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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영혼-71화 (71/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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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디스본.

12. 디스본.

디스본은 루크에이스처럼 중립지대에 있는 대미궁이다. 다만, 거대 나무인 루크에이스와 달리 그 입구가 거대 동굴처럼 되어 있으며, 뜨거운 기후를 가진 사막지대다. 루크에이스가 만년 겨울이라면 이곳은 만년 여름이다.

테드와 사이나는 디스본의 입구라고도 불리는 마을에 와있다. 디스본의 아래에 있는 이 마을의 이름은 ‘디질’이고 사막과 평원의 맞붙어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테드와 사이나는 이곳에서 사막을 건널 준비를 하고 있었다.

디스본은 사막지대다. 넓은 황금색의 모래바닥이 가득한 곳이고, 더운 기후 탓인지 굉장히 추운 루크에이스와 달리 몬스터가 많다. 가장 유명한 몬스터로는 거대 전갈 몬스터, 자이언트 스콜피온이 있다.

테드는 디질에서 디스본으로 향하는 상단 호위 의뢰를 받았다. 사이나와 둘이서 가는 것이 빠르고 편하지만, 길이 없는 사막이다. 나침반과 지도 하나만으로는 잘 찾아갈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돈이 아니라 길잡이를 목적으로 상단의 의뢰를 받아들인 것이다.

상단주는 얼씨구나 하고 받아 들였다. 테드의 어린 겉모습을 보면 의심도 들었으나, 신분증을 내보이며 당당하게 밝히는 테드에게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A등급의 모험가. 고용하는 것을 둘째 치고 디질같이 지나가는 마을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고급인력이다.

이 상단 호위의뢰를 받은 모험가 중에서 가장 높은 등급의 모험가가 B등급이었다.

루크에이스 공략대에 알고 있는 모험가 몇몇은 테드의 이름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아

는 척을 해왔다.

테드는 호위대에서 암묵적인 대장이 되어 있었다. 실제로 대장은 상단의 주인인 중년 인간 남자인 녹한이었지만, 그는 아무래도 좋은지 싱글벙글 웃으며 테드에게 아부하기 바빴다. A등급의 모험가, 그것도 그 귀하다는 마법사인 것을 알고 인맥을 쌓기 위해 부지런히 아부를 떠는 것이다.

테드에게 잘 보이려는 녹한의 노력덕분에 테드와 사이나는 사막을 편하게 건널 수 있었다. 잘잘한 일은 모두 등급이 낮은 모험가들이 해서 할게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계급으로 억지로 부귀영화를 누리는 느낌이라 불편한 감정도 없잖아 있었다. 그는 후에 알게 된 사실인데 모험가들 사이에서 테드에 대한 소문이 나돌았다. 실버 울프 클랜 마스터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던가, 사실은 대귀족인데 정체를 숨기고 어떠한 목적으로 모험가 일을 하고 있다던가, 모험가 길드의 간부와 친분이 있어 모험가 길드도 함부로 할 수 없다 등의 황당한 소문이었다.

테드는 그 소문에 쐐기를 박듯이 첫날에 나타난 자이언트 스콜피온을 마법하나로 처리해버린 것이다. 사용한 것은 불꽃 계열의 마법.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파이어 볼이다.

그 위력도 위력이었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캐스팅 속도에 있다. 모험가들이 마법을 준비하는 구나. 하고 생각한 순간에 이미 마법이 발동해서 불덩어리가 스콜피온을 향해 날아가 명중했다. 어처구니없는 속전속결이었다.

모험가들은 노릇하게 구워진 자이언트 스콜피온을 먹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모험가들은 알아서 테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 압도적인 실력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서 테드에게 대드는 모험가가 있을 리 없었다.

상단이 사막에 들어선지 3일째 되던 날이었다. 상단은 뜻하지 않은 사고에 잠시 길을 멈추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마차… 아니, 마법차라고 불리는 게 정확한 마차가 중간에 멈춘 것이다.

