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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영혼-57화 (57/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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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루크에이스 공략

해가 지나고 2월이 되었다. 테드는 슬슬 루크에이스를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모험가로서의 공적이라면 이미 충분할 정도로 쌓았다. 거기에 제법 명성도 생겨서 자유기사가 되는 것에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였다.

레드 헥사그램이 미궁에 가지 않는 휴일 날에 테드와 사이나는 집에 있었다. 즐길 오락거리도 딱히 없고 추운 날씨 때문에 집에서 나가기도 뭣하기에 테드는 휴일의 대부분은 집에서 보낸다. 그런 한가한 휴일의 오후에 한 명의 손님이 찾아왔다,

비단결같이 긴 검은색 머리카락과 머리위에 있는 은색의 늑대 귀. 평상복 위에 따뜻해 보이는 검은색 코트를 걸친 천랑이었다.

“오랜만이군. 테드.”

천랑이 현관의 앞에서 말했다. 테드가 그녀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근래는 물론이고 이전에도 실버울프 클랜과 마찰은 없었다. 어쩌다 미궁에서 마주쳐도 천랑을 제외하면 인사하는 클랜원도 없다.

레드 헥사그램의 파티원들이 자신 몰래 사고를 친것일까? 테드는 떠오른 생각을 지웠다. 사고를 쳤으면 보고가 왔을 것이고, 천랑이 이렇게 조용하게 나타났을리 없다.

“……무슨 볼일이야?”

“이렇게 서서 이야할 것이 못된다고 생각하네. 들어가서 이야기해도 되겠는가? 아니

면 메이드랑 내가 들어가면 곤란한 일이라도 하고 있었나?”

“칫.”

능글맞게 웃는 천랑을 향해 들으라는 듯이 혀를 찼다. 겉보기엔 청순가련한 여자 그 자체인 천랑이지만, 환생 전에는 제법 이름 있는 낭인이었다. 거친 낭인 생활 탓인지 음담패설도 아무렇게나 내뱉을 정도로 여성스러움이 없는 여자다.

테드는 그녀를 집안으로 끌어들였다. 반갑지는 않으나, 일단 찾아온 손님이었다. 현관 앞에서 계속 세워둘 수는 없다. 거기에 천랑이 직접 찾아 왔을 정도면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일 가능성이 있다.

손님의 방문을 눈치 챈 사이나가 거실에 테이블과 의자를 준비해두었다. 테드는 아쉬운 눈으로 소파를 바라봤다. 천랑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소파에 누워 뒹굴 거릴 예정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언제 준비한 것인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홍차와 쿠키를 준비해두었다. 찻주전자를 든 사이나가 천랑을 향해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하더니 부엌으로 사라졌다.

“자네의 메이드는 언제나 우수하군. 집으로 데려가고 싶을 정도로.”

“따로 메이드라도 구하지 그래.”

천랑의 인기와 재력이면 메이드를 자처하는 여자는 넘쳐날 것이다. 천랑은 그 말에 살짝 고개를 저었다.

“사이나만큼 우수한 메이드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겠지. 그러니 하루라도 좋으니 빌려

주지 않겠나?”

“안 빌려줘. 꿈깨.”

테드의 단호한 말에 천랑이 희미하게 웃으며 쿠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달달하고 바삭한 쿠키의 맛을 본 뒤 홍차를 조금 마셨다. 그녀는 홍차보다 녹차를 선호하는 편이지만, 이 홍차만의 향은 녹차에 대한 생각을 싹 잊어버릴 정도로 좋았다.

반면 테드는 홍차를 한 번에 마시고서 쿠키를 집어 먹고 있었다. 어린아이 같은 그 모습에 천랑은 입안에 있는 음식을 웃음과 함께 뿜을 뻔했다. 간신히 웃음을 참고서 음식을 삼킨다.

“오늘은 자네에게 협력을 요청하기 위해 찾아왔네.”

“협력? 실버 울프 클랜이?”

“클랜의 정식 협력 요청이지. 공문서를 가지고 오지 않았네. 사실 내일 길드에 정식으로 요청할 예정이었는데…… 한가하기도 했고, 자네라면 거절할 가능성도 있어서 이렇게 직접 찾아왔지.”

쿠키를 집던 테드의 손이 도중에 멈춘다. 실버 울프 클랜은 루크에이스를 대표하는 거대 클랜 중 하나다. 그런 클랜이 유명하다곤 하나 파티에 불과한 레드 헥사그램에게 협력을 구한다? 테드의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뭐에 대한 협력인데?”

