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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영혼-77화 (77/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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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디스본.

베누크는 소파에 앉아 있는 몸을 일으켰다. 눈앞의 어린 마법사는 외모와 달리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 변한 붉은색의 두 눈만 봐도 알 수 있다. 어린아이의 눈이 아니다. 강자의 눈이다.

베누크는 긴장하는 자신의 몸을 인식하며 스킬을 발동한다. 베누크의 양손에 검은색 어둠이 모여들어 형상을 취한다. 그 손에 쥐여진 것은 검은색의 시커먼 단검이다. 광택조차 내지 않는 시커먼 단검을 들어 자세를 취한다. 무릎과 허리를 살짝 굽히고, 그 두 눈은 앞에 있는 침입자에게 향한다.

《다크 웨폰》. 베누크가 이 세계에 환생하면서 얻은 스킬이다. 효과는 일시적으로 무기를 만들어내는 것. 빛 속성에 취약하고, 만들어낼 수 있는 무기도 한계가 있었다. 예를 들면 총 같은 지구의 무기는 만들어낼 수 없다. 만들어내는 것은 검이나 창 같은 원시적인 무기가 전부다.

베누크는 혹시 모를 마법에 대비하며 적을 탐색한다. 모험가일 때의 버릇이다. 처음 보거나 정보가 적은 몬스터를 발견하면 안전을 위해 우선 탐색부터 했었다. 그 버릇이 여기서 튀어나왔다.

테드의 입장에선 고마운 버릇이었다. 마법으로 육체를 강화할 시간을 어느 정도 벌었으니까. 베누크가 뒤늦게 테드가 마법으로 육체를 강화하는 것을 보며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한순간에 테드의 앞에 나타나 오른손의 단검을 위에서, 왼손의 단검은 옆에서 크게 휘두른다. 단검은 검은색의 궤적을 남기며 테드를 베어냈다.

테드의 몸이 흐릿해지더니 사라졌다.

“환상!?”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베누크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테드의 모습은 물론이고 기척까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법사 같지 않은 재빠름에 혀를 차며 감각에 집중한다. 주위에 마나의 흐름이 이상한 곳을 찾는다.

등 뒤에서 마나의 이상함이 느껴졌다. 몸을 팽이처럼 회전시키듯 돌면서 그대로 양손의 단검에 원심력을 담아 휘두른다. 베누크의 등을 노리고 날아오던 이글거리는 불덩이가 단검에 베여 폭발한다. 쾅! 거대한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는 곧 사라지고 입고 있던 하얀색 옷이 타버려 재가 되어 흩날려 상체를 노출한 베누크가 있었다. 구릿빛의 피부에는 약간의 그을림이 있을 뿐이다.

파이어볼이 폭발하기 직전 짧은 순간, 베누크는 반사적으로 마나를 움직여 몸을 강화해 보호했다. 전투에 숙련되어 있는 자들만이 보일 수 있는 반응속도였다.

베누크는 파이어볼이 날아온 쪽에 있는 테드를 보았다. 어린 마법사. 겉모습은 어린아이지만, 그 속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젊음을 유지하는 비전 마법을 사용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자신처럼 환생한 인물로 전생이 어마어마한 인물이었거나.

“……들어본 적 있다. 루크에이스의 천재 마법사. 확실히 이름이… 테드 크루시안이었

나.”

신문에서 본적 있었다. 제법 흥미로운 내용이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어린 소년의 모습. 검은 머리카락과 회색의 코트. 스태프나 완드 없이 발동하는 마법. 알고 있는 정보와 확실하게 일치했다.

“모험가 길드의 사주로 찾아온 거냐?”

“아니, 이 일에 모험가 길드는 관계없다. 내 개인적인 일이다.”

“개인적인 일이라…… 침입자는 너 혼자 뿐이라는 건가?”

“그래. 나 혼자다.”

대답하며 마법을 준비한다. 검은색의 마법진이 방안 곳곳에 그려진다. 천장과 벽, 바닥, 허공 할 것 없이 마법진이 나타난다.

베누크가 재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나타난 마법진은 총 12개. 동시에 마법진을 그리는 솜씨가 경악스러울 정도다. 천재 마법사라는 이명이 괜히 붙은 것이 아니었다.