상단주인 녹한이 마법사인 테드에게 도움을 구했다.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마차에 앉아서 움직이던 자신까지 피해 받기에 녹한의 요청을 받아 들였다.

마차는 거대한 네모난 상자 형태에 사륜이 있었다. 마법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마차를 이끄는 동물이 없고, 마법을 이용해 움직인다. 지구의 자동차와 비슷했다. 그러나 이 마차 하나의 가격이 도시의 좋은 집과 비슷한 가격이다. 가격만 따지면 움직이는 집이라

할 수 있다.

운전도 쉽기에 상단주인 녹한이 직접 운전한다. 이곳에서 딱히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가끔씩 피곤하면 자신 아래에 있는 상인에게 운전을 시킨다.

앞에는 운전석, 운전석의 바로 뒤에는 테드와 사이나가 앉은 좌석이 있다. 그 바로 뒤가 물건이 실린 짐칸이다.

“그냥 마차 아래에 그려진 마법진이 약간 파손 됐네요.”

테드는 마차를 슥 훑어보고서 말했다. 마법진이 그려진 것은 내부라서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선 마차의 밑으로 기어 들어가야 하지만, 투시 능력이 있는 테드에겐 해당되지 않는 일이었다.

“파, 파손이요? 여기서 고칠 수는 없나요?”

통통한 중년 남성, 녹한이 당황한 듯 물었다. 영국 신사 같은 멋들어진 수염을 한 그가 땀을 흘리며 초조함과 불안함을 내비치고 있었다.

“내구도가 다한 것뿐이에요. 제가 고칠 수 있겠네요. 마법차같은 경우엔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으니까 정기적으로 정비를 해줘야 해요.”

“…다, 다음부터는 꼭 정비를 받아야겠군요.”

손등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쳐내며 녹한이 말했다. 마법차를 정비하는 것에는 제법 돈이 든다. 정비하는 자들이 마법사이기 때문이다. 녹한은 돈이 아까워 정비를 받지 않았다. 이 마차를 구입하고 요 1년간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만약 테드가 없었다면… 모험가들을 이용해 마차를 이끌어야 할지도 모른다. 몬스터가 덤벼오는 등의 최악의 상황이라면 마차를 버려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녹한은 앞으로 정기적으로 정비를 받을 것을 스스로 맹세했다. 정비의 비용보다 마차의 가격이 압도적으로 비싸기 때문이다.

테드는 후드를 쓰고 마차의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등에서 뜨끈한 사막 모래의 열기가 느껴졌다. 의외로 온도가 알맞아서 그런지 몸이 나긋해지는 기분이었다.

마차의 밑에 덧대어진 판을 뜯어내고 마법진을 확인한다.

수은을 굳혀서 그린 마법진이었다. 동그란 원과 그 안에 기이한 도형과 문자가 적혀 있다. 일반인이 보기엔 그냥 잘 그린 낙서로 밖에 보이지 않을 마법진이다.

그 마법진의 일부가 파손되어있다. 수은으로 된 마법진의 경우엔 지속적으로 수은을 갈아줘야 한다. 마법진이 발동하면서 수은의 내구도를 깎아 먹기 때문이다.

수은으로 마법진의 파손된 부분을 조심스럽게 덧칠하면 마차는 문제없이 움직일 것이다. 다르게 마법을 이용해 일시적으로 마법진의 기능을 강제로 수행하게 할 수 있다. 테드의 실력이라면 며칠정도는 충분히 움직이게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제법 많은 마력을 사용해야 한다.

“혹시 수은 가진 것 있나요?”

테드가 밖에 있는 녹한을 향해 물었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녹한이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있습니다! 지금 가져 올게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녹한이 벌떡 일어나더니 짐칸을 향해 달려갔다. 얼마나 힘차게 짐칸을 뒤적이는 지. 그 소란스러운 소리가 마차의 아래에 있는 테드의 귓가에 들렸다.

