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결한 영혼-78화 (78/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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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디스본.

테드는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방금 전의 마법 공격의 허용은 방심의 산물이었다.

흔하지 않은 마법진이라, 보고 어떤 마법인지 파악하는데 약간 시간이 걸렸다. 마법진을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방어마법을 펼쳤지만 데미지를 피할 수는 없었다. 몸에 걸린 신체강화 마법이 없었다면 분명 치명적인 데미지를 입었을 것이다. 상상하기 싫지만 죽었을지도 모른다.

‘암브로시아를 쓸까?’

테드는 기초 치료마법인 힐을 사용해 몸을 회복하며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암석이 여기저기 깔려 있는 황금색 사막에 구멍이 있다. 디스크리트의 아지트다.

아지트의 사이로 도적들이 기웃거리며 마법으로 하늘을 날고 있는 테드를 보며 뭐라 뭐라 소리치면서 경악하고 있다.

사람들이 빠르게 모여드는 것을 느꼈다. 암브로시아를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그걸 쓰면 몸을 움직이는 것도 힘들어 지고 본의 아니게 사이나의 수발을 받아야 한다. 물론 사이나가 싫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좋지만, 디스본에 와서 며칠 동안 침대에 누워있는 것은 사양하고 싶다.

“리커버리(Recovery).”

우선은 상급의 회복마법을 사용한다. 웬만한 공격보다 더 많은 마력을 소모하지만, 효과는 확실하다. 몸의 상처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렇다고 흔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라 몸에 달라붙은 피나 찢어진 옷은 조금도 복구되지 않는다.

아공간을 열어서 천랑에게 받은 마력포션을 하나 꺼내 한 모금 마신다. 몸 안에 빠르게 차오르는 마력을 느끼며 포션을 다시 아공간에 넣었다.

테드의 아래에는 수 십 명이 넘는 도적들이 순식간에 모여 있었다. 아지트를 나온 도적들은 테드를 신기하다는 듯이 보고 있었다. 제각각 무기를 들고 있고, 방어구도 갖추고 있다. 진형을 짜며 전투를 준비하고 있다.

디스크리트의 간부들, 유난히 번쩍거리는 방어구와 무기를 갖춘 자들이 있었다. 여타의 도적들과 달리 귀티가 흐르는 게 한 눈에 간부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간부들 사이에 디스크리트의 마스터인 베누크가 있었다. 제대로 방어구를 갖추고 사막위로 올라와 있다. 검은 금속 같은 왼팔에는 짧은 단검을 쥐고 있으며, 오른팔에는 장검을 쥐고 있다. 스킬로 만들어낸 검이 아니라, 장인이 공을 들여 완성한 명검들이다.

도적들은 훈련이 되어 있었는지 빠르게 모여든다. 간부들의 지시 하에 모인 도적들은 제각각 무기를 치켜들어 하늘에 떠있는 테드를 향해 겨누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눈치다. 그들 중에 활을 든 도적들만이 유일하게 시위를 당기며 테드를 맹렬하게 노려보고 있다. 명령이 떨어지면 당장이라도 화살을 쏠 기세다.

“개미떼처럼 모여드는군.”

디스크리트의 암살은 이미 글러먹었다. 조용히 처리하고, 조용히 디스본의 관광생활을 누리려고 했건만……. 일은 계획대로 술술 풀리지 않았다.

테드는 모여드는 도적들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어떻게 처리할까. 이렇게 된 이상 전부 쓸어버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혹은 전투가 어려워지겠지만 간부들을 노리고 해치우는 방법이 있다. 가장 피가 적게 흐르는 것은 후자 쪽이다.

달리 일단 여기서 벗어난다는 선택지도 있지만, 될 수 있으면 여기서 빠르게 처리하고 싶다. 도적들의 숫자가 많다보니 시간을 끌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 뭐라고 해도 단체와 개인이다. 도시 안에서 물량을 이용한 전술을 들고 나오면 귀찮아지는 것은 테드다.

“하나 제안하지.”

테드가 입을 열었다. 작은 목소리이나 마법이 발동되어 사막곳곳에 울러 퍼졌다. 그 목소리는 아래에 있는 도적들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그들의 시선이 허공에 떠있는 테드에게

집중 된다.

“디스크리트의 마스터를 죽이고 도적 연합을 해체해라. 다시 모이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면 나는 이대로 순순히 물러나겠다.”

“…….”

기가차서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오만한 말이었다.

베누크는 주위를 힐끗 살폈다. 간부들은 물론이고 말단 도적들까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다.

그도 그럴 것이 테드가 하고 있는 것은 협박이다. 1명이 수백 명, 그것도 계속해서 인원이 보충되는 디스크리트에게 협박을 하고 있었다.

그와 직접 싸워본 베누크는 테드의 강함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멀쩡한 상태에서 다시 싸운다고 해도 이길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혼자서 덤볐을 경우다. 지금처럼 많은 일원들이 함께 있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저 미친놈이 침입자입니까?”

베누크의 옆에 있던 간부 한 명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베누크에게 되물었다. 베누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방심하지마라. 저렇게 보여도 내 왼팔을 가져간 놈이다.”