천랑이 한 차례 홍차를 들이마셔 입안을 씻겼다. 입속에 남은 홍차의 향기가 달아나기 전에 말한다.

“루크에이스 미궁 공략. 목표는 완전공략이네.”

“불가능해.”

테드가 단언했다. 미궁의 완전공략, 즉 100층을 노린다는 뜻이다. 현재 루크에이스 미궁에 대해 알려져 있는 정보는 90층까지다. 즉, 91층부터는 어떤 몬스터가 나오는지 아무런 정보가 없다는 말이다.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미개척지역이다. 그런데 91층도 아닌 100층을 노린다고? 웃기는 소리.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면 아무리 나라도 의기소침해진다만…….”

“사실을 말한 것뿐이야. 너도 알고 있겠지만, 미궁의 최상층 구간인 90층부터는 격

이 달라. 91층이나 92층이 목표라면 몰라도 100층은 오버야. 클랜원을 전부 죽일 생

각이야?”

“루크에이스의 모험가 정예.”

느닷없이 천랑이 말했다. 테드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천랑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어중이떠중이를 전부 걸러낸 루크에이스의 최정예 모험가 120명. 공략 원정대의 대

장은 나이고, 모험가 길드가 지원을 맡았지. 이정도면 할 만 하다고 생각되지 않나?”

90층의 게이트 키퍼 입장 한계 인원이 120명이었다. 그 120명을 명성이 자자한 실력파 모험가들만으로 구성했다. 꿈의 공략대라 할 수 있다.

“……아니, 완전 공략은 불가능해.”

테드는 자비 없이 부정의 말을 내뱉었다. 천랑의 눈썹이 꿈틀 거렸다.

“……어째서인가? 120명, 그것도 루크에이스의 최정예 모험가들이네. 자네는 그들을 얕보는 것인가?”

“네가 미궁을 얕보고 있는 것이겠지. 120명의 최정예 모험가로 완전공략이 가능했다면, 이미 과거에 루크에이스 공략은 끝났을 거야.”

부정적인 테드의 말에 천랑이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80층밖에 공략되지 않았네. 하지만 과거에도 이 정도의 전력은 없었지.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네. 자네는 모험가이지 않나. 모험을 해볼 생각은 없나?”

테드가 쿠키 하나를 집어 들어 입안에 넣었다. 달달한 맛이 혀를 통해 뇌 속으로 퍼지는 느낌이다.

“모험도 모험 나름이야. 그리고 너희들이 미궁을 공략하는 것을 말리진 않아. 하지만 괜히 날 끌어 들이지마.”

“…….”

천랑의 호박색 눈동자가 테드의 눈을 지긋이 바라봤다. 테드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았다. 그녀에게 안타까운 소식이지만, 테드는 조금도 의견을 굽힐 생각은 없었다. 그의 의지는 굳건한 성처럼 단단했다.

“……흠. 보수도 섭섭지 않게 준비했다만?”

“미궁의 최상층은 귀환부를 사용하기도 전에 죽을 가능성이 높아. 어차피 그 보수도

목숨 값에 비하면 푼돈이겠지.”

“그런가. 아쉽게 됐군.”

천랑이 코트 주머니에서 어린아이 주먹만 한 사각형의 상자를 꺼냈다. 상자의 기본 색은 검은색이었지만, 상자의 표면에 장식되어 있는 노란색 선은 분명 황금이었다. 상자 그 자체만으로도 비쌀 것 같았다.

천랑은 테이블 위로 상자를 올리더니 급할 것 없이 천천히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내부에는 푹신한 천으로 하얀색 내용물을 보호하고 있었다.

하얀색… 아니, 하얀 빛의 가까운 그것은 작은 구슬 같았다. 은은한 하얀 빛을 내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내고 있다. 최상급의 보석, 그 이상의 아름다움이 상자 속에 있었다.

테드의 눈이 휘둥그레 떠지고, 손에 쥐고 있던 쿠키가 바닥으로 맥없이 떨어졌다. 입은 바보처럼 헤 벌리고 있다.

“자네와 사이나의 보수로 생각했었는데… 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 경매에 올릴 수밖에.”

천랑의 손이 다시 상자를 향해 움직였다. 테드가 다급하게 손을 내밀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사실 나는 루크에이스 미궁의 완전 공략을 꿈꾸고 있었어! 불가능한 모험? 모험가로서 당연히 도전해봐야지!”

굳건한 성은 메테오를 맞고 바스라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 정도의 보상이면 공략 실패를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 거기에 귀환부가 있으니 공략에 실패한다 해도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공략대에 참가하는 모험가들은 그렇게 생각하리라.

