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결한 영혼-76화 (76/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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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디스본.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고운 여성의 목소리가 버본의 귓속으로 들어왔다. 목에 겨누어진 검만큼이나 날카롭고 싸늘한 목소리였다. 버본이 눈동자를 또르르 굴렀다. 등 뒤를 확인하려 했지만 고개가 움직이지 않는다. 모습을 볼 수 없다. 상대를 확인할 수 없다는 사실에 두려움이 물밀 듯이 몰려왔다.

“누, 누구야?!”

꿈쩍도 하지 않던 입술이 움직였다. 그 뿐만이 아니라 버본의 얼굴까지 일그러졌다. 그 두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통제를 벗어난 몸 중에서 유일하게 얼굴 근육만이 움직였다. 목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디스크리트의 수뇌부들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아, 알고 있어. 전부 말 할 테니까. 제발… 살려줘….”

울먹이는 목소리로 버본이 말했다.

버본은 유난히 겁이 많았다. 돈이 필요해 모험가가 되었지만, 그놈의 겁 때문에 안전한 의뢰와 사냥만 하다 보니 몇 년이나 D등급에 머물고 있었다. 디스크리트에 들어온 것도 분위기에 휩쓸려 동료를 따라 가입하게 된 것 뿐이다. 솔직히 도적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하는 일이라곤 가끔씩 상단을 터는 것과 사냥을 하는 것뿐이라 모험가 일 때보다 편했다.

그렇지만 지금 버본은 도적이 된 것을 맹렬하게 후회하고 있었다. 편하긴 하지만 미래가 불투명하다. 도적이다 보니 원한을 살 일이 많았다.

버본은 며칠 전부터 모험가 길드와의 관계가 지금보다 험악해지면 동료 간의 의리고 나발이고 전부 버리고 디스본에서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었다.

“말씀해주시지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정중한 말이었다. 목소리만으로도 보이지 않는 그녀의 외모가 그려지는 느낌이었다. 틀림없이 미인일 것이다.

“……알려주면, 사, 살려주는 거지?”

“살려드리겠습니다.”

목을 겨누고 있던 검이 멀어졌다. 단지 그것뿐인데도 버본은 굉장히 안심되는 것은 느꼈다. 일단 위험한 고비를 넘긴 기분이다.

“……디스크리트의 간부들은 최하층에 있어. 최하층 전체가 간부들 구역이야.”

“그렇군요. 그럼 그 최하층으로 가는 길은?”

버본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곳은 아지트 중에서도 가장 위층의 구석진 곳이다. 입구와 상당히 멀고, 입구 근처에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간부들의 위치야 모를 테니 물어볼 수 있다고 해도, 침입할 때 입구를 통해서 왔다면 내려가는 길은 물어볼 이유는 없었다.

“내려가는 계단은 아지트 입구 쪽에 있는데… 넌 도대체 어디로 들어 온 거야?”

그가 알기로 아지트와 밖과 연결된 곳은 입구뿐이다. 최하층에는 간부들이 사용하는 비밀 통로가 있다고 들었지만, 그걸 통해 왔다면 간부들에 대해서 묻지도 않았을 것이다.

“……제가 그걸 말해줘야 합니까?”

싸늘한 목소리에 버본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면, 그 하얀 검이 목을 베어버릴 지도 모른다.

“아, 아니. 아니. 내가 잘못했어.”

노심초사하다. 알아낼 것을 알아냈다면 그냥 빨리 여기서 사라져 주었으면 한다.

“그… 몸이 움직이지 않는데…. 풀어주면 안 될까? 동료들한테는 절대로 말하지 않을게. 맹세할 수 있어!”

어떻게 한것인지 모르겠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뒤에 있는 여인과 관련있을 것이다.

버본은 여기서 풀려나면 짐 싸서 바로 아지트에서 도망칠 생각이었다. 이런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법은 없다.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었다. 동료들이 당하든 말든 알게 뭔가. 자신만 무사하면 그걸로 됐지.

“……상단에게 약탈한 물건들은 모두 어디에 있습니까?”