곧 닥쳐올 마법을 준비하면서 베누크는 방문을 힐끗 살폈다. 방금 전 파이어볼이 폭발하면서 거대한 굉음이 울렸다. 폭발의 여파로 주변 또한 약간 흔들렸다. 부하들이 눈치 챘으면 당장 이변을 느끼고 달려왔을 것인데 감감 무소식이다. 문밖에는 조금의 소란스러움도 보이지 않는다.

‘무슨 짓을 한 거지.’

상대는 자신이 혼자라고 말했지만, 그는 적이다. 말을 완전히 믿을 수 없다. 어쩌면 밖에서는 전투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베누크는 걱정되는 것을 느꼈다. 디스크리트의 간부들이야 문제없지만, 말단 도적들의 무력수준은 높지 않다. 모험가로 치면 대부분이 D~E 등급의 수준이다.

베누크는 검은색 마법진에서 검은 쇠사슬이 뻗어져 나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몸을 놀렸다. 검은 쇠사슬. 보기에는 그렇게 특별한 마법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공격용이 아니라 움직임을 방해하기 위한 것이리라.

여기저기서 뻗어오는 검은 사슬을 피해내면서 《다크 웨폰》을 변형 시킨다. 양손에 각각 쥔 두 개의 단검이 어둠이 되어 끝이 삐죽한 검은색 장창 하나로 변한다. 장창을 두 손에 든 베누크는 바닥에서 뻗어지는 사슬을 점프해 피하며 허공에서 테드를 향해 창을 내던졌다.

디딤발 없이 던져진 창은 회전력까지 더해져서 그대로 빙글빙글 돌며 테드의 가슴을 향해 돌진한다.

검은 창이 테드의 가슴을 꿰뚫기 직전, 하얀색 마법진이 창의 바로 앞에 나타난다. 파지직, 마법진에서 스파크 형태의 마나가 거세게 튀며,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창과 마법진이 힘겨루기를 시작한다.

승자는 마법진이었다. 방패 같은 마법진은 창의 공격을 완벽히 막아냈다. 힘을 잃은 창이 바닥에 떨어지더니 어둠이 되어 사라진다. 바닥에 착지한 베누크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 창에는 자신의 마나를 실려 있다. 전력은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힘으로 던진 창이다. 간단히 막아낼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생각보다 상대가 너무 까다롭다.

촤르르륵.

“……!”

느닷없이 베누크의 등 뒤에서 사슬이 나타났다. 민첩하게 몸을 움직였지만, 왼쪽 팔에 사슬이 칭칭 감기고 말았다. 분명 마법진은 없었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사슬이다.

베누크는 자신의 왼팔을 감은 쇠사슬을 오른손으로 붙잡았다. 사슬을 끊어낼 기세로 잡아 당겼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나가 움직이지 않는다니…. 이 사슬의 효과인가…!”

당장은 사슬을 푸는 것을 포기하고 테드를 향해 정면을 쳐다봤다. 어느새 다가온 건지 한 발자국 거리에 테드가 있었다.

마나를 사용하지 못한다고 해서 몸 자체가 죽어버린 것은 아니다. 사슬에 묶인 왼팔에 제약이 생겼을 뿐이다. 베누크는 멀쩡한 오른 주먹을 테드의 머리를 향해 내질렀다.

테드는 자신의 얼굴을 노리고 들어오는 그의 주먹을 바라보며, 오른쪽 손바닥으로 그의 팔목을 쳐냈다. 베누크의 주먹이 테드의 옆으로 튕겨져 나간다.

그 반응속도는 마법사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빨랐다.

베누크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이건 절체절명의 위기다.

“한 가지 알아둬라. 날 죽인다고 해서 디스크리트는 사라지지 않는다. 디스크리트를 없애려 한다면 디스크리트의 간부들 전부를 죽여야 할 거다.”

“그럼 죽여야지.”

어이가 없을 정도로 망설임 없이 담백하게 선언했다. 그 서늘한 붉은 눈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다. 진심이다. 진심으로 간부를 전부 죽일 생각이고, 그게 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눈이다.

모험가는 냉정해질 수밖에 없다. 그게 자신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상관없이 살아남으려면 냉정해질 필요가 있었다.

