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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영혼-72화 (72/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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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디스본.

“당장 무기 버리고 항복하면 살려는 드릴게.”

루크락슨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테드를 바라봤다. 건방진 말을 한 꼬마 녀석의 머리통을 쪼개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서 테드의 행색을 살폈다.

도적이라고 해서 아무나 터는 것은 아니다. 대귀족이나 상위 등급의 모험가들이 있는 상단은 포기해야 한다. 대귀족이면 심하게 보복할 가능성이 높고, 상위 등급의 모험가들은 도적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의 무력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찰대의 말에 의하면 그렇게 눈에 띄는 모험가는 보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어린아이가 있다는 말도 듣지 못했다. 아마도 마차 안에 있어 정찰대의 눈을 피한 것이리라.

입고 있는 옷은 회색의 코트다. 디스본의 주민들이나 모험가들은 코트 종류의 옷을 잘 입지 않는다. 그 옆에 있는 메이드도 적색의 코트를 걸치고 있다. 아마도 다른 곳에서 온 인물들이리라.

후드 안에 보이는 꼬마의 얼굴엔 자신감이 가득하다.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는데 자신의 알량한 검술 실력을 믿는 것일까.

루크락슨은 곱상한 얼굴의 테드를 바라보며 어딘가의 귀족 자제라고 결론을 지었다. 문제는 어떤 가문이냐는 것이다. 건들어도 탈이 없을 정도로 작은 가문의 귀족이면 여기서 죽이면 된다. 달리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진 가문이라면 골치가 아파질 수 있다.

루크락슨은 우선 위협하기로 했다.

“꼬마 놈이 건방지구나!”

거대한 손도끼를 들어 올린다. 있는 힘을 모조리 끌어 모아 바닥으로 내려찍었다. 도끼의 날이 테드의 바로 앞에 떨어졌다. 거대한 충격음과 함께 모래 먼지가 주변에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모래 구름이 시야를 가려서 꼬마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검게 보이는 실루엣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 갑작스런 위협에 일어서 있는 자세 그대로 굳어 버린 것이리라.

바로 뒤에서 상황을 보고 있던 모험가들이 몸을 움찔거렸다. 테드의 뒤에 있던 사이나가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면 몇몇은 뛰쳐나가 전투를 시작했을 것이다.

모험가들의 꼴을 본 몇몇 도적들이 킥킥 웃었다. 메이드의 말을 고분고분 듣는 모험가들이 웃긴 모양이었다.

“알겠냐, 꼬마. 다시 한 번 말해주마. 죽기 싫으면 우리 지시에 따르라.”

먼지 구름이 가라앉고 테드의 얼굴이 드러났다. 루크락슨은 겁에 질린 얼굴을 기대했다. 그러나 결과는 루크락슨의 바람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극히 평탄한 얼굴로 얼굴과 몸에 묻은 먼지를 손으로 털고 있었다. 절대로 두려움에

찬 얼굴은 아니었다.

“더럽게 먼지를 일으키고 난리야.”

건방진 말까지 해대는 꼬마에 루크락슨의 입가가 꿈틀거렸다.

“저 메이드를 믿고 그렇게 나대는 것이냐?!”

그녀는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는 미인이었다. 저 미모로 왜 메이드 따위를 하는 것인지 궁금해질 정도다. 부하들 몇몇은 경계엔 신경 쓰지 않고 그녀를 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루크락슨은 그녀의 미모에 감탄하는 한편 경계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도적질을 하고 있지만, 한 때는 잘나가는 B등급의 모험가였다. 모험을 하면서 많은 사람을 봐왔다. 그 중에는 절망을 느끼게 할 정도로 강자들도 있었다. 루크락슨이 보기에 메이드가 그랬다. 몸에서 알 수 없는 기백이 느껴진다. 말로는 잘 설명할 수는 없다. 본능이라 할 수 있는 것이 경종을 울린다. 저 여자는 위험하다고. 여기서 가장 강한 인물이라고. 전투를 한다

면 부하들과 함께 달려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너희들 정도는 사이나만으로 충분하긴 한데…….”

테드가 입을 열었다.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루크락슨을 비롯한 도적들을 한 차례 훑어본다. 그 뒤에 피식 웃으며 오른손으로 허공을 휘젓듯이 도적들 전부를 가리킨다.

“사이나가 나설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여기 있는 모험가들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그래. 일단 네 그 건방진 팔을 끊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루크락슨이 살의를 내비쳤다. 그 몸에서 차가운 살기가 흘려 나온다. 도끼를 든 손을 크게 올려들고 휘두를 준비를 한다.