“차, 찾는 물건이라도 있는 거야?”

어쩌면 물건을 빼앗긴 상단에서 의뢰를 해서 고용한 것일지도 모른다. 버본은 그렇게 생각했다. 돈만 주면 살인도 서슴지 않는 용병과 말로만 듣던 암살자 길드를 떠올렸다. 자신이 생각하고도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묻는 말에 대답하시지요.”

다시 하얀색 검이 버본의 시야에 나타났다. 검날은 목의 동맥을 정확히 겨눈다. 말하지 않으면 죽는다. 울상을 지은 버본이 억지로 두뇌를 가동시켰다.

“물건은 간부들이 관리하기 때문에 모르는데… 따, 따로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다고 들었어.”

“그 창고의 위치는?”

“몰라. 이건 정말 모른다고! 간부 놈들이 나 같은 말단에게 가르쳐 줄 리가 없잖아!”

“…….”

대답이 그녀의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하얀색 검이 다시 시야에서 사라진다. 버본은 코로 숨을 크게 내쉬었다. 꿈에서 하얀 검이 나올까봐 무섭다.

“전부 말했으니까. 이제 풀어줘…….”

버본이 애원 하듯이 말했다. 그러나 등 뒤에서 대답은 조금도 들려오지 않았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인기척은 목에 칼이 들어온 순간부터 느끼지 못했다. 대화를 하는 지금도 인기척을 느낄 수 없다.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있는지 조차 몰랐을 것이다. 귀신같은 여자다. 뛰어난 암살자가 틀림없다.

“……이봐?”

버본이 의문을 담아 그녀를 불렸다.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사라진 것일까? 안도감과 동시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아직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쩌면 평생 이 상태로 살아가야 되지 않을까? 불길한 상상을 애써 지우듯 입을 열었다.

“……이봐….”

목소리는 기어들어가듯이 작아져 있고, 굉장히 떨리고 있다.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버본이 자신의 불행을 한탄할 때였다. 뒤에서 뚜벅거리는 발걸음소리가 들렸다. 혹시 그 여자 일까? 한순간 그렇게 생각했지만 순식간에 그 생각을 지웠다. 침입자가 당당하게 발소리를 내며 돌아다닐 리가 없으며, 그 여자는 인기척을 숨기는 것에 도가 텄다. 거기에 이 발걸음 소리는 어딘가 무거운 느낌이다. 여자의 가벼운 발소리가 아니다.

멀리서 들리던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버본을 숨을 삼켰다.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이 들려와 저도 모르게 긴장한 것이다.

발소리의 주인은 모퉁이를 돌자마자 보이는 버본의 등에 깜짝 놀라서 ‘으잉’하고 새된 비명을 질렀다.

“인기척도 내지 않고 여기서 뭐 하냐, 버본.”

익숙한 낮은 목소리에 버본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칼!”

버본이 반가움이 담아 그의 이름을 불렸다. 칼은 모험가 일때부터 알고 지낸 동료다. 또 버본이 도적이 된 계기가 바로 그다.

“그래. 칼이다. 그렇게 소리지를 필요는 없잖나.”

칼은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자다 깼는지 목소리가 살짝 잠겨 있었다. 그가 가만히 서있는 버본의 어깨를 향해 손을 뻗었다. 몸은 움직일 수 없지만 어깨를 통해 그의 감촉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칼! 비상사태야! 지금 침입자가……!”

버본이 말을 다 잇기도 전이었다.

쉭하고 바람이 부는 소리가 작게 들리고 칼의 머리가 허공을 날아 앞으로 날아갔다.

버본은 눈앞에 떨어지는 칼의 머리를 똑똑히 보았다. 까무잡잡한 피부의 곰의 귀를 한 수인이다. 각진 얼굴과 오른쪽 눈가에 있는 칼에 베인듯한 상처. 버본이 알고 있는 칼의 얼굴이다.

“……칼?”

입을 뻐끔히 벌려 그를 불렸다. 칼은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하다. 그는 이미 죽었으니까.