녹한은 마법재료를 비롯한 여행 동구들을 전문적으로 유통하는 상인이다. 수은은 마력과 상성이 좋기 때문에 마법진의 기본이 되는 금속이다. 수은 하나만으로도 일반적인 마법은 문제없이 발동된다. 마법진의 내구도나 출력 등을 높이려면 수은에 다른 마법재료를 섞는 방법도 있다.

“여기 있어요! 근데 이 정도의 양으로도 충분할까요?”

녹한이 바닥에 엎드려 손을 뻗어 테드에게 작은 병에 담긴 수은을 건넸다. 투명한 유리병안에서 수은이 찰랑였다. 밀봉은 완벽한 상태였다.

“이 정도면… 충분하네요.”

테드는 망설임 없이 마개를 열었다. 뿅 하는 소리와 함께 병뚜껑이 열린다. 본래는 마차의 아랫부분을 빼서 따로 마법진을 그리는 것이 정석이다. 테드처럼 불안전한 자세론 마법진을 완벽히 보완할 수 없다. 중력이 방해한다.

테드는 마력을 움직여 마법을 발동한다. 유리병 속에 있던 수은이 저절로 움직이더니 마법진을 향해 날아갔다. 염력마법이다.

일반 마법사가 이 장면을 보았다면 혀를 찼을 것이다. 염력마법의 발동 자체는 어렵지 않다. 초보 마법사도 충분히 발동 할 수 있는 마법이다. 그렇지만 염력을 이용해 마법진을 고칠 정도로 섬세한 움직임은 불가능하다. 테드가 지금하고 있는 짓은 엄청나게 높은 마법 제어력이 요구하는 일이다.

마법진을 고치고 판으로 다시 덧댄다. 수리는 끝났다. 마차는 다시 움직일 것이다. 테드가 기어서 마차 밖으로 빠져나왔다.

“가, 감사합니다! 이건 답례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만….”

“뭘 이런 걸 다.”

녹한이 건네는 물건을 확인도 하지 않고 일단 받았다. 그가 건넨 것은 방금 전 보았던 수은이 담긴 병이었다. 살짝 흔들자 수은이 찰랑거렸다. 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수은의 시세가 어떻게 되더라.

“수고 하셨습니다. 주인님.”

“아, 고마워.”

사이나는 테드에게 시원한 음료가 담긴 잔을 꺼냈다. 그녀는 테드의 등에 묻은 모래등을 털어주었다.

테드가 음료를 마시면서 자신을 부럽다는 듯이 바라보는 녹한을 향해 슬슬 움직이자고 말하려는 찰나였다.

시야 한편에서 모래구름이 뭉게뭉게 일으키며 누군가가 빠르게 다가왔다.

그들은 낙타를 타고 있는 오크였다. 누런 낙타를 타고 가죽옷으로 몸을 감싸고 있다. 사

막지대이다 보니 천으로도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그들 중 일부는 얼굴을 내놓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의 중심에 있는 이가 그랬다.

그는 들창코가 인상적인 녹색 피부의 사내였다. 오크다. 머리에는 검은색의 터번을 두르고 위협적으로 갈색의 눈을 부라리고 있다.

지구에서 오크는 게임이나 만화 등을 보면 몬스터같은 생김새로 묘사된다. 우락부락한 몸과 거대한 송곳니, 악마처럼 길쭉한 귀 등.

네메스 대륙의 오크의 생김새는 인간에 가깝다. 대표적인 종족 특징을 말하라면 피부는 녹색이고 코가 들창코다. 또 육체가 발달하기 쉬워서 남녀가리지 않고 근육질인 오크가 많았다. 의외로 툭 튀어나온 뱃살을 가진 오크는 거의 없다.

루크에이스에선 오크를 보기 힘들다. 추운 기후 탓에 따뜻한 날씨를 좋아하는 오크들이 찾지 않기 때문이다. 오크 모험가 대부분이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날씨인 디스본에 있다.