모험가가 상대하는 것은 몬스터뿐 만이 아니라 사람이 될 수 있다. 동정심 따윈 사치이며 강자의 권한이다.

베누크는 모험가를 그렇게 생각하며 행동해왔다. 그렇지만 눈앞에 있는 어린 마법사는 지나친 느낌이다. 어딘가가 비틀려있다. 주저없이 내뱉는 말에서 그렇게 느껴졌다. 아무리 환생자라고 해도 이상하다. 어쩌면 전생에 살인마나 학살자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괜히 등골이 오싹해졌다.

테드가 주먹 쥔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검은색 장갑을 낀 오른 주먹의 앞에 마법진이 그려졌다가 사라진다. 주먹의 위력을 일시적으로 강화시킨 것이다.

베누크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마력을 사용할 수 없는 지금, 저 주먹을 제대로 맞는 순간 죽을 것이다. 몸을 움직이려 하자 꼼짝 말라는 듯이 왼팔에 감긴 사슬이 잡아당긴다. 마나 없이 몸놀림만으로 저 주먹을 피할 수 있을까?

베누크가 이를 악물었다. 그의 주위에 있는 어둠이 일렁였다.

쾅! 테드의 주먹이 허공을 때렸다. 바닥에 무언가가 툭 하고 떨어졌다.

“…….”

테드는 바닥에 떨어진 잔근육이 붙어 있는 구릿빛 팔을 바라봤다. 팔에는 검은 사슬이 칭칭 감겨있다. 사슬이 사라지고 테드가 시선을 돌렸다.

조금 떨어진 곳, 책상의 곁에 베누크가 있었다. 오른손에는 칠흑 같은 검이 들려 있고,

왼팔은 팔뚝 부분이 잘려서 핏물을 뚝뚝 흘리고 있다.

베누크는 마나를 이용해 흐르는 피를 지혈했다. 절체절명의 순간은 넘겼으나, 팔이 잘렸다.

어둠으로 검을 만들어 자신의 검은 사슬에 감긴 팔을 잘라 마나를 사용해 빠르게 벗어났다. 테드는 어느 정도 방심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모험가들은 마나에 의존한다. 마나가 힘의 원천이기 때문에 마나가 봉인당하면 패닉상태에 빠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신의 팔을 자르는 냉철한 판단을 할 겨를이 없는 것이다. 테드의 실수였다.

“그 검… 마나를 사용하지 않는 스킬이군.”

테드의 말대로 베누크의 스킬 《다크 웨폰》은 마나가 아닌 정신력을 소모하는 스킬이다. 무기를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것에도 정신력이 소모되기 때문에 처음에는 고작해야 작은 단검 하나를 5분간 유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지금은 반나절 정도는 끄떡없다.

베누크의 잘린 왼팔 부위에 검은 어둠이 모여들며 팔의 형상을 취한다. 순식간에 검은 강철의 팔이 생겨났다. 왼손을 쥐었다, 폈다하며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을 짧게 확인한다. 그는 서둘러 책상의 두 번째 서랍을 열어 안에 있는 물건을 꺼내 들었다.

베누크가 꺼내든 것은 어린이 주먹만 한 푸른색의 구슬이었다. 그걸 오른손에 들어 테드를 향해 집어 던졌다.

테드는 자신을 향해 날려드는 구슬을 옆으로 한발자국 움직이는 것으로 일단 피해냈다. 그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일반적인 구슬은 아닐 것이다.

구슬을 던진 베누크가 서둘러 책상의 밑으로 들어가 고개를 숙였다.

바닥에 떨어진 구슬이 강렬한 빛을 내며 바닥에 하얀색의 마법진을 그린다. 짧은 시간에 완성된 마법진이 순식간에 발동한다. 마법진에서 물리적인 힘을 가진 빛이 뿜어져 나와 위로 쏘아진 것이다. 마법진의 범위 안에는 테드가 있었다.

책상 속에 몸을 숨긴 베누크는 고막을 찢는 듯한 굉음 뒤에 찾아온 침묵에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구슬은 5년 전 경매장에서 막대한 재산을 털어 어렵게 구한 일회용 마법 구슬이다. 마나를 담아 바닥에 던지면 마법이 발동하는 구조다.

