저기 있는 분이 현 가주님의 아버지, 전대 가주님이에요.”

“오래된 사진은 아닌 것 같군요.”

아이리스의 얼굴을 보며 사이나가 말했다. 레미는 조금 슬퍼진 눈으로 사진을 바라봤다.

“전대 가주님과 소가주님이 던전에서 실종되기 전이니까, 2년 전쯤 일거에요. 1년 전에 귀부인님께서 돌아가시고… 에휴. 우리 가주님만 안 됐지 뭐에요.”

레미가 속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현 가주, 아이리스를 싫어하는 사용인은 없었다. 그녀는 상냥했고, 귀족의 신분이면서도 평민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렇군요.”

사이나는 적당히 맞장구 쳐주었다. 물론 그녀는 레미의 감정을 조금도 이해하고 있지 않다. 테드를 제외한 다른 인간이 어떻게 되든 그녀의 알바 아니었다. 관심도 없었다. 그렇지만 이 사진에는 약간 흥미가 있었다.

사진의 오른쪽에서 두 번째 창문. 자칫하면 그림자로 오해할 수 있는 창문의 맨 아래에 하나의 작은 눈동자가 있었다. 짙은 황갈색의 눈동자는 동공이 세로로 찢어져 있다. 파충류의 것과 굉장히 닮아 있었다. 인간의 눈동자는 아니었다.

그림자 속에 있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이 창문을 자세히 보아도 쉽게 알 수 없다. 또 우연히 발견해도 눈동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빛의 반사로 인해 보이는 것이겠지 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악마로서 지나치게 눈이 좋은 사이나는 확신했다. 우크사이어 백작 일가를 보고 있는 저 눈동자는 생물의 것이다.

“굉장히 잘 찍힌 사진이군요.”

“아, 그건 전문 사진 작가를 불러서 찍은 걸로 기억하고 있어요. 제법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네요.”

레미와 사이나는 다시 복도를 걸었다. 사이나는 혹시나 싶어 벽에 걸린 사진과 그림을 지나가면서 유심히 바라봤으나, 특이한 점은 발견할 수 없었다.

레미는 창고의 문을 열었다. 특별한 물건은 집사장이 따로 관리하기 때문에 중요한 물건이 없는 이 창고는 잠겨있지 않았다. 어두컴컴하고 좁은 창고안을 유일한 창문 하나에서 흘러나오는 햇빛이 주변을 밝혔다. 레미는 익숙하게 문근처에 있는 마광등 스위치를 눌렀다. 천장의 마광등에 불이 들어왔다. 숨어 있던 검은 쥐가 레미를 향해 달려들었다.

“꺄아아아아악!”

레미가 그 자리에서 폴짝 뛰며 자지러지게 비명을 내질렀다. 검은 쥐는 레미를 지나쳐 문밖으로 질주했다. 그러나 사이나의 발이 그대로 쥐를 밟는다. 터지지는 않았으나, 사이나의 발에 꾸욱 눌러진 쥐는 벗어나지 못하고 바둥거리고 있다.

사이나가 권능을 발동시켜 쥐의 뇌를 박살낸다. 쥐가 축 늘어졌다.

바닥이 더러워지기 때문에 쥐를 밟아 터뜨리지 않았다.

“사, 사이나씨는 괜찮으세요?”

놀란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레미가 사이나의 안부를 물었다. 사이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을 쳐다봤다. 루크에이스의 저택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생물이었다.

사이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비록 1년 정도 밖에 살지 않을 저택이지만, 쥐가 돌아다닌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이나가 몸 안에서 마력을 끌어 올렸다. 작은 마력의 파장을 만들어 주변에 널리 퍼뜨린다.

“……이 저택에는 쥐가 좀 많군요.”

“저, 저도 쥐를 보는 건 처음이에요. 검은 쥐라니… 기분 나쁘네요. 이거 죽은 거에요?”

“죽었습니다. 제가 치우도록 하죠.”

사이나가 마법 주머니에서 집게와 봉투를 하나 꺼냈다. 집게로 검은 쥐의 사체를 봉투에 넣어 밀봉한다. 땅에 묻어줄 생각 따윈 당연히 없다. 저택의 밖에서 마법으로 완전히 소각 시킬 것이다.

창고의 밖으로 나가는 사이나의 등을 바라보며 레미가 작게 중얼거렸다.

“……꺼림칙하게… 왜 하필 검은 쥐람.”

펠리스 왕국에선 검은색 동물은 불길함의 상징으로 유명하다. 쥐, 고양이, 새 할 것 없

이 색이 검다면 우선 기피하고 봤다. 검은 동물을 애완동물로 삼는 인간은 아주 소수에 불과했다.

레미는 검은 쥐의 처리를 사이나에게 맡기고, 방금 있었던 일을 잊어버리려는 듯이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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