또 네메스 대륙에서 의외로 오크는 여성 쪽이 인기가 많다. 탄탄한 근육질인 몸매는 엘프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고 한다. 얼굴의 경우 다른 종족이 보기에도 미인측에 속하는 오크 여인도 제법 있다. 오크하면 들창코를 떠올리지만 꼭 전부가 들창코 인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크의 가장 큰 특징은 들창코 보다는 녹색 피부의 매끈한 피부다.

“아, 이런 도적이군요.”

녹한이 말했다. 상단주인 그의 말투는 지나치게 태평했다.

마차 주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모험가들이 느릿느릿 자신들의 무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차를 지키듯 모여들어 전투 준비를 하는데 터질 듯한 긴장감은 없다. 적당한 긴장감. 자신들의 승리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강자의 여유였다.

“도적들인가. 운이 없는 녀석들이야.”

“하필이면 A등급의 모험가인 테드님이 있는 이곳에 오다니…….”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라고. 녀석들도 모험가였을 지도 모르니까.”

A등급의 모험가. 테드가 이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A등급의 모험가의 무력이면 도적대 전부를 혼자서 쓰러뜨릴 수 있을 정도다.

낙타를 타고 온 오크, 머리에 검은색 터번을 걸친 무리의 리더로 보이는 오크가 상단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서는 뛰듯이 낙타의 등에서 내렸다. 두 다리로 멋지게 착지한 그는 허리춤에서 무시무시한 손도끼를 꺼내들었다. 도끼 자루에 묻어있는 때와 상처는 그가 얼마나 손도끼를 사용했고 숙련되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루크락슨! 데저트 오크의 행동대장이다! 얌전히 우리 지시에 따른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그의 뒤를 따라서 낙타를 타고 온 도적들이 우르르 내리면서 각자 자신의 무기를 꺼내들어 위협한다. 모험가들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무기를 치켜들어 그들에게 맞서면서 테드의 눈치를 살펴봤다.

“어떻게 할까요?

녹한이 테드를 향해서 물었다. 정식으로 호위대장의 지위를 받아들인 적은 없다. 다만, 이 호위대에서 가장 등급이 높은 모험가가 테드이기에 자연스럽게 그를 향해 물은 것이다.

“……일단은 경계해야죠.”

테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모험가들의 눈이 바뀌었다. 조금 더 진중해졌다. 여기서 괜

히 설렁설렁하다가 테드의 눈 밖에 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눈 밖에 난다… 즉, 모험가 생활 끝이라는 공식이 성립되었다.

테드가 음료를 홀짝이며 앞으로 나섰다. 뜨거운 사막에서 마시는 시원한 음료는 굉장히

기분 좋았다. 테드의 뒤에서 무표정의 은발 메이드가 뒤따랐다.

루크락슨은 자신의 앞으로 나타나는 회색 코트를 입고 후드를 뒤집어 쓴 꼬마를 보며 미

간을 좁혔다. 등 뒤에 메이드까지 대동한 것을 보니 귀족의 자제로 보인다. 손에 음료를 들고 마시면서 오는 게 굉장히 거슬렸다. 후드 속에 보이는 검은색의 눈동자는 여타의 어린아이처럼 조금의 두려움도 품고 있지 않다.

“뭐냐, 꼬마. 죽고 싶으냐?!”

루크락슨이 손도끼로 테드를 가리키자 뒤에 있던 사이나의 눈썹이 한차례 꿈틀거렸다. 살짝이지만, 움찔하고 손이 움직였다.

상단의 인물은 모험가와 상인을 통틀어 모두 20명 정도인 반면에 도적들은 약 30명 정도다. 수적으로 보면 그들이 우세하다. 우세하지 않으면 당당히 앞으로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테드는 도적들을 한 차례 훑어봤다. 무기는 제각각이고 활을 든 인물이 뒤에 몇 명 있었다. 마법사로 보이는 인물은 없었다.

테드가 컵에 담긴 음료를 모두 들이켰다.

빈 컵을 이리로 달라는 듯이 사이나의 손이 뻗어왔다. 그녀에게 컵을 건네고서 테드가 루크락슨을 바라봤다.

“당장 무기 버리고 항복하면 살려는 드릴게.”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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