구입당시에는 혹시 모를 위기 상황 때를 대비해 구입한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일종의 부적으로 전략했었다. 지금 여기서 사용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빛의 마법 ‘라이트 월(Light Wall)’. 빛의 기둥을 쏘아내는 상급의 마법.

직격 당하면 드래곤이라도 무사하지 못한다고 경매사가 호언장담한 물건이다. 실제로 드래곤에게 통할지는 알 수 없다.

베누크는 책상아래에서 일어났다. 이 마법 구슬을 사용하는 것은 처음이라 그 여파가 생길 것을 우려해 책상 밑으로 몸을 피한 것이다.

방은 그의 예상대로 마법의 여파로 인해 엉망이 되어 있었다. 장식품들은 깨지거나 바닥을 뒹굴었고, 책과 옷이 사방팔방으로 널브러졌다. 가관인 것은 천장이다. 밝은 태양빛과 동시에 사막의 모래가 후두둑 내려오고 있다. 베누크가 고개를 올리자 구멍이 뚫려있는 아지트 밖이 보인다. 지하에서 보는 푸른 하늘은 새로웠다.

아지트를 고치려면 어느 정도의 돈과 시간이 걸릴까. 안 그래도 모험가 길드도 아지트가 있는 암석지대를 의심하고 있는 모양인데…… 머리가 지끈거렸다.

문밖에서 급하게 움직이는 듯한 발소리와 누구의 것인지 모를 고함이 울린다. 아지트에 구멍을 내버린 마법에 디스크리트의 도적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마스터!!!”

문이 부서질 듯이 열리며 베누크의 4명의 부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최하층에 있던 간부들이 이변을 눈치 채고 빠르게 달려온 모양이다. 간편한 옷에 자신들의 무기만을 손에 쥐고 있다. 제대로 무장도 갖추지 못한 그 꼴이 우습다.

“늦었다. 너희들. 침입자가 있었는데… 그 꼴을 보니 모르는 모양이군. 침입자는 제거했다만… 동료가 있을지도 모르니 디스크리트는 경계태세에 들어간다.”

구멍이 뚫린 천장아래에서 경악하며 위를 살펴보던 간부들이 베누크의 말에 급하게 부동자세를 취하며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베누크는 그들의 대답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엉망이 된 방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바닥을 살폈다. 스스로 잘라낸 왼팔이 있을 것이다. 단면은 깨끗하니 빠르게 붙이면 무리 없이 회복할 수 있다. 그러나 팔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베누크가 인상을 구겼다. 아마도 마법에 휩쓸려 사라진 모양이다. 왼팔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바닥을 살피던 베누크가 왼팔을 포기하고 다시 고개를 올렸다.

하늘에서 하얀 빛의 창이 폭우마냥 떨어졌다. 빛의 창은 그대로 뚫린 천장 아래에 있는 5명의 간부들의 몸을 꿰뚫는다.

머리, 어깨, 가슴, 복부, 허벅지, 종아리 등 무차별적으로 빛의 창이 떨어진다. 5명의 육체를 간단히 푹푹 꿰뚫고 바닥에 떡하니 박힌다.

아주 짧은 폭우가 끝나고 난 뒤에는 참혹한 형상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간부들의 시체는 형체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빛의 창에 꿰뚫려 있었다. 빛의 창은 그 목적을 달하고서도 사라지지 않고 과시하듯 남아 있다. 육체를 꿰뚫은 하얀 빛의 창을 타고 붉은색의 핏물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베누크는 간부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대신 시선을 위로 올렸다.

푸른색의 하늘, 그곳에서 회색 코트를 입은 소년이 붉은색 눈을 번뜩이며 공중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베누크는 섬뜩함을 느꼈다.

마법에 직격 당한 테드 또한 데미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코트는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으며 붉은 피로 범벅이었다. 회색 코트인지 붉은 얼룩 코트인지 알 수 없을 정도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핏방울 하나가 테드의 턱을 타고 아래로 떨어졌다.

하나의 핏방울이 바닥에 고인 피 웅덩이에 떨어진다.

“……괴물 새끼.”

베누크의 떨리는 목소리에는 미세한 두려움이 묻어 있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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