거기서 루크락슨은 위화감을 느꼈다. 살기까지 내뿜었는데 주변의 모험가들은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는다. 은발의 메이드 또한 조용히 노려보기만 할 뿐 움직일 기세가 보이지 않는다. 소중한 도련님의 팔이 날아가게 생겼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그가 의문을 가질 때였다.

“그럼 난 너희들의 다리를 얼리지.”

쩌정. 유리에 금이 가는 소리가 공간에 울리며 푸른색의 냉기가 사막의 바닥에서 스멀스

멀 올라와 시야를 가렸다. 루크락슨이 냉기의 출처를 찾기 위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거기엔 얼어붙은 바닥이 있었다.

뜨거운 모래채로 자신의 허벅지까지 완벽히 얼려져 있었다. 차가운 고체의 얼음이 도적들의 다리를 한 명도 빠짐없이 감싸고 있다.

“무, 무슨…!”

당황한 루크락슨은 얼어붙은 다리를 움직이려고 했다. 상체가 이리저리 흔들렸지만, 다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의 앞에 있는 테드가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는 게 보였다. 루크락슨은 방금 전의 그가 했던 말이 떠올라 머리에 열이 확 뻗쳤다.

“네 놈…! 마법사였냐!!”

“처음에 했던 말, 기억나? 그거 아직도 유효해.”

상단을 호위하듯 모여 있던 모험가들이 점점 도적들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천천히 압박하듯, 당장 죽이겠다는 듯이 무기를 내보인다.

“루, 루크락슨님! 어, 어떻게 할 까요?”

옆에 있던 부하가 물어왔다. 예상 밖의 사태에 당황한 듯 말을 더듬고 있다.

루크락슨은 앞에 있는 꼬마… 아니, 마법사를 바라본다. 마법이 발동한 뒤에야 그가 마법사라는 것을 알았다. 마력의 움직임을 조금도 눈치 채지 못했다. 더군다나 이 뜨거운 태양 아래에 있는 사막에서 얼음은 녹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냉기를 풀풀 내뿜고 있다.

뜨거운 태양아래에서 동사하는 유쾌한 경험을 할지도 모른다.

“……정말 살려주는 거냐?”

우둔한 머리로 어떻게든 방법을 모색한다. 그렇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방법이 없다는 결론만이 나올 뿐이었다. 애초에 왜 저런 마법사가 이런 작은 상단의 호위같은 걸 맡고 있는 거지. 또 겉모습은 영락없는 어린아이잖아. 루크락슨은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라며 억지로 받아 들였다.

“너희들도 죽일 생각은 없었잖아?”

죽이고 빼앗을 생각이었다며 당당하게 쳐들어와서 말을 건네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죽이고 빼앗으면 그만이다.

“……오늘은 운이 나쁘군.”

루크락슨이 테드를 지긋이 바라보며 손에 쥔 도끼를 놓았다. 탕하고 얼어붙은 바닥에 그

의 무기가 떨어졌다. 이윽고 그의 부하들이 제각각 무기를 버리기 시작했다.

“놓아줄 수는 없어. 너희들은 도적이고 동료를 데리고 오면 귀찮으니까. 디스본에서 모험가 길드에 넘길 거야.”

디스본은 루크에이스와 마찬가지로 모험가 길드가 관리하는 곳이다. 도적들의 처리도 그들이 한다. 악질적인 범죄행위 경력이 있다면, 사형일 것이고 아니라면 감옥에 들어가게 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 도적단… 데저트 오크가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거래를 하지 않겠나? 우리를 놓아다오. 그렇다면 이번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다. 데저트 오크는 너희들을 쫓지 않을 것이다.”

짝! 테드가 놀랍다는 듯이 손바닥을 치며 두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렸다.

“아! 그거 참 솔깃하네요!”

그리고 이내 귀찮다는 듯이 표정이 변한다. 희극적인 표정변화였다.

“라고 말할 줄 알았어? 너희들은 도적이야. 믿을 놈을 믿어야지.”

“우리는 명예로운 오크들이다!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명예? 남의 물건을 빼앗는 도적놈들에게 명예가 어디에 있어? 그게 오크의 명예라면, 오크는 상종할 가치가 없어. 알고 있어? 네가 하고 있는 짓이 오크 전체의 명예를 깎아 먹고 있는 걸.”

“…….”

루크락슨의 이마에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눈에는 핏발이 섰고 양 주먹은 부들부들 떨렸다.

테드의 빙옥 같은 검은 눈동자가 루크락슨을 올려다봤다. 분명 올려다보는 것인데 루크락슨은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네가 하는 짓은 진정 명예를 아는 오크들에 대한 모욕이야. 네가 진정 명예를 안다면 그 단어를 입에 담아선 안 됐어.”

