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결한 영혼-80화 (80/277)

80====================

12. 디스본.

디스크리트가 해체됐다는 소문은 금세 디스본에 퍼졌다. 디스크리트 도적들의 죽음은 디스본의 주민들에게 있어 한 동안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 화젯거리였다. 불가사의 한 것은 도적들의 사인이 동사라는 점이다.

얼어 죽었다. 사막인 디스본에서 얼어 죽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차라리 열병에 걸려 죽었다는 말이 더 신비성이 있었다.

누군가는 하늘에서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지더니 그곳으로부터 눈이 내렸다고 주장했다. 3명의 모험가가 암석지대를 지나가면서 우연히 그 현상을 목격한 것이다. 도적들이 동사했기 때문일까. 그 말을 믿는 디스본의 주민들은 의외로 많았다.

마도사는 기상을 조종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모험가 길드에 속한 마법사는 공식적으로 디스크리트에서 비는 내릴지언정 눈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하며 소문을 부정했다. 어떻게 눈을 만들어내도 디스크리트의 뜨거운 온도와 태양이 그대로 허공중에서 녹여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널리 이름이 알려진 얼음계열의 마도사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무엇때문에 그들이 디스본에 와서 도적을 처리하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가 없었다.

션은 테드가 머무는 숙박소, ‘블루 오아시스 호텔’에 찾아왔다. 테드와 테이블을 두고 마주앉은 션은 사이나가 내온 음료수는 쳐다보지도 않고 외치듯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냐?!”

여유롭게 신문을 보던 테드가 테이블 위에 있던 자신의 음료를 시원하게 한 모금 들이켰다. 복분자 주스다. 자주색 액체에 투명한 얼음이 동동 뛰어져 있다. 시원하면서도 새콤달콤해서 무의식적으로 찾게 된다.

“뭐가 어떻게 돼?”

“디스크리트 말이다. 디스크리트! 괜히 모르는 척 하지마라!”

션의 얼굴은 진지했다. 테드가 답해주지 않으면 돌아갈 생각자체를 하지 않을 것이다.

정의가 모토인 션이다. 어디 가서 간단히 테드에 대해 소문을 내지는 않을 것이다. 의외로 입이 무거운 녀석이다. 그렇지만 어딘가 미덥지 못한 구석도 있다. 그 놈의 잘난 신념 때문에 이용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아주 약간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마법이야. 마법을 이용해서 그들을 모두 처리했어. 말했잖아. 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다고.”

“그건 강하다고 설명 될 문제가 아니다! 1,000명! 1,000명이 넘는 도적들이 한 순간

에 죽었다! 너는… 그들을 죽이고도 아무렇지 않은 거냐?!”

테드가 읽고 있던 신문을 접으며 한숨을 쉬었다.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다.

조금 더 생각하고 진지하게 임했더라면 1,000명이나 되는 도적들을 죽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1,000명이 한 순간에 죽었기에 디스크리트는 재기 불능의 타격을 입었다. 수뇌부가 죽었다고 해서 새로운 수뇌부가 나타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1,000명의 도적의 죽음으로 디스본은 평화를 얻었다.

“그들은 도적이야. 그건 알고 있지?”

차분한 테드의 말에 션 또한 흥분을 가라앉혔다.

“……알고 있다. 그들이 범죄자라는 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학살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션으로선 1,000명이나 되는 도적을 한 순간에 학살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이유라면 그들이 도적이라는 것으로도 충분해.”

“…….”

테드가 단호히 말하자 션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을 보며 테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은 민간인이 아니야. 남의 것을 빼앗는 악당들이지. 디스본에서는 제대로 활동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감옥에도 돈이 든다. 1,000명의 도적을 살려서 모험가 길드에게 넘긴다고 해도 살아남는 것은 극소수일 뿐이다. 모험가 길드는 재정을 아끼기 위해, 본보기를 보여 다시는 도적 연합을 만들어내지 않게 그들 대부분을 처형할 것이다.

“그들이 마음을 고쳐먹어 개과천선 하는 경우도 있겠지. 그러나 몇 명이나 될까. 300명? 100명?”

“그들 전부가 잘못을 뉘우칠 수도 있다.”

테드가 하하하 웃었다. 1,000명 전부가 잘못을 뉘우친다고? 그럴 리가.

“반대로 그들 전부가 더 큰 범죄를 저지를 수 있지.”

의미 없는 말이었다. 미래일은 아무도 모른다. 션의 말처럼 될 수 있고, 테드의 말처럼 될수도 있다.

“나는 그들을 죽였지만, 후회는 하지 않아.”

후회하지 않겠다고 맹세했고, 이미 지난 일을 후회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것은 없었다.

“너도 알잖아. 디스크리트가 해체되었다고 해서 도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모험가 길드는 도적의 수배를 풀지 않았고, 디스크리트가 해체된 지금 모험가 클랜이 본격적으로 도적 소탕을 시작했어.”