왼팔은 스스로 잘랐다. 결코 테드가 자른 것이 아니었지만, 굳이 그것까지 덧붙이지 않았다. 간부는 베누크의 왼팔을 힐끗 본다. 검은색의 금속… 베누크의 스킬을 알고 있는 간부는 얼굴을 굳힌 뒤 하늘에 떠있는 소년을 바라봤다.

너덜너덜한 회색 코트와 피부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붉은 피를 보면 제법 큰 상처를 입은 듯 하다. 베누크를 상대하고 상처 하나 없었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것이지만.

“내 제안을 거절하는 건가?”

테드의 붉은 눈이 정확히 베누크에게 향했다. 베누크는 피식 웃었다. 제안은 무슨. 완전히 협박이구만.

“디스크리트가 너 하나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하나?”

테드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 백 명… 지금에 와서는 일천 명에 달하는 도적들이 모여 있다. 아마도 아지트내에 있던 도적들 모두가 밖으로 나온 것이리라. 도적들은 모두 테드를 경계하고 있으나, 얼굴 표정에는 조금의 두려움도 보이지 않는다.

숫자의 힘이었다.

상대는 뛰어난 마법사다.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지만 한 명이다. 그에 반해 자신들은 천 명.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테드가 양손을 펼쳤다. 그에 반응하듯 테드의 발 아래에서 거대한 푸른색의 마법진이 그려진다. 어떻게 보면 하얀색으로도 보이는 마법진이다. 아래에 있는 아지트 크기의 대마법진이 갑작스레 나타나자 주변에서 동요가 일어났다.

어떤 마법일지는 알 수 없다. 마법사 출신의 간부도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이래도?”

담담한 테드의 말에 베누크는 속이 타는 것 같았다. 저게 환상이었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마법진에서 거대한 마력이 느껴진다. 저게 완성되면 특대마법이 아지트로 떨어질 것이다. 엄청난 피해가 일어날 것임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상대가 일천 명? 그게 어쨌다고. 대마도사 한 명의 대마법은 그 배에 달하는 적들을 단 번에 쓸어버릴 수 있다.

괜히 전쟁터에서 마법사를 최우선으로 죽이라는 말이 진리처럼 이어진 것이 아니다.

“마, 마스터! 이건 좀 위험한 거 아닙니까?”

“당연히 위험하지. 하지만 시간을 벌었다. 뭉쳐있지 말고 흩어져서 공격해라.”

아지트에 있는 도적들을 사막위로 모여들었다. 얼핏 봐도 천명이 넘는 그들은 흩어지기 시작했다. 뭉쳐야 산다고 하지만, 마법사가 상대일 경우엔 반대다. 뭉치면 마법 한 방에 다 죽는다.

“어리석군.”

주변에서 무수히 날아오는 화살들을 보며 말했다. 그의 발아래에 있는 거대한 푸른색 마법진이 화살에 분노한 듯 강렬한 푸른빛을 낸다.

마법진 근처에 도달한 화살들이 허공중에 멈춘다. 화살의 촉과 깃, 몸통이 그대로 얼어붙어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얼어버린 화살이 모래 바닥에 후두둑 떨어진다.

“나는 분명 기회를 주었다.”

마법진이 회전하며 밝은 빛을 내뿜는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광경에 사막위에 있던 도적들은 숨을 삼켰다. 기분 탓일까.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느낌이다.

“아니…. 기온이 떨어지고 있다.”

베누크가 자신의 왼팔을 보며 중얼거렸다. 검은색의 강철 팔의 표면에 새하얀 서리가 묻어있었다. 평균 40도가 넘어가는 디스본의 사막에서 서리가 생겼다. 디스본의 주민들이 들었다면 웃기지도 않는 설렁한 농담이라고 치부했을 것이다.

베누크는 이 온도변화의 주범이라 생각되는 마법진을 올려다보았다. 밝은 빛을 내며 회전하고 있는 마법진에서 새하얀 무언가가 떨어진다.

“……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디스본은 사막지대다. 눈은커녕 비도 한 달에 올까말까 한 곳이 디스본이다.

“이, 이게 눈이라고?!”

“진짜 차갑잖아!”

도적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디스본이 고향인 녀석들이다. 한 번 쯤은 들어보았을 테지만, 눈을 직접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그 반응은 충분히 이해간다. 하지만 지금은 전투 중이다.

베누크는 간부들을 시켜 주의를 주라고 지시한 뒤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마법진이 고고하게 빛나고 있다.

이 사막에 눈을 내리는 것은 확실히 상식을 벗어났다. 그러나 왜 겨우 눈을 내리게 하는 것일까?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문득, 지금이 전투중이란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시스템의 제재가 없다는 것도.

베누크는 한 번 시스템의 제재를 받아본 적 있다. 청년 시절 클랜끼리 시비가 붙어 단체 전투를 할 때 였다. 그때 100명이 넘는 클랜원이 있었고, 시스템의 제재가 들어왔었다. 전투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 정확하게 전투가 일어나기 직전인 분위기였다. 시스템은 그 분위기를 보고 제재를 가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100명 그 이상인 1,000명이 모여 있음에도 시스템의 제재가 없다. 상대가 한 명이라서?