“말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중하게 들리는 여성의 목소리는 저승사자와 같았다. 버본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비지땀이 비오 듯이 흘려 내렸다. 상의가 축축하게 젖는다.

“…요, 용서해…….”

버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검이 움직였다.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버본의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버본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메이드복을 입고 있는 은발미녀의 무감정한 붉은 눈이었다.

⁂⁂⁂

테드는 마법을 사용해 몸을 숨기면서 아지트 내부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몸을 숨기는 마법, 정확하게는 몸을 투명하게 만드는 마법인 인비져블(Invisible)이다. 마법 자체에 기척차단의 효과까지 있기에 은밀 행동에 딱 좋다. 마력의 흐름 정말 집중하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이기에 방심하고 있는 도적들이 알아챌 일은 없었다.

실제로 바로 옆에 테드가 걸어감에도 도적들은 누구 한 명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테드는 이 아지트를 보고 감탄성을 내뱉었다. 통로 곳곳에 문이 있고, 그 문 너머에는 도적들이 생활하는 방이 있다. 1인 1실은 아니고 방의 크기에 따라 3명에서 5명까지 적당한 인원이 분배되어 있다. 통로를 지나가다 우연히 발견한 게시판에는 식단표나 일정표 같은 자잘한 공지사항이 있다. 도적 주제에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테드는 이러 저리 움직이다 보니 식당으로 오게 되었다. 식사시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한가한 도적들 몇 명이 식당에 모여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아아. 그러고 보니 말이야……. 너희들, 밖에 있는 거대한 바위알지?”

머리에 보라색 터번을 쓴 오크 남자가 입을 열었다. 초록색 뺨이 약간 불그스름하게 변했다. 취기가 상당히 오른 모양이다. 그의 앞에 있는 남자 두 명의 경우에도 취기가 오른 건지 흐리멍덩한 눈을 하고 있다.

“거대한 바위? 그게 왜?”

흥미 있다는 듯이 되물은 것은 갈색머리의 청년이었다. 푸른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인간 청년이었다. 그 옆에 있는 오크 사내는 관심 없다는 듯이 연거푸 술을 들이 키고 있다.

“글쎄, 내가 말이야. 우연히 간부들이 나누는 말을 듣고 말았거든. 거기… 거대 바위

가 창고인 모양이더라. 마법으로 숨겨 놓았다던가, 뭐라던가.”

터번을 쓴 오크 도적이 청년의 맞장구에 기분이 좋다는 듯이 말을 잇는다.

“창고? 그 산처럼 커다란 바위가?”

도적질을 하면서 빼앗은 물품들은 간부들이 관리한다. 창고는 도적들의 재산이 있는 곳이다.

“나도 놀랐다니까. 정해진 주문을 외우면 바위가 열린다나 뭐라나.”

“주문? 마법사가 아니어도 열리는 거야?”

“대화를 보면 그래. 확실히 주문이…… 여러라 착깨…? 였던가? 하여튼 네메스어는 아니었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특이한 주문이었어.”

“여, 여러라? …착깨? 그건 또 무슨 의미야.”

“마법 주문이야. 마법 주문. 우리 같은 멍청이들이 모르는 마법 주문이지.”

터번을 쓴 오크가 킬킬거리며 술잔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그 옆에서 대화를 모두 듣고 있던 테드의 얼굴이 오묘하게 말했다.

여러라 착깨. 이건 마법 주문이 아니다.

대마도사인 테드다. 아무리 연구를 하지 않는 전투계 마법사라지만 마법 주문 정도는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주문이 맞다. 한국인이라면 거의 대부분이 알고 있는 유명한 주문이다. 닫힌 문을 열게 하는 주문.

‘열려라 참깨.’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마법을 이용한 음성인식 결계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아마도 마법을 설치한 인물이 환생한 인물로 전생에 한국인 이였을 것이다.

테드는 더 이상 그들에게서 얻을 정보가 없자 식당의 밖으로 나갔다. 돌아다니면서 얻은 정보는 적었다. 이렇게 된 이상 누구하나 잡아서 심문하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른다.