“…….”

전부 옳은 말이라서 션이 뭐라고 반박할 수 없었다.

테드의 말대로 모험가 길드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2개월간 디스크리트 때문에 골치를 앓은 길드가 그 분노를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한때 거대 클랜의 이름 높은 모험가였던 디스크리트의 수뇌부들이 모두 죽은 지금, 모험가 클랜도 더 이상 꺼릴게 없다.

“디스크리트가 사라졌다고 누구 하나 슬퍼하지 않아. 그렇게 도적들을 옹호한 주민들이지만, 결국은 자신과 상관없는 타인의 이야기야. 도적들을 위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아. 지금은 오히려 이렇게 생각하겠지. ‘사라져서 다행이다.’라고.”

디스크리트가 사라지며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물건들이 다시 상단의 품으로 돌아갔다. 동시에 올라가던 디스본의 물가가 내려갔다. 무역이 활발해지고 디스본으로 오는 관광객과 상단이 늘어났다. 모험가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도구를 구입하고, 주민들은 모험가, 관광객 등을 상대로 돈을 번다. 디스크리트가 사라지며 디스본은 정체되었던 발전이 다시금 시작되었다.

“그들은 범죄자야. 나는 모험가로서, 개인적인 이유와 부차적인 피해를 막기 위해 그들

을 죽였어. 내가 잘못 했어?”

“……아니. 테드. 넌 옳다. 하지만 그 방식은 잘못됐다.”

테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테드는 그런 방식밖에 모른다. 션이 원하는 것처럼 할 수 있는 요령이 없었다.

점심식사를 대접하려고 했으나, 션은 그대로 돌아갔다. 무언가 결심한 표정을 보니 말릴 수도 없었다. 테드는 다시 신문을 들었다. 루크에이스처럼 디스본의 신문도 가격이 장난 아니었다.

신문의 첫 면에는 디스크리트에 대한 소식이 가득했다. 추측한 글은 많았지만, 학살의 범인인 테드의 이름은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았다.

그 다음 장에는 이번 5월 달에 열리는 주권결정전에 대해서 적혀 있었다. 주권결정전. 테드가 알고 있는 미래라면 이번에도 어김없이 천족이 승리할 것이다. 중요한건 다음에 열리는 주권결정전… 10년 후의 일이다. 그 때는 이변이 일어나 마족이 승리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대륙 전쟁이 일어난다.

테드는 스윽 신문을 훑어보고 다음 장으로 넘겼다. 이미 전쟁을 막기 위한 준비… 그 시발점을 없앨 계획이 있다. 주권결정전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다음 장에선 펠리스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한 달 전쯤에 펠리스 왕국에 새로운 왕이 즉위했다. 병든 왕을 대신해 왕자가 정식으로 즉위한 것이다.

라이거 라이오넬 펠리스.

펠리스 왕국의 새로 즉위한 왕의 이름이다.

테드는 그 이름을 입속으로 곱씹었다.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연관되지 않을 이름이다.

잠시 동안 신문을 보던 테드가 이윽고 다음 장으로 신문을 넘겼다.

⁂ ⁂ ⁂

그곳은 휘황찬란한 복도였다. 복도의 바닥에는 붉은색의 카펫이 복도처럼 길게 깔려 있으며, 복도의 좌우에는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미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5M가 넘는 천장에는 밝은 빛을 내는 마광등이 고급스러운 황금 장식품과 함께 조각되어 있다. 샹들리에와 굉장히 닮아 있었다.

넓은 복도 치고는 굉장히 조용했다. 복도의 벽이나 창문 등은 매일 관리하는 것인지 아주 깨끗했지만, 사람이나 동물 같은 움직이는 생물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조용한 복도를 혼자서 내달리는 거대한 체구의 남자가 있었다. 허겁지겁 레드 카펫을 밟으며 뛰고 있었다. 뒤룩뒤룩 찐 몸이 달릴 때마다 좌우로 흔들렸다. 당장 옆으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헉… 허헉… 하억!”

남자의 입에선 거친 호흡이 시끄러울 정도로 새어나와 복도의 침묵을 깨뜨렸다. 머리와

등 할 것 없이 땀이 육수처럼 줄줄 흘러내려 고급스러운 레드 카펫을 적신다. 그럼에도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사내는 하얀색의 타이트한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그 어깨에는 적색의 망토가 달려 있었다. 최근 귀족계에서 유행하는 패션이 바로 망토를 어깨에 걸치는 것이었다. 남자가 달릴 때마다 망토가 거추장스럽게 펄럭였다. 하지만 그는 망토를 벗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뛰었다.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긴박함이 있었다.

“비, 빌어먹을……! 훅…! 헉…!”