테드가 몸을 돌렸다. 루크락슨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말이 전부 옳기 때문이다. 도적에게 명예는 없다.

“괘, 괜찮을 까요?”

녹한이 숨 막히는 분위기를 연출하는 테드를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가 물었다. 그가 약간의 불안감을 담아 묻자 테드는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 괜찮아요. 조치는 취할 거니까요. 그리고 저 도적들의 소유권은 제게 있어요. 데리고 가도 상관없지요? 관리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테드 님께서 직접 관리를 하신다면 괜찮아요. 그런데 저… 혹시 낙타를 제게 파시지 않으시겠어요?”

낙타는 약 20마리 정도다. 사막에선 말보다 비싼 것이 이놈들이다. 제법 짭짤하게 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저 놈들 무기랑 옷도 사지 않을래요? 엄청 싼값에 팔게요.”

“예? 옷까지 파는 건가요?”

“어차피 감옥에 가면 누더기 옷으로 바꿔 입을 건데. 사용할 사람이 유용하게 사용해야죠. 안 그래요?”

“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과연 테드님. 사려가 굉장히 깊으시군요!”

“아니… 뭐. 그 정도야. 그냥 조금 깊은 것뿐이죠.”

테드가 기분 좋게 웃으며 녹한에게서 돈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묵직한 주머니를 느끼고 있을 때였다. 사이나가 테드를 불렸다.

“주인님. 근처에 모래 폭풍이 있습니다.”

“어, 진짜네.”

테드가 사이나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제법 많이 떨어져 있는 곳이다. 움직이는 경로를 보자면 테드가 있는 상단과는 제법 떨어진 곳이다. 이대로 움직여도 큰 지장은 없을 것이다.

디스본의 사막에는 뭐든지 휩쓸고 다니는 모래 회오리가 있다. 직격당하면 당연히 무사하지 못한다. 다행히 밤에는 없고 낮에만 나타나고 크기도 그렇게 크지 않기에 멀리서 발견만 한다면 피하거나 대비를 할 수 있다.

테드는 신기하다는 듯이 초롱거리는 눈으로 모래 황갈색의 모래 폭풍이 움직이는 것을 바라봤다.

⁂ ⁂ ⁂

테드는 디스본에 도착 후에 상단의 인원들과 헤어졌다. 상단주인 녹한이 테드의 손을 붙잡고 부담스러울 정도로 고개를 숙이며 헤어졌다. 그가 건넨 돈주머니에는 약속했던 의뢰비용 보다 조금 더 많이 들어 있었다.

디스본은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활기가 느껴졌다. 추워서 사람이 자주 돌아다니지 않는 루크에이스와는 날씨만큼이나 다른 분위기였다.

디스본의 건물은 대부분이 경사지붕이 아니라 평지붕이고 창문이 크고 많다. 사람들은 검은 옷보다는 밝은 옷을 입은 자들이 많았다. 더운 날씨 때문인지 거의 헐벗은 수준의 옷을 입는 사람들도 있었다.

테드는 사막에서 잡은 도적들을 이끌어 모험가 길드에 넘겼다. 달랑 속옷 한 장만 걸치고 있는 오크들이라 주변에 시선이 쏠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부끄러움은 도적들의 몫이었다.

도적을 모험가 길드에 넘기면서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다. 행동대장인 루크락슨의 경우엔 현상금 15골드를 받을 수 있었고, 나머지 도적들은 두당 1골드를 받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 짭짤한 수익이었다.

“최근에 도적들이 너무 많이 늘어나서 보상금도 상승했지요. 될 수 있으면 또 부탁하고 싶군요.”

모험가 길드 디스본 지점의 여직원이 말했다.

깔끔하게 정장을 빼입은 그녀가 테드에게 보상금을 건네준 인물이었다.

“기회가 되면요.”

테드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며 대충 맞장구를 쳐주었다. 모험가들은 도적을 잡는 것보다 미궁에서 몬스터를 잡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는 족속들이다. 벌이가 더 좋고 위험부담이 적어지기 때문이다. 상대가 도적이면 예상외의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지능 있는 인간과 본능뿐인 몬스터. 어느 쪽이 더 편한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모험가 길드를 나온 테드는 시선을 느끼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험가 길드 건물 바로 옆 골목길로 사라지는 인물이 보였다. 테드가 미간을 좁혔다.

…미행? 아니, 외지인이라 쳐다 본 것 일수도 있다 너무 예민하게 반응한 것일지도 모른

다.

“뭐…. 오래 머물 것도 아니고.”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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