“시스템은… 전쟁으로 보지 않는 거냐.”

충분히 가능성 있었다. 전쟁은 단체와 단체의 전투다. 단체와 개인의 전투를 전쟁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다.

“……일단.”

마법진 위에 있는 테드를 바라보면서 베누크가 간부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하늘위에 있는 그를 향해 공격이 가능한 자는 없다. 저 거대한 마법진이 있는 한 화살은 먹히지 않을 것이다. 적은 수의 마법사들이 있지만, 그들도 뾰족한 수는 없다.

“최대한 몸을 사린다. 그리고 놈이 마력이 떨어져 아래로 내려오는 순간…… 끝을 낸다.”

베누크의 지시에 간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견은 없었다.

마법진에서 눈은 계속해서 내렸다. 시간이 지나자 기온이 내려간 것이 확실하게 느껴져서 추위로 인해 몸이 움츠려들고 덜덜 떨렸다. 이변이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난생처음 눈을 보고 신난 도적 한 명이 모래위에 약간 쌓인 눈을 만진 순간이었다.

그의 몸이 눈을 만진 팔부터 얼어붙기 시작하더니 이내 몸 전체가 얼어붙었다. 옆에 있던 동료가 깜짝 놀라 그의 어깨 만졌다. 그리고 동료 또한 어깨를 만진 손으로부터 얼어붙기 시작했다. 무언가 조치를 취하기도 전에 얼어붙은 그들은 얼음 조각상이 되어 있었다.

“눈이다! 눈을 맞지 마라! 암석이든, 방패든 눈으로부터 몸을 숨겨!”

베누크가 눈치 챘을 때는 이미 피해가 발생하고 난 뒤였다. 스킬을 이용해 거대한 방패를 만들어 눈을 피한 베누크가 방패 너머로 주위를 살폈다. 하얗게 쌓인 사막이 보였다. 입을 통해 내뱉은 숨이 곧바로 얼어붙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살아남은 자! 있나?!”

간부들이 있던 장소를 쳐다봤다. 간부들도 눈을 완벽히 피하지는 못했다. 간부중에서 살아남은 것은 2~3명이 전부였다. 그들은 모두 두려운 눈으로 계속해서 눈을 보내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고, 마법진은 사라지지 않는다.

“빌어먹을! 얼마나 살아남았지?!”

베누크가 비통하게 외쳤다.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

10분.

마법진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한 단 10분 만에 그곳은 더 이상 사막이라 부를 수 없는 환경이 되어버렸다.

사방에 눈이 깔려 있었고, 곳곳에 얼음 조각상이 된 도적들이 있다. 공포에 찬 얼굴을 한 생생하기 그지없는 얼음 조각상이다.

베누크는 암석 위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하늘에 있던 푸른색 마법진은 10분간 폭설을 쏟아내고서 사라졌지만, 모래에 쌓인 눈에 닿으면 얼어붙을 가능성이 있다. 마법진이 사라지자 온도가 올라가는 것이 피부를 통해 느껴졌다. 조금만 기다리면 저 뜨거운 태양이 저주스러운 눈을 녹여줄 것이다.

암석위에서 주변을 둘러본 베누크는 할 말을 일었다.

천 명이다. 천 명이 넘던 도적들이 전부 얼어붙어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마법 하나에 천 명이 그대로 죽었다. 아니, 전부는 아닐 것이다. 아지트의 안으로 대피하는 몇 십명의 도적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그들은 아지트에서 눈을 피했으니 분명 살아남았을 것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스스로 되새기며 이번엔 적을 찾았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이 참혹한 현상을 만든 테드를 찾았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가 으득 갈렸다.

‘이런 현상을 만들어 놓고서 그냥 사라졌다고? 반드시 찾아내서 죽인다.’

베누크는 몇 십번이나 반복적으로 다짐하고서 얼른 눈이 녹기를 기다렸다. 눈이 녹으면 곧장 아지트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일을 하기 위해 나간 디스크리트 소속의 도적들을 전원 모아서 테드를 공격한다. 곱게 죽이지 않을 것이다.

베누크는 제법 떨어져 있는 구멍 뚫린 아지트를 쳐다봤다. 입구는 따로 있지만, 제법 멀다. 눈이 녹으면 저 구멍을 통해 빠르게 이동할 생각이었다.

구멍 속에서 하나의 인형이 솟구쳤다. 사뿐히 눈 위에 올라선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베누크를 확인하고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메이드복 위에 붉은색 코트를 입은 은발의 여인이었다. 눈이 휘둥그레 떠질 정도로 미녀였으나, 그 붉은 눈은 이 참상을 만든 마법사 놈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닮아 있었다.

그녀의 한 손에는 눈처럼 새하얀 검이 들려 있었다.

베누크는 자신의 검을 들었다. 디스크리트에는 여자 도적도 있었지만, 저 정도의 미녀는 한 명도 없었다. 틀림없이 적이다.

============================ 작품 후기 ============================

손이 시려워 꽁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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