“음. 그럼 공략에 참가하는 건가?”

“물론이야. 이미 준비는 끝마쳤어. 내일이라도 당장 갈 수 있지.”

테드가 노도와 같은 기세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천랑이 피식 웃었다.

“그럼 이 루크에이스의 과실은 자네와 사이나를 고용하는 보수네. 계약서는 가지고 오지 않았지만… 여기선 내가 신뢰를 보여야겠지. 자네는 내일 길드에서 계약서를 작성해주게.”

테드는 설렁설렁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부들부들 떠는 양손을 내밀어 상자를 조심스럽게 잡아들었다.

루크에이스의 과실. 압도적인 효과를 자랑하는 정력제다. 가격만 따져도 몇 만 골드가 넘어가는 물건으로 없어서 못 구하는 물건이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테드와 사이나의 보수치고는 지나치게 가치가 높았다.

“그런데 왜 루크에이스 과실을 주면서까지 나와 사이나를 끌어들이려는 거야?”

“이유야 당연히… 자네들이 강하니까지. 솔직히 나는 자네의 진짜 실력을 가늠할 수가 없네. 무인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네를 보고 있으면 내 육감이 경고를 하네. 절대로 싸우지 말라고.”

테드의 행적을 보자면 자신이 질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막상 싸우는 것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면 쉽게 이기는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사이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본능적으로 싸우는 것이 꺼려지는 감각. 천랑은 그 느낌을 말도 안되는 강자를 마주쳤을 때 몇 번이나 느껴본 적이 있었다.

테드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상자를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복용하고 그 효과를 확인해보자.

“그렇지만 역시 급한 것 같은데. 굳이 지금 완전공략을 노릴 필요는 없잖아.”

“이렇게 서두르는 것은 지금 모험가 길드가 지원해주기 때문이네. 우리 클랜만으론 한계가 명확하니 말이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네.”

“왜 그렇게 완전공략에 집착해?”

테드의 물음에 천랑이 쓰게 웃으며 찻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조금 남은 홍차를 전부 마시고서 의지가 느껴지는 눈빛으로 테드를 바라봤다.

“네메스 대륙에는 6개의 대미궁이 있지. 자네는 6개의 미궁에 관한 소문을 들어본 적 있나?”

“나도 모험가니까, 당연히. 하지만 그건… 소문에 불과할 뿐이야.”

6개의 대미궁을 모두 공략하면 환상의 7번째 대미궁이 나타난다는 전설 같은 소문이다. 테드를 포함한 대부분의 모험가는 이야기 짓는 걸 좋아하는 누군가가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있다.

“확실히 허무맹랑한 소리지. 하지만 왜 우리가 이 세계에 환생했는지 알고 있나?”

“……신과 계약해서잖아.”

“그럼 그 계약에 대한 조건은?”

“…….”

구체적인 조건은 없었다. 테드의 계약신인 크루시안은 이곳에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족하다고 했다. 아니, 그건 계약이라기보다는 거래에 가까웠다. 지구에 남겼던 흔적을 완전하게 없애는 대신 새로이 네메스 대륙에 환생하는 것.

“나는 말일세. 신은 살아가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했지만… 역시 우리가 이곳에

환생한 것에는 이유가 있을거라고 생각하네. 시스템이 관리하는 6개의 대미궁… 무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6개의 미궁을 전부 공략한다면 어떠한 일이 벌어 질것만 같은 예감이 드네.”

“듣고 보니 그럴지도 모르겠네.”

미궁은 몬스터를 통해 귀중한 에너지 자원인 마나석을 얻을 수 있는 곳이다. 몬스터가 끊임없이 생성되는 곳이다. 마나석 관리만이 목적이었다면 굳이 미궁을 100층까지 만들 필요는 없다.

“뭐, 6개의 미궁을 전부 클리어 했을 경우엔 알 수 있겠지. 그럼 볼일도 끝났고…. 슬슬 일어나겠네.”

천랑의 진짜 목적은 네메스 대륙에 있는 미궁을 전부 공략하는 것이다. 이미 모험왕에 의해 하나가 공략되었으니 5개가 남은 셈이다.

“아, 참. 공략 원정은 열흘 후에 시작되네. 공략 기간은 미지수지만… 몇 주가 걸릴 수도 있겠지. 준비는 단단히 해두게.”

그녀가 현관을 나서기 전에 말했다. 테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배웅했다.

테드는 루크에이스를 조만간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천랑의 부탁이었지만, 이번이 루크에이스의 마지막 공략이 될 것이다. 테드는 남은 열흘 동안 루크에이스의 생활을 정리하리라 결심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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