“어, 내 소시지 누가 먹었어?”

연거푸 술을 들이키던 오크 사내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대화를 나누던 도적들이 모른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오크가 인상을 찌푸렸다. 술기운에 몽롱한 정신을 다잡고 기억을 되새긴다.

“내가 먹었던가…?”

먹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먹은 것 같기도 하다. 아리송하다.

“에라, 모르겠다. 술이나 마시자.”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낀 오크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술잔을 들었다. 동료들 또한 술잔을 들었다. 이윽고 식당에는 짠하는 소리가 울러 퍼졌다.

⁂⁂⁂

테드는 귀마개를 통해 사이나에게 최하층이 바로 간부들의 구역이라는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정보를 듣고 곧바로 마법을 이용해 최하층으로 내려왔다.

최하층은 깔끔하지만, 단조롭기 그지없는 위층과 달리 통로에서부터 고급스러운 장식들이 치장되어 있었다. 벽에는 그림이 걸려 있고, 심심치 않게 조각상도 볼 수 있었다. 같은 아지트인데 위층과는 구조자체가 다른 듯 하다.

상층은 방이 많은 반면에 최하층은 방이 적고 컸다. 투시로 살펴본 결과 고급여관을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어이가 없는 것은 방을 정리하는 청소부까지 있다는 점이다.

청소부의 경우 적당히 몸이 단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일반인은 아니었다. 아마도 그 또한 도적일 것이다.

‘엄청나게 사치스럽군. 이건 도적이 아니야.’

테드는 속으로 툴툴 거리며 가장 좋은 방을 찾았다. 아마도 거기가 디스크리트의 두목의 방일 것이다.

얼마 걷지 않아 가장 좋아 보이는 방을 찾았다. 문부터가 달랐다. 금으로 치장되어 있는 붉은색의 호화로운 문이었다. 통로를 지나면서 여러 문을 보아왔지만 이 정도로 호화롭지는 않았다. 딱 봐도 각이 나왔다. 디스크리트의 정점의 방일 것이다.

투시를 해서 내부를 들여다보자 푹신해 보이는 소파에 앉아 있는 중년 남자가 보였다. 등을 깊게 의자에 묻고서 눈을 감고 있다. 입고 있는 옷은 평범해 보이는 하얀색 천 옷이다. 짧은 스포츠 머리의 남성이다. 피부색은 태양에 그을린 구리 색으로 오크가 아닌 인간이다.

소파에서 잠을 자는 것일까… 아니, 마나의 흐름이 이상하다. 그를 중심으로 마나가 흔들리고 있다. 코를 통한 호흡을 통해 마나가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밖으로 나오면서 발생한 흔들림이다.

문 앞에 있던 테드의 몸이 사라지고 소파에 앉아 있는 사내의 앞에 나타난다.

“……무슨 마법을 사용해 여기까지 온 거지?”

테드가 방의 안으로 나타나자마자 사내가 입을 열었다. 천천히 눈을 뜬 그는 푸른색의 눈동자로 정확히 테드가 있는 곳을 바라본다.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마력의 흐름으로 그곳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테드가 마법을 풀었다. 이미 들켰고, 마력에 민감한 실력자의 앞에선 별다른 효율이 없다.

드러난 테드의 모습에 그가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테드의 어린 모습은 예상외였을 것이다.

“……넌 누구지? 어떤 목적으로 침입 한 거냐?”

“내가 누구인지 알 필요는 없고…….”

마력을 끌어 올린다. 테드의 주위에 바람이 일어난다. 회색 코트 자락이 펄럭인다.

테드의 검은색 눈동자가 붉게 변한다. 천장에 달린 마광석의 빛을 반사해 붉은 안광을 빛내는 것 같았다.

“목적은…… 네가 예상하는 대로.”

============================ 작품 후기 ============================

찾아보니 블링크는 자신만 이동할 수 있다고 마성의 남자 편에서 언급되었습니다만, 신체를 접촉한 것으로 함께 이동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제 부주의로 인한 설정오류입니다. 죄송합니다.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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