터올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도 달렸다. 흐르는 땀이 두툼한 살에 감싸인 눈을 쿡쿡 찔렸다. 팔뚝으로 대충 눈을 찌르는 땀을 처리하면서 등 뒤를 살폈다. 다행히도 따라오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이대로 멈춰있으면 잡히고 만다. 얼른 저택에서 벗어나 은신처로 도망가야 한다.

“젠장맞을…! 훅…. 왜 갑자기…!!”

터올은 이를 악물었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복도의 끝이 눈앞에 보였다. 출구는 빛이 아닌 어둠에 감싸여 있다. 낮이 아니라 밤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 상황에서 나가기엔 무언가 꺼림칙했다. 그러나 살려면 저곳을 통과할 수밖에 없다.

터올이 드디어 복도의 끝에 닿는 순간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세 명의 남녀가 나타났다.

터올은 헉하고 숨을 삼키며 그 자리에 멈췄다. 어떻게 자신 보다 먼저 와있을 수 있는 거지? 분명히 뒤에 있었는데…!

“너무 급하게 가시는 군요.”

오른쪽에 있는 하얀 기사의 예복을 걸친 남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곱슬거리는 갈색머리 속에 있는 갈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난다. 그의 손에 있는 검이 천장에 달린 마광등의 빛을 받아 주인의 눈처럼 번뜩였다. 터올의 다리가 떨렸다.

“시, 시안 카르트…! 아무리 집행관이라 해도 내 호위들은 모두 일류의…….”

“우리 집행관을 너무 얕보고 있군. 그 정도의 실력이라면 굳이 우리가 나설 필요도 없었

다. 지금쯤이면 함께 온 집행자들이 모두 처리했을 테지.”

가장 왼쪽에 있던 하얀색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여인, 레이나 델톤이 터올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터올의 눈썹이 부르르 떨렸다. 왕국 최고의 무력이라 불리는 집행관….

그 2명이 자신의 앞에 있다. 아까처럼 호위를 미끼로 사용해 도망칠 수도 없는 상황이다.

눈치를 살피던 터올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3명의 가운데 있는 인물, 하얀색의 망토로 몸을 가리고 있는 금발 머리의 남성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즈어어어어언하아아아아!!! 신이 잘못 했사옵니다!!”

라이거의 각각 색깔이 다른 적청의 오드아이가 싸늘한 빛을 냈다. 같잖다는 듯이, 조소를 담은 목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터올 공작. 처음에 그렇게 말했어야지. 날 보자마자 도망가면 쓰나?”

라이거가 말을 받아 주었다. 말이 통한다고 생각한 터올은 무릎으로 최대한 비굴하게 기어서 라이거의 다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져 목숨을 구걸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터올의 바로 앞에 시안의 검신이 턱하니 대리석 바닥에 박혀 진로를 막는다.

“전하를 암살 할 작정이었습니까?”

“무, 무엄하다! 시안 카르트! 이건 전하와 나의 일이다! 네놈은 빠져 있어라!”

라이거는 미간을 찌푸리며 앞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그에 시안이 박힌 검을 뽑고 옆으로 물러났다.

“터올 공작. 적당히 해먹었으면 나도 이렇게 하지 않았네. 하지만… 보물을 빼돌리는 건 좀 심하지 않았나?”

터올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바닥이 그의 땀으로 흥건히 젖어 들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지? 설마 놈들이 불었나?

“저, 전하! 부디 자비를! 모두 왕국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부디 전하의 하해와 같은 자비를 제게 조금만 베풀어 주시옵소서!!”

“……왕국을 위한 일이었다고? 우리 왕국은 아닐 테고… 설마 다른 왕국도 포함되어 있는 건가?”

“아, 아니옵니다! 펠리스 왕국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본국을 위해서? 본국의 보물을 다른 나라에 넘긴 것이? 나를 뭘로 보는 것이냐, 터올!!”

라이거가 분노해 외쳤다. 커다란 그의 목소리가 복도를 울리며 메아리친다.

터올은 부들부들 떨리는 양손으로 라이거의 바짓가랑이를 향해 내뻗었다.

“전하…! 전하! 제발 자비를……!!”

라이거는 발을 들어 올려 그의 도톰한 손을 있는 힘껏 밟았다. 끄아아악, 돼지 같은 비명을 내지르는 터올을 내려다보았다. 오른쪽 적안에 분노가 이글거렸다.

“미안하네만, 내 자비는 모두 백성들이 예약해나서 남은 자비가 없다네.”

옆을 향해 오른손을 내뻗는다. 눈치 좋은 시안이 라이거의 손에 검의 손잡이를 올렸다.

“전하…! 전하아!! 즈어어언하아아아!!!”

터올의 절규와 함께 검이 휘둘러진다.

떼구르르르. 터올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무감정한 눈으로 그의 머리를 바라보던 라이거가 몸을 돌렸다.

아직 해야 할 일은 많았다. 숙청은 끝나지 않았다.

“다음으로 간다.”

펠리스의 패왕이 조